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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자료국명: 스리랑카 사회민주주의 공화국(Democratic Socialist Republic of Sri Lanka) 면적: 66,000 sq km 인구: 1800만 명(연증가율 1.5%) 수도: 콜롬보(Colombo; 120만 명) 민족: 싱할리족 74%, 타밀족 18%, 무슬림7% 언어: 싱할리어, 타밀어, 영어. 종교 : 불교69%, 힌두교15%, 이슬람교8%, 기독교8% 정부형태 : 민주주의 대통령: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수상: 시리마보 RD 반드라나이케(Sirimavo RD Bandaranaike) 지리 및 기후거대한 인도대륙 남쪽 끝에서 흘러나온 커다란 눈물방울처럼 생긴 스리랑카는, 50Km 너비의 포크해협(Palk Strait)을 사이에 두고 인도와 떨어져 있다. 물론 이 해협에는 아담의 다리(Adam's Bridge)로 알려진 일련의 작은 산호초 섬들이 존재한다. 스리랑카는 길이가 350Km, 너비가 고작 180Km 밖에 되지 않는 섬이며, 아일랜드, 웨스트버지니아, 테즈메이니아 등과 비슷한 면적을 가지고 있다.
섬의 남반부는 수려하고 울퉁불퉁한 고원지대로 덮여있으며, 북반부 전역은 고원지대 가장자리에서 자프나(Jaffna)까지 뻗쳐있는 큰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높은 산은 누와라 엘리야(Nuwara Eliya) 근처에 있는 2524미터 피두루탈라갈라(Pidurutalagala )산이며, 가장 긴 강은 섬의 중앙부에서 시작하여 트링코말리(Trincomalee)에 위치한, 인도양까지 흐르는 마하웨리(Mahaweli) 강이다. 가장 좋은 해변은 남서부, 남부,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
흑단, 티크, 비단목과 화려한 난초 등이 남서부 울창한 열대우림에서 자라고 있다. 내한성의 초원, 진달래, 외소한 산림은 서늘하고 다습한 고원지대에 주로 분포하며 관목과 초원은 북부의 건조 지대에 펼쳐져 있다. 야생동물이 매우 많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코끼리 외에 표범, 사슴, 원숭이, 나무늘보, 멧돼지, 코브라, 악어, 듀공, 거북 등이 서식한다. 스리랑카는 휴식을 위해 겨울철 북부에서 초호(礁湖), 습지대, 조류보호구 등지로 떼지어 이동하는 플라밍고를 비롯한 철새가 계절마다 거쳐가는 터전이다. 새를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는 1월부터 4월 사이이다.
스리랑카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전형적인 열대 나라지만 두 가지 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지역에 따라 다양한 기후가 나타난다: 얄라(Yala) 시즌(5~8월)에는 남서 몬순이 불어와 남부, 서부, 중부 지역에 비를 뿌린다; 마하(Maha) 시즌(10~1월)에는 북동 몬순이 불어와 북부와 동부에 비가 내린다. 해안 지역은 연중 무덥지만 고도가 높아지면서 기온은 급격히 떨어진다. 기온이 가장 높은 시기는 3월에서 6월까지이며, 반면에 11월부터 1월까지는 연중 가장 시원한 시기이다. 강우량은 남부, 남서부, 고원지대에 가장 많고 북부와 중북부는 상당히 건조하다. 서해안과 남해안, 고원지대 방문에 제일 좋은 시기는 12월과 3월 사이이다. 5월에서 9월은 동해안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다. 역사스리랑카의 최초 이주자는 검은 피부에 가냘프고 왜소한 체구를 가진 유목민, 베다(Veddahs) 인이다. 전설은 다소 악의적으로, 그들을 기원전 5세기나 6세기 무렵 싱할리 인들에게 정복된 도깨비인, 야차(Yakkhas)로 기술하고 있다. 기원 전 4세기 스리랑카 전역에 걸쳐 몇 개의 싱할리 왕국이 세워졌으며, 그 중에서 북부 평원에 자리잡은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가 가장 강력했다.
불교는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안 왕조 아쇼카 황제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에 의해 전래되어 급속하게 퍼져 국교가 되었고, 강력하고 적극적인 민족주의의 구심점이 되었다. 하지만 아누라다푸라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기 힘들었다. 이후 1000년간에 걸쳐 남인도로부터 끊임없는 침략과, 관련된 각 왕조간에 반복되는 세력다툼이 벌어지게 된다. 1070년 비쟈야바후(Vijayabahu)왕이 남인도의 촐라(Cholas) 왕조를 몰아내고 폴론나루와(Polonnaruwa)에 새 수도를 세웠을 때 그간 계속되었던 침략의 위협은 종식되었다.
특히 폴론나루와를 아시아에서 가장 영화로운 도시 중의 하나로 변모시켰던 파라카라마바후(Parakramabahu)왕의 통치를 전후하여 2세기 이상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인도의 침입은 또 다시 시작되어 1215년 폴론나루와는 함락되고 만다.
1505년 포르투갈 인들은 콜롬보에 도착하여 매우 값비싼 향료와 계피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얻었다. 1597년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은 공식적으로 섬의 주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캔디(Kandy)에 있는 강력한 싱할리 왕국을 격퇴하지는 못했고 1658년 캔디 왕국은 네덜란드 인들의 협력을 얻어 포르투갈 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네덜란드 또한 캔디 왕국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나 영토보다는 무역과 이윤에 더 관심이 많아, 1796년 영국이 왔을 때 네덜란드는 내키지 않는 수동적 저항만을 하였을 뿐이었다. 영국은 1815년 캔디 왕국의 주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후 섬 전체를 지배하는 최초 유럽세력이 되었다. 제국의 경영은, 도로를 건설하고, 커피, 차, 계피, 야자농장(남인도에서 데려온 타밀족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하는)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영어가 국어로 도입되었다.
1948년 스리랑카(실론)는 영연방국가로 남은 범위 내에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였다. 최초의 정부는 사회주의를 채택하고 사회복지를 강화하면서 강력한 경제를 유지하였지만, 80만에 달하는 타밀 농장노동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하였다. 1959년 싱할리 민족주의자인 솔로몬 반다라나이케(Solomon Bandaranaike)가 당선되자 국회를 통해 싱할리 어를 공용어로, 또 싱할리 인들이 가장 좋은 직장과 가장 권력있는 자리를 효과적으로 얻을수 있도록 하는 '싱할리 제일주의'를 추진하였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다수의 싱할리족과 영어를 사용하는 기독교 엘리트사이의 권력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재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북부와 동부에 거주하는 타밀족을 화나게 만들어, 타밀족들은 보다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며 중앙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의 민족적, 종교적 이질성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부와 구직에 대한 경쟁이 심화됨으로써 더 악화되었다. 반다라나이케는 1959년 두 민족을 화해시키려고 할 즈음 한 불교승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자리는 그의 아내 시리마보(Sirimavo; 세계최초의 여성 수상)가 맡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71년, 싱할리 마오쪄뚱(毛澤東)주의자들인 JVP에 의해 섣부른 조직반란이 일어나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1년 후 스리랑카는 공화국이 되었고 스리랑카를 정식국호로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그 사이,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북부 타밀족 지역에 불안이 고조되었다. 1972년 헌법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국교의 위치에 올려놓았고, 대학 내에서 타밀인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타밀족 지구에서 사회불안이 국가 비상사태로 확대되자, 군기가 문란한, 그리고 싱할리족이 절대다수인 군과 경찰은 젊은 타밀족 청년들에게 적군으로 비춰졌고, 급기야 그들은 타밀 독립을 위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1977년 주니우스 리차드 자야와데네(Junius Richard Jayewardene)가 당선되자 타밀족 지역에서는 타밀어가 '국어'로서 위치를 확보했다. 또한 그는 타밀족에게 더많은 지방정부 권력을 부여했지만 타밀 청년들과 보안군 사이의 폭력과 보복은 통제불능 상태로 치달았다.
liberation 1983년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LTTE) 분리주의자들이 군경을 학살하자 싱할리 폭도들은 이틀동안 수천 명의 타밀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광란극을 벌였다. 이 일은 돌아킬 수 없는 전환점이 되었고 많은 타밀인들이 북부 타밀족 거주지로 이동하고 싱할리인들은 자프나 지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타밀족은 섬의 30%에 해당하는 북부지역과 동부해안에 대해 자치권을 요구했다. 타밀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북부에서는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동부에서는 싱할리인과 이슬람교도와 거의 같은 비율로 살고 있었다. 폭력은 현재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참혹한 '인종청소'와 같은 수준으로 쌍방간에 자행되고 있다.
1985년 말까지 5만여명의 스리랑카인들이 난민촌에 수용되어 있었고 10만명의 타밀인들이 인도의 타밀나두(Tamil Nadu) 주 수용소 캠프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관광업은 급하강하였고, 차(Tea)의 가격은 내려갔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폭력으로 인해 외국의 원조는 끊어졌다. 1987년 정부군이 타밀호랑이를 자프나반도로 밀어붙이자 남인도의 불안상태와 인도정부에 대한 국내의 압력이 스리랑카에 대한 인도의 침공 가능성을 높혔다.
쟈예와데네는 당시 인도수상 라지브 간디(Rajiv Gandhi)와, 스리랑카군이 주둔지로 철수하고 인도평화유지군(IPKF)이 북부의 질서를 유지하며 반군을 무장해제시키기로 하는 절충안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협정의 조건에 무관하게 남쪽에 사는 싱할리나 무슬림에게는 망신스러운 일이었고 그들은 인도가 북부지역을 차지하는 것과 동부의 비타밀인들이 팔아넘겨진 상태에 이른 것에 반기를 들었다. 한편 반군들은 싱할리족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나가고, 인도평화유지군(IPKF)은 반군들을 분쇄하기 시작하면서 스리랑카는 이제 어느 누구도 명예롭게는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1989년 인도평화유지군(IPKF)이 북부에서 표면적으로 통제권을 회복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부와 중부에서는 JVP가 주도한 연이은 파업과 정치적 암살과 같은 싱할리인의 반란이 일어났다. 정국은 당시, 라나싱헤 프레마데사(Ranasinghe Premadasa) 집권 정부가 JVP를 꾀어 정치주류로 끌어들이려 할 때 답보상태에 빠졌다. 이 책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프레마데사는 JVP 혐의자 살해를 전문으로 하는 암살단을 풀어 그들의 시체를 강에 던졌다. 3만~6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공포시대가 3년 동안 지속되었다. 한 때 8만명에 이르렀던 IPKF는 아무런 보답도 없는 임무를 그만두고 1990년 철수했다. 타밀호랑이는 정전에 동의하였지만 타밀분리자들이 일방적으로 독립국을 선포함과 거의 동시에 폭력의 불길이 다시 타올랐다.
이 때부터 스리랑카 정부는 정치적 해결과 군사적 해결책 사이를 왔다갔다하였지만, 어느 쪽도 학살과 테러를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1991년 라지브간디는 타밀자살폭탄테러로 폭사하였고 1993년 프레마데사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1995년 초 합의된 휴전 협정은 타밀 호랑이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 정부는 1995년 말 자프나 반도를 탈환하고 타밀반군과 자프나시의 타밀족들을 격퇴시킨 대규모의 군사작전으로 응답하였다. 타밀족들을 무마해보려는 정부의 시도는 상대적으로 잘 받아들여졌고, 타밀반군들은 확실히 진압당하여 스리랑카에 영구적인 평화가 오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반군들은 다시 조직을 재편하여 1996년 무렵 스리랑카 북부에 주둔하고 있는 정부군에 큰 타격을 입히기 시작했으며 콜롬보에서도 테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재개된 폭력은 타밀족과의 평화노력에 반대하는 싱할리족 의견만 더 굳히게 하였다.
한편 스리랑카의 경제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빈약한 경제기반, 부패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가지출 중 거의 20%을 국방비로 쓰고 있으며, 국내경제는 해외, 주로 걸프국들에서 일하는 스리랑카인들이 매년 고국으로 송금해오는 US$15억 달러로 유지되고 있다. 분쟁의 해결과 경제성장의 회복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경제국내총생산: US$86억 1인당 국민소득: US$500 연성장율:6% 물가상승률:18% 주요생산품: 의류, 차, 섬유, 보석, 고무, 관광산업 주요교역국 : 미국, 영국, 일본, 한국, 중국, 인도 문화스리랑카의 비극은 종족의 편협성과 종교철학의 호전적 해석에서 비롯된다. 싱할리족은 불교도가 압도적으로 많고 타밀족은 대다수가 힌두교도이며 또 적지않은 수의 이슬람교와 기독교 버거(네덜란드식민통치자의 후손들)가 있다. 싱할리족은 싱할리어를, 타밀족은 타밀어를 쓰며 버거족은 영어를 쓰기도 한다. 이슬람교도는 섬 전역에 산재해있는데 초기 아랍이나 인도상인들의 후손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대부분 내전에 휘말리진 않았지만 동부에서 이슬람교도와 타밀간에 충돌이 있어왔다. 고원지대에 거주하는 타밀족은 차농장에서 일을 시키기 위해 영국인이 데려온 하층 카스트민이다. 그들은 스리랑카에서 1000년이상 거주해온 북부 타밀족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 고원지대의 타밀족은 대체적으로 현재의 민족분쟁에 말려드는 것을 피해왔다.
스리랑카의 고전건축, 조각, 회화는 불교와 관련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불탑은 전원지대에 산재해 있으며, 엄청나게 큰 불교조각들은 아카나(Aukana)와 부두루바갈라(Buduruvagala)에 특히 많다.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와 폴로나루와(Polonnaruwa)는 가장 인상적인 고고학 유물지역이나 현재는, 캔디(Kandy)가 가장 번성하는 문화중심지로 되었다. 식민지시절의 유산으로는, 네덜란드 요새와 운하, 교회, 그리고 영국주택, 클럽, 법원등이 있다. 갈레(Galle)는 섬에서 가장 식민지적 요소가 짙게 남아있는 도시이다.
싱할리 춤은 인도춤과 유사하지만 곡예, 민첩함, 대사전개의 상징성에 의존함이 인도춤과 구별된다. 캔디는 '현지춤'을 보기에 좋은 지역이고, 콜롬보나 암발랑고다에서는 '악마춤'의 액막이 의식를 볼수 있다. 민속연극은, 춤, 가면극, 북치기, 액막이의식을 결합하여 생동감있게 스리랑카의 민속을 재창조하고 있다. 목각, 자수, 도기, 금속공예는 모두 고도로 발달한 수공업이며, 특히 스리랑카는 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암발랑고다는 스리랑카 가면을 구경하기에 가장 좋고, 라트나푸라(Ratnapura)는 스리랑카 보석교역의 중심지이다.
카레라이스 - 입에서 불이 날 정도로 매운 -가 주식이며 보통 채소와 고기, 생선반찬이 여기에 곁들여진다. 채식주의자용 탈리(thali)같은 인도카레, 비리야니(biriyani), 그리고 삶고 튀겨 햇볕에 말린 야채 콤보 쿨(kool)도 맛 볼수 있다. 호퍼스(hoppers)는 유일한 스리랑카 스낵으로, 계란이나 꿀, 요거트를 곁들여 먹는 팬케잌의 일종이다. 해안도시에는 휼륭한 생선요리가 풍성하며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싱싱한 그 지방 참치를 맛보며 행복감을 느낀다. 선택의 폭이 넓은 열대과일이 무궁무진하며, 스리랑카 차는 세계적으로 알아주지만 맥주는 먹을만한 정도.
스리랑카에는 불교,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인들의 거창한 축제가 연이어 있다. 7월, 8월에 있는 캔디 에살라 페라헤라(Kandy Esala Perahera)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중요하고 볼만한 행사로, 10일동안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 댄서, 북치는 사람, 채찍을 든 사람, 거대한 생일케잌같이 불밝힌 코끼리등을 볼 수 있다. 이 행사의 절정은 캔디의 성스러운 불치(佛齒)를 공양하는 장중한 행렬이다. 두번째로 중요한 축제는, 부다의 스리랑카 방문을 경축하는 두루투 페라헤라(1월)로 콜롬보에서 열린다. 이 외, 퍼레이드와 춤, 민속경기를 볼 수 있는 국경일(2월), 코끼리경주, 야자게임, 베개싸움으로 거행되는 신년(3월/4월), 부다의 탄생, 열반, 성도를 기념하는 성스러운 정월축제 베사크(5월), 전쟁의 신 스칸다(Skanda)의 의식용 전차가 두 사원간에 당겨지는 콜롬보의 벨(Vel)축제(7월/8월), 주로 힌두교신자들이 갖가지 자기학대 의식을 행하는 카타라가마의 카타라가마축제(7월/8월)등이 있다.
비자 : 대한민국 여권소지자는 입국시 스리랑카에서 발급하는 비자를 받아야한다 보건위생 : 콜레라, 간염, 말라리아에 예방 및 주의 요 시간: 한국이 스리랑카보다 3시간 30분 빠르다. 전압: 230-40V, 50 Hz 도량형: 미터제를 사용(도량형 환산표(영문)) 외래관광객: 1994년 40만명이 스리랑카를 방문했다.
주의 사항 스리랑카의 3분의 1인 북부와 동부연안은 출입금지구역으로 아주 위험하다. 섬의 남부와 남서부, 고원지대는 대체적으로 평온했지만 1995년 11월, 정부군이 자프나반도에서 타밀호랑이를 몰아낸 후로 테러공격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그 중에는 1996년 1월 80명이상이 죽고 1000명이상이 부상한 스리랑카 중앙은행의 자폭테러와 1996년 7월 70명이상이 죽고 600명가량이 부상한 열차폭탄테러도 있었다. 물불안가리는 그들의 테러행위는,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할 필요가 있을 때는 여지없이 또 자행될 것이다.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은 자국민에게 불필요한 여행은 가급적 삼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외국인은 지금까지 특별히 테러공격의 대상이 되진 않았지만, 타밀타이거는 관광산업을 경제적 공격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실제로 한 타밀 분파집단은 외국인을 공격대상으로 삼겠다고 위협해 왔으며 관광객들에게, 콜롬보공항을 보이코트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었다.
통화: 스리랑카 루피 (rupee) 일반 경비 : 저렴한 현지식사: US$0.50 레스토랑에서 식사:US$3 최고급 식당 식사: US$6-15 저렴한 숙박지 : US$4 중급호텔:US$15 최고급숙소:U$30이상
스리랑카는 아직까지 경제적으로 즐겁게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나라이다. 적은 경비를 예산하는 여행자들의 경우, 버스를 이용하며 2인실이상의 방에서 머물고 번지르르한 음식점에서 돈을 낭비하지만 않는다면 1일 US$20이하로 경비를 예상할 수 있다. 좀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려면, 깔끔하고 쾌적한 숙박은 US$5 나 US$10정도 더 추가 예상하고, 완벽한 파이브스타 호텔 정도의 대우를 받고 싶다면 1일 약 US$100정도를 예산한다.
대부분 주요은행에서 여행자수표를 환전할 수 있다. 은행환전 시 여행자수표가 현금보다 더 환률이 좋지만, 은행을 찾을 수 없는 경우를 대비해 약간의 현금을 소지하는 것이 좋다(콜롬보와 히카두와에는 환전업자들이 매우 많다). 미국달러가 가장 좋다. 현금출금기(ATM)는 주요도시에서 흔히 찾을 수 있지만 콜롬보와 캔디이외에는 국제신용카드가 사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용카드는 널리 사용가능하다 : 비자와 마스터카드 현금써비스는 주요은행에서 가능하다.
중상급 호텔과 식당에서는 10%정도의 써비스료가 계산서에 포함되기 때문에(별로 써비스받은 게 없다 할지라도), 팁을 별도로 줄 필요는 없다. 역시 택시나 삼륜교통편을 이용할 때도 팁은 필요없다. 호텔 포터는 무거운 가방 하나에 10-20 루피정도를 받는다. 대체적으로, 스리랑카에서 가격 흥정은 필수이나 흥정을 죽기살기식으로 하지는 말도록. 개략적인 가격을 판단한 후 서로 받아들일수 있는 절충안에서 타협하자.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서부와 남부해안, 고산지대는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여행의 최적기는 12월부터 3월까지이며, 동해안은 5월부터 9월이 가장 좋다. 대부분 외래관광객은 12월부터 3월사이에 오는데 이 중 다수가 유럽의 겨울을 피해 오는 유럽인들이다. 비수기 여행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붐비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항공요금과 숙박요금이 내려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가 항상 내리는 것도 아니다. 히카두와(Hikkaduwa)같은 곳은 암초들이 해변가를 둘러싸고 있어 수영하기에도 적당하고, 특히 계절풍이 불 때는 더 쾌적하다.
섬에서 제일 큰 도시 콜롬보는, 소란스럽고 흥분이 술렁이는 조금 광적인 도시이다. 여기저기의 파손이나 혼란한 교통, 정전정도는 어깨를 으쓱하거나 미소정도로 넘겨버리는 이 곳에서,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한 마디는 '문제 없어요(No Problem)'이다. 하루에 수십번도 더 들려오는 이 말은 국가모토가 된 것 같다. 비록 콜롬보가 다른 섬 지역보다 매력적인 요소가 적은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다채롭고 충족한 장소로, 스리랑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볼 수 있는 방문지이기도 하다.
콜롬보는 상대적으로 길 찾기가 쉬운 도시이다. 북쪽은 포트(Fort)지구인데, 스리랑카의 비즈니스지역으로 백화점, 서점, 항공사 사무실이 모여있고 1996년 1월, 타밀호랑이에 의한 중앙은행 폭탄테러가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시계탑, 과거의 등대, (완고한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여왕의 저택으로 알려진)대통령궁, 지나간 제국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식민지 건물들과 같은 풍부한 광경들이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갈레 페이스 그린(Galle Face Green)이 나오는데, 해안가에 넓게 퍼진 잔디가, 크리킷경기하는 사람, 연 날리는 사람,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연인들과 어우러져 인상적인 경치를 이룬다. 조금 더 남쪽으로는 시나몬 가든(Cinammon Gardens)이 있는데, 이 도시에서 가장 세련된 지역으로, 멋있는 맨션과 나무가 늘어선 거리, 콜롬보에서 자랑하는 가장 넓은 공원이 있다. 포트의 동쪽은 후각을 자극시키는, 시장이 있는 페타 바자르(Pettah bazaar)지구이다. 여유있게 거닐면서 온갖 종류의 물건들- 과일, 채소, 고기, 보석, 금, 은, 놋쇠와 양철고물등 -에 경탄해 보라.
문화애호가라면, 훌륭한 역사적 작품들이 소장된 국립박물관과 이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이 주로 전시되는 미술관, 그리고 시내의 많은 이슬람 사원과 불교, 힌두교사원을 방문해 보자. 문화적인 면을 충분히 감상했다면, 데히왈라(Dehiwala) 동물원으로 가 이 곳의 야생동물을 보는 것은 어떨지. 이 곳의 하이라이트는 오후에 열리는 코끼리 쇼이다. 가장 가까운 해변다운 해변은, 시 남쪽에서 10Km거리의 초라한 리조트, 마운트 라비나(Mt Lavinia)에 있다. 배낭여행자들에게 인기있는 지역은, 저렴한 숙박시설과 싼 식사, 최고의 쇼핑거리가 있는 포트(Fort)와 페타(Pettah)지역이다. 시대상황에 따라 최근 나이트라이프는 사라져 가고 있지만, 포트지역의 영화관에 가보는 것도 괜찮다.
고원지대의 한가로운 수도이자 불교의 역사적인 보루인 캔디는, 평화로운 호수 주변에 세워져, 그림같이 아름다운 고원분지에 자리잡았다. 완만히 경사진 기와지붕 건물이 특징이고, 중심가는 상점, 소음, 시장, 호텔로 활기가 넘친다. 캔디의 대표적 명소는 스리랑카의 가장 중요한 종교유골(불치)이 안치되 있는 8각형의 달라다 말리가와(Dalada Maligawa)불치사佛齒寺)이다.
불치에 공양하는 의식이 매일 거행되는데 연꽃과 향을 지니고 흰옷을 입은 순례자의 행렬을 볼 수 있다.열광적인 캔디 에살라 페라헤라(Kandy Esala Perahera) 축제기간동안, 모조 불치를 코끼리등에 실어 시 전역을 돌게 한다. 다른 볼거리로는, 규모는 작지만 훌륭한 국립박물관과 페라데니야(Peradeniya) 식물원, 그리고 평화로운, 조류의 낙원인 우다와카탁칼래(Udawattaakelle)보호구가 있다. 캔디주변에는 경치가 아름다운 산책로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마하웰리(Mahaweli)로 향하는 곳에 있고, 그 곳에서 코끼리가 목욕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호수변에 위치한 캔디 예술협회와 문화센터에는 현지 수공예품이 전시되 있고 대중적인 춤 공연을 위한 공연장도 있다.
캔디는 콜롬보에서 북동쪽 100km(62mi)거리상에 있고, 공항은 없지만 두 도시간을 운행하는 버스와 기차가 얼마든지 있다.
스리랑카의 첫번째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는, 싱할리 세력의 유력한 상징이었으며, 가장 큰 규모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스리랑카의 고대도시이다. 서기 380년에 수도로 지정된 후, 1000년 이상 싱할리 왕들이 이 위대한 도시를 지배했었다. 인상적인 유적지들이 19세기 초 발견되었는데 아직까지 복원 중에 있고, 시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성스러운 보리수나무(Bo-Tree)는 시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이며, 부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보리수나무로부터 자란 것이다.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많은 사원 중 가장 오래된 투파라마 다가바에는, 부다의 오른쪽 쇄골(鎖骨)이 안치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제타바나 다가바(Jetavanarama Dagoba)는 가장 넓은 건축물로, 한때 높이가 100m(328ft)이상 되었고 어림잡아 약 3000명의 승려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또한 가 볼만한 박물관들이 있고, 승려들의 의식용 목욕탕으로 이용되던 훌륭하게 복구된 두 개의 연못, 벼재배를 위해 지어진 관개용 저수지들이 있다. 아누라다푸라를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전거를 타고 이곳 저곳 둘러 보는 것이다.
아누라다푸라에서 남동쪽으로 75km(46mi)떨어진 고대 호반도시, 폴론나루와(Polonnaruwa) 유적지는, 대부분 11세기와 12세기 인도 촐라왕조 지배기의 것으로 훌륭히 보수되어 있다. 콜롬보 북쪽, 250km(155mi)거리에 있는 아누라다푸라는, 콜롬보에서 매일 여러차례 버스가 운행되며, 구식 버스는 약US$0.60이고, US$0.70을 더 내면 에어컨시설의 시내버스도 탈 수 있다. 기차도 아누라다푸라에 가긴 가지만 이는 북부의 정세변화에 따라 좌우된다.
장엄한 바위요새 시기리아는 난공불락의 성채이자 승원의 피신처로, 바위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침략을 당할까 두려워 방어용으로 구축된 이것은, 200m(656ft)의 바위산 꼭대기에 위치해 있어 마치, 호주의 바위산 에어즈 록(Ayers Rock)정상에 유럽의 성을 그대로 떨어뜨려 놓은 것 같다.
거기에는 수상정원과, 5세기경 바위에 그려진 아름다운 처녀, 사진을 걸어놓은 것 같은 1천년 역사의 그림문자 벽, 한쌍의 거대한 사자발톱 그리고 무엇보다도, 멋진 경관이 있다. 콜롬보에서 시기리야로 오려면, 버스로 담불라(Dambulla)까지 가서, 다시 바위요새행 버스를 갈아탄다(매시간 있음)- 총191km(118mi)거리.
히카두와는 최근들어 약간 버림받은 듯한 인상이지만, 그래도 섬에서 가장 개발이 잘 된 해변 리조트이다. 이 곳에는, 숙소, 괜찮은 식당, 해변가에 늘어선 분위기 좋은 카페가 줄을 지어 있고, 멋있고 접근하기 쉬운 산호서식처에서의 스노클링, 수많은 난파선에서의 스쿠버 다이빙, 전망용 유리바닥으로 된 보트투어, 써핑등 온 갖 수상레포츠가 갖춰져 있다.
그러므로 서양여행자들에게 인기있는 여느 아시아 해변 리조트와 다름없는 휴양지이다. 관광객들의 충동구매를 북돋우는 수많은 수공예품점, 불교사원, 풍부하고 다양한 조류가 서식하는 호수 외에 주요도로에서의 위험한 고속질주도 빼놓을 수 없는 이 곳의 특징이다. 콜롬보에서 해안을 따라 87km거리에 있고, 버스편도 많지만 하루 4번 운행하는 고속열차도 타 볼만하다. 완행기차도 몇 대 있긴하지만 3, 4시간이 소요된다.
성경속의 도시 타스시(Tarshish)라고 여겨지기도 하는 갈레는, 스리랑카에서 네덜란드인들이 굳건히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화려한 도시이다. 1663년에 지어진 36헥타르(89에이커)의 이 네덜란드 요새는 황폐의 시기를 잘 견뎌내 왔다. 거대한 성벽이 구 갈레에 해당하는 언덕지역을 둘러싸고 있고, 성벽 안 쪽에는, 튼튼한 네넬란드 저택들과, 박물관,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역사의 흐름과는 반대로 상당히 조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이다. 1684년 네덜란드지도자들이 세운 뉴 오리엔탈 호텔(New Oriental Hotel)은 식민지 시대의 보석으로, 무드있는 근사한 바가 있다. 비록, 대부분 여행자들이 우누와투나(Unuwatuna), 웰리가마(Weligama), 탄갈라(Tangalla)등 근사한 해변이 있는 해안지역을 더 선호하지만 갈레근처에도 몸을 담구기에 적당한 작은 해변이 있다. 이 곳으로 오는 기차편도 매일 있지만, 콜롬보와 갈레 사이 107km(66mi)구간을 운행하는 다양한 버스편을 이용하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12월부터 4월에는 높이 2224미터(7295ft)의 아담스피크를 오르기 위해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산 정상에는 거대한 '발자국'이 있는데, 이슬람교도들은 그것이, 에덴동산에서 속죄를 위해 서 있던 아담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불교도들은 그것이 부다의 족적(足跡)이라고도 하고, 힌두교도들은 시바신이 남긴 것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것이든 개의치 말자. 확실한 사실은, 1천년이상 성스러운 순례지로 내려왔다는 것이니까. 새벽에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아무리 냉소적인 불가지론자라 할지라도 환상의 무아지경에 빠지게 만든다.
달후제(Dalhousie)마을에서 산 정상까지 오르는데는 4시간이 소요된다. 아담스 피크 기슭에 도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낮에는 버스로 이 곳까지 도달하고, 밤에는 산으로 오르면 되니까... 성지순례기간에는 캔디, 누와라 엘리야, 콜롬보에서 달하우세까지 버스가 운행된다. 하톤(Hatton)이나 마스켈리야(Maskeliya)로 도착해도 된다. 만일 늦게 출발해야 한다면 콜롬보에서 택시로, 하톤이나 달하우세로 갈 수 있는데 220km(136mi)정도를 가야될 것이다.
한때 영국인들이 선호했던 고원휴양지, 누와라 엘리야는 아직도 제국의 흔적 - 튜더와 조지양식이 혼합된 건축물, 박공지붕, 장미덩쿨이 있는 깔끔한 잔디밭, 이끼가 낀 묘비 - 이 남아있는 곳이다. 힐 클럽(Hill Club) - 골프코스, 테니스장, 심지어 전원생활의 복제판까지 - 을 가보거나 인근 고원의 식물원과 차농장을 방문하면 스리랑카 별천지의 분위기에 빠져볼 수 있을 것이다.
누와라 엘리야로 가는 버스는 콜롬보에서 거의 매시간 출발하며, 캔디에서는 정기적으로 자주 출발한다. 기차로 온다면, 누와라 엘리야에는 기차역이 없으므로, 나누오야(Nanu Oya)에서 하차하여 연결버스나 택시로 갈아탄다.
얄라 웨스트는, 아직까지는 여행자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스리랑카의 몇 안되는 국립공원중 하나이다. 스리랑카 남동부에 있는, 약 1000평방 킬로미터의 이 공원은, 관목, 늪, 바위투성이 지대로 코끼리를 볼 수 있는 곳이고, 레오파드, 곰, 사슴, 악어, 맷돼지, 원숭이, 물소, 야생공작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티싸마하라마(Tissamaharama)에서 운전수딸린 지프를 빌려 가는 것인데, 새벽녁이나 땅거미가 질 무렵에 물가 근처 장소에 있는다면 이 곳의 많은 동물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근처, 분달라(Bundala)국립공원은 스리랑카에서 조류를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얄라웨스트는 9월에 문을 닫고 보통 8월과 10월에도 부분적으로 문을 닫는다. 그러나 일단 문을 열면, 가기 가장 좋은 방법은 콜롬보에서 241km(149mi)거리의 해안도시, 티싸마하라마까지 버스로 가, 거기서 운전사가 딸린 지프를 빌리는 것이다. 직접 차를 몰고 간다면, 정문앞까지 가서 입장료, 보험료, 트래커비용을 지불하면 된다.
남서부 해안지대 해변가에는 수영하기에 좋은 장소들이 많이 있다. 히카두와(Hikkaduwa)는 스쿠버 다이빙, 스노클링, 파도타기에 좋은 지역이고, 우나와투나(Unawatuna)는 스노클링에, 밴토타(Bentota)강은 항해, 윈드써핑, 수상스키를 하기에 멋진 장소이다. 트래커들은 아담스 피크를 등반해보거나, 누와라 엘리야(Nuwara Eliya)근교의 적막한 홀튼평야(Horton Plains)지대 고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나오는 700m(2296ft)절벽에서, '세상의 끝'을 느껴보라.
스리랑카에 입국하는 유일한 방법은 항공편이다. 콜롬보는 유럽, 아시아, 호주, 중동에 직항편이 닿아있는 국제관문이다. 콜롬보와 인도의, 마드라스(Madras), 트리치(Trichy), 트리반드럼(Trivandrum), 뭄바이(봄베이)를 오가는 저렴한 항공편을 구할 수 있다. 출국세는 US$ 20.
스리랑카국내에는 항공편이 없고, 주요 교통수단으로 버스와 열차가 있다. 매연을 뿜어대는 괴물(?)버스로부터 개인이 운영하는 현대적 버스에 이르기까지, 버스는 저렴하고, 편수가 많으며, 항상 만원이다. 기차여행은 느리 반면 상당히 편안하다. 갈수록 오토바이와 자동차 렌트족들이 많아지는데 주의할 것은, 갑작스런 소와 개 - 많은 개들이 다리가 세 개이다-의 출현으로 종종 장애물경주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루나 며칠간, 운전사 딸린 차량을 빌리는 것도 일반적인데, 몇 명의 친구와 동행한다면 이것도 가격면에서 괜찮다. 시내 교통편으로 버스, 택시, 오토바이 릭샤가 있다. 요금을 미리 확인한 후에 타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