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stles Peter and Paul-GRECO, El
1592, Oil on canvas, 121,5 x 105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
축일:6월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feast of Peter and Paul
Solemnity of Saints Peter and Paul
celebration of Saints Peter and Paul co-founders of the Church
성 아우구스띠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295, 1-2. 4. 7-8: PL 38, 1348-1352)
이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전한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복된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의 순교는 이날을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에 대해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퍼져 나가고,
그들의 말은 땅 끝으로 번져 갔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전한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정의의 길을 좇아 진리를 고백하고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도들의 으뜸이요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한 복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 즉 반석이다."
이 말씀은 이보다 앞서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베드로 즉 반석이니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 즉, 네가 고백하는 신앙을 내가 이 반석위에 세우리라.
네가 나더러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했으니
내가 그 고백 위에 내교회를 세우리라. 너는 베드로 즉 반석이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서 나오지 않고
반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것처럼,
베드로라는 이름도 ’베드라’(반석)라는 말에서 연유하지
베드라가 베드로라는 이름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수난 당하시기 전
제자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만이 거의 어디서나 온 교회를 대표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온 교회를 대표할 책임을 맡은 베드로만 그리스도께로부터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열쇠는 한 사람만 받은 것이 아니고 온 교회가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탁월함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교회의 보편성과 일치의 표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너에게 열쇠를 주겠다."라고 하실 때,
모든 이에게 주실 것을 베드로에게 위탁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하늘 나라의 열쇠는 그리스도께서 온 교회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모든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역시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칠 과업을 맡겨 주셨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베드로 혼자서만 주님의 양 떼를 쳐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시기 위해 이 말씀을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하십니다.
사도들 중 으뜸인 베드로에게 먼저 말씀 하십니다.
"베드로여, 실망하지 마십시오. 한번, 두번, 세번까지 대답하십시오.
당신의 경솔한 자신감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세 번이나 땅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당신은 사랑의 고백도 세 번 해야 합니다.
세 번 묶은 것은 역시 세번 풀려져야 합니다.
"두려움으로 묶은 것을 사랑으로 푸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한 번뿐만 아니라 두번, 세번까지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맡기셨습니다.
이 두 사도들의 순교는 같은 날에 기념합니다.
이 두 분은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날에 순교했지만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가고 바울로가 뒤따랐습니다.
사도들의 피로 우리에게 거룩하게 된 이 축일을 경건히 지내고
그들의 신앙과 생활, 그들의 수고와 고난, 그리고 그들의 증거와 복음 전파를 공경하도록 합시다.
(가톨릭굿뉴스홈에서)
[ICON] Apostles Peter and Paul. 12th-13th century.
140 x 91 cm. From the Church of the Ascension in Byelozersk.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성 베드로 사도
St. Petrus
ST. PETER the Apostle
St. Peter, Prince of the Apostles
San Pietro Apostolo
Bethsaida (Galilea) - † Roma, 67 d.C.
Born:as Simon
Died:martyred c.64 crucified head downward
because he claimed he was not worthy to die in the same manner as Christ
Canonized:Pre-Congregation
Name Meaning:rock(Pietro = pietra, sasso squadrato, dal latino)
Emblema:Chiavi,Croce rovesciata,Rete da pescatore(Keys,turned upside down Cross,Net from fisherman)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2월22일.게시판1629번.
(feast of the Chair of Peter, emblematic of the world unity of the Church)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울로 대성당 축성 봉헌 축일:11월18일.게시판1476번.
(feast of the dedication of the Basilicas of Peter and Paul)
St.Peter late XVth century.Novgorod
마태16,12-15ㄱ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새번역성서)
베드로
라틴어 Petrus
영어 Peter
첫번째 교황이며 십이 사도들의 지도자.
갈릴리에서 어부 요나의 아들로 태어나 아우 안드레아와 함께 어부 생활을 하던 중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원 이름은 시몬이었으나 예수가 그에게 베드로 또는 아람어로 게파(Cephas)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요한 1:42) 베드로나 게파는 둘 다 '바위'라는 뜻이다.
이러한 이름은 그의 강한 성격에도 어울리지만 후에 그리스도가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라고 하심으로써 그의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다.
베드로가 사도들 중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담당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서에서 그의 이름은 사도들의 명단 중 언제나 제일 처음에 기록되었으며(마르 3:11)
다른 어떤 사도들의 이름보다 빈번히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다(루가 5:10).
베드로는 사도들의 대변인 역할을 했으며 예수가 사도들에게 질문할 때마다 그들을 대신하여 답변하곤 하였다.
베드로는 또한 예수의 거룩한 변모(transfiguration)의 증인이며(마태 17:1-8)
예수가 야이로의 딸을 살려냈을 때 그와 함께 있었고(루가 8:51)
게세마니에서 그리스도가 공포와 번민에 싸여 기도하고 있을 때도 그와 함께 있었다(마르 14:33).
예수는 자신과 베드로를 위하여 성전세를 바치셨으며(마태 17:24-27)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음을 알려주면서 천사는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하라"(마르 l6:7)고 말하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 베드로는 유다의 후계자를 뽑는 모임을 마련했으며(사도 1:15-26)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참석했던 예루살렘 회의를 주관하고 논쟁을 잠잠케 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사도 15:6-12).
4복음서에 기록된 그 밖의 많은 일화들이 베드로의 지도자적 역할을 명백히 해주고 있으며
그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신(요한 21:16-17)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에 진심으로 순종하였다.
베드로는 여러 가지 강점들을 지니고 있었으나 때로는, 인간적인 결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성급함은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 동산에서 대사제의 종 말코스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린 사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요한 18:10).
그는 메시아적 사명을 잘못 해석하여 예수의 꾸지람을 듣기도 했고(마르 8:33)
예수와 자신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비겁함을 드러내고는 몹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였다(루가 22:54-62).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약점들 중의 그 어느 것도 예수가 그에게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9)고 말씀하심으로써
부여한 그의 역할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승천 후 베드로는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아그리파 (Herod Agrippa) 1세에게 붙들렸다가 도망하여 소아시아 및 안티오키아에서 전도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로마에서 잠깐 동안 그리스도 교단을 주재하였으나
네로의 폭정 아래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는 후에 로마 초대 교황으로 추대되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베드로는 '돌, 반석'이란 뜻이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그의 복음 전반부를 승리의 절정에서 끝맺는다.
그는 예수께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심과 오해와 반대를 기록 했으며,
"당신은 메시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 고백을 기술했다 (마르 8.29).
그것은 베드로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질을 하다가 예수님을 위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날로부터 시작된 영광스러운 순간들 가운데 하나이다.
신약 성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선택되어 사도들의 지도자가 된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그는 예수님의 얼굴이 변하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죽은 아이의 부활과 겟세마네의 고통에 참여하는 특전을 받았다.
그의 장모는 예수님에 의해서 완쾌되었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파스카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요한과 그를 파견하셨다.
그의 이름은 모든 사도들의 명단에서 맨 첫머리에 나온다.
그리고 그에게만 해주신 이런 말도 있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 16,17-19)
그런데 복음은 베드로에 관하여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닌 내용도 상세하게 덧붙임으로써
복음 자체의 진실성을 입증하기도 한다.
그는 결코 선전가가 아니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까지도 인간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평범하게 죽어야 할 인간들에게는 크나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는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였지만 어린이 같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버렸으니 무엇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기도 했다.
그는 고통당하는 메시아의 개념에 반대하다가 그리스도의 심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려 애쓰고 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지만 일곱 번이란 제한을 내세웠다.
그는 신앙으로 물 위를 걸었지만 의심을 했기 때문에 물에 빠졌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 발을 씻어 주는 것을 거부했지만 다음에는 온몸을 깨끗이 씻어 달라고 했다.
그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최후의 만찬에서 맹세하였지만
결국은 절대로 그 사람을 모른다고 여종에게 맹세했다.
그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 말코스의 귀를 자르면서 충성스럽게 저항했지만
끝에 가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그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시고 용서해 주셨다.
그는 밖으로 나가서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The Repentant Peter-GRECO, El
c. 1600. Oil on canvas, 93.6 x 75.2 cm. The Phillips Collection, Washington
우리는 어떤 다른 사도들보다도 베드로에게 더 쉽게 고해 성사를 보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성덕의 단순하 사실에 대한 좀더 뚜렷한 실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한 것이다.
베드로야, 네가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내 아버지의 계시이다. 네가 아니라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낮추어 하느님의 권능에 복종하십시오.
때가 이르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 정신을 바짝 치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하십시오.
아시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교우들도 같은 고난을 당해왔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동안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에게 당신의 영원한 영광을 주시려고 불러 주신 하느님,
곧 모든 은총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 하게 하여 주시고
든든히 세워 주시고 힘을 주시고 흔들리지 않 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1베드 5,6-10)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예수께서는 친히 말씀하신 “스스로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라는 말씀은
특히 성 베드로 사도에게 잘 맞는 말씀이다.
그는 원해 비천한 어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주님께 친히 사도들의 으뜸, 모든 교회의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주님의 대리자가 되었고, 그 권한을 상속한 로마 교황은
교통(敎統) 연면(連綿)해 오늘에 이르기?沮?교회를 보살피는 대업을 수행하고 있다.
베드로는 일생을 가난하게 상고 신앙을 위해 순교했다.
그러나 그의 무덤 위에는 세계에서 가장 웅대하고 화려한 성전이 간립되어 끊임없이
각국의 순례자들이 방문해 열심히 그의 전구를 구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처음 시몬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것이 반석이라는 뜻인 베드로라 칭하게 된 것은 주님의 명명(命名)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부친은 똑같이 가난한 어부로서 요나라고 불렸도 그의 모친은 요안나라고 했다.
베드로는 주 예수보다 2,3세의 연장으로서 겐네사렛 호숫가의 작은 마을 베사이다에서 태어나
동생인 안드레아와 함께 건전히 자랐고, 신앙이 깊은 일반 유다인처럼 그곳의 회당에서 성서를 배웠다.
장성함에 따라 그들 형제는 부친처럼 어부 생활을 하고
나이가 들자 아내를 맞이해 가난한 중에서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성 요한 세례자가 요르단강 근처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동생과 더불어 일찍이 그의 제자가 되었으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업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뒤 곧 두 형제는 예수를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성 요한 세례자가 요르단강에 가까이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하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안드레아와 후에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가 된 요한은 그 말을 듣고 즉시 주님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예수께서 뒤돌아 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었이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라삐(선생님), 묵고 계시는 데가 어딘지 알고 싶습니다”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시자 그들은 따라 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이었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하며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가자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는 너를 게파(베드로, 반석)라 부르겠다.”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잠시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예수와 같이 가나도 갔고, 예루살렘에도 올라갔다.
그러나 그 후 다시 고향에 돌아가서 전과 같이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안드레아와 함께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께서 오셨다.
그 날은 하필 소득이 없었다. 전날 밤부터 그물을 쳤으나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다 아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하셨다.
두 형제는 어차피 헛수고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씀대로 했다.
그러자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했다.
동료들이 와서 같이 고기를 끌어 올려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두 배에 가득히 채웠다.
참으로 큰 기적이었다. 이것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하고 말했다.
베드로는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The Calling of St. Peter-Domenico Ghirlandaio.
1482. Fresco. Sistine Chapel, Vatican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그 뒤 예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시도하신 후 날이 밝자 많은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으며 그 중 베드로를 으뜸 사도로 선택하셨다
(그러나 그 권력을 공공연히 위탁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언제 어느 때나 주님과 함께 있었다.
백인대장의 종을 고치실 때도,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실 때도,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실 때도,
야이로의 딸을 부활 시키더나 타볼 산에서 변모하실 때나 게세마니 동산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도
다른 사도는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을 경우에도 베드로만은 동행의 영광을 차지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 그러한 선택을 받을 점이 충분히 있었다.
그는 다혈질이고 성격이 급하면서도 주님을 참으로 사랑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적에 누가 그보다 더 열심히 들었는가?
누가 그보다 더 주님의 몸에 대해 염려했는가?
예수께서 게세마니 동산에서 배반자 유다에게 잡혔을 때
스승을 생각하는 열정에서 상대에게 달려든 자는 누구였던가?
주님께서 재판소에 끌려가실 적에 매우 근심하며 맨 처음으로 그 뒤를 따라가
밤새도록 그곳을 떠나지 않은 자는 누구였던가?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그의 예수께 대한 사랑은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도 통탄할 실수는 있었다. 그것은 최후 만찬 석상에서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예수께 말씀드리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 말을 잘들어라.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다시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장담했으나 재찬소 마당에서 “당신은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 아닙니까?”
하는 질문에 세 번 모두 겁을 집어먹고 “나는 그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만약 이것이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습니다”하고 맹세까지 하며 배반한 사실이다.
그때에 닭이 울었고 주님께서는 몸을 돌려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슬피 울었다.
이는 베드로가 세상을 뜰 때까지 늘 가슴에 사무쳐 얼굴에 눈물의 골이 패었다고 한다.
St Peter is Walking on the Water-BORRASSA, Lluis
1411-13. Tempera on wood, 102 x 65 cm. San Pedro, Tarrasa
주님께서도 그의 진실한 통회를 보시고 그의 약함을 용서해 주셨다.
이것은 자신의 힘을 너무 믿은 인간의 약점의 폭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희소식이 들리자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을 향해 갔다.
그 뒤 예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세 번째로 사도들에게 발현하셨을 때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세 번씩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마음이 슬퍼져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선언하시며 모든 교회를 다스릴 대권을 그에게 위탁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째 되는 날 오순절이 되어 베드로는 성모 마리아와 다른 사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성령이 내렸다.
그때까지 백성들이 무서워서 숨어 있었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성령의 힘으로 용기를 얻었고 베드로는
여러 사람 앞에 서서, 일장의 설교를 해 한 번에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베드로는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해 주고, 그로 인해 법정에 끌려가 예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했지만 베드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 번 판단해 보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단호한 태도를 표시했다.
The Liberation of St Peter (detail)-RAFFAELLO Sanzio
1514. Fresco, width of detail: 220 cm. Stanza di Eliodoro, Palazzi Pontifici, Vatican
그 후에도 여러 번 그는 성령의 힘으로 용감히 교회의 지도자로, 예수의 대리자로 최선을 다했다.
신앙을 위해 투옥 당한 일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천사의 특별한 힘으로 구출된 사실도 있었다.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나자 베드로는 요한과 더불어 사마리아에 가서 그곳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다음 안티오키아를 방문하고 거기에 교회를 창설했으며 요빠에서 기적을 행하고,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회의를 사회(司會)해 중대한 결의를 선언했다.
Martyrdom of St Peter (detail)-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546-50. Fresco, 625 x 662 cm (full fresco). Cappella Paolina, Palazzi Pontifici, Vatican
그리고 나서 그는 로마로 활동 무대를 옮겼는데 애석하게도 자세한 내막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 당시 아시아의 두세 교회들에 보낸 서간이 성서 속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남아 있을 뿐이다.
67년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스승과 같이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스승과 같은 형태로 순교할 자격이 없다고 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용감한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
그 유해는 신자들이 정성되이 안장해 지금도 세계 최대의 베드로 대성전 안에 안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공경은 사방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2월22일.게시판1629번.
(feast of the Chair of Peter, emblematic of the world unity of the Church)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울로 대성당 축성 봉헌 축일:11월18일.게시판1476번.
(feast of the dedication of the Basilicas of Peter and Paul)
*성 바오로 사도 개종 축일:1월25일.게시판1585번.
(Conversione di San Paolo Apostolo)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달리기 시합을 할 때 출발 신호가 울리기 전에 뛰어나간 적은 없는가?
부주의해서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나, 결국 후회하게 될 말을 한 적은 없는가?
충동적이고 좌충우돌하기도 하지만 삶의 기쁨이 넘치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성 베드로와 닮은 성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성 베드로는 중도에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배에서 뛰어 내려서 물 위를 걸으려 했고 주님을 향한 자신의 끝없는 사랑을 외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고 믿음을 잃고 낙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온 마음과 열정을 다 쏟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수없이 넘어졌지만 언제나 다시 일어섰고 앞을 향해 전진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한 열정과 복음을 향한 열정, 그리고 생명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미지근한 홍차를 조금씩 홀짝거리는 데 비유한다면,
베드로의 모습은 마치 한여름에 차가운 냉차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베드로의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 같은 문구가 있다.
"인생은 연습이 아니다.
시간은 우리가 무대 위에 올라갈지 말지를 결정하도록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가 미적거린다면 쇼는 벌써 끝나고 막은 냈다는 것만을 알게 될 것이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사도 使徒
라틴어 apostolus 그리스어 apostolos 영어 apostle
'사도'의 어원은 '파견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 apostell 이며
이의 명사형인 apostolos 즉, 사도는 '보내진 자' 또는 ' 파견된 자'라는 의미이다.
성서에서 '사도'는 초기에 예수를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더 엄밀히 말하면 '사도'라는 칭호는 예수가 그의 교회를 세우고,
그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선택한 열두 명의 제자들과(마태 10:2, 사도 21:4)
이방인들의 탁월한 사도였던 바울로에 국한되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12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던 시기에는 '제자'들로 불려졌으나
예수가 승천한 이후부터는 '사도'들로 기록되고 있다.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베푸는 자리에서 예수는 이들을 사제로 임명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들은 성령강림절 이후에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가르쳤던 바를
사람들에게 전했으며, 초대교회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현대적인 의미에서‘사도’는 사도직을 계승한 주교 등 성직자뿐만 아니라
사도적 활동을 하는 평신도들에게도 해당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에서는 사도직 수행의 권리와 의무는
성직자나 평신도나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이라는 것과 교회 건설에 평신도들도
고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교령 25)을 성직자들이 명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Peter and Paul, the Holy Apostles
St Peter-GIOTTO di Bondone
1290s, Fresco,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축일:6월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feast of Peter and Paul Solemnity of Saints Peter and Paul celebration of Saints Peter and Paul co-founders of the Church
성 베드로와 성바오로는 공동체를 위한 일치의 표지이며 구원의표지입니다.
두 분은 로마시의 보호자이다. 베드로 성인는 어부였고 이름이 시몬이었다. 네로 시대에 십자가에 머리를 밑으로 하고 거꾸로 순교 하였다.
바오로 성인은 제일의 선교 사도이며 가장 중요한 선교사로써 67년 로마에서 머리를 잘려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는 각각 64년과 67년에 순교하였으며, 그들의 무덤은 바티칸과 로마 성밖 오스티아로 나가는 길가에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며 주님께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약속을 듣는다. 그는 형제들을 굳세게 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거친 인물에게 그토록 중요한 일을 맡기시는 하느님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는 시험을 이겨 내지 못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베드로였기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는 형제들의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바오로는 그리스도께 늦게 부름 받았지만, 많은 교육을 받았으며 활기있고 놀라운 힘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주님의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어떤 시련도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씨 뿌리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었다.
서로 대조적인 두 인물이 똑같이 위대한 공헌을 하여 교회가 커 나가는 데에 주춧돌이 되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주님의 신비이다.
로마 교회는 두 사도를 같은 날에 기념해 왔다. 두 사도는 교회의 두 기둥으로 공경을 받아 왔으며, 옛 성화에도 함께 등장한다.
보편 교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정하여, 성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전세계 모든 신앙인을 훌륭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ICON]Apostle Paul - Andrei Rublev. c. 1420s. Tempera on wood 160 x 109 cm.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성 바오로 사도
St. Paulus, Ap. San Paolo Apostolo St. PAUL the Apostle Born : c.3 as Saul at Tarsus, Cilicia (modern Turkey) Died : beheaded c.65 at Rome, Italy Paolo = piccolo di statura, dal latino (small of stature) Emblema: Spada(Sword)
인창동성당 주보성인
*성 바오로 사도 개종 축일:1월25일.게시판1585번.
(Conversione di San Paolo Apostolo)
*성 베드로대 성당과 성 바오로 대성당 봉헌 축일:11월18일.게시판1476번.
(feast of the dedication of the Basilicas of Peter and Paul)
2 디모 4,7-8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리기를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새번역성서)
바울로 라틴어 Paulus 영어 Paul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의 한 사람.
십이 사도의 일원은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 가장 큰 활약을 한 사도였다.
칠리치아(Cilicia)의 타르소(Tarsus)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그는 성장한 후
광신적인 바리사이인들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박해로 악명이 높았다(사도 8:3).
그러나 그리스도 교도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된 바울로는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개종하였다(사도 22:10).
바울로가 그리스도교를 처음 전하기 시작했을 때 교회 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바리사이인들은 그를 변절자라고 욕하였고 그리스도 교도들은
그의 박해에 대한 초기의 평판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나바는 특히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그는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에
바울로를 데리고 가서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주님을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일과
또 다마스커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전도한 일들을 낱낱이 설명해주었다(사도 9:27).
바르나바의 변호가 효과가 있어 안티오키아 교회는 키프로스, 밤필리아, 이고니온, 리스트라,데르베 등으로
이어지는 전도 여행에 바르나바를 지도자로 바울로와 마르코를 보조자로 각각 임명하여 파견하였다(사도 13:14).
첫 번 전도 여행을 완수한 후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당시 할례를 강요라던 낡은 율법의 지지자들에게
보다 완화되고 보편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 무렵 유대에서 몇몇 사람이 안티오키아에 내려와 교우들에게 모세의 율법이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와 그들 사이에 격렬한 의견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교회는 바울로와 바르나바와 몇몇 신도들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다른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는데(사도 15:1-2) 베드로가 이 회의를 주관하였다.
모든 견해들이 피력된 후에 마침내 바울로와 그의 동료들의 견해 즉,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유태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견해가 승리를 거둔다(사도 15:5-21).
회의를 마친 후 바울로는 두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나는데 이 여행에서 그는 프리기아, 갈라디아,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지방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모든 신도들을 격려하였으며(사도 18:23)
세 번째 전도 여행에서는 마체도니아와 그리스를 방문하였다.
이 세 차례의 전도 여행에서 바울로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나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릴 만큼 사도로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그는 신약성서 27권 중 13권을 서간문의 형식으로 저술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그가 재판받기 전 투옥되어 있던 2년 동안에 씌여진 것이다.
67년경 바울로는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손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현재 성 바울로 대성전에 안치되어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12월26일.게시판1539번.
바오로는 라틴어 Paulus로 본래 '작은'이란 뜻이다.
만일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갑자기, 미국은 공산주의를 택해야하며 헌법을 무시해야 한다고
설교하기 시작한다면 그에 대한 분노와 반발은 대단할 것이다.
그러한 분노와 반발은 바오로가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므로 이 예는 그의 일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실한 바리사이파였으며, 모세의 율법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다.
그런데 이제 그가 이방인들을 환영하는 이단자로, 배반자이며 배교자로 자기 형제인 유대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바오로의 근본적인 확신은 하느님만이 홀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단순하고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가장 철저하게 율법을 기키는 것까지-도 죄에 대한 보상과 은총의 대가로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는 인간의 선행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죄로부터, 악마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구원되기 위하여
인간은 온전히 예수님의 구원 능력 앞에서 자신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없는 율법의 쓸모 없음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평생을 두고 논쟁했지만
자기 형제인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을 저버린 적은 없었다. 그는 아직도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며
약속의 자녀들인 유대인을 원줄기로 하여 이방인들에게 접목된 것임을 상기시켰다.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일은 교회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그 어떠한 그리스도의 사절보다도 더 열성적이고 박력이 있으며 용감한 일꾼으로 만드는 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박해와 천대와 나약함은 매일매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였으며 더욱 승화될 수 있는 요소였다.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있었으며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이방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일하다가
로마 황제 네로라는 이방인 권세자에 의해서 순교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The Apostle Paul-Rembrandt. c. 1657. Oil on canvas.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바오로는 양극으로 대립된 유대 교회와 이방 교회를 일치 키기 위하여 타협 없이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가장 위대한 행동 가운데 하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모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하여 이방 교회에서 벌인 모금 운동이다.
그것은 우선 그들의 물질적 결핍을 구제하는 방법이었으며,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루어진 공동 연대성을 상징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바오로는 아마도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의심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실패가 어떠한 것이든 율법의 노예에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도구이며, 유대인들의 고귀한 유산에 새로이 접목된 이방인들의 가지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
자신의 고통에 대하여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 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2고린 11,24-27;12,10)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바오로는 소아시아의 시리아 다르소에서 출생해 처음은 사울이라고 불렸다.
양친은 유다인으로서 열심히 그 종교의 율법을 지켜나가고 있었는데,
바리사이인이던 아버지는 아들 사울에게도 그 정신을 심어 주려고 애썼다.
그래도 사울은 당신 다르소에서 번성하던 그리스 주의의 교육을 받고,
그리스의 철학, 역사, 문학, 언어등에 능통했다.
이러한 지식은 그 당시의 문화인에 있어서는 불가결의 것이었고,
그의 풍부한 교양은 후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바오로는 당시의 습관에 따라 하나의 손으로 하는 직업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천막을 만들던가 아니면 주단을 짜는 일이었다.
그는 그 기술에 매우 능통해 그것으로 넉넉히 독립적인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유명한 학자 가므리엘의 슬하에서
유다교의 신학과 히브리어를 연구하게 했다.
예루살렘에는 그의 누이가 출가해 있었는데, 그녀의 아들은 후에 바오로를 많이 도와 준 사람이다.
바오로는 학문에 많은 발전을 하고, 규율이 잡힌 엄격한 생활에 익숙해갔다.
그간 그는 예수나 요한 세레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들은 일이 없었다.
이유는 아직 예수께서는 공동생활을 시작하시지 않았고,
요한 세례자도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다르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그신자의 수가 날로 증가하고 있을 무렵, 바오로는 다시 에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타고난 불과 같은 열정과 유다의 율법에 대한 존경심에 맹렬히 그리스도교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그는 성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일때나 예루살렘과 그 부근의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박해때는
언제나 참가했다.
얼마뒤에 그는 다마스커스에 그리스교도교도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즉시 그들을 체포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그는 땅에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는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네 발로 송곳을 차면 너만 해로운 뿐이다."라는 대답이 있었다.
여기에서 바오로는 공포와 경악으로 떨면서 "주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던 바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잇을 것이다"하는 음성을 듣고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부하들의 인도를 받아 가며 다마스커스로 들어가
3일동안 아무 음식도 취하지 않고 오로지 통회의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다마스커스에 아니니아라는 주님의 제자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신비로운 영상 가운데 나타나
"어서 일어나 '곧은 거리'라는 동네에 사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다르소에서 온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아라.
그 사람은 내가 뽑은 인재로서 내이름을 이방인들과 제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할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사울로 말하자면 유명한 박해자였으므로 아나니아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어쨌든 주님의 분부대로
그를 방문하고 사울에게 손을 얹으니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는 동시에
바오로는 시력을 회복하고 일어나 아나니아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신자가 된 바오로는 전에 그리스도교의 박해 때 드러낸 열의를 그대로 전교하는데 돌려
그 박학한 지식을 무기로 삼고 눈부신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복음 선포의 시작은 다마스커스 마을이었는데 유다교도들이 그를 미워하며 죽이려고 햇으므로
그는 그것을 피해 광야로 가 그곳에서 3년간 기도하고, 성서를 읽으며, 묵상하면서 사도직을 준비했다.
그 동안의 의식주는 손수 천막을 만들어 마련했다.
그는 한 나라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나라를 다니며 영혼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사도로서 일어섰다.
우선 그는 다시 다마스커스에 갔고, 다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드로 사도를 만나보고,
다시 고향인 다르소에 돌아가서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아티오키아로 길을 떠났다.
그는 가는곳마다 신자들이 단체를 만들엇으며, 그만큼 도처에서 교회를 탄압하는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용감하던 그는 아무리 고난이 많이 닥쳐와도 하느님을 위해 온몸으로 인내했다.
Cartoon for St. Paul Preaching in Athens.- Raphael. c1513-1514. Mixed media on paper, mounted on canvas.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UK.
그의 유명한 3차례의 전도여행은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에 돌아왔을때부터 시작된다.
최초의 여행은 3년간이나 걸려서 소아시아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 등에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이번 한 번의 여행만 한 것이 아니라, 처음은 중요한 도시만을 방문하고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부근 일대에도 점차 신자를 증가시킨다는 전교법을 이용하여 제2, 제3의 전도여행을 했다.
제2차 전도여행도 역시 약 3년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이번에는 전에 교회를 세운 도시를 방문하고 기타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도 방문했다.
또한 그는 유럽의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아테네, 고린토 지방에도 발을 옮겨 에페소 지방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제3차 전도여행은 5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 중 3년은 에페소에서 머물렀다.
바오로는 전부터 로마를 방문하고 거기서 전교를 하다가 다시 멀리 스페인까지도 가려고 결심하고 있었으나
그 실현에 앞서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유다교도들에게 체포되어 2년간을 가이사리아의 감옥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황제에게 상고하고 그로 인해 로마에 호송되었으나
그곳에서의 감금생활은 매우 관대했으므로 전교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지내기를 2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무죄 선고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St Paul-MASACCIO 1426. Tempera on wood, 51 x 30 cm.
Museo Nazionale, Pisa
전승에 의하면 바오로는 후에 스페인에 갔다가 다시 동쪽 나라로 갔으나
예루살렘 방면에는 가지 않고 다시 로마로 향했다.
그리고 네로 황제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아 67년 칼로 참수 당하여
거룩한 순교자로서 일생을 마쳤다 한다.
바오로의 순교 장소에는 오늘날 한 성당이 건립되었고 그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그의 묘지위에는
미(美)의 극치를 드러내는 대성전이 웅장하게 서 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성 바오로 대성전이다.
성 바오로는 생존시에 친히 세운 교회나 제자들에게 보낸 서간이 14통이나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신약성서로 인정받아 지금도 예수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귀중한 문헌으로 되어 있다.
바오로의 활동은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수많은 나라에 가서 전교하며 갖은 환난을 당했다.
그는자기 스스로도 말한 바와 같이 종종 감옥에도 갇히고 죽을 위험을 당하고 냉대와 학대를 받았다.
그는 유다인들에게서 40대에서 하나 모자라는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로마인들에게서도 태형을 세 번 당하고, 세 번 파선을 당해 일주일 동안 바다 위에서 표류한 적도 있었다.
또한 그에게 가끔 닥쳐온 죽음의 위험, 병고, 기갈, 단식, 추위, 노고, 영적 고통 등,
그는 일체를 그리스도를 위해 인내했다.
예수야 말로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라 2, 20)
하신 그의 말대로 사랑하는 예수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열렬히 원했다.
그 희망은 성취되어 그는 지금 성스러운 사도, 영광스러운 순교자로서 천국의 영복을 누리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바오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크리스챤 저술가로 꼽힌다.
로마서(고린토에서 57년-58년), 고린토 1서(에페소에서 54년), 고린토 2서(필립비에서 57년),
갈라디아서(에페소에서 54년), 골로사이와 필립비, 에페소, 필레몬서(로마에서 61-63년),
테살로니카 Ⅰ-Ⅱ(고린토에서 51-52년) 및 사목서간인 디모테오서와 디도서를 보냈다.
히브리서는 아마도 다른 저자인듯 하다.
*성 바오로 사도 개종 축일:1월25일.게시판1585번.
(Conversione di San Paolo Apostolo)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바울로 대성당 축성 봉헌 축일:11월18일.게시판1476번.
(feast of the dedication of the Basilicas of Peter and Paul)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2월22일.게시판1629번.
(feast of the Chair of Peter, emblematic of the world unity of the Church)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The Conversion of Saul -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542-45. Fresco, 625 x 661 cm. Cappella Paolina, Palazzi Pontifici, Vatican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는 한 마디 음성에 박해자에서 열애자로 돌변한 바울로는
기원전 5년경 다르소의 히브리 가정에서 태어난 바리사이파요 율사 후보생이었다.
예루살렘에서의 박해만으로 부족하여 다마스커스까지 쫓아가 신자들을 없애려던 그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가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 이를 성 스테파노의 기도의 은혜라고 한다.
동족에게 매를 맞고 돌질을 당하고 바다에서 세 번이나 파선하여 표류하였으며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2고린 11,27)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하였다.
예루살렘에서 희랍으로 희랍에서 로마로 또 스페인까지 먼 길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1고린 9, 16)이라고 외쳤으니 그를 "이방인들의 사도"(로마 11,13)라고 하는 것이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한 그는 모든 것을 버렸기에 모든 것을 얻었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고 황홀해 하였다.
그에게 더 소원이 있었다면 "그리스도와 고난을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필립 3,10)이었다.
그 소원은 64년 로마에서 성취되었다.
신앙은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
새 사람이 되려면 비워야하고, 비우는 것은 채우는 것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The Apostle Paul - Dionysius. From the Church of Nativity of the Virgin in the Ferapontov Monastery. c. 1502. 155 x 60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사도]
사도라는 말은 희랍 원어로 아뽀스똘로스(Αποδτολοs)이며, 그 뜻은 ’누구를 보낸다.’
또는 사자(메시지 전달자)라는 말이고,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뽑으신 12 제자라는 뜻으로 통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라는 말은 희랍어 구약성서에 단 한번 사용하였으며,
이런 뜻의 아라메아어는 예수님 시대 이전에는 사용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이 예수님께서 생전에 쓰신 말인지, 초대교회 때에 쓰여진 말인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기록의 근거는 이러하지만, 복음 사가들은 예수님께서 첫 파견자들인 12 제자를 지칭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사도들의 증거활동]
사도들의 임무는 그리스도 부활의 사실을 증거 하는 것으로 (사도행전 1, 8. 22 ; 2, 32 ; 10, 39-41),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믿는 사람들을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 안으로
보다 깊이 젖어 들도록 이끄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증거활동은 두 가지 의미의 특징을 지녔는데
첫째로는 눈으로 보았다는 증거(사도행전 10, 39)와,
둘째로는 크리스찬 믿음의 증거로 신앙을 체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신앙을 현실화 시켜주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유다스를 대신할 마티아를 뽑을 때 사도가 되는 요건(要件)을 정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오시는 동안,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우리 곁을 떠나 승천하실 날까지
줄곧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에서 하나를 뽑아
우리와 더불어 주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사도행전 1, 21-22)."
The Conversion of St Paul- ESCALANTE, Juan Antonio Frias y Oil on canvas. Museo Cerralbo, Madrid
[바오로사도]
바오로 사도는 위와 같은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직 임무를 받았다는 점으로 보아 "사도"라는 말은
신약성서에서 이미 광의(廣義)로 풀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의 소명은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이루어진 점(갈라디아 1, 1)과
특별한 개종(改宗)이었다는 점입니다(로마 1, 1).
바오로는 항상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라고 하였지만,
다마스코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뵈었던 경험이 사도가 되는 조건에 합당했던 것입니다(1 고린토 9, 1).
†주여. 나를 약하게 하소서.
성 바오로는 비상한 은총과 능력을 받았고 또 그것은 바오로 안에서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것이 하느님의 능력이요. 바오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 바오로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바오로에게 매질하고 지나치게 자랑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런 약점을 떠나게 해주시도록 세번이나 간청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2 고린 12.9)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을 힘껏 드러내게 하시기 위하여
바오로를 약하게 하셨다는 말도 안되는 이것을 당신은 깨닫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에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 은총의 기적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우리 자신의 힘을 넘어서기를 두려워 하기 때문에
용서가 가져오는 기적적인 결과를 보지 못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해야 할 위치에 우리 자신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활동하는 것을 알아보지 못 할 것 입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우리는 그것을 참으로 믿습니까?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훌륭한 것을 만들어 내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밀알이 죽어야 합니다.
Peter and Paul, the Holy Apostles
St Paul-GIOTTO di Bondone 1290s, Fresco,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