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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6월의 함성과 미래의 목소리: 1987. 6.
대구참여연대, 2017. 11.13, 삶창, P. 419.
올해는 정리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요강공주 박령을 감옥에 보내는 것도 하나의 정리이지만 말이다. 경북대 학생운동 이야기지만 박통 시대를 정리하는 책이 나왔다. 청춘, 시대를 깨우다: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6~1979(여정남기념사업회 경북대학교학생운동사편찬위원회, 삼천리, 2017. P.456) 그리고 80년대에 시작을 알리는 광주와 연계된 대구 이야기가 상당한데, 나올 수 있는 여러 요소가 결합되는 상황이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인지, 1987년으로 뛰어 넘어 6월 항쟁을 중심으로 촛불항쟁을 연결접속 시켜 놓았다. 그 시기의 관련 인물들을 다 대담하여 올릴 수는 없었다고 할지라도, 대구, 6월의 함성과 미래의 목소리: 1987. 6.(대구참여연대, 2017. 11.13, 삶창, P. 419)로 나온 것은 제목처럼 30년의 세월을 넘어서(가로질러, 다리를 건너) 2017년 청년 세대와 연결에서 미래의 목소리와 계열을 이어 갈 것으로 보인다. (50W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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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987: When the Day Comes)
- 드라마/역사, 2017, 12, 27. 2시간9분(129분), / 감독: 장준하, 각본: 김경찬, 제작사: 우정필름. / <《1987》는 2017년에 개봉한 대한민국의 영화. 고(故)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시작으로 6월 항쟁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슬프고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늘 토요일 아침 김어준의 뉴스 공장에서 유시춘과 이정렬 진행자와 대화가 나왔다. 1987년 상황의 뒷이야기가 있었다. 한승헌님은 “성공회에서 실행해서 성공했다고 ...”
1987년 이래 30년. 이 시기에 처음으로 남녘에서 한글로 된 신문이 나왔다. 나로서는 이로써 일제 잔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 세대(30년)가 지나면 인민의 목소리가 나올 것으로 여겼다. 인민의 목소리가 사회관계망소통(SNS: Social Network Service)을 통해 퍼져 나간다. 그 퍼져 나감이 옛날에는 입소문이나 전단지를 통해 퍼져나갔다. 그 범위가 작고 오류가 항상 따라다녔기에, 전설 같은 신화와 착오를 만들었었다. 지금은 핸펀(스마트폰)으로 문자와 그림으로 범위로는 단번에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속도는 그야 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연결자 모두에게 한꺼번에 들어간다. 어제 작가 이외수 문자로는 한사람이 연계할 수 있는 선들이 많다고 했다 <이외수에게 유리한 사건이나 소식에 대해서는 대개 기레기들이 침묵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과 카카오스토리채널이 있습니다. 팔로워 수가 2백 60만을 능가합니다. 기레기들이 운영하는 찌라시들의 구독자 수보다 훨씬 많습니다. 진실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오후 8:38 - 2017년 12월 29일> 가짜와 오류를 고의로 만드는 집단으로 기레기 같은 분자들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흐린 물도 정화되듯이 서서히 삶의 양태에 맞게 맞추어 갈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한글 시대 30년, 그리고 항상 자기에 의한 자기 생산(창조)으로 생성(devenir, 되기)이 각 인격에서 이루어지리라.
다시 한번 대구, 6월의 함성과 미래의 목소리: 1987. 6.(대구참여연대, 2017. 11.13, 삶창, P. 419)가 시기에 맞게 나왔다. 인민의 성장, 인민의 확대, 그리고 인민의 계열들, 즉 리좀의 흐름과 속도가 있다. (50WMJ)
# 내용 ***
목차
* 책을 내며 / 004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독재정권에 맞섰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독재정권의 간선제 호헌에 반대하고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내기 위해 전국에서 일어난 6월민주항쟁. 그 과정에서 이한열 열사는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사망하였으며 박종철 열사는 모진 고문을 견뎌내지 못하고 사망하였습니다. 그들의 나이 고작 스물한 살,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6월항쟁을 통해 그들이 이루려 했던 민주주의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요. /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7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위해 또 다시 긴 싸움을 시작하였고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전국의 많은 국민들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촛불을 들고 매주 광장으로 모였고, 청년들 또한 시국 선언 등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 사실 우리 사회의 청년들에겐 강요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등의 말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젊다는 이유로 아프고 고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참고 견디면 낙이 올 줄 알았는데 이 나라는 ‘헬조선’이 되었고 우리는 ‘흙수저’가 되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세대’를 넘어 이제는 포기해야 할 것들을 셀 수 없다는 ‘N포 세대’라 불리기도 합니다. 거듭 탄생하는 신조어는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4-5)
결국 모든 것은 올바른 민주주의 확립에서부터 옵니다. 헌법 제1조에서 말하고 있듯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불과 30년 전만 하여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호헌철폐, 대통령직선제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87년의 경험이 30년이 지난 지금, 촛불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역사를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공부하고 행동하여야 하니까요. (6)
대구는 4ㆍ19혁명의 도화선이 된 2ㆍ28학생운동, 10월항쟁, 6월항쟁 등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소망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해왔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대구의 이미지는 어떠한가요. 군사독재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수구꼴통, 고담 대구(고담시티Gotham City는 미국 DC 코믹스사의 배트맨 시리즈에 나오는 가상도시이다. 성경에 나오는 지명인 고모라Gomorrah의 ‘고’ 소돔Sodom의 ‘돔’이 합쳐진 조어이다. 빅 애플을 애칭으로 갖는 뉴욕의 별칭이기도 한데, 사고가 많이 나고 변화가 힘든 도시로 영화 배트맨 시리즈를 통해 회자되게 되었었다: 편집자 주) 등의 수식어는 대구를 부정적인 이미지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구 또한 변하고 있습니다. 지난 촛불 항쟁 때 추위에 떨며 광장에서 촛불을 밝힌 많은 대구시민들이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데이트 대신에 촛불을 선택했고, 30년 전의 청년들은 자녀와 함께 촛불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말을 합니다. ‘민주주의 역사 속에 내가 있었다.’ (6-7)
1부. ‘광주’에서 6월까지
1. 역사적 관점에서 본 6월항쟁 / 이윤갑 _013
이: 대구에서 결정적으로 큰 시위가 있었던 날이 6월 26일이에요. 이날이 전국적으로 디데이가 돼서 시위를 했는데 이땐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어요. 사후에 발표된 기록을 보면 이때 4만 명 정도가 모였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 탄핵집회 때 여러분도 시내 가봐서 알겠지만 중앙로 거기다 가득 차도 오천 명 정도잖아요. 그런데 4만 명이 시내에 다 모였다고 생각해봐요. 발 디딜 틈 없이 차 있었다고 봐야죠. 여기서만 그런 게 아니고 서울도 갈수록 시위가 강렬해지니까 결국은 전두환 정권이 굴복을 한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된 거는 미국 개입도 있고 여러 가지 상황이 있는데 대구에서 6월항쟁은 그런 형태로 진행이 된 거예요. (21-22)
이... / 4월 혁명 당시 통일운동이나 노동운동 중에서 교원노조운동 같은 경우는 대구가 시발점이었죠. 7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는 여전히 서울과 버금갈 정도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했고 학생운동도 굉장히 선진적으로 발달해 있었죠. 1974년에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게 있었어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전국 대학생들이 연합해 시위를 계획한 사건인데 박정희 정권 때 그 배후로 조작된 게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이었죠. 그 사건에서 9명이 사형을 당했는데 그중에 대구 출신이 많아요. 이런 역사에서도 드러나지만 이 지역이 70년대까지는 민주화운동을 굉장히 선도하는 진보적인 지역이었어요. (23-24)
2. 울 아들이 뭘 잘못 하드노? / 이송금, 김주태 _039
이: 두렵지. 그때 심정이 안 두려운 사람이 없지. 최루탄이 하도 날아오니께. 그래도 딴에 우리가 민가협인데…. 보통 사람들은 그 앞에 한 번도 못 갈 거야. 근데 민가협 엄마들은 자식이 고생하는데 우린 죽으면 어떻냐 캄서 나서는 거지. 엄마들 마음은 똑같아. “우리 이만큼 살았는데 죽음 어떻노, 우리가 안 하면 할 사람 누가 있노.” 카면서, 그래 마음이 딱딱 뭉치데. 그래서 대구백화점이다 뭐다 어디라도 모인다 카면 항상 가고 활동 많이 했어. 고마 모임이 완전 직업이라. 서울도 자주 가고 서울 가는 거 보려도 가고, 얘기하려고도 가고 가담하려고도 가고, 많이 댕겼어. 그땐 겁이 없었어. 자식을 교도소에 넣어놓곤 엄마 마음이 겁나는 게 없어. 계명대 앞에서 경찰이 한 번 그 카대. “집에 갔을 때는 순한 양이더만 와 이래 사자로 변했는교?”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 하는교? 당신도 죄 없는 아들 형무소 드가 봐요. 나보다 더할 걸.” 그카니까 자기도 “안 그러겠습니까…” 그러더라고. 데모 중에도 대화는 해봤다(웃음). (45)
3. ‘광주’와 6월항쟁 / 이용석, 남태우 _ 051
이: ... 광주에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학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유언비어였던 세상이었거든요. 진실은 아무리 덮으려 해도 송곳처럼 튀어나오잖아요? 어떻게 감추겠어요. 먼저 접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대학 생활 내내 그걸 접해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동시대를 살았던 저희 세대 중에도. 우연한 기회에 먼저 접한 사람이 있을 테고, 그러면 ‘왜’ 하는 물음이 당연히 나오겠죠. 그렇기 때문에 86세대들 대부분이 학생운동을 접하고 투사로 변하는 과정의 근간에는 80년 5월이 깔려 있다고 보는 겁니다. (56)
ㆍ30년 전에 선배님들께서는 목숨을 걸고 학생운동을 하셨는데, 이번 촛불집회만 봐도 30년 전에 비하면 대학생들의 참여율이 확실히 눈에 띄게 적습니다. 사회문제를 대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실망스럽진 않으신지요.
이 : 패턴은 분명히 달라요. 지금 학생들이 화염병 들고 나오겠습니까? 시대가 분명히 변했고 지금 학생들은 다 우리 세대가 키워낸 사람들 아니에요? 또 우리가 그렇게 교육을 시켰고. 부모한테 교육받은 것보다 자기들끼리 사회 속에서 배운 게 더 많을 텐데 서로 소통하다 보면 바뀌는 부분이 있겠죠. 이제는 과거 패턴으로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되죠. 많은 통로들이 있잖아요. 유튜브나 팟캐스트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접하고 있을 거예요. 과연 그걸 조직해낼 것인가 말 것인가는 그들의 몫이거든요. 재밌는 게 참 많아요. 지금은 폭이 얼마나 넓어요. 그중에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메뉴판도 다양하고. 그걸 기준에 맞춘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죠. (90-91쪽)
4. 주권재민과 6월항쟁 / 박형룡_097
대구에서는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사회단체,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라고 있었습니다. 민통련에서 1월부터 전국적으로는 보조를 맞춰 2월 7일, 3월 3일 가두집회를 했었고 경북대에서는 학원민주화 투쟁을 했는데, 연일 5천 명에서 1만 5천 명씩 모여 본관을 점거하는 등 데모를 했었죠. 5·18광주민주화항쟁 기념집회 등을 통해서 계속 운동 및 집회를 해왔었습니다.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6월항쟁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전국 동시다발 투쟁이었다는 점입니다. 서울 중심으로만 일어났다면 모든 경찰 병력이 몰려 결국에는 진압됐을 것이나 전국적인 투쟁이었기 때문에 각 지역의 경찰 병력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결국 6·29선언으로 이어진 겁니다.(103)
5. 정치는 모두가 함께해야 하는 것 / 한유미, 정은정 _125
6. 역사는 흐른다 / 김충환 _155
유인물 같은 경우는 A4 용지 반 장 정도 크기로 만들어서 한 사람당 300장 정도 가져요. 네 개 대학교에서 100명 정도 모으죠. 사람을 모으고 나면 먼저 버스노선도를 그리고, 동성로하고 한일극장 앞 중앙로를 지날 때 정도로 시간을 맞춰서 몇 번 버스, 몇 번 버스, 이런 걸 다 지정해줘요. 거기는 워낙 교통이 복잡하니까 맞물려서 막 몇 대씩 서거든요. 정해준 시간과 버스에 타고 가다가 그 지점에서 버스가 서는 순간 창문을 열고 위에 올려놓고 내려버리는 거죠. 그럼 차가 가면서 쫙~ 날리는 거예요. 그러면 만 장 정도가 거리에 뿌려지고 학생들은 안 잡히고 그랬었죠. (166)
7. 운동 거점으로서의 서점 문화 / 신창일, 김석호 _179
신창일(79학번), 김석호(78학번)
신: .. 제가 79년 대학교 입학을 했을 때에 4.19 혁명을 지방에서 이끌어주었던 선배들이 계셔서 만나 뵙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1979년도에서 1960년 4월 19은 19년 밖에 안 지난 거거든요. 그때 저는 그것도 멀게 느껴지면서 와 닿지 않고 관념적으로 받아들여졌어요. 체감이 안 된 거죠. 6월 항쟁은 지음 30년이 흘렀더라고요. 학생들이 6월 항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해보니까 그때의 저처럼 하나의 텍스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사실 와 닿지 않는 거 잖아요. 태어나지도 않은 시기에 발생했던 민주혁명, 박종철열사 사건들은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거지요.; 근데 한 가지 생각해줬으면 좋겠는 게, 그 당시에 치열하게 살았어요. 징역도 각오하고요. 치열하게 살다가 투옥되고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의견을 낼 수 있고 비판적인 발언들을 할 수 있는 사회가가 된 거고, 여러 방면에서 민주적으로 1보 전진할 수 있었던 거죠. 앞으로 여러분들의 이런 관심과 의식이 다음 세대에 전해져 전진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원동력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192)
8. 6월항쟁과 시 / 김용락 _193
9. 행동의 원동력은 일상 / 최호선 _218
2부. 6월항쟁이 대구에 남긴 것들
1. 그때, 민중들은 어디에 자취를 남겼을까 / 이동엽 _247
1959년 이승만 정권의 국가보안법 개정반대 투쟁, 1986년 농축산물 수입 개방반대 투쟁 등이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열렸고, 인근의 계명대 학생들은 명덕네거리와 함께 대개 서문시장에서 집회를 많이 열었다. 6월항쟁 때도 서문시장과 부근의 신남네거리에 인근 계성고와 계명대 학생들을 비롯한 시위대가 집결하여 계산오거리, 서성네거리를 거쳐 시내로 나아가곤 했다. / 근래에 서문시장이 보수 세력의 집결지이고 대구·경북 민심의 척도라며 정치적인 목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이처럼 국채보상운동과 영남 지역 3·1운동의 효시였고, 대구 지역 민주운동의 거점이었던만큼 역사적인 중요성을 고려해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257-258)
2. 1987년 민주화운동의 물결에 뛰어든 고교생 / 최미나 _260
3. 어느 6월항쟁 참여자의 개인적 메모 / 임채도 _269
나도 서울 광화문 앞 촛불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30년 만에 다시 광장과 거리에 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 / 30년 만에 열린 광장에 모인 수십만 군들 틈에서 여러 6월항쟁의 동료들을 만났다. 머리가 희끗한 옛 동료들과 해우가 좀 어색했지만 그렇게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30년을 지키며 살아왔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우연일까? 아닐 것이다. (287) [흐름의 변용태에서 만나게 되는 게 새로운 생성의 필연이 아닐까.. 리좀은 탈주선을 그리고 매끄럽게 흘러간다.]
4. 작은 책방에서 출발한 ‘그날’의 염원 / 김민기 _288
5. 최루가스 속에서 되찾은 자유 / 이동엽 _303
6. 민주광장, 부활하다 / 최미나 _324
3부. 정치는 우리의 것-청년이 청년에게
1. 출산장려금이 왜 지역마다 다르지? _333
2. 먹고사는 걸 도와주는 게 정치다 _339
3. 헬조선에서 ‘함께’ 살아가기 _345
4. 정치 문제는 시민의 책임 _348
5. ‘지역감정’은 없다 _351
6. 투명하고 공정한 정치를 바라며 _355
7. 청년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 _359
8. 청년에게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_362
“우리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점은 대개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 부정적인 면만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거죠. 우선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배금주의가 판치고 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 및 복지 혜택과 비정규직 문제 그리고 과도한 경쟁과 학벌주의, 인맥과 혈연 등의 관계에서 비롯된 기회의 박탈 등 수많은 문제가 복합적으로 존재한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 문제 해결법이라고 하면, 일단 공과 사는 구분 지을 수 있는 인맥 관계와 더불어 어릴 때부터 서열을 나누어 등수를 매기는, 그런 과도한 경쟁 사회를 내면화하지 않도록 교육 개혁이 필요하고 고졸, 대졸, 명문대졸에 따른 편협하고 시대착오적인 시선이나 관점들을 변화시키는 게 우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소득 비례에 따른 처벌과 대기업하고 중소기업의 격차가 줄어들도록 해야 하며 외모와 나이가 아닌 순전히 내면의 능력이 평가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363)
9. 과거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사회 _365
4부. 미래의 목소리-참여 후기
1. 1987년 6월이 만든 2017년 대한민국 / 김혜연 _373
2. 몰랐던, 그러나 알아야 할 기억을 찾아서 / 박상민 _375
3. 무임승차를 거부한 나의 ‘도전’ / 금지원 _377
4. 교과서에서 걸어 나온 ‘6월항쟁’ / 김현선 _380
... 6월민주항쟁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되새기는 이번 활동이 많은 분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활동에 임했고, 그래서인지 작업을 할 때마다 큰 이유 없이 가슴이 뛰고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바라는 마음이 아닌 진심으로 6월민주항쟁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활동에 제가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힘이 나고 열심히 하고 싶었습니다. /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변할수록 당시에는 아무리 심각했던 일이라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선 잊히게 됩니다. 저희의 활동이 사람들이 6월민주항쟁에 관심을 가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최소한 잊히지는 않길 바랍니다.(381-382쪽)
5. 5개월 동안 함께한 영상팀의 ‘6월항쟁’ / 김혜영 _383
6. 그날의 그분들은 오늘의 나다 / 박경원 _386
7. 새롭게 와 닿은 ‘6월항쟁’ / 임현화 _389
8. 올바른 역사 기록의 꿈을 향한 첫발 / 황예지 _392
9. 단절되지 않은 민주주의의 경험 / 장은우 _394
10. 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김예빈 _397
11. 하루하루가 의미 있었던 5개월 / 이동엽 _399
12. 대구 청년들의 대구 역사 기록 / 최미나 _402
13. 2017 청년 예찬 / 최엄윤 _404
‘6월항쟁’ 일지 _407
(5:39, 50WMI) (6:26, 50W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