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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무역인큐베이터 원문보기 글쓴이: 무역청년
한때 역사를 전공했던.. 국사학자를 꿈꿨던..
예전의 저의 대학시절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도 그때 그 열정 그대로.. 이곳 중국에서 학자로서의 꿈이 아닌,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연의 디딤돌 같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나를 위해..
예전의 글을 조심스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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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1년 여름..
저와 같이 중국과 인연을 맺었던 네명의 친구들과 의기투합.
그당시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던
장보고의
숨결을 찾아...
우린 다시 한번 중국으로의 발길을 내딪었다.
칠흙같은 밤, 인천항을 등지고 시나브로 멀어지는
망망대해를 달리는 배, 서해 어디쯤 가고 있을까?
침실을 나와 갑판에 오르니 바람이 거세다.
강한 바람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는 뺨이 아플정도다.
하지만 장보고를 선장으로 한 16300톤급 NEW GOLDEN BRIDGE호는
잠자는 선원들을 깨지 않을 정도의 미동으로 앞으로만 간다.
장보고 선단이 서해를 건널 때, 이런 비바람에는 오히려 더욱 빨리 달렸을지도 모른다.
돛은 순풍을 만나면 훨씬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다고 했다.
6월31일, 날이 밝으며, 중국대륙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배는 그 후로도 한참을 가서야 청도에 도착했다.
한국시간 9시, 중국시간 8시, 하지만 우리는 선내에서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군무원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배는 도착했는데 군무원이 없어 하선을 하지 못한다니,
2년여만에 다시 찾은 중국은 99년 필자가 처음 들어갔을때의 중국과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군무원의 얼굴을 보니 외모에 신경을 쓰는지 안쓰는지 왠 뚱뚱해 보이는 여자가
군복 같은 복장을 하고 단정하지만 보기엔 헝크러진 머리에 무뚝뚝한 표정으로
감시하듯 바라보고 있다.
산동성은 진링산맥 동쪽에 있는 중국에서는 역사가 깊은 곳이며,
우리 고대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 나는 중고등학교시절
삼국시대를 공부할 때면 "요하 동쪽은 요동, 요하 서쪽은 요서,
그리고 우리나라를 행해 쭉 뻗은 산동반도." 하면서 삼국지를 벗삼아 해아 할 공부는 하지않고
하루종일 삼국지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기에 다시 한번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산동반도,
시나브로 장보고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일었던 때도 바로 그때부터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이번 나의 이런 터무니없고 계획성없는 장보고 유적답사에 대해 나의 벗들이
쉽게 동의해 줄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날 믿어주고 따라와준 네명의 벗들이 있었기에
우리들만의 장보고 유적 답사를 떠날수 있게 되었다.
모두들 쉽지 않은 결정을 한 후 나도 모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난 이번 우리들의 장보고 유적답사에 대해 장보고가 우리들을
산동반도로 부른거라 생각한다.
아니, 우린 그렇게 믿고싶다. 그렇게 믿을것이다.
산동성은 일산일수일성인(一山一水一聖人)이라 하여 중국역사의 축소판이다.
일산은 태산을 일컬음이요, 일수는 황하를 말하며,
일성인은 공자를 말한다. 그러니 산동에 오면 중국역사의 모두를 보는 것과 같다.
다만 공자의 탄생지인 곡부를 가지못했던 것이 아쉽다.
중국의 최대 휴양도시로 이름난 청도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면서 노산으로 향했다.
노산은 한나라 때 처음 건립하였다는 태청궁이 있는 곳으로 도교의 성지였다.
태청궁에는 천지신을 받드는 삼궁전, 중국의 삼황을 받드는 삼황전, 옥황상제를 모시는
삼청전 등이 있었다. 이곳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을 보면서 중국의 주술적인 민간신앙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지만 신비감도 들었다. 검은 도복을 입고 문앞에 졸고 있는
도인이 우스꽝스러워, 내가 가서 사진 찍자하니 앉은 채로 씩 웃는다.
선교(도교)를 신봉한 모습이 저럴까?
1990년 5월 고속도로 공사중 발견하여 전시하게 되었다는 고차 박물관을 관람하고,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3시간을 달려 밤9시 태안시에 도착하였다.
숙소를 정하고 세면을 하고 나니 10시가 넘는다. 집으로 전화를 할까하니 한국시간으로 11시가
넘는 시간이 되었다. 태안(泰安)은 인구 530만의 중국에서는 작은 도시에 해당하지만,
황하문명 발상지로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그것은 1545m에 불과하지만 광활한 대지에
우뚝솟아 오악독존(五岳獨尊)이라 하여, 천하 제일의 명산으로 꼽는 태산이 있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10분을 올라 태산에 우뚝 서니 의미가 남다르다. 태산은 진시황 이후
한 무제, 당 현종 등이 봉선의식을 해온 곳으로 김정일도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곳을 왔다 갔다고 한다.
산동성 박물관은 우리나라 박물관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여느 박물관과 다름없이 특징은 없었다.
박물관에서 보는 역사는 역시 죽은 역사이다. 모든 유물과 유적은 현장에 살아 있어야 하는데
박물관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박제품이 아닌가? 다만 살아있는 것은 경비병(?) 뿐이었다.
깜찍하고 귀엽게 생긴 것이 웃으며 모델 노릇을 톡톡히 한다.
한.중 친선을 선언하고 유물앞에서 악수를 하며 사진을 찰칵했다.
이어 황하대교를 슬쩍 돌아오는 것이었지만 중국 역사의 어머니격인 황하를 보고,
농업용 우물을 파다 발견하였다는 제경공순마갱과 강태공사당을 관람하였다.
228필의 말을 순장하였다고 하는데 밖을 향하여 힘차게 달리는 듯한 자세로 순장되어 있었다.
전설적인 강태공은 춘추 전국시대 제나라 초대 왕으로 강태공의 묘는 찾지 못하였으나,
그의 사당은 모자와 옷을 묻은 의관총과 함께 있었다. 강태공의 셋째 아들은 신라에 표류하여
우리나라 평해 구(丘)씨의 시조가 되었다 하여, 평해구씨 종친회의 기념비가 있었다.
유방시에서의 셋째날 밤은 노상주점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흰까운을 입은 노상 안마사는 손님이 없어 아쉬운 듯 늘상 우리만 바라본다.
넷째 날, 등주수성에 이르자 전남대학교 어느 한교수님의 여담이 생각난다.
"산동성은 행정구역상 명칭은 용구이다. 산동성의 등주는 용각에 해당하므로
방어시설이 있는 곳으로 등주성이 있다. 천진두는 용의 코에 해당하며,
영성시는 용의 입, 법화원이 있는 곳은 용수,
즉 용의 수염에 해당되는 곳이다. 장보고는 법화원을 산동반도의 가장 중요한 자리는
용의 수염이 있는 곳에 건립하였다. 중국문화의 뿌리는 산동성에 있다.
중국문화의 어머니는 황하이며,
아버지는 태산이다. 그러므로 그곳을 다녀온 사람은 곧, 중국문화의 모든 것을 본 것이다. "
등주성은 산동반도의 방어진지이면서 노철산수로의 출발지에 해당된다.
역사적으로 서해 횡단항로가 발견되기 전, 즉 항해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연안항로를 이용하였는데
연안을 따라 계속 올라가 요동반도와 산둥반도가 가장 가까운 지점을 횡단하였다.
이것이 노철산수로라는 것이다. 이후 항해술의 발달로 서해 횡단항로가 개발되었으며,
장보고는 이 횡단항로를 이용해 해상무역을 독점하였다.
등주성은 역사적으로 한무제가 고조선을 칠 때, 수·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수군을 발진시킨 곳이며, 발해 장군 장문휴가 수군으로 공격하여 점령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왜구가 가장 많이 출현했던 곳이기도 하여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공을 세운
척계광의 동상이 지금도 바다를 호령하듯 서 있었다.
중국에서의 척계광은 고려 후기 왜구를 물리쳐 국민적 영웅이 되어 조선을 개국하였던
이성계와 대비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제 적산 법화원을 답사하면 우리의 여행이 거의 모든 일정을 마치게 된다.
법화원은 장보고와 신라인들의 숨결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 동안 답사하였던
중국의 역사와 문화는 모두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이었지만, 법화원에서 장보고의 활동과 함께
신라인들의 중국에서의 활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한 맛뵈기였다.
적산 법화원과 관련된 내용은 그 동안 많은 서적이나 사진을 통해서 접해왔다.
하지만 직접 보고, 체험하고, 느낀 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다름이 있으리라.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가리라.
장보고가 적산에 법화원을 세운 것은 항해의 안전을 비는 관음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곳에 법화원을 세운 것은 뒷산이 붉은 색을 띠어 항해의 표시로 삼았을 듯 하지만
붉은 적산은 보이질 않는다. 장보고의 법화원은 관음신앙으로 신라인들의 항해의 안전을 빌고,
또한 무역의 번창을 바라는 사업가로서의 희망도 젖어 있었다.
아울러 법화원은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신라인들의 구심점 역할도 하는 곳이었다.
법화원은 잘 복원되어 있었지만 당시대 유물은 맷돌 뿐이었다.
이런 맷돌은 청해진에도, 제주 법화사에도 있다고 하였다.
법화원은 일본인 스님 옌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록에 의해
중국이 한국과 수교하기 전 일본에 의해 복원되었다고 한다.
옌닌은 수행을 위해 입당하였으나 불법체류자가 되어 추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장보고의 도움으로 법화원에서 3년 정도 머무른 적이 있으며, 장보고가 제공한 선단으로
일본으로 귀국하였는데, 838년7월부터 847년 초겨울까지 약 9년동안의 옌닌은 중국에서의
수행과정과 장보고의 도움, 그리고 귀국하는 행로를 일기로 남겼다.
그것이 『입당구법순례행기』이다. 일본인들은 법화원을 복원하고서 옌닌의 절이라고
기념비를 세웠다. 아이러니 하게도 옌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의해
장보고의 절이었음이 밝혀졌다. 법화원내에 세웠던 일본인들의 비석들은 모두 절밖으로
쫓겨나 법화원 입구 한쪽에 서 있었고 한국인들이 세운 기념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머지 않아 밝혀질 역사적 사실들을 쪽바리의 근성으로 즈그들 멋대로 숨기고 왜곡하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비판만 할 것이 아니다. 기념탑을 오르다 오른쪽으로 산을 보니 산 정상부까지
임도같은 길이 보이는데, 왠 작은 표석 같은 것들이 길을 따라 계속 서 있었다.
얼른 보아도 30여개는 될 것 같은데, 무엇일까? 장보고와 관련있는 것일까?
달려가 확인하고 싶지만 모두들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는거 같아
군중심리에 휩쓸려 그곳을 지나치고 말았다. 후에 그것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일본 승려들이 세운 비라고 했다. 일본 승려들은 아직도 법화원을 많이 찾는다고 했다.
한국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장보고 기념탑'은 석도진이 가장 잘 보이는 법화원의 앞산에 있었다.
기념탑에서 바라보는 석도진은 정말 아름답고 천혜의 반월같은 항구였다.
석도진은 신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항구였다고 하나, 현대식으로 발전한
중국의 다른 항구에 비하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법화원 바로 밑의 신라인들이 살았다는
마을 역시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지금도 신라인의 숨결과 노젖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가끔 보이는 저 사람들은 혹 신라인의 후손이 아닐까?
장보고는 역사적으로 어떤 인물이었을까? 신라 흥덕왕은 관제에도 없는 '대사'로 임명하여
청해진 대사라 부르게 되었다. 장보고는 828년(신라 흥덕왕 3년) 군사 1만명으로
청해진을 설치하고, 서남해 일대의 해상을 장악하고 한·중·일 무역을 독점하여
바다의 왕자로 위세를 떨쳤다.
이에 대해 미국의 역사학자 라이샤워는 장보고를 '해상제독(총독)'이라 칭하여 세계사에 빛나는
인물로 꼽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궁복(弓福), 삼국유사에 궁파(弓巴)라고
기술되어 있어 장보고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중국측 기록인 두목(杜牧 803-852)의 『번천문집(樊川文集)』에 장보고(張保皐)라는
이름이 보일 뿐이다. 장보고의 활동무대나 항해로는 엔닌의 기록이 전해주고 있다.
왜 우리의 기록은 없는가? 우리는 많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정적에 의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는 김구 선생이 심증은 가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정적에 의해 암살되었고,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도 같은 민족 박상실이란 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장보고는 846년 한 때 자신의 부하였던 염장에 의해 피살되고, 반란의 주모자로 낙인찍혀
모든 기록은 없어졌다. 청해진의 주민은 851년(신라 문성왕 13년) 벽골군(현 전북 김제군)으로
강제 이주당하고 청해진은 혁파되었다. 청해진의 모든 사람이 역적으로 몰린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요, 패자는 말이 없는 것이다.
청해진(장도)의 정상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주변의 신지도, 조약도, 고금도로
둘러쌓인 크지 않지만 해상의 요지에 있는 작은 섬임을 알 수 있다. 과연 장보고는 장도라는
작음 섬에 1만명에 이르는 군사를 거느리고 청해진을 설치하였을까?
청해진의 정확한 위치도, 규모도 추정일 뿐이다.
다행히 1991년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발굴을 하고 있어,
성터와 목책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장보고의 무덤일줄도 모른다는 목없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장도에서는 거대한 우물(샘)이 발견되므로써 청해진의 위치와 규모가 서서히 밝혀져 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 성산산맥의 최동단에 위치하여 성산두(成山頭),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요
하늘의 끝이라 하여 '천진두(天盡頭)'라는 곳,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진시황의 불로초 이야기가 전하며, 해신과 관련된 전설이 전하는 곳이다. 또한 백제정벌을 위하여
소정방과 13만의 수군이 출항하였다는 곳이다.
보고싶은거 다 보고 가고싶은 곳 다 가면서 바쁘지 않은 답사를 마치고, 배에 오르니
장보고의 후예들이 우리 말고 또 있다. 300여명에 이른다는 보따리 무역상들이다.
10박11일의 유적답사였지만 배타는 시간을 빼면 유적답사는 겨우 9일이었다. 계획에 비해
너무 짧은 여정이었다.
난는 늘 그를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으로 그를 느끼고 싶었다.
그가 가진 꿈과 희망, 그가 겪었던 아픔과 좌절, 그가 사랑했던 바다와 사람,
조국을 함께 호흡하고자 했다. 예전에 보았던 KBS 역사스페셜 다섯편이나 되었던
역사 다큐 '해신 장보고'를 보면서 장보고가 되어 그가 자취를 남겼던 모든 곳에 마음으로
함께 움직였다.
메마른 산둥반도를 버스로 하루종일 내달리면서도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이곳에 목숨걸고
상륙하여 고달픈 삶을 끈질기게 이어갔던 우리 조상들을 생각했다. 다른 중국 지역보다 훨씬
한국적 입맛에 가깝게 변한 식당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들을 생각했다. 좋은 시설의 배로
거의 멀미 없이 중국 땅에 도착하면서도 배멀미로 구토해서 축축해진 옷을 털며
오직 무사히 당도한 것만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그들을 생각했다.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과 현재 역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중학교시절 국사선생님께서 자주 말씀 해주셨던 말씀을 적으며
넋두리를 마치려 한다.
"역사를 보라. 역사 속에서 살다간 사람들을 보라. 지금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비록 시대는 달라도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 그들이 추구해 간 이상을 보면 우리가 가야 할 방향도 그 속에 보인다.
역사는 인간의 삶에 대한 따뜻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