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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о 엄덕열의 좋은 하루 .·´″°³о ====
 
 
 
카페 게시글
◈◈ 소설 스크랩 2008 농민신문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작/소 / 김영중
좋은 하루 추천 0 조회 97 09.05.07 01: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새벽 비명소리에 눈을 떠보려고 기를 썼다.
세상에 나오기 전 모태 속에 거꾸로 누운 채 들었을 수도 있는 비명.
어머니의 목청은 경악에 차서 덜덜 떨렸다.
나는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려 손사래를 치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섰다.
어머니가 얼어붙은 듯이 선 채 쳐다보는 쪽으로 눈을 돌리던 나는
헉 하고 신음을 들이삼켰다.
마당 한켠 외양간에 괴변이 벌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발을 동동 구르다 못해 울음을 내흘렸다.
나는 눈을 비비고 주시하다가 대청마루를 내려서서 한 발짝 다가섰다.
어스름빛 속에 황소가 앞다리를 들고 선 채 숨져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혀를 빼문 황소의 외로 비틀린 목엔 밧줄이 세 겹이나 친친 감겼고
그 밧줄은 키 높이의 굵직한 가로장에 묶여 있었다.
꿈인지 생신지 혼동스런 광경이었다.

“시상에, 대체 저기 무신 일고! 장골 서넛이 나서서 부러 매달라캐도 에럽시럴 저 꼴을 지눔 혼자서 저랬단 말가? 아이구, 저 쌔빠질 눔이 뭣 때미 저런 흉한 짓을…….”

공포와 의문이 가득 어린 눈으로 어머니는 황소와 나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일이 힘들어서 자살이라도 한 건가, 실연이라도 당했나?”

나는 짐짓 흰소리를 해보았으나 속은 영 꺼림칙했다.
어젯밤에 귀향한 뒤로 왠지 낯설고 불편한 마음으로 뒤숭숭했는데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저런 해괴한 일이 벌어지다니,
혹시 나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어머니도 그런 낌새를 챘는지 푸념을 거두고는 구부정한 허리를 애써 펴며 사립문 쪽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아니, 웬눔의 인간이 고삐를 저게다가 매놓았단 말고, 아이구 오매.”

악몽이 떠올랐다.
지난밤엔 어수선한 심정에 늦도록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소가 뿔을 세운 채 부릅뜬 눈에 불을 내뿜고 씩씩대며 쫓아왔다.
나는 내달렸으나 다리가 흐느적거리고 발이 끈끈이에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소는 나를 적으로 여기고 곧 죽이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소가 뿔을 흔들며 맹렬히 달려드는 순간 쇠뿔이 쑥쑥 자라나
소의 온몸을 휘감아서 철장처럼 가두어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니 소는 고통에 가득 찬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뿔을 만지는 찰나 아버지의 얼굴을 한 소는 나 자신으로 바뀌었다.
내 머리의 뿔이 내 몸을 마구 찔렀다.

나는 핏발이 선 소의 눈을 슬쩍 쳐다보았다.
무슨 한이 서린 것 같기도 하고 나를 탓하며 비웃는 듯싶기도 한 눈.
소의 눈은 점점 크게 확대되며 말하고 있었다.
네가 귀신을 달고 와서 해코지한 거야.
네가 제대로 살지 못하고 서울서 노닥거리다가
결국 패배해서 병든 몸으로 내려왔기에
내가 대신 귀신과 싸우다가 이렇게 원통히 죽은 거야…….
난 할 말이 없어 눈을 내리깔았다.

사랑채에서 아버지의 목쉰 신음소리가 끊어질 듯 들려왔다.
나는 발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서 방문을 열었다.
구리터분한 악취가 확 끼쳐왔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서 엉거주춤 앉아
굵은 뼈만 두드러지게 남은 아버지의 손을 쥐었다.
짧게 깎은 흰머리 밑의 고랑 닮은 주름살,
거무튀튀한 안색에 잿빛이 덧섞인 아버지의 얼굴은 해골과도 같아 보였다.
 아버지의 깊숙이 팬 눈은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간절히 묻고 있었다.
황소는 집안의 대들보와 같은 존재였다.
적어도 아버지에겐.
나는 끈질기게 침묵을 지켰다.
아버지는 통증을 호소하며 약봉지를 가리켰다.
 알약을 겨우 삼킨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이부자락을 자꾸 들치려 했다.
나는 어젯밤 늦게 어머니가 하던 대로
아버지의 아랫도리를 벗겨내린 뒤 기저귀를 갈았다.
가죽만 남은 앙상한 엉덩이가 짓물러 피고름이 맺힌 것을 보다가
나는 소의 죽음을 알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크게 뜨인 눈에 내가 감지할 만한 어떤 의미도 담지 않은 채
의외로 조용하게 받아들였다.
얼마 후에야 나는 문득 소의 눈과 아버지의 눈이 어딘지 닮았다는 점을 느꼈다.
그러나 내가 비감을 받으려는 순간 아버지는 눈을 감아 버렸다.

창호 아재가 퍼렇게 날 선 낫으로 밧줄을 끊자
황소의 육중한 사체가 바닥으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소를 뒤안으로 옮기려 했으나
힘이 부쳐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해체하기로 했다.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긴 해도 정작 힘깨나 쓸 만한 이는 몇 안 되었다.

창호 아재가 중심에 자리잡고 몇몇 사람이 소의 사지 쪽에 붙어앉아 칼을 들었다.
소의 목줄을 따고 가죽을 벗겨내는 데만 꽤 시간이 걸렸다.
불그죽죽한 살과 가죽이 분리되며 내는 쩌억쩌억 하는 소리는
 사람들에게 잔치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풀이 죽고 울적해서 땅으로라도 꺼지고 싶었다.

“벨일도 다 있제. 그리 순하던 눔이 웬 발광을 했을꼬.”

“쇠고삐를 그리 맨 사람의 불찰이긴 허나 고건 항다반사니. 참 해괴스런 변이로세.”

마루에 걸터앉은 노인네들이 두런거렸다.
내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어린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속으로 나를 주목하는 것만 같았다.
도끼로 목과 네 다리를 잘라낼 즈음,
그동안 잠잠하던 사랑채에서 아버지의 신음소리가 음울하게 들려왔다.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낼 땐
소의 울음 같은 소리로 변했다.
피를 잔뜩 묻힌 사람들이
소의 간을 꺼내 소금에 찍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허공을 멍하니 쳐다본 채
입을 꽉 다물고 끙끙거리며 신음을 삼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결코 자신의 고통이나 고뇌를 과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젠가 소여물을 썰다가
작둣날에 검지손가락을 잘렸을 때도
첫 비명만 짧게 지르곤 잠잠해서
어린 나는 착각인가 했었다.
그간 오래도록 위장이 아픈데도 꾹꾹 참아 넘기다가
끝내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서야 자리에 누운 것이었다.
스스로 그렇게 살아서 그런지
처자식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실 한 오라기라도 낭비하는 게
심히 못마땅한지
되풀이해서
마치 소가 새김질이라도 하듯 나무라곤 했다.
그런 아버지가 미소를 머금고
유일하게 너그러이 대하는 존재는 소였다.
소는 아버지의 재산이자 허물없는 친구였다.
가장 싱그런 풀을 골라 정성들여 쇠죽을 끓였으며
자식의 머리라도 빗기듯 소의 털을 몇 번이고 다듬어 주었다.
소는 늘 뱃구레가 통통하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아버지는 즐거울 때나 슬플 때 처자식보다는
소와 얘기를 나누며 감정을 추슬렀다.

나는 땀이 돋은 아버지의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몇 번 흔들다가 그대로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나는 소보다 못한 놈이었다.
어릴 땐 송아지보다 못난 놈이었을 것이다.
일곱 살 때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얼마나 귀여워하던지
나는 처음으로 질투의 감정을 느꼈었다.
그 녀석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을 때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의외로 아버지는 내 손에다 귀한 사탕을 쥐어 주는 것이었다.
더 자라서도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나무를 잘 하지도 못하고
좋은 소꼴을 많이 베지도 못하고
칡뿌리 같은 것을 끈질기게 캐어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팽이나 새총 따위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동화책이나 읽는 데 몰두했으므로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일곱 살의 어느 겨울 밤,
 아버지가 방문을 빼꼼히 열고 향긋한 군고구마를 가져다 주었을 때
나는 포르노 잡지를 보며 자위행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노여워하긴커녕 빙긋이 웃었다.
 나는 자책감에 그 미소를 비웃음으로 느꼈지만,
혹시 자식이 생리적으로 건강하게 성숙한 데 대한 대견함이 아니었을까.
마치 소가 발정을 하게 되면 더 애지중지하듯이.
아버지는 내가 농사를 지으며 살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척박한 땅을 갈다가
일생을 다하는
아버지의 소처럼 되긴 싫었다.
어쩔 수 없어 농고에 진학하기는 했지만
일찌감치 술과 담배에 빠져 희득거리며 도시의 삶을 꿈꾸었다.
아버지의 지게작대기에 얻어맞는 것도
씁쓸한 환희라면 환희였다.
학교를 마치자 아버지가 정성스레 키운 중송아지 판 돈을 훔쳐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기차를 탔다.

아버지는 통증을 견디느라
끌어모은 여린 힘으로 한숨을 휘휘 내쉬곤 했다.
알맹이는 다 소진되고 껍데기만 남은 아버지.
그때 차창으로 본 메마르고 황량스럽던 그 논밭에서
아버지는 소와 함께 매일 일하고 또 일했을 것이다.
질긴 쇠심줄을 자르느라 용을 쓰는 소리,
살덩이를 잘라내며 흘리는 감탄,
도가니 쪽을 달라고 떼쓰는 아낙,
등심을 청하는 아저씨,
꼬리를 가져가서 곰탕이나 끓여 먹었으면 좋겠다고 웅얼거리는 노인네의 목소리…….
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키운 마지막 소가
 한번 울어 주길 바라기라도 하듯
움머- 하고 목청을 울렸다.

쇠고깃국을 끓여 저녁을 먹었다.
어머니는 사랑방에 들어가서
아버지 입에 억지로 국물 몇 술을 흘려 넣곤 나오며 혀를 끌끌 찼다.
 내 국그릇에 고기를 듬뿍 넣어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곤
자신도 후룩후룩 어기차게 드셨다.
한여름 햇볕에 타서 갈색으로 변한 피부건만
어머니의 얼굴과 팔은 꺼칠하고 허약해 보였다.
몇 해 전에 가벼운 풍을 맞은 뒤로
말이나 몸놀림이 부실해진 편이었다.
다반사로 듣던
“소보다 못한 년”이란
아버지의 핀잔이 그날 상황엔
어찌나 기가 막히고 분하던지 쓰러지고 말았단다.
수저를 놓고 하늘의 잔별을 올려다보며
잠시 한숨 돌리는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아버진 저렇게 그냥 두실 겁니꺼?”

“안 그라모 우짜라꼬.”

“병원에서 수술을 받든지 치료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꺼?”

“휘유, 그랄 형편이 돼야 그래볼 꺼 아이가. 너무 위중해져서 칼을 대고 어쩌고 다 소용없응께 병원에서도 그만 모셔가라 안카나마. 느그 아배도 병원 싫으니께 어서 나가자카더라.”

“그래도…….”

나는 무슨 말을 더할 입장도 면목도 없었다.
 어머니가 내 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누구라꼬 속이 안 상하것노.
이자 고만 하루라도 빨리 가시는 기 당신한테도 편한 노릇인기라.
내도 또 운제 풍을 맞아 꺼꿀질지 모리는 일이고,
생각하모 마 세상 사는 기 아이다.
니라도 좀 장남답게 정신을 곧게 채리고 살아서
집안 꼴을 세왔으먼 안 좋것나.
아이 참, 그란데 니는 아무 기별도 없이 요참에 우찌 내리왔노?”

“그냥요.”

“그냥이라? 무신 일이 있는 건 아이제?”

나는 모깃불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그냥 앉았다간 걱정거리가
머릿가닥이라도 낚아챌 듯
서둘러 마루에서 내려서 빈 그릇을 챙겨 부엌으로 갔다.

막막한 심정이었다.
차라리 내려오지 말 걸 그랬군, 하는 생각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또 어떻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
당장 역전이나 종로의 컴컴한 지하도로 나가 새우잠을 자야 할 형편이 아니었던가.

사립문이 흔들리더니 어떤 여자가 조심스런 걸음으로 들어왔다.
 “오빠” 하고 부른 여자는 말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머니가 내다보았다.

“선이 아이가. 이 밤에 니가 웬일고?

“정우 오빠 왔다캐서, 이거 줄라꼬예…….”

“강냉이가 참 토실하구마. 느그나 묵지 그라나.”

“오빠 운제 왔어예?”

머리카락을 치렁하게 길러내리고 얼굴이 해쓱하고
서른이 가까울 텐데도
아직 소녀 때처럼 여윈 선이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제 밤에 안 왔나.”

“오빠 잘 지냈다캅니꺼?”

“니가 직접 물어 보라모.”

선이의 눈이 나를 흘끔 곁눈질했다.
언제라도 촉촉이 눈물이 어려 있던 큰 눈,
송아지같이 순하던 눈이 어쩐지 변한 성싶었다.
여름밤이라서일까,
검은 눈동자에 모종의 광기를 띤 야릇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오빠, 삼년만에 보네. 와 인제사 왔노.”

“잘 지냈나?”

“하모. 뭣에 붙들려서 그랬노. 서울이 그리도 좋더나?”

“좋기는…….”

“오빠 뒤쪽에 서울 귀신이 서서 웃고 있네.
노란 얼굴에 피를 흘린다.
오빠 정기를 빨아먹고 넋을 홀리는기라.
저 객귀한테 놀라서 소가 지 목을 훌쳤다쿤께.
 오빠 눈엔 안 보이제?
내 눈엔 다 보인다.
소 눈에도 보였을기다.”

“……”

“선이 니 지끔 무신 흰 사설을 늘어놓노.
미친 가스나 아니랄까이.”

어머니가 혀를 끌끌 찼다.
선이는 돌아서더니 걸음소리도 없이 나갔다.

“그년의 인생살이도 참!
갸가 애릴 적부텀 정신이 쫌 허하고 묘한 소릴 해사꼬 하더니만 결국……
아매 낼모레 터골할매 밑에 내림굿을 받고 신딸이 될 모냥이더라.”

“결혼했다고 하더니만…….”

“반년도 못 살고 안 쫓겨왔나.
 시집간 년이 사내 앞에서 한사코 속곳을 안 벗을라캤다나 뭐.
겨우겨우 아를 하나 낳긴 했는데
병신인 데다 얼마 안 가 죽었다카더라.
사내가 무작스러워서 맞기도 많이 한 모냥이더라만.
저래갖고 살림을 온전히 할 수가 있나. 쯧쯧.
그란데 니 참맬로 어데 아픈 거는 아이가?”

나는 고개를 흔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심란스러워서 밖으로 나갔다.
간간이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올 뿐
골목이고 태정마당이고 고적했다.
노인네 한둘이 골목 어귀 어둑한 다리 가에 말없이 유령처럼 쭈그려 앉았을 따름이었다.
어릴 때 도깨비불이 돌아다닌다고 믿었던 강 건너 당산 기슭도
까무룩이 어둠에 묻혀 있었다.
가문 논바닥에서 힘겹게 자라고 있을 벼이삭의 신음이 들려오는 듯,
심경 탓인지 개구리 울음마저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정자나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예부터 근동에서 가장 연륜 깊고 우람하고 수려한 정자나무라고 해서 마을 이름도 정자리였다.
추억 속의 여름밤엔,
하루 일을 마친 남녀노소가 돗자리 위에
저마다 모여 앉아 반딧불이를 바라보며 정담을 나누고
가지각색의 웃음소리가 흘러넘쳤다.
하늘만큼이나 높고 청청한 나무를 타오르고 놀며
옛 선조들의 인생사에 얽힌 희비애락을 듣고
미래의 꿈을 펼치던 전당이 아니었던가.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고 활활 타오르던 달집을 구경하던 성소.
 그런데 이젠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적했다.
나무는 그대로 서 있는데 인간만 변해서 와 있는가.
그때 그 넘치던 혈기와 희망은 다 어디로 빠져나가 버렸는가.
그 꿈과 열정은 고작 마귀가 꾸며둔 요지경 속에 불과했던가?
그 마귀는 내 무명과 욕망이 만들어낸 도깨비불이 아니었을까.
패배할수록 중독된 듯 더욱 더 탐착하여
스스로 요마의 환각 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식어 버린 재 위의 피 묻은 몽당빗자루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이럴까.

소 판 돈으로 야간대학에 입학하고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뛰어다닐 때만 해도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하면,
마의 도시는 개인을 너무 많은 희망 속에 빠뜨리고
제멋대로 만든 룰로 판돈을 긁어 가는 뒷골목의 도박판 같다.
아무리 기계처럼, 아니, 쇠로 된 소처럼 일을 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내가 꼭 소만큼 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이 소처럼 일을 해야만 하는가?
난 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떠나온 게 아니던가.
누굴 위해, 뭣 때문에, 좀 생각도 해야 하지 않는가?
좀 즐기기도 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뭐 주지육림에 빠져 희희낙락했다는 소린 아니다.
소주와 삼겹살에 유행가 몇 곡이면 흐뭇해 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는 뼈빠지게, 논밭의 소보다 더 노심초사하며 일했다.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휴학과 복학을 번갈아 하며 2학년을 겨우 마친 뒤
그만둬 버린 건 잘한 일인지 실수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피땀 밴 돈이 잦은 휴강으로 허비되는 게 속쓰렸다.
군대 갔다 온 후엔 집에 조금씩이나마 송금을 해야 했다.
적어도 훔친 소값은 갚아야 자책감이 들지 않을 테니까.
그때부턴 한 달 벌어 한 달 버티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희망은 점점 닳아 갔고
사람은 도시의 소가 되어 갔다.
쫓기는 심정으로 한 여자와 동거를 했다.
나 자신이 마멸돼 가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자식을 얻으면 나를 넘겨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여자는 내게서 희망을 보지 못했던지
소리도 없이 떠나 버렸다. 지난 겨울에.
나는 불기 없는 방에서 각혈을 했다.

한 차례 바람이 일자 아름드리 고목의 이파리들이 추억을 속삭이듯 소리내며 떨었다.
나는 축대 위로 올라서서 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거친 껍질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아이들은 그 껍질을 붙잡고 나무를 기어올라
가랑이진 옴팍한 틈바구니에서 몽상을 속삭였었다.
엄마의 자궁 같던 그곳.
이제 보니 이백 살이나 된 노파의 샅처럼 휑뎅그렁했다.
팔을 벌려 보듬어 보았다.
 반도 채 안기지 않았다.
팔을 돌려 또 껴안았다.
내 가슴과 나무의 가슴이 꼭 맞닿았다.
어쩐지 나무의 속이 뻥 뚫린 듯 허전한 느낌을 주었다.
 손바닥으로 꺼칠꺼칠한 껍질을 쓰다듬으며
 돌아 밑둥치 쪽에 난 구멍을 보러 갔다.
구렁이가 산다고 믿은 무서운 구멍. 우뚝 멈춰 섰다.
그 구멍 옆에 흰옷 차림의 선이가 옹크려앉아 있었다.
어린 어느 날 선이는 구멍 속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방울과 거울을 꺼내어 들고
단발머리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었다.

말을 걸어도 선이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강녘만 내동 바라보았다.
나는 맞은편 돌 위에 앉았다.

“세상이 허망타. 오빤 안 그러나?”

“허으…….”

“매번 오빠는 날 꼭 첨 보는드끼 보더라. 예전부터. 난 오빠를 몇 년 만에 만나도 늘 보던 듯했는데.”

“…….”

“난 오빠가 꼬맹이 적부터 한 것 다 생생히 기억한다. 오빠는 내 기억 아무것도 없제?”

나는 묵묵히 선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늘 좀 겁먹은 듯한 그 표정을 볼 때면
애틋함을 느끼면서도 안 보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했던 얼굴.
나는 수시로 그애의 눈길을 등뒤에 느끼면서도 무시해 버리곤 했다.
그애는 우리와 함께 살면서도 우리와 절연된 존재였다.
그러나 뇌리에 깊이 박힌 기억이 하나 떠오르긴 했다.
도시로 떠나기 전날 오동나무집에서였다.
원래 번듯한 대갓집이었는데 장손이 사고로 죽은 뒤 다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폐허가 된 집이었다.
고즈넉한 한낮 넓은 뜰에 내리는 보슬비에 붉고 흰 매화가 떨고 있었다.
그 꽃잎 같은 선이의 입술이 말했다.

“오빠 먼길 떠날라카제? 숨겨도 다 안다. 제발 가지 마라!”

“닌 뭘 모린다. 그냥 가만 있어라.”

“안다! 다 뵌다. 오빠는 제 몸속 알맹이 다 뺏기고 늦가을 허사비맨키 서 있게 될끼다.”

“헛소리 마라. 미친 꺼병이 같은 게.”

선이의 눈에 슬픔이 어리고 온몸이 떨렸다.
나는 언짢았으나 미안스럽기도 해서 손을 잡아 주었다.

“그때 오빠가 따준 꽃 기억나나? 말라서 보기 싫어졌을 때 나무 밑에 묻어 뒀다.”

선이가 작게 속삭였다.
난 그건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선이가 부르짖던 허사비가 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정말 삿된 귀신이 나도 모르는 새 허한 심신 속에 들어온 게 아닐까 싶어
으슬으슬한데 선이가 불쑥 말했다.

“오빠, 나 어째야 할꼬? 내사 마 허사비가 된 것 같다. 나 무당 되기 싫다.”

“안 하모 될 거 아이가. 싫은 일을 와 하노.”

“안 해도 되몬 얼매나 좋겠노. 그치만 신령님도 노하시고 울어매도 구박하니 어찌 피하것노.”

“아지매까지? 아재는 뭐라카시노?”

“아부지가 무신 힘이 있노. 괜히 분란만 생기지.”

선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음이 어둡고 무거워졌다.

“오빠, 내 한번만 안아 줄 수 있나?”

내가 어깨를 감싸자 선이는 시름겨운 양 가만히 있었다.

농약 분무기를 어깨에 메고 논배미로 들어섰다.
미열이 있었지만 신경을 쓸 만한 형편은 안 되었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나,
아직 병석에 눕지만 않았을 뿐이지 이런저런 지병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견뎌내는 어머니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내색하지 않고 보건소에서 타온 약을 숨겨두고 먹는 것으로 자족했다.
어머니는 내가 며칠 쉬다가 다시 서울로 복귀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은 나도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머니 자신이 구부정한 등허리에 큰 통을 메고 나서려는 것을 만류하고
허겁지겁 집을 나섰던 터였다.

아직 여물지 않은 벼의 낟알들은 젖 같은 액체를 머금고 있었다.
파르무레한 잎 사이에 숨은 메뚜기의 눈이 플라스틱 안경이라도 쓴 것 같았다.
군데군데 병과 벌레에 시달린 벼이삭들이 누렇게 시들고 있었다.
곰팡이에 의해 거무죽죽하게 변한 이삭이 아버지를 연상시켰다.
통에 달린 손잡이를 젓자 분무기에서 약물이 안개같이 뿜어져 나왔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독한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숨을 죽이며 계속했다.
 멀리 보이는 넓은 논엔 발동기를 사용해 몇 집이 어울려서 약을 뿌렸다.
하지만 외떨어진 단마지기 논밭은
직접 들어서서 이삭 하나하나에 연장을 가져대 대고 뿌려줘야 했다.

한낮의 해가 사막처럼 뿌연 하늘을
이글이글 태우고 돌며 따가운 빛을 쨍쨍 내리비쳤다.
헛발을 떼놓자 짊어진 금속 통이 출렁이며
뜨끈뜨끈한 등짝에 불쾌한 압박을 더했다.
숨이 훅훅 막히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둑에서 내려다볼 때는 크잖던 논이 한가운데 서 있자
노랗게 끓어오르는 소금바다 같았다.
가슴 한쪽이 뜨끔뜨끔했다.
나는 손을 귀로 가져가 입마개의 걸이 하나를 풀었다.
열기보다 더 독한 약기운이 머릿골을 띵하게 했다.
입을 다문 채 고랑을 헤어 나갔다.
통증을 참느라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잠시 쉬었다가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겨우 한 마지기도 건사하지 못하고
중간에 주저앉는다는 건 가당찮았다.
 아버지가 비웃을 성싶었다.
고개를 흔들어 입마개를 떨궈 버렸다.
그게 농약 냄새를 막기 위한 것인지
내 입 속의 병균을 막기 위한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약 성분이 폐 속 깊이 들어가
병균을 죽이든지 또는 나 자신을 죽이든지.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나는 헐떡거리면서 분무기의 손잡이를 세차게 움직였다.
 미세한 약물 방울이 세차게 퍼져 나가며 얇은 막을 형성하고
 그 위에 햇볕이 반사돼 무지개꽃을 피웠다.
그곳에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 비치고
건장한 아버지가 비치고
객지에서 떠돈 나의 모습들이 어른거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이제 한 이랑밖에 남지 않았다.
가슴 속이 메슥메슥하며 구역질이 치올랐다.
 괴로움 속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누런 흙물이 출렁이는 논에 오리떼를 몰아넣고,
나는 밀짚모자를 쓴 채 방초가 흐드러진 둑길을 한가로이 걷는다.
 걷어붙인 다리에서 거머리를 떼어 던지며 걸찍한 욕을 뱉는다.
 둔덕에 매어둔 소가 ‘움메’ 하고 운다.
눈을 들자 저 멀리 논둑길을 걸어 흰 머릿수건을 쓴 선이가
새참 바구니를 이고 온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버티다가 이랑 속으로 무너져내렸다.
잠시 검은 비가 흩뿌리는 듯했다. 번갯불도 치고.

밤이었다.
정신은 들었지만 속이 자꾸 메슥거리고
암울한 기분을 주체할 길이 없어서 밖으로 나갔다.
달이 먹구름 속을 힘겹게 헤쳐 나가며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반쯤 열려 있는 문짝을 흔들어 기척을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깜박거리는 전등 빛이 한켠에 진열된 잡화와 여분의 공간에 마련된 목로를 비추고 있었다.
방 안에서 실랑이라도 하는 듯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미닫이문이 열리더니 외팔이 아재가 상반신을 내밀었다.

“왔는가. 약 치다 중독됐다카더이 좀 괜찮은가?”

“예. 막걸리나 한잔 마실까 하고…….”

덕산 아지매가 다리를 약간 잘룩거리며 나왔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심이 어린 그런 인상이었다.
 
 
그녀는 행주로 목로를 훔친 뒤 막사발과 김치부터 내놓았다.

“아재도 한잔 드실랍니꺼?”

“먼저 마시게.”

쭈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막걸리가 담겨 나왔다.
선이가 고개만 빼꼼 내밀어 바라보고는 곧 들어갔다.
눈이 그렁그렁했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자 찌르르했다.
 거푸 석 잔을 마시고 앉았으니 덕산 아재가 나왔다.
한쪽 소매가 어깻죽지에서부터 건들거렸다.
반백의 머리는 헝클어지고 깊숙한 눈엔 뻘겋게 핏발이 서 있었다.
잔을 채우자 아재는 떨리는 손으로 들어 천천히 쭉 들이켰다.
아재는 젊을 때 친구가 사는 광주에 놀러갔다가
군인들의 총검에 찔려 팔을 잃었다고 했다.
아지매가 옆에 서서 눈을 흘기며 혼잣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저…… 아재, 그라고 아지매…… 와 선이를 무당으로 만들라캅니꺼. 지도 죽어라꼬 싫어하던데.”

“그라모 좋아서 하는 일이 세상 어디에 있겠노.
다 어쩔 수 없으니 눈 감고 하는기제.
저 가스나가 가마이 있더이 엊그제부텀 별쭝맞게 지랄하고 자빠지네그래.
정우 니가 괜한 소리해서 들쑤씨논 것 아이가?
뒷감당도 못할 거 씰데없이 그라지 마라마.”

덕산 아지매가 지청구를 했다.
덕산 아재는 고개를 수그린 채 묵묵히 목로만 보고 있었다.

“억지로 해서 좋을 일 있십니꺼. 재고하이소 마.”

“아서, 신벌 받을 소리 마라. 인자 쟈한텐 딴 길이 없슨께.”

“사람이 하는 일인데…….”

“누구하고 같은 소릴 하고 있네. 그래, 사람이 하는 일인데, 사람 사는 기 우찌 이리도 팍팍할꼬. 하이구마.”

“주디 닥치고 들가거라 마.”

덕산 아재가 음울한 목소리를 냈다.

“터진 주디로 말도 못하나.
누군 뭐 딸 하나 있는 거 무당딸 만들고 싶어 이랄까.
누구 땜시 요꼴로 사는긴지 모리것네.”

“닥치라이까!”

아재가 눈꼬리를 험하게 찢어 올리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 서슬에 놀라 선이가 뛰어나오고 뒤따라 홍이가 눈을 비비며 흐느적흐느적 걸어나왔다.
선이보다 서너 살 밑인 홍이는 정신지체가 선이보다 한층 심한 데다
목이 외로 꼬이고 팔다리마저 힘이 없었다.
입이 비틀려 늘 침을 잴잴 흘렸다.
선이는 아버지를 불안스레 바라보며 떨고 있었다.
덕산 아재는 심정이 요동치는 듯 성한 손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신음을 흘렸다.
 
덕산 아지매는 더 말없이 눈치를 살피며
홍이더러 방으로 들어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홍이는 알아채지 못했는지 어쩐지 ‘히히’ 웃음을 흘리며
슬리퍼를 질질 끌고 어기적어기적 목로 앞으로 다가와서는
술잔을 들어 마시는 것이었다.
 
그의 손가락은 담뱃진에 절어 싯누랬다.
반나마 주루룩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막걸리를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던 아재는 급기야 잔을 빼앗아 패대기를 쳤다.
그러고는 말릴 새도 없이 꽉 쥔 한 손으로
자기 자신의 면상을 억세게 후려치는 것이었다.
코피가 쏟아졌다.
팔을 붙들자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눈두덩에 퍼렁덩이가 든 채 피를 머금은 입으로
 고개를 젖혀 잘려 버린 팔을 물어뜯으려고 악을 썼다.
방으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아재는 이제 아내도 딸도 몰라본 채 고함을 내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버둥거렸다.
 아지매가 나를 향해 놓아두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재는 울부짖으며 뛰쳐나갔다.
아지매가 구시렁대며 절룩절룩 쫓아가고
그 뒤를 선이가 훌쩍이며 따랐다.
덕산 아재의 빈 소매가 펄렁거렸다.
영화에서 본 외팔이 검객처럼 멋있지 않고 추레하고 으스산한 모습이었다.

“저 사람 또 밤새도록 온 산으로 들로 헤매 다님시러 두견이 울음을 재우것구먼.”

다릿목에 앉아 곰방대를 빨던 노인네가 혀를 끌끌 찼다.

얼기설기한 전깃줄 위로 희끔한 그믐달이 걸려 있었다.
전깃줄에 쳐진 거미줄과 그 가운데 도사린 거미가 무슨 눈처럼 보였다.
 잿빛으로 삭은 초가지붕의 처마 끝에 내걸린 전등에 하루살이들이 뿌옇게 모여들었다.
가까운 뒷산에서 간간이 두견새가 구슬피 목놓아 울었다.

퇴락한 터골할매네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서 내림굿이 벌어질 참이었다.
굿판은 초라하다 못해 을씨년스레 느껴질 정도였다.
우선 신어머니로서 굿을 주관할 터골할매가 반쯤 노망이 나 정신이 흐리마리한 상태였고,
선이네의 형편이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지경이다 보니
굿을 격식에 맞게 준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굿상 중앙에는 돼지머리 대신 삶은 닭이 놓였고
그 둘레에 시루떡, 인절미, 생쌀을 수북이 담은 그릇,
그리고 수박, 사과, 참외, 귤 등속이 줄느런했다.
그릇 사이사이에 빈틈이 많았는데,
한구석엔 가게에서 가져온 성싶은 비스킷과 사탕 따위가 접시에 담겨 있었다.
덕산 아지매가 어디선가 붉고 희고 노란 삼색 종이꽃을 가져와
상머리에 꽂고 향로엔 향을 듬뿍 피워 놓았다.

굿상 앞에 선이가 고개를 수그린 채 다소곳이 서 있었다.
머리를 땋아 올려 쪽을 쪄서 드러난 가냘픈 목이 조금씩 떨렸다.
 연두색 적삼에 분홍치마 차림이었다.
쪽은 나중에 신어미가 쪄주는 거라고
누군가 아는 체하자 바쁜데 됐다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슥한 마당가엔 일을 마치고 온 아낙들과 노인네와 코를 문 어린애들이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덕산 아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지막이 울리던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서서히 고조되었다.
터골할매의 아들인 삼수 아재와 낯이 선 한 중년 남자가
멍석 가장자리에 앉아 악기를 치고 있었다.
터골할매는 댓가지를 쥔 채 먼 허공을 우두망찰 올려다보고 있더니
입을 오물오물해 소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장식도 올리지 않은 백발에 흰 모시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다.

“나아무 나아무 나아무아미타아불……
세상천지 만물 중에 무부모자 없으련만 그 부모는 어데메서 생겨났노.
산에 산신님, 강에 용신님, 고갯마루 서낭신님, 어허이 어허이…….”

할매는 잠시 멍하니 서 있더니
댓가지를 쳐들어 흔들며 신령님의 강림을 기원했다.
그 틈에 선이의 등을 건드렸다.
어릴 적 천장에 온갖 무늬가 빙빙 도는 걸 쳐다보며 앓고 있을 때
할매가 댓가지로 물을 뿌리며 기원하던 기억이 났다.
선이는 몇 번이고 절을 하더니 갑자기 굳은 듯 엎드러져 울음을 터뜨렸다.
섧디 서러운 울음이었다.
서른 해 쌓인 고통과 설움,
자신과 가족의 곤고로웠던 삶을 풀어내듯이 통곡했다.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더 높아졌다.
그렇지 않았으면 민망할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선이의 어깨가 떨리더니 점점 전신으로 번져 갔다.
그렇게 울던 선이가 불현듯 멍석 위를 엉금엉금 기며
‘움머움머’ 하고 소울음을 냈다.
함께 울던 덕산 아지매의 눈이 동그래지고, 사람들은 뜨악한 소리로 숙덕거렸다.

“우짜꼬, 저거 쇠귀신이 실렸는 기 아이가.”

선이는 상 앞에서 방울과 구리칼을 집어들고 발딱 일어서더니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딴 존재로 변한 듯 펄떡펄떡 뛰고 돌며
팔을 쳐들어 흔들면서 괴성을 질렀다.
 ‘움머움머, 음매음매’ 하는 송아지 울음 소리도 끼어들었다.
무아경의 선이 입에서 한 자락 귀곡성이 흘러 뒷산으로 메아리졌다.

“움머허어이…… 울 할아배 동으로 가고, 울 할매는 서로 가고, 성아는 남촌, 동생은 북촌으로 팔려갔네.

으아으으, 요 세상에 귀양와서,
 사시장철 일만 하고 병신 되면 죽여 먹고,
살과 뼈는 발라먹고 가죽으론 북 만들어 어절씨구 치는구나.

놀고 먹는 한량인간 엇쇠,
저리 물렀거라!
남의 피땀 빨아먹는 각다귀도 물러서라!

부귀영화 누구 거냐. 술타령 춤타령에 한세상이 저무는구나.

으어이 으어이, 고난세월 견뎌내면 코뚜레를 벗을 날 언제 오려나.”

선이는 목에 요령을 대어 딸랑딸랑 흔들고
칼로는 뿔 찌르는 시늉을 하며 격렬히 춤을 추었다.
 주체할 길 없는 몸부림 같았다.
한 순간, 선이의 눈이 간짓대 아래 놓인 작두로 향했다.
선이는 날듯이 그쪽으로 갔다.
덕산 아지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년이 으짤라쿠노!
그건 니가 탈 기 아이라쿤께.
저 할무님이 옛날 옛적 생각이 나서 그냥 신이 오리라꼬 구경삼아 갖다논 거라 말따.”

하지만 아지매는 말리러 나서지도 못하고 가슴을 누르며 두려워할 뿐이었다.
선이는 입술을 모아 긴 휘파람을 불고 나서
간짓대를 잡곤 시퍼런 작두날 위에 한 발을 올려놓았다.
구경꾼들의 긴장된 낯빛과는 달리 선이는 달뜬 기색이었다.
선이의 마른 발이 작두날을 딛고 올라선 순간 짧은 비명이 고요를 찢었다.
선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표정으로 작두 위에서 춤추며
전혀 딴판으로 변한 목소리로 공수를 뇌었다.
둘러선 사람들은 두 손을 모으고 비볐다.

그때 어머니가 굿상 앞으로 나서서
꼬깃꼬깃한 종이돈을 꺼내 올리고는
선이를 향해 신수점을 청했다.
선이는 한참 푸념을 주저리더니 위엄을 갖춰 명을 내렸다.
어머니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나를 발견하자 다짜고짜 팔목을 잡아끌고 선이 앞으로 갔다.
그리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손을 싹싹 비벼댔다.
 선이가 야릇한 몇 가지 빛을 머금은 보석 같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눈이었다.
 선이는 영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버린 듯싶었다.
오래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퍼런 작두날 위의 여윈 발.
 섬뜩하기보다는 차라리 가슴이 쓰라렸다.

선이가 내 머리 위에서 방울을 흔들었다.
구리로 만들어서인지 어쩐지 꼭 소의 목에서 울리던 요령 소리처럼 들렸다.
선이는 그 소리에 맞춰 느릿하고 처연한 목청으로 넋두리를 했다.

“어화 으으, 구천세계 쇠신령님 이 몸에 내리시어 착하고 멍청한 우리 오랍 넋에 씐 잡귀신들 다 몰아내솝서.

엇쇠,
굶어죽은 아귀,
걸귀,
떠돌던 객귀,
일에 지쳐 혀빠지고 병에 약 못써 죽은 원귀,
얻어맞고 치이고 죄없이 급살맞아 죽은 영산귀,
사랑 못해 물에 빠진 몽달귀와 손각시,
엇쇠, 이 딸랑이 소리 듣고 물러가라!

엇쇠, 잠귀신, 술귀신, 노름귀신, 난봉귀신, 꼬리빠지게 도망가거라. 우두장군님의 뿔벼락이 친단다!

아으, 심술귀, 배터진 욕심귀, 입찢어진 양아치귀신, 죄다죄다 줄행랑을 놓아라!”

나는 선이의 푸념을 멍한 정신으로 듣고 있었다.
말소리는 귀에 울려왔지만 뜻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나는 다른 상념 속으로 잠겨들었다.
어찌 저리 작두 위에서 사뿐사뿐 춤출 수 있는가.
혹시 선이의 발은 소의 발처럼 변해 버린 것인가?
하지만 한 순간 한 순간 조마조마하고 가슴 속을 저미는 듯 뜨끔뜨끔했다.
작두날이 금방이라도 발꿈치를 썩둑 베고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아버지의 잘린 손가락과 비명이 떠올랐다.
쇠여물을 썰다가 작두에 잘려나간 손가락.
그리고 빈방에 누워 고통을 견디며 신음하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도 어른거렸다.
아버지가 나를 찾고 있을 듯싶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방울소리가 절정을 이루다가 잦아들었다.
물방울이 투둑 떨어져 쳐다보니
선이의 이마와 눈엔 땀과 눈물이 번지레했다.
나는 장구 꽹과리 소리들을 뒤에 남겨두고 굿판을 벗어났다.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다리가 휘청거렸다.
사립문 앞에서 이상스런 느낌이 들어 멈칫하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뛰어들어 아버지의 손을 쥐었다.
 싸늘했다.
불러 보아도 흔들어 보아도 아버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똑바로 누운 채 천정을 보는 아버지의 얼굴은
고통을 참던 흔적인 듯 좀 찡그러져 있었다.
눈물 몇 방울이 떨어져 볼을 적셔도 아버지는 대꾸 없이 깊은 침묵만 지켰다.

밖으로 나섰다.
텅 빈 외양간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버지의 잔잔한 웃음이 들리고 모습이 보이는 듯싶었다.
 그 옆에 송아지가 아장대고 검지가 뭉툭한 손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끝〉
 
 
2008 신춘문예-당선소감
 

 

 

 

 

 

 

 

 

 

 

 

 

 

 

 

 

오래전 고향에서 직접 겪은 일 소설로

나는 농부의 아들이지만 농촌과 농민의 문제엔 큰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온 이후
간혹 한번씩 다녀오는 것이 고작이다보니 마치 이방인과도 같았다.

이 소설은 오래전에 고향의 큰댁에 갔을 때
직접 겪은 일을 계기로 썼다.
소설에서와 같이 귀향 다음날 일어나보니,
다 자란 암소가 목을 매단 채 숨져 있었다.
새끼를 낳아도 몇마리나 실하게 낳을 만한 놈이었는데….
습작을 한답시고 가방에 넣어간 노트와 외국의 명작소설들이 부끄러워졌다.

사춘기 무렵엔 이무영 선생의 장편 〈농민〉을 읽으면서,
 흙 속에서 순박하고 아름답게 사는 몽상을 한 적이 있다.
요즘도 그렇게 사는 이들이 있을 터이지만 내겐 꿈만 같다.
삭막하기로는 이제 농촌이나 도시나 진배없고,
사람이면서도 지렁이처럼 겨우 연명이나 하는 게 가난뱅이 필부들의 현실이지만
말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가 농민의 자식으로서
조금이라도 필요한 일을 해나가게 됐으면 좋겠다.


△본명 김영권 △1970년 경남 진양 출생 △인하대 사범대 졸업 △프리랜서 작가


2008 신춘문예 심사평-심사평 유재용·김문수
 

 

 

 

 

 

 

 

 

 

 

 

 

 

 

 

농촌소설 현대적 기법으로 잘 풀어내

전체 응모작품 중 예선을 통과한 작품은 〈파동〉 〈씨앗〉 〈벼〉 〈자발적 유배〉 〈소〉 〈올가미〉 〈99%의 용기〉 〈어머니의 언덕〉 등 8편이었다. 본선에 오른 작품을 윤독한 뒤 다시 거른 결과 〈소〉 〈파동〉 등 2편이 최종심에 회부돼 논란이 거듭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파동〉은 시부모의 합장·합사 문제를 둘러싼 이야기다.
남편과 시누이·시숙 등 시댁 식구들의 얘기가 정연하지 못하다는 결함이 지적됐다.

〈소〉는 문장도 우수하고
구성도 치밀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됐다.
황소는 아버지의 상징으로도 읽혀졌다.
 줄거리 위주의 소설보다도 다양한 장면 제시를 통해,
농촌소설이면서 이를 현대적 소설기법으로 풀어낸 것도 높이 평가됐다.
다만 황소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가
다소 현실감이 나지 않는 점이 지적됐다.
하여 이론 없이 당선작으로 정했다.
당선자의 정진과 탈락자들의 분발을 바라며 간단히 소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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