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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미학 원문보기 글쓴이: 여세주
제14차 수필쓰기 촌평
(마지막 리비도는 문장에 대해 손대지 아니하였으므로 촌평 부분만 올립니다.)
이번 제14차 글쓰기에서는 완성작에 가까운 작품이나 색다른 형식을 시도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 관심을 끄는 제목도 없었다. 제목이 지나치게 직접적인 진술이거나 관념적이어서 무겁다. 17편 가운데 읽고 싶은 제목을 가진 작품 서너 편 지적해 보시라. 어떤 제목들인가?
(1) 물
벌써 두 병째다. 건강을 위해 물을 많이 마셔 주라는 것과는 전혀 별개다. 마치 내 몸이 스펀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마셔도 자꾸 목이 마르다. 오후 세 시가 다 되어가건만 아직 화장실에 가지 않은 것도 평소와 다르다. 내 몸에 들어온 물이 세포 구석구석까지 채우느라 밖으로 내 보낼 것이 없는 것인가. 가뭄에 갈라진 논이 조금 내린 비로는 해갈이 되지 않듯이 내 몸에 가뭄이 들기라도 했나보다. 이유를 찾아본다. 그저께
1박2일 일정으로 000 산행을 했다. 일박이일 행사로 타지로 갔다. (가던 길에 들른 어느 한정식당에서 거나하게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었지만 몇 시간 후에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다행히도 광주지역에서 온 분이 수지침으로 답답한 체증을 해결해 주었다. 맛있게 먹은 점심을 먹은 입으로 다시 밖으로 내보내고서야 나는 진정이 되었다.) 어제 산행에서는 몹시도 목이 말랐지만 준비한 물이 적었기에 목마름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하산 길에 낯선 이도 동행자와 대화를 하면 물이야기를 한다. 저 아래 암자에 가면 물을 마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나도 침을 삼켜본다.
물은 원형 상징을 가진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다양하지만, 기본적인 심리는 비슷함을 지녔기 때문에 원형 상징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원형 상징으로서의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속성을 지녔으므로 정화와 순결을 상징한다. 또한 생명 탄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오랫동안 물은 새 생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물은 이와 반대로 소멸과 죽음, 이별을 상징하기도 하고,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강은교의 ‘우리가 물이 되어’에서 물은 가뭄으로 상징되는, 병들어 죽어가는 현대 사회에 뿌려져서 활기를 되찾게 하는 생명수가 되어 비정하고 삭막한 현대 사회를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
풍수지리의 이론으로 분석하면 물은 모든 생명체의 근본이 된다. 지구도 최초에는 물로부터 발생되었다는 내용이 5행의 이론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물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물의 역할로 볼 때 물은 신비한 물체임에 틀림없다. 한국의 전통적인 사상에서도 바다에는 해신이나 용왕신이 있는 것으로 전해져 온다. 또한 현대의 일부 종교계에서도 물의 세레를 종교행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다. 기의 이론으로 분석하더라도 물체에는 신이 깃들게 되는 만큼, 물에도 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생명체를 만들어주는 물이야말로 가장 신비한 부분으로 인식되어 정화수가 되고 성수가 되었을 것이다. (논설문 같은 느낌)
생태계에서 물은 생명의 기원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 몸의 70%가 물이듯이 생명체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도 대부분 물이 차지하고 있다. 물의 존재는 강, 호수, 바다, 지하수뿐만 아니라 대기권에도 포함되어 존재한다. 그리고 동식물은 그것을 이용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표면에 고루 분포되고 분배되어 있지 못하고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이변으로 가뭄과 홍수라는 자연재해를 입기도 한다. 물은 오랜 가뭄과 사막화를 겪는 극한 지역에서 나타나는 고통을 극복하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생명체 등의 진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관념적 설명이다)
물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물을 지표면에서 대기 중으로 옮기는 증발은 순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식물의 증산작용, 응결(凝結), 강수(降水), 유수(流水) 등으로 순환한다. 지구 생태계 내에서 순환하는 물의 총량은 항상 유지되지만 다양한 과정 중의 물의 분포는 계속적으로 변화한다. 물 순환은 동식물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관념적 설명이다) 어느 여행 방송에서 터키를 여행하는 장면에서도 물이 나온다. 그 나라의 풍습에 이별을 할 때면 떠나는 사람의 가는 길 위에 물을 한 바가지 가져와서 뿌리는 장면이다. 흐르는 물처럼 다시 만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고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종류만도 수백만 종이라는데 물은 그들의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 기후 환경 변화로 수자원의 편차가 심해 가뭄이 극심한 사막지역은 사막화가 더욱 촉진되는 지역이 있는 반면 집중호우로 물난리를 겪는 자연재해 지역도 있다. 우리나라도 물 부족국가 분류군에 속한다고 한다. 물 쓰듯 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된지 오래다. 생수 한 병의 값도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세상이다. 수자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수자원을 확보하려는 다방면의 연구와 노력이 참 중요해졌다. 도시화가 확대되면서 도시주변에 인공 호수를 만들거나 복개된 강을 되살리면 도시의 열섬현상과 아파트지역의 돌풍현상을 완화 시키는 작용을 해 준다고도 한다. 녹지공간을 넓히고 하수 관개시설을 잘 관리하면 침수되는 지하용수를 확보하고 홍수 피해도 방지할 수 있다. 또 빗물을 잘 활용하는 인공호수는 오염도를 줄여 주는 역할과 기온 조절 역할도 한다. 물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물을 아끼며 깨끗이 순환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자.
갈증을 참고 산 중턱의 암자에 도착했다. 사방이 온통 바위로 이뤄진 작은 굴속에 마치 보물처럼 샘물을 품고 있다. 물을 떠서 감사한 마음으로 마신다. 맑은 기운이 온 몸으로 퍼진다. 하늘이 더욱 파랗다.
산행에서 겪은 갈증의 경험을 통해, 인류사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물의 의미를 말하고자 한 듯하다. 이 작품이 구조적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산행의 과정 속에 물의 인류사적 의미들(상징, 속성, 역할 등등)을 삽입하는 구성을 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첫 단락과 마지막 단락은 갈증에 대한 실재의 경험을, 그 가운데 물에 대한 의미들을 단락별로 배치해야 한다는 말이다. 각 단락별로 물의 무엇에 대하여 말할 것인지, 그 중심생각을 미리 구상해 놓고 퇴고해 가면 손쉽게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의 진술방식도 다시 고려해 봐야 한다. 관념적이고 객관적인 설명보다는 감각적이고 주관적인 설명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2)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줌마! 사무실에 불났어요.” 휴대전화를 타고 들리는 음성이 다급했다. 어디냐며 정신없이 묻는 말에 “아줌마 부동산 사무실이에요.”라는 말이 또렷했다. 가슴도 머릿속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막 퇴근하여 옷을 벗으려던 참이었다. 설마 하면서도 귓전을 파고드는 부동산 사무실이라는 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젊은 여자의 목소리 같았다. 특별한 말도 따로 하질 못했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놀랄 때 엄마라는 말이 절로 나오듯 불은 바로 119다. 테이프를 돌린 듯 기계적으로 “119에 신고 좀 해주실래요?”라는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동안 보고 듣던 화재 발생시 대처법이 하얗게 지워졌다. 쿵쾅거리는 가슴에 침착, 침착이란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효과는 없었다. 사무실에 가줄 만한 주변의 지인에게 전화조차 제대로 연결하지 못한 채 허둥댔다.
장난전화일까? 전화를 걸었다. 부동산 사무실에 불이 날 일은 이유는 전혀 없었다. 부동산 사무실 인근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OO 부동산’에 불난 거 확실해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대답에 긴장감이 돌았다. 사무실 안에서 불이 활활 타오른다고 하였다. 그제서야 119에 전화를 걸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고를 받던 소방서는 이미 접수되어 출동했다고 했다. 자신들이 알아서 최대한 진화를 잘하고 있을 터이니 마음을 가라앉혀서 오라고 했다. 평소와 달리 엘리베이터도 느리고, 앞서 달려가는 차도 거북이다. 마음은 내 차 안에서도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골목 입구에 소방차 두 대가 줄지어 서 있다. 내 사무실에 동원된 차인 듯 했다. 사무실 앞에는 소방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불 구경나온 주민들이 시끌벅적하였다. 불은 꺼졌지만, 차단기가 내려간 사무실 내부는 칠흑 같은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타다가 만 붙박이장이 흉물스럽게 보였다. TV, 오디오 서랍장이 한곳에 뒤엉켰고 새까만 벽과 천정은 화마로 일그러졌다. 그을음과 물벼락을 덮어쓴 집기들은 플래시 불빛을 따라 귀신처럼 너울거렸다. 어디서 불이 났는지 왜 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타버린 재 부스러기는 꺼먼 곤죽이 되어 물 바닥 위를 쓸쓸히 떠다녔다.
퇴근 직전에 친구가 왔었다. 몇 해 전에 취미 삼아 함께 공부하면서 동갑이라 서로 편하게 지냈었다. 바쁜 일과에 쫓겨 얼굴 보기 어려웠다며 지나는 길에 일부러 짬을 내어 들렀다고 했다. 친구는 안부를 물으며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개 피를 피웠다. 평소에는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금기였었다. 모처럼 찾아온 친구에게 야박할까 싶어 내키지 않은 연기를 맡으면서도 묵인해 주었었다. 커피를 마시고 종이컵에 꽁초를 눌러 버린 것이 탈을 낸 것일까? 달리 불이 날 만한 곳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혼자만의 추측과 기억을 되짚으며 나는 형사 콜롬보로 변했다. 설령, 담뱃불이 원인이라 해도 친구 탓을 할 수 없는 처지다. 반가운 마음으로 온 것이 화재를 일으켰다면 친구는 두고두고 자책감에 시달릴 것이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고 신고를 해준 사람은 젊은 여인이 아니라 초등학생이었다. 태권도 도장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사무실 안이 붉은 연기로 꽉 차서 보게 되었다며, 아이들은 진화가 끝나고 구경꾼들이 돌아간 뒤에도 한참을 지켜보았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나에게 알려주고 소방서에 신고까지 해준 아이들이 무척 고마웠다. 인사를 하려다가 순식간에 미끄러졌다. 진화작업으로 뿌린 물이 그사이에 얼었던 모양이다. 짓찧은 무릎보다 동굴 속 같은 사무실을 생각하니 더 기가 막혔다.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은 심정을 알았나 보다. 열심히 살아도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더니 무심히 부는 칼바람이 온몸으로 맞았다.
소방차도 떠나고 구경나온 사람들도 옷을 여민 채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나도 땅 두더지 소굴 같은 사무실을 나왔다. 엄동설한의 겨울바람 끝이 얼음 같다. 차에 시동을 걸어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린 두 딸과 세상에 남겨졌을 때, 죽은 남편보다 먹고사는 일이 더 절박했었다. 급한 마음에 겁 없이 덤볐던 여러 차례의 도전은 실패로 이어졌다. 이곳은 할 줄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던 내가 나의 이름을 걸고 맨몸으로 홀로서기 11년을 보낸 곳이다. 올망졸망 커지던 아이들의 꿈을 좇아 쓰러지던 나를 수 없이 담금질했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연치고는 참 고약한 우연이었다. 하필 왜 그 친구가 내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피운 것일까.
앞서 가는 차량 꽁무니 불빛 위로 얼룩이 번졌다. 부실한 몸으로 이 년째 미루던 수술 날을 받아 둔 것이 코앞으로 닥쳤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사람들은 나를 장군이라고 불렀다. 혼자 몸으로도 뭐든지 씩씩하게 잘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남편이 남기고 간 삶까지 모두 내가 다 살아주겠노라 마음을 품었었다. 아빠로서, 엄마로서, 자식으로서 그리고 내 몫까지 몇 곱으로 움직이고, 배우고, 살기에 시간은 늘 턱없이 모자랐다. 철없는 욕심에 병이 돋은 것일까. 먹먹한 가슴을 타고 흐르던 슬픔이 외로움이 되어 가슴 위로 뚝뚝 떨어졌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일회용 밴드처럼 젖은 가슴에 붙이고 어깨를 폈다. 이 또한 정녕 지나가 줄 것이다.
아침도 거른 채 사무실로 나갔다. 화재의 흔적은 비참했다. 어느 구석 남김없이 그을음으로 새까맣다. 발화지점에는 타고 남은 콘센트 구리선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잿더미 속에 삐죽하게 보이던 연탄집게를 보는 순간 머리끝이 쭈뼛했다. 밤새워 뒤척이며 친구를 원망했던 화재의 불씨가 연탄집게라니. 온몸에 힘이 쪽 빠져나갔다. 올겨울 들어 최고로 매서운 동장군의 기승에 쫓기듯 퇴근을 서두른 것이 발단이었다. 연탄을 갈고 달아오른 집게를 무심코 종이상자 위에 던져둔 것이다. 모처럼 찾아온 친구를 원망하며 가슴을 쓸었으니 얼마나 바보인가. 무조건 남 탓부터 하고 보는 못난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신고해준 아이들 학교를 다녀오면서 (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활기차게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에 절로 힘이 솟아났다. “별일 없지?” 수화기를 타고 들리는 안부인사에 나도 큰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럼 별일 없지.”
삶의 터전이었던 부동산 사무실에 불이 났던 경험을 제재로 삼았다. 이 제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바는, 힘겨운 삶의 지속(좀더 진솔하고 자세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에도 불구하고 내색하지 않고 씩씩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화자의 모습이다. 제목과 마지막 단락이 드러내는 의미작용에 주목하여 볼 때 그렇게 읽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처럼 겉모습과 속사정이 다른 실체로 살아갈 것이라는 데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남부터 탓하고 보는 화자 자신과 사람들의 그러한 속성에 대한 지적하는 데에 이 작품의 주제를 두고자 하였다면, 제목부터 바꾸어 놓고 성경의 한구절을 삭제하는 등등의 수정을 해야 할 것이다.
(3) 「민들레 바람 되어」를 보고
흰 날개를 단 민들레가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흩날린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의 별을 닮은 노란 꽃을 피워낼 것이다.
「민들레 바람 되어」라는 연극을 남편에겐 같이 보자는 말 한마디 않고 혼자 보러왔다. 밥상머리에서 딸아이도 좀처럼 하지 않는 반찬 투정을 하는 남편이 미웠기 때문이다. 나 빼곤 모두 부부가 함께 와 앉아 있는 것 같다. 극은, 가볍게 떠돌아도 끝내 종착지에 내려앉는 민들레의 속성을 부부의 사랑에 대한 은유로 풀어내려는 듯하다.
무대에서 젊은이들이 연애를 시작한다. 남자는 여자가「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좋아한다는 걸 안다. ‘엘리스는 체셔고양이에게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 체셔고양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려있다고 대답 한다.’ 남자는 그 부분을 종이에 적어 곁눈질해가며 외우는 척 여자의 환심을 산다. 그 여자가 좋아하는 것은 보석이나 명품가방이 아니라 책이다. 그런 여자와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예뻐 보였다. ‘엘리스’를 가슴에 품고 다녔던 젊었을 때의 순수가 그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을 보고 칠 개월 정도 사귀는 동안 손을 눈 위에 대고 해를 가리는 행동을 자주 하는 내게 남편은, 봉채 보낼 때 양산을 꼭 챙겨 주마고 했었다. 채단을 받고 제일 먼저 살핀 것이 파라솔 이었으나 들어 있지 않았다. 아주 작은 콩알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도 별 반갑지 않았다. 결혼해 그 일을 물어 보았더니 엄마가 빠뜨렸나 보다며 무심히 대꾸했다. 그 땐 양산을, 나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으로 여겼나보다. 왠지 알맹이가 빠진 예물을 받은 듯 했었다.
극중에서 남자와 여자는 결혼했지만 아내 ‘오지영’이 너무 빨리 이승을 저버린다. 떠나버린다. 삼십대 남편 ‘안중기’는 아내의 무덤을 찾아 외로움을 호소한다. 그녀는 자신의 무덤가에서 힘든 그를 보듬어주고 함께 대화하지만 듣지 못한다. 그의 사랑은 움직일 줄 모르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시간을 거슬려 올라가 지난날들을 다시 살아내려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그녀만을 붙잡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우리는 어쩌면 사소한 것에서부터 상대를 늘 오해하는지 모른다. 중기는 생전엔 꽃을 좋아하는 아내를, 돈을 더 좋아할 것이라 지레짐작하며 꽃다발 한 번 안기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죽은 후 무덤에서 그에게 비로소 꽃을 받았다. 나의 남편은 결혼기념일과 생일날 꽃을 선물했었다. 그런데 내가 살이 찌고부터는 꽃 대신 밥을 선물이라고 사준다. 공교롭게도 남편이, 식사준비 하기 싫어하는 내게 맛있는 밥이 꽃보다 낫겠다고 생각한 시점과 내가 살이 찌기 시작한 게 일치했을 뿐 꽃과 살과 밥은 아무런 연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거의 날마다 무덤을 찾던 그가 어느 날 아내에게 자신의 재혼을 알린다. 딸에게 엄마가 필요해서라 얘기하지만 관객은, 그가 젊고 쓸쓸하기 때문이란 걸 안다. 재혼 상대가 좋은 여자라는 그의 말에 보는 이들은 진심으로 지지를 보내며 그녀와 잘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재혼한 여자마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곁을 떠나버린다.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새 사랑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못하게 했으리라. 나는 마음속으로, 저렇게 매일 죽은 아내만 찾는 남편이라면 어떤 여자가 함께 살고 싶겠냐며 그를 버린 재혼한 아내를 오히려 측은해 한다.
중기는 나이 먹어 회사에서 고립되는 괴로움과 마음에 들지 않는 사윗감에 대한 원망들을 무덤가에서 낱낱이 이야기한다. 그의 아내는 그런 남편을 격려하기도 하고 따끔한 충고를 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 통할 수 없다 여겼으나 그들의 소통은 이뤄진다. 서로를 향한 절절함이 생과 사의 경계마저 허무는 모양이다.
안중기의 아이는 사실, ‘아내의 아이’이다. 아내 지영은 부부싸움을 하고 자신과 남편을 아는 선배를 찾았다. 그러나 이 일은 어이없게도 남편 중기에게 말 할 수 없는,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밝히지 못할 사실을 만들게 했다. 그는 아내의 이런 비밀을 알면서도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그녀만을 닮은 아이를 정성껏 키워 왔으나 아이는 그에게 생의 삶의 의욕을 주지 못한다. 「토지」의 ‘월선’에게는 어린 시절부터의 연인 ‘용’이 있다. 그녀는 그의 아들을 제 속으로 낳은 자식보다 더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녀를 아끼는 용은 이런 그녀의 마음을 생각하며 아들 생모와의 갈등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간다. 중기도 월선의 마음이 되었더라면 싶어진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무대는, 장소의 변환이나 배우들의 별다른 동선 없이 이루어져 있다. 상황은 주인공의 대화로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있다고는 하지만 무덤가가 배경이다. 주제도 부부간의 사랑과 갈등을 그려 무겁다. 이런 극에 핵심 줄거리에 바람둥이 노인과 노부인이 끼어들어 활력소의 역할을 한다. 젊어 밖으로 떠돌며 끊임없이 여자문제로 노부인에게 상처를 줬던 바람둥이 노인. 그러다 늙은 아내가 아프기 시작하자 아내의 수발을 들고 기도하며 죽은 뒤에는 늘 아내의 묘소를 찾는다. 노부인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마음을 바꿔 정성을 다하는 노인에게 냉랭했던 마음을 조금씩 녹인다. 노인은 아내에게 늦은 참회를 한다. 노인이 젊었을 때 성가를 팝송인 것처럼 불러 여성들을 유혹했다는 등의 노부부의 해학적 대화는 다소 작위적인 듯 했으나 가라앉은 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간간히 객석의 웃음을 이끌어 낸다.
“나를 안아줘, 여보.”
남자는 어느덧 칠십대 노인이 되었다. 그는 이제 기운조차 이 없다.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마주 앉아 울고 웃어도 문득 문득 외롭지 않던가. 홀로 긴 세월을 겪어 냈으니 많이 고독 했으리라. 남자는 어느덧 칠십대 노인이 되고 병들어 간다. 그는 아이마냥, 관객에게만 보이는 아내에게 안겨 이 말을 남긴 채 민들레가 풍성한 아내의 묘지에서 힘들었던 삶을 놓는다. 극 마지막, 초췌한 모습으로 이승을 떠나는 안중기의 모습에 드라마란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아프다. 그와 그의 아내가 다시 만나는 장면을 혼자 연출하며 마음을 달랜다.
같이 올 걸 그랬나 보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삼십 여년을 함께 한 옆지기 아닌가. 앞으로 꼭 그 만큼의 세월을 다시 함께 하며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서로를 살게끔 하는 존재이고 싶다. 남편이 좋아하는 장조림을 만들어야겠다.
길가의 민들레 하얀 꽃씨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봄에 돌아와 다시 노란 꽃을 피우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한 편의 연극을 보면서, 남편에 대한 서운했던 감정을 풀고 사랑하는 마음을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의도한 만큼 작품의 논리는 정연하지 못하다. 서두에서 반찬 투정하는 남편이 미워서 혼자 극장으로 가게 된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려주고, 그 중간에 연극에 대한 감상과정에서 연상되는 남편과 자신의 문제를 떠올리고, 마지막에 가서 남편과 나의 관계 정립을 새롭게 하는 다짐으로 끝맺음하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 그렇다면, 첫단락과 마지막 단락, 즉 민들레의 생명 순환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일까? 이 연극의 주제가 이 수필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 논어의 ‘愛之欲基生’과 일맥상통할 수 있는지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제목도 다시 고려해야 한다.
(4) ~척하다
내 마음이 봉두난발처럼 된 것은 손바닥 크기의 신문기사 때문이다. ‘올가을 유행할 패션’이라는 머리말에 붙들려 기사를 읽어보기로 했다. 몇 줄을 읽어내려 가다 말고 원점으로 되돌아와 읽기를 반복했다. 용어가 영어투성이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알고 있는 영어와 조합해서 낯선 단어를 해석하려 해도 짧은 지식으로 부족했다. 신문 내용에 담긴 외국어를 세어헤아려 보니 50여 개나에 달했다. 굴욕감보다는 기자를 성토하는 마음이 앞섰다. 흥분한 상태에서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경제면에 실린 기사라 담당부장과 연결됐다. 나는 기사 분량과 비교하면 영어 섞임이 지나쳤다, 기자가 앞장서서 우리말을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허투루 신문을 읽지 않는 척했다. 상대방은 점잖게 응대하면서 패션 기사다 보니 외국어가 많이 들어갔다며 양해를 구했다. 담당 기자에게 독자의 의견을 잘 전달하겠다는 마무리 인사에 나는 수더분하게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돌연 마음이 마구 흩트려흐트러졌다. 마치 정의의 기사인 사도인 척했지만, 내 못난 탓으로 양은냄비 밥물 끓듯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는 태생이 영어 불임증에 걸린 듯하다. 세 살 위인 언니가 중학생일 때 영어로 된 이름 하나 지어달라고 졸랐다. 언니는 고민도 하지 않고 “피그거 킹(Pig Kig)”으로 불러주겠다고 했다. 나와 어울리는 이름이며 ‘킹’은 왕이라고 일러줬다.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잘난 척을 했다. 또래보다 남다른 하나를 더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우위에 있는 것 같아 완장을 찬 기분이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어 단어의 뜻을 알고는 한바탕 난리를 쳤다. 언니는 이제야 알게 된 사실도 우스운지 길길이 뛰는 내 앞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었다. 한동안 불렸던 이름이 ‘돼지 왕’이라는 걸 알았어도 나는 영어 공부와 그다지 친밀해지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 대로변과 인근 주택가에 카페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점포 수도 많지만, 이름이 영어로 돼 있어 다 외우지도 못한다. 했다. 분위기가 어떤지 동네 카페를 모두 방문해봤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몸에서 거부해 주로 생과일주스를 주문한다. 다행이다. 그 많은 커피 종류를 머릿속에 넣어두려면 기억장치가 과부하가 되지 싶다. 어디 카페뿐이랴. 제과점, 옷가게, 미용실, 아파트 이름도 영어판이다. 스마트폰으로 뜻을 찾아보면 될 법도 한데 게으른 탓에 그냥 지나친다. 그래서 요즘, ‘아는 척’하고도 산다. 누가 “무슨 뜻인 줄 아세요?”하고 물어오는 일 없길 바랄 뿐이다.
도심의 거리를 걷는다.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든다. 빗발치듯 터져 나오는 아이돌 가수의 노래엔 영어가 태반이고, 네온사인에 돋보이는 간판은 대부분 영어로 돼 있다. 번쩍일 때마다 알파벳이 도시의 점령군 같다. 사람들 사이에 외국인이 보인다. 느린 걸음으로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웃기도 한다. 이 도시에서 20여 년을 살고 있는 나보다 더 익숙한 모습이다. 그들을 앞질러 바삐 걸었다. 나란히 걷거나, 두어 발작 뒤에서 걸으면 말을 건네기 쉽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질문이라도 피하고 싶다. 영어가 사방 널려있는 곳에 살면서 이것도 모르나할까 봐서다. 이럴 땐 바쁜 척하는 게 상책이다. 이러한 행동은 다분히 나의 경험에서 터득한 것이다. 초행길에 목적지를 찾지 못해 헤매 일 헤맬 때 느긋하게 걸어오는 이에게 물어본다. 걸음이 빠른 사람을 멈추게 하려면 용기가 더 필요하다. 그럴 땐 좀 더 늦더라도 편한 대상을 물색하는 게 나았다. “익스큐즈 미.”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다. 화들짝 놀랐지만, 더 바쁜 척 발을 내딛는다. 발바닥 굳은살 아래로 찌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나는 언제부터 ‘~척’하고 살았을까? 아마도 기억의 주파수가 닿지 않는 그 이전일 게다. 돌이 갓 지난 아기 여럿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 그들 나름대로 서열이 있다. 덩치가 크다고 해서 모두를 제압하는 건 아니다. 때로 과잉 행동과 표정으로 강한 척해서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한다. 나도 언제나 ‘~척’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쩌면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이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정의로운 척, 잘난 척, 아는 척, 모르는 척, 바쁜 척, 이해하는 척, 겸손한 척 등으로 나를 포장했다. 타인의 ‘~척’을 탐색하는데도 골몰했다. 때로 화려하게 포장하지 않은 사람을 만났을 때 청량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런 이들만 곁에 머물길 바라면서 아직도 ‘~척’의 포로 신세다. 점령군의 회유에 불복할 때가 많지만, 언제나 탈출을 꿈꾼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13장)
외국어의 남용으로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신문기사를 발상의 시발점으로 삼아, 인간의 위선성을 꼬집는 데에 이른 작품이다. 주제가 보편성을 확보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 문제는, 첫 단락(신문기사에 대한 항의사건)이 전체를 위해 기여하는 바는 무엇일까? 발상의 단초로서만 역할한다면 과도한 분량 할애가 아닐까.
(5)산행이 주는 즐거운 단상
나는 가끔 산에 가면서 배낭에 무겁지 않은 책 한두 권 넣는다. 적당한 자리에 앉으면 심심풀이로 내어 읽는다. 한 손으로는 누룽지를 먹기도 하고 벌레들을 쫒기도 한다. 어떤 때는 책 행간 사이에 벌도 날아오고 애벌레도 슬금슬금 손등을 타고 내 눈이 가는 쪽으로 기어온다. 방해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함께 놀고자 놀자고 무언가 소리를 내는 것 같기도 한다.
여느 때 같으면 후-우하고 입김으로 불어 버릴 것 같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마음이 없다.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도 하고 함께 할 무슨 놀이가 없을까 망설여지기도 한다. 간간히 나뭇가지 사이로 영롱한 햇살이 가늘고 긴 허리를 편다.
무슨 종(種)의 벌인지 몸뚱이보다 머리가 훨씬 작다. 날아 갈듯 말듯 여섯 다리를 세우고 앉기를 몇 번 보이더니 목 구비를 쭉 빼고는 주위를 살피는 것이 숨은 도둑이 담 밖으로 인기척을 살피러 고개를 내미는 것과 흡사하다. 이마에 노란 휘장을 붙이고 두 가닥의 짧은 더듬이가 검은 머리에 돋보인다. 한참을 지켜보니 정겹게 보여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잠시 한 가닥의 바람이 휙 돌아가니 다리를 움츠리더니 휑하니 날아가 버린다. 갑자기 눈 안이 벙벙하다.
잎사귀 사이로 통과하는 빛이 참 맑다. 요놈 봐라, 입으로는 거미줄 같은 실을 물고 낙하를 는 것이 제법 고수인 것 같다. 탄력을 주며 자연스레 내려오는 모습이 수천 번의 고공 낙하훈련을 거친 병사와도 같고 그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담력으로는 호랑이를 잡을 만큼 기상을 기른 사내 같다. 한 번 두 번 내려오다 다시 오르며 몸을 다스리는 것은 나아갈 때가 아닐 경우 한 발 물러서는 여유는 수련이 잘 된 수도자와도 같다. 움직이는 저 놈을 보노라면 투-욱 툭 툭, 허공을 가르며 공기의 층계를 밟듯 내려앉는 느낌이 오르가즘의 정점에 선 선녀 같다. 내려오는 속도를 줄이며 살금살금 간격을 좁히더니 내 책 위에 사뿐히 앉는다. 앉자마자 사정없이 줄을 끊어버린다. 소리 없는 줄은 솔바람에 날리어 가늘게 빛을 내더니 어디론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내 머리를 치켜들고 한 바퀴 사방을 살피고는 몸을 오므렸다 펴서는 내 팔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다. 난간에 매달리기도 하고 사다리를 타듯 위쪽으로도 자유자재로 소요하기도 한다.
저 미물이 아무런 거부감을 보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를 모습에서 자연의 경외함을 또 한 번 체험한다.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고 감정을 바로 드러내는 것이 내 몸과 마음이건만 저렇게 유유자적하는 곤충에게도 자유자재하는 소질이 있었던가. 항상 불안 근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어쩌면 저 벌레만도 못한 내가 부끄럽기까지 하다.
허나 나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고지식한 탈을 쓰고, 자연과 더불어 노니는 즐거운 놀이를 한다. 이놈들뿐만 아니라 개미에게 밥을 주며 유심히 지켜보는 일이라든지 주위 이름 모를 곤충들에도 관심이 집중된다. 귀찮다거나 싫지 않다.
벌이 다시 와서 내 손 주위를 돈다. 분명 소리는 나는데 날개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소리가 파리 소리 같기도 하고 ‘윙윙’ 하는 소리가 소담스럽게 들리기도 한다. 벌이 귓가로 오니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허리 밑으로 노란 얼룩무늬가 선명하다. 날개를 접었는데 어디서 소리가 나나하고 신기해서 조심스레 살피니 속 날개를 아주 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손등 솜틀에 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황홀함이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해금산조의 중모리 선율 같다. 자연의 경외함이여. 네가 내고 내가 네인 것 같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절벽 난간을 조심스레 걷는 발밑에 산돈나물과 부처손이 고개를 들어 손짓 한다. 청룡산 정상에 거의 다다를 쯤, 길 가장자리에서 두어 발 아래 미끈한 소나무 한 그루가 어느 날 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무 말 없이 그냥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의식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다음 부터는 왠지 쑥스러워 산행인 들을 피해서 안아보곤 한다. 한 백년 쯤 되어 보이는 그는 쭉 뻗은 모습이 아래서는 끝이 보일 듯 말듯 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떠서 어루만지며 통통 두드려보니 맑은 소리가 나고 참 따스하게 다가온다. 기운이 내통하는 것 같다. 처음 몇 번은 다른 나무를 안기도 했다. 뭔가 이상한 감정은 산에 내려올 때야 사라졌다. 누구에게 감정도 없는 나무를 끌어안고 정감이 있느니 좋으니 하고서 얘기를 하면 실없는 소리를 한다거나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놀릴까봐 아무에게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오고 갈 때마다 포옹해보는 것은 자연과 내가 하나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주위에는 훈훈한 느낌이 감돌고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나를 지켜 봐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이 가벼우니 걸음도 신이 난다.
또 하나 즐기는 곳이 있다. 집채 크기만 한 바위를 휘감아 돌면 두 세 사람이 앉을 만한 암굴(巖窟)이 있다.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먼저 잘 다듬어 놓은 휴식처다. 비와 바람도 막아주고 적당한 햇빛이 하루 종일 각도를 달리 하며 들어오는 남향이다. 저 앞쪽 끝머리는 비슬산과 대견사지가 바로 보이고 앞은 두어 발자국 밑이 몇 길 낭떠러지다. 양쪽으로는 잘 다듬어진 아기자기한 능선들이 멀리 보이는 것은 용마루 같기도 하고 중간에 보이는 것은 매끈한 말 엉덩이 같기도 하다. 발밑은 맑은 녹색 물감을 부어놓은 초원 같다. 자리는 겹겹으로 소나무 잎으로 다져놓아 푹신하면서 건조하다. 안쪽에는 알 수없는 구멍이 하나 뚫려 있고 드러누워서 천장을 보면 동굴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누가 이런 자리를 발견 하고 만들어 놓았을까 하고 호기심이 발동하지만 주변 정리를 보면 필시 마음이 맑은 사람이 세상일 인간사 시비를 끊고 싶어 산으로 오르다 이 좋은 바른 자리를 발견 했으리라. 살다보면 다 좋은 일만 있을까마는 이른 곳에 와서 찌든 마음 다 내려놓고 고요한 그 자리에 불씨하나 밝히고 가면 그 기분이야 이 세상 무엇과도 견주랴. 내 마음도 그렇고 보니 보통 인연만은 아닌 것 같다. 언제 오가다 만나는 일이 생기면 차 한 잔 맛있게 대접하리라. 마음만은 벌써 건너 능선을 타고 있다.
정상을 지나 넙적 바위 난간에 다리를 꼬인 채 걸터 않는다. 저 멀리는 낙동강이 휘어져 흐르고 가까운 거리에는 수밭못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잠시 상념에 잠기니 호수는 곤붕(鯤鵬)이 잠들어 있는 같고 내 앞의 숲은 용상(龍象)이 깃든 숲 같기도 하다. 저 곤붕이 깨어나 하늘로 치솟아 오르면 나는 그놈을 타고 구만리 창공으로 날아가 자유로이 노닐 것이고, 그리고 용상이 깃든 숲속으로 들어가서는 용을 깨워 그 등을 타고 구름 속으로 차고 나가 승천하는 하늘에서 함께 동화 되어버리는 생각을 해 본다.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순간이다.
산에 오르는 길은 내 자신을 부정적으로 초월 해가는 과정이고, 정상에서 내려 올 때는 긍정적으로 다시 현실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내려와서는 오르기 전과는 다른 현실 삶의 향유를 즐긴다. 이러한 흐름은 ‘장자’를 순서 되로 읽어가는 과정과도 같다. 산의 정상과도 같은 ‘대종사’는 ‘크게 중심으로 삼을 스승’이라는 뜻이다. 이 경지는 만물의 변화 속에서도 편안한 상태를 말하는 영령(攖寧)과도 같다.
태어날 때는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죽을 때는 구름이 사라지는 것을 보라고 했던가. 죽고 사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깨달아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고 지금 이 순간이 내 모든 것의 중심이자 존재하는 그 자체임을 또 한 번 되새겨본다.
산행은 나를 찾는 즐거움의 한 방편이다. 소요유의 즐거움에 청룡산 가을도 내려와 모자의 먼지를 턴다.
청룡산을 오르는 과정, 그 자체가 한마디로 자유자재이며 삶의 소요유라고 하는 데에 작가의 궁극적 의도가 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데에 동원된 소재들을 보기로 하자. 벌, 애벌레?, 소나무, 동굴바위,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순이다. 곤충을 관찰할 때에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치밀한 미세 관찰을 하고 있고, 자연물을 관찰할 때에는 먼 거리에서 거시 관찰을 한다. 곤충을 통해 자유자재를 자연물을 통해 자연합일을 이끌어낸다. 설계도를 다시 가다듬고 거기에 맞게 미장까지 잘 되어 있는지 다듬고 다듬어야 할 것이다.
(6)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일상에서의 탈출을 위해. 또한, 새로움에 대한 도전과 설렘 때문에 나는 여행을 떠난다.
세계 3대 요리로 이름난 터키에 와서 처음 하는 식사라 호텔 지하 레스토랑으로 가는 발길이 부푼 기대감에 흥이 났다. 문도 힘을 주어 밀면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문 앞 테이블 위에 놓인 컵라면. 새우탕면, 신라면, 안성탕면...... 주위를 둘러보니 한국의 중년 부부들이 게 모임으로 여행을 온 듯했다. 컵라면 뚜껑을 열어놓고 뜨거운 물을 요구한 것인지, 웨이터들이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식탁 위에는 김치, 고추장, 된장, 김, 일회용 밥까지 한국식당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또한, 목소리들은 어찌나 큰지, 주위의 외국 여행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한쪽 구석에서 대충 식사를 하고 얼른 나와 버렸다.
TV에서 한국의 농촌을 여행하는 프랑스인 가족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시골 할머니들이 맨손으로 겉절이를 해 준 나물에 고추장과 된장을 넣어 밥을 비벼 먹었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맵지 않으냐고 피디가 물으니 호호 입술을 오므려 불면서도 좋았다며 새로운 맛을 느꼈다고 했다. 재래식 화장실을 다녀와서는 신기한 경험을 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카파도카아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갔다. 며칠 전 호텔 레스토랑에서 본 중년의 부부 팀을 다시 만났다. 그들의 식탁 위에는 여전히 김치, 고추장, 김 등이 놓여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속으로 참 대단하다. 저걸 가방에 메고 다니려면 얼마나 무거울까, 한국사람 뚝심은 알아 줘야 해, 라며 혼자서 웃었더니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나서 반갑다며 고추장과 김을 주길래 우린 현지 음식을 먹을 거라고 사양을 했다. 그리고 음식이 영 입에 맞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원래 치즈는 좋아하지 않았고, 다른 것들은 향이 거슬려서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터키에 왔으니 여행지의 음식도 먹어봐야 되지 않겠어요. 먹거리도 여행의 한 부분으로 차지하거든요. TV에서 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의 음식들을 먹으러 오기도 하잖아요.. 한식의 세계화라는 말 들어 보셨죠. 한식이 세계화되려면 여러 나라의 음식 체험도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우리 것만 고집해서는 한식의 장단점을 알 수가 있겠어요. 이미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세계화가 되고 있습니다. 남의 것도 알아야 내 것의 옳고 그름도 알 수 있겠지요.
라며 일장 연설을 했다. 그리고 야호! 그러고 나니, 첫날 레스토랑에서 엉망이 된 기분을 약간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그들은 알듯 말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호텔 레스토랑에서 그 팀을 또 만났다. 반갑다고 서로 인사를 했다. 그들의 식탁을 봤더니 고추장 하나만 보이고 수프와 빵 그리고 샐러드가 놓였다. 내가 “김치 떨어졌어요? 고추장만 남았나 봐요.”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현지 음식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 중이라고 한다. 어떤 날은 배고프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온 종일 한 끼만 먹었다고 한다. 거의 일주일이 되니까 조금씩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웃었다. 그리고 배낭이 가벼워져서 좋다고 했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언젠가 남이섬에 갔다가 일본인 여행객들과 함께 닭갈비와 막국수를 먹은 적이 있었다. 닭갈비 맛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맵고 맛있다고 했다. 특히 비빔 막국수를 먹으면서 얼굴에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가면서 육수를 먹고 맵다고 호호 혀를 내밀었다. 내가 여행은 새로운 것에 도전이라고 했더니, 맞다면서 맞장구를 쳤다. 원래 매운 건 못 먹었는데 춘천에 왔으니 춘천의 유명한 음식을 먹어봐야 되지 않느냐고 도리어 나에게 반문을 한다.
여행은 낯섦에 대한 낯익히기가 아닐까? 여행지의 풍경들과 풍습을 보면서 내 자신과 우리나라를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때론 현지인들의 생활들을 체험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되고 새로운 것에 도전도 해보고 낯섦이 낯익힘으로 히므로 다가가는 것도 어쩌면 그건 여행지에 대한 예의라고도 생각한다. 음식 또한 여러 나라의 음식 맛을 보면서 역시 한식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훌륭한 맛을 지닌 음식임을 자부하게 된다.
12일의 여행을 마치고 터키공항에서 중년의 팀을 다시 만났다. 여행 재미있었어요? 라고 물었더니 터키 맛에 막 길들 때 여행이 끝났다며 웃는다.
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긴 글이다. 터키 여행에서 마주쳤던 한국여행객들의 모습을 통해, 외국의 음식문화를 즐길 줄 모르는 한국인의 일반적인 관광 행태를 꼬집었다. 공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대부분의 한국인 관광 행태는 문화유적지나 기이한 풍광을 주마간산격으로 눈요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문제점은 다른 여행객들을 향한 직접적인 훈시를 하는 부분이다. 자기과시적이고 우월적인 화자의 모습를 드러내 보일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차분한 관찰을 통해 자기성찰(한국인들의 관광행태의 문제점 지적)에 이르는 방식의 글쓰기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람직할 듯하다.
(7)흔적을 찾아
상큼한 가을바람이 파랗게 불어온다. 한동안 길게 이어진 잿빛은 하늘의 원래 색깔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중추가절에 더위가 심술을 부렸으니 만추를 더 즐길 수밖에. 조금씩 넓어지는 황금빛 들녘을 따라가며 어릴 적 걔들을 애써 떠 올린다.
묵은 앨범을 펼쳤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다. 비닐우산에 검정고무신이 정겹게 느껴진다. 사진 속의 어깨동무들을 떠 올려 본다. 추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다. 그 시절이 훅하고 밀려왔다. 지나간 시절의 아련한 흔적이다.
어릴 적 놀던 골목길. 아직 그대로다. 편을 갈라 동네 한 바퀴 돌기 시합을 하던 생각이 났다. 서로가 반대방향으로 뛰도록 정해져 있다. 반칙을 할 수 없는 아주 공평한 게임이었다. 굽이진 돌담길 어귀엔 시끌벅적 옛 동무들이 아직 떠들고 있었다.
흔적을 남겼다는 이유로 단체 기합을 호되게 받은 적이 있다. 침투훈련이 끝난 강평시간, 이런 저런 흔적들을 지적당했다. ‘너희 모두 죽은 목숨’이라며 뺑뺑이를 돌리던 교관에게서 ‘군대에서 흔적은 남기지 않아야 하는 것’임을 뼈저리게 배웠다.
직장 선배 상사의 흔적 관념은 또 달랐다. 어느 부서 어느 지방을 가더라도 ‘자기의 흔적’을 남겨야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내심 존경하던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되어 열심히 좇은 적이 있다. 흔적을 남기고자 그 때같이 열심히 일한 적이 없다.
친한 친구 녀석의 기가 죽어 있다.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단다. 늙어가는 나이에 웬 주접이냐며 연유를 물었다. 주저거리는 폼이 무슨 잘못을 크게 저지른 모양이다. 바보 같은 놈. 흔적을 남겼으니 할 말도 없겠구먼... 핀잔을 주었지만 개운치가 않다.
기억의 저편에 파묻힌 나의 흔적들을 찾아 나선다. 띄엄 띄엄 부서진 조각들이 순서 없이 이리저리 손에 발에 느껴진다. 어느 쪽 편린인지 분별조차 없다가도 어느 순간 그래하며 섬광처럼 떠오른다. 한편의 글을 위해 오늘도 흔적을 찾아 헤맨다.
남겨야 하나 지워야 하나 고민이다. 내 삶에 대한 흔적은.(6.1)
발상은 좋은 것 같다. ‘흔적’이라는 제목으로 좀더 깊이 있는 사색을 해 보면 좋을 듯하다.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 남겨서 좋을 일과 남기지 말아야 좋을 일을 대비시켜 소재를 두루 구해보는 것이 좋겠다. 그것들을 통해, 흔적의 여러 의미작용을 이끌어내고 마침내 ‘내 삶의 흔적’ 문제로 사유를 귀결시켜 보는 것이다.
(8)이런 날 올 줄 알았지
구독하던 조간신문이 끊겼다. 화장실 들어갈 때는 아내에게 소지품검사를 받는다. 없는 새에 들어갔어도 중간에 노크도 없이 불쑥 문이 열린다. 가재눈 족제비눈이 내 손에 들린 게 있는지 살피고 문이 닫힌다. 요즘 아침마다 내가 치르는 일과다.
치질은 사람들에게 왠지 부끄러운 병으로 치부된다. 아마도 더러운 것을 배설하는 곳에 생긴 탈이라 그런 모양이다. 증상이 있는 사람도 없는 체 의뭉스레 넘기고 수술을 받은 사람도 드러내어 밝히지 않는다. 마지못해 수술 받은 사실을 밝히면 그제야 너도나도 이실직고한다. 의외로 그 수가 많다. 병원 대기실을 둘러봐도 그렇다. 항문전문병원이라곤 하지만 서너 명 의사의 진료실 앞마다 수십 명씩 엉거주춤 거북한 자세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1, 2분 진료나 면담을 위해 한 시간 기다림은 기본이다.
나도 언젠가는 수술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미뤄왔다. 호기롭게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 무리하게 몸을 혹사시킨 날이면 화장실에서 붉게 부어오른 그곳을 보며 불편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보낸 세월이 어언 수년째이다. 수술을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하고 난 후 꽤 오랜 기간 수반될 통증과 불편함을 두려워 한 때문이다.
직장 산악회에서 한라산으로 특별 산행을 가기로 한 날 아침에 일이 터졌다. 볼일보고 샤워를 하는데 욕조에 선혈이 낭자했다. 갑자기 출혈이 시작됐다. 좀체 지혈이 되지 않았다. 많은 휴지를 적시고 가제손수건을 흥건히 적신 후에야 겨우 멎었다. 비행기를 타면 기압이 높을 것이고 높은 산을 올라야 하는데 괜찮을까? 안가면 비싼 여행경비도 환불받지 못할텐데 아깝잖아. 고민 끝에 합류했고 술 한 방울 입에 안대며 조심했다. 다행이 탈 없이 산행을 마쳤다. 아내는 당장 수술을 하라고 채근했다. 등쌀에 못 이겨 병원을 수배해서 검사받고 수술날짜를 잡았다. 마침 추석연휴가 닷새나 되었다. 연휴전날 수술했다. 황금 같은 추석연휴를 해외여행 대신 병원에서 보냈다.
쓰리다. 따갑다. 묵직하게 아프다. 변을 묽게 해준다는 과일, 채소, 생고구마, 다시마에 식이섬유식품까지 챙겨 먹었는데 덩어리는 딱딱하고 굵게 나온다. 배변을 참다가 올챙이배가 되었다. 볼일 한 번 보고나면 진땀으로 온 몸이 흥건해진다. 그 놈이 잘라내고 꿰맨 자리를 할퀴며 미어져 나오니 입에서 악 소리가 절로 새어나온다. 좌욕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성난 곳을 위무해준다. 운전석에 앉아 운전도 해야 하고 의자에 앉아 근무도 해야 한다. 딸아이가 인터넷을 뒤져 ‘빵심이’ 방석을 사왔다. 원형 복원력이 탁월한 소재이고 도넛처럼 가운데가 빈 것이다. 그걸 출퇴근길에 들고 다니니 보는 이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들의 얼굴에 이내 의미심장한 웃음이 비죽이 스민다. 내 눈에 그리 보인다.
헐렁한 사각팬티 대신 몸에 착 달라붙는 삼각팬티로 바꿔 입었다. 생리대를 착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생리와 작별한 아내가 남겨두었던 패드를 남편인 내가 착용하게 될 줄이야. 상처에서 나오는 진물이 밖으로 새나오지 않는다. 무통분만처럼 무통용변은 할 수 없을까 부질없는 생각도 해본다. 빵심이 보며 웃는 사람들이 생리대까지 착용하고 있는 줄 알면 어떤 표정일까?
아침에 내가 하던 일을 회상해본다. 눈을 뜨면 기지개를 켠다. 일어나 창문을 열고 심호흡 복식호흡을 한다. 손을 비벼 눈과 얼굴을 마사지한다. 현관으로 가서 신문을 챙겨 화장실로 직행한다. 지면이 늘어 두꺼운 신문은 대충 훑어도 30분, 눈길 끄는 칼럼이 있으면 40분을 훌쩍 넘긴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 있다. 화장실 볼일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은 신문이나 책을 읽거나 새로운 기획 구상에 더할 수 없이 좋은 시간이다. 실제로 화장실에서 삼빡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고 신문이나 책의 독서를 통해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다. 한 때는 변기 옆 받침대위에 읽을 책을 서너 권씩 꽂아놓기도 했다. 맨손으로 화장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경멸하기까지 했다. 인간의 신체 장기는 주인의 습성에 맞춰 변하나보다. 배변도 찔끔찔끔 여유를 두고 나온다. 잔변감이 남아 또 기다린다. 오래 앉아 볼일을 보는 날들이 쌓이고 쌓이니 탈이 날 수밖에.
아내는 그런 나에게 잔소리를 달고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5분을 넘기지 않는다. 한 덩이만 싸고 나오란다. 나중에 또 마려우면 들어가란다. 자기 말을 안 듣는다며 언젠가는 고생하며 후회할 날이 오리라고 악담까지 했다. 악담을 한다고 발끈했지만 온전치 못한 뒷전 때문에 마음은 늘 불안하고 편치 않았다.
무슨 일이나 에든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상존한다. 매사에 다 통용되는 원칙도 없다. 효율적인 시간 활용이 개인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면에는 나쁜 습관으로 병들어가는 곳이 있음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했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요즘이다. (12.8)
문장의 흐름이 유려하다. 진솔하게 드러낸 화제들 자체가 독서의 즐거움을 준다. 비밀을 알아채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양가성이란 주제를 이끌어내는 솜씨도 거칠지 않고, 이끌어낸 주제도 무난한 작품이다.
(9)목걸이
여기저기서 청첩장과 부고장이 쉴 새 없이 날아든다. 말이 청첩장이나 부고장이지 실은 납부고지서다. 상호부조금이 가정경제에 많은 부담을 주고 있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부조금들이 일생에서 늘 비슷한 수준으로 지출되면 별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50대 중반부터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부조금이 급격히 늘어나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50대 중반이 되면 자녀들이 한창 출가할 때이다. 당연히 축의금 지출 횟수가 부쩍 늘어난다. 친구의 종류도 다양하다. 고향 친구부터 학교동기생, 사회 친구에 이르기까지 그 부류도 다양하고 숫자도 헤아리기 어렵다. 몇 년간 소식이 없던 친구도 어떻게 주소를 알았는지 청첩장을 보내온다. 축의금뿐만 아니다. 이제 한창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으니 하루가 멀다고 부음 소식이 전해진다. 부고장이 아니라 휴대폰 문자로 보내온다. 이제는 남이 대신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보내는 시절이 되었다.
은퇴하기 전까지는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활동영역이 늘어만 간다. 기존의 향우회나 동창회, 취미활동 모임도 시간이나 경제적 형편에 맞게 줄여나가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모임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회비와 모임에 필요한 경비뿐만 아니라 부조금 지출을 더 가중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 지위가 올라갈수록 체면치레해야 할 일도 더 늘어난다. 관리자가 되면 평사원일 때는 그냥 지나치던 경조사도 챙겨야 할 경우가 많다. 늦은 나이에 아직도 현역에 있다는 이유로 각종 모임에 간부를 맡으라고 등을 떠민다. 굳이 사양해보지만, 본의 아니게 감투를 쓰는 경우도 있다. 특별회비나 찬조금 또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아내가 집을 나설 때마다 옷 타령이다. 변변한 핸드백 하나 없다고 투덜댄다. 남편 잘못 만난 속내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여성들에게는 핸드백이 부의 상징처럼 되었다. 내 눈으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지만, 여성들은 명품핸드백이 로망이다. 여성들의 눈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핸드백조차도 예사롭게 보지 않는 것 같다. 그 가격도 가히 놀랄 만하다. 조그마한 백에 보석을 주렁주렁 단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비싼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어느 선배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황혼에 접어든 부인에게 새로운 반지를 선물하고자 이미 지니고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팔려고 보석상을 찾았더니 그 반지는 싸구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감정한 사람은 다름 아닌 20여 년 전에 그 반지를 판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사장은 자기가 판매한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정직하게 감정해 주는 바람에 바가지를 씌운 사실이 뒤늦게 들통이 난 것이다. 그때까지 애지중지하면서 남들에게는 내심 자랑했던 것이 가짜로 밝혀졌으니 부끄러움과 배신감이 오죽했겠는가. 사치 때문에 가짜 목걸이를 위해 10년 동안 숱한 고생을 한 부부이야기 소설 ‘목걸이’가 연상되었다.
이런 가식과 허세가 싫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나는 보다 실리적이 되었다. 친구들이 결혼식 때 비싸게 산 예물을 오래 지니고 있는 것을 보기 힘들었다.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도 신혼 초에 몇 번 자랑삼아 끼고 다니다가 어느 날 슬그머니 손가락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고급 명품시계도 잃어버리고 아쉬워하는 모습들을 자주 접했다. 나는 결혼식 때 한 돈짜리 18K 실반지 하나만을 예물로 받았다. 지금까지 내 왼손 약지에서 이탈한 적이 없다. 내 생일에도 은 특별히 기념하는 것이 없다. 형제들이 많은 가난한 시골에서 아이들의 생일잔치란 언감생심이었고 더군다나 내 생일은 음력 윤팔월이니 생일이 잘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우리 집는 내 생일은 물론이고 아내의 생일, 결혼기념일 따위는 거의 챙기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에게 은 부조금 정도는 별 부담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땅하게 돈 쓸 곳이 없는 것이 걱정인데 얼마나 얼굴 내밀기 좋은 기회일까. 무슨 모임에서 찬조금을 성큼성큼 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샐러리맨인 나에게는 이런 지출은 많은 부담이 되고 있다. 약간의 안면만 있으면 청첩장을 스스럼없이 보내는 이, 별 친분도 없으면서 어떤 단체에 같이 속해있는 사람에게까지 부조할까 말까하고 갈등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에는 모른척하고 지나치고 나서 당사자를 우연히 마주치면 돈 몇 만 원 때문에 느끼는 죄스러움이 수십만 원의 무게로 다가오기도 한다.
남의 집 길흉사는 챙기면서 집안의 생일이나 기념일도 챙기지 않았다. 아내 체면 살려주는 손가방 하나 선물 해 준 적이 없다. 아니 해 준 적이 없다는 표현보다 해 줄 능력이 없다가 맞는 말 같다. 중년의 사회적 체면이 어쩌면 모파상의 소설 속 가짜 목걸이가 아닐는지. 오늘따라 화장기 없이 퍼석한 얼굴, 남루한 차림에 고단한 일터로 출근하는 아내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보인다.
연상을 매우 조밀하고 차분하게 이끌어간 글이다. 문장도 그런 사고의 흐름에 부응하여 매끄럽고 자연스럽다. 잔잔한 감동을 준다. 대부분의 서민들이 살아가는 보편적인 모습을 들춰내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차적인 소재에서 가져온 제목은 다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10) 모임
천성이 눅진하지 못한 탓인지 집에 붙어 있을 때가 거의 없다. 가족과 저녁을 함께 먹는 일이 월례 행사만큼이나 뜸하다. 어찌 보면 외식이 많은 게 천성 탓이 아니라 모임이 잦은 탓이리라.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 이런저런 모임이 생겨났다. 가장 먼저 생기는 게 학교 동창회다. 학연을 따지는 사회 분위기가 숙지지 않는 한 동창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이 직장에서 맺어진 동호회 모임이나 친지들의 모임이 주류를 이룬다. 지금까지 거쳐 간 숱한 모임을 통해 나름대로 내 자신의 사회적 성장을 이룬 게 아닐까. 대화와 소통을 통해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지고 다양한 행사 참여로 안목이 깊어졌다.
초등학교 동기 모임에 처음 나간 것은 고등학교 다닐 때이다.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몇몇 친구들이 모임을 마련했다. 중고등학교를 남학교만 다녔기에 동기 모임에서 만나는 여학생들이 조금은 서먹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반창회가 이어졌지만 그 후로 각자 제 배필을 찾아 가정을 이루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지금은 연례행사로 만나는 동기회가 삶의 바탕을 여물게 한 초등학교 시절을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고 있다.
중학교 동기회는 졸업한 지 20년이 지나서야 마련되었다. 대구에서는 몇 안 되는 중학교 동창체육대회 참여를 위해 동기회가 결성되었다. 체육대회 전야제를 시끌벅적하게 치루고 나면 그 다음날 행사에 지장이 많았다. 지금은 격월로 모임을 가지며 어릴 적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운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때 그 시절을 떠올리며 동심으로 돌아간다. 3년 전부터 총무를 맡다보니 빠질 수는 없지만 동기들 간의 소통을 위한다고 생각하니 뿌듯함이 앞선다.
고등학교 동기들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모임을 가져왔다. 대구를 떠나 있는 동안은 동창체육대회 때 몇 번 참석할 정도로 그리 적극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0년 전에 우리 기수가 동창체육대회 행사를 치루면서 동기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대구 유수의 학교인지라 지금도 총동창회는 면모를 과시할 정도로 대단하다. 그 중에서도 우리 동기회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군인의 길로 들어선 동기들은 사령관이나 장성급이 되어 있고, 경찰청장이나 조달청장으로, 대기업 사장이나 부사장 등으로 출세한 친구들도 많다. 2년 전부터 동기회 총무로 500명이 넘는 친구들의 연락을 맡으면서 인간관계의 폭도 넓어졌다.
대학교 동기들은 졸업하자 말자 바로 모이기 시작했으니 거의 30년이 다 되어간다. 초기에는 매달 모여서 회식하며 오락도 즐겼다. 남학생들은 따로 친목계도 만들어 상호부조도 꾸준히 하고 있다. 참으로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들인데 요즘은 일 년에 몇 차례 모임을 가질 뿐이다. 모두가 같은 길을 걷고 있기에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만나다보니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해묵은 우정을 간직하고 있다. 동기회 회장이자 총무를 윤번제로 하다 보니 모두가 한두 번씩은 다 맡았다. 본인 결혼 축의금 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자녀들의 결혼 축의금을 받을 나이가 되었다. 대학 동기회와 함께 한 세월 만큼이나 나 자신의 안목도 더 넓어진 게 아닐까.
교직에 들어서면서 전문성을 신장하기 위한 단체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국어교사들의 모임인 국어교과연구회와 글쓰기 모임인 문예교육연구회에 오랜 시간 참여하면서 총무를 맡기도 했다. 양 모임의 총무를 다 거친 덕에 웬만한 국어교사들은 다 알고 지낸다. 연구회 활동으로 해외 연수까지 다녀왔으며 역대 총무들은 거의 다 승진까지 했을 정도니 모임이 주는 혜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의 모임인지라 언제나 활기차고 화기애애하다. 일 년에 두 차례의 연수회를 통해 정보도 나누고 친목도 다진다.
일가 어른들은 일찍부터 문중 모임을 가지며 친목을 다졌다. 매달 일정액의 회비를 내며 집집마다 윤번제로 모임을 주최했다. 이제 어른들 대부분은 돌아가시고 없지만 모임은 계속되었다. 우리 세대가 주축이 되어 매년 선산 벌초나 묘제를 주선하기도 한다. 20여년 전부터 이 모임의 총무를 맡아 제반 연락을 담당하고 있다. 해마다 봄에 한 번 모이고 음력 8월에는 벌초하러 음력 10월에는 묘제를 올리러 모인다. 모두 7대조 할아버지의 후손들로 열성을 다해 조상을 모시는 일에 앞장선다. 저마다 생업에 바쁘더라도 문중 일로 함께 힘을 모으다 보면 알게 모르게 조상의 음덕을 보게 된다.
외가 쪽 사촌들과는 어릴 때부터 자주 들락거렸다. 이모집이나 고모집, 외갓집을 뻔질나게 다니다보니 어느 날인가 모임이 만들어졌다. 거의 20년 가까이 모임을 가지면서 어른들의 칠순과 팔순 기념 잔치도 열어드리며 사촌들의 회갑도 챙기고 있다. 외조부와 외조모 사이의 6남매 밑으로 모두 22명의 사촌들 모임이니 성씨는 각기 달라도 마음은 한결 같다. 들어온 며느리나 사위들도 함께 자리하니 세상사 이야기 보따리들이 풍성하다. 이제는 우리 세대를 지나 자녀들이 모임의 빛이 되어 3대가 함께 어울리니 세월의 힘을 느낀다.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보며 지나 온 시절을 돌아보는 즐거움도 인생의 낙이 아닐까.
그 밖에도 이런저런 연유로 함께 삶을 나누는 모임을 들자면 한이 없다. 포항에서 다니던 학교를 인연으로 맺어진 모임이 두 개가 있고, 테니스를 즐기며 매주 모이거나 매월 만나는 모임도 있다. 정기적으로 일정액의 회비를 내며 함께 모이는 모임이 이렇다보니 가족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 최근에 와서는 매주 사흘은 취미와 전문성을 살리는 일에 할애하다보니 더더욱 집에서 저녁 먹기가 어렵다.
그래도 지금의 나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한 숨은 원동력은 모임의 힘이 아닐까 한다. 모임의 한 귀퉁이에서 존재를 자각하고 세상과 소통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된 것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했지만 내게는 이 모임들이 오늘의 나를 키운 것이다. (14.8매) (2013. 10. 15.)
한국인들만큼이나 이런저런 모임활동이 많은 민족도 없을 듯하다. 화자는 활동하고 있는 각종 모임을 반복적으로 나열했다. 그러한 모임 활동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고 세상과의 소통을 통한 자아 성장을 가져오게 한다는 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각종 모임 참여가 자기존재확인 또는 자아성장에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 둘 사이에 설득력 있는 어떤 인과관계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공동체의식이 강한 한민족의 속성을 드러내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11)균형
청도 와인 터널 가는 길은 가로수가 온통 감나무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 열매가 붉은 등을 달았다. 경부선 하행 열차도 감상에 빠진 듯 주춤거린다.
어릴 적 기차 여행에서 만나는 터널은 무섭기도 하고 호기심도 일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많은 터널을 만났다. 손가락 꼽는 재미에 덜커덩거리며 엉덩방아를 찧는 좌석도 불편한 줄 몰랐다.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가면 절망 가운데서 희망의 빛이 어리듯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언덕을 오를 때면 온 힘을 다해 뿌앙하던 경적 소리가 고단한 인생을 허덕허덕 넘어가는 부모님 같기도 했다. 기차여행이 아니면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추억 속의 터널이 술을 빚는 저장고가 되었다.
청도 와인 터널은 경부선 열차 터널을 정비하여 만든 곳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끄떡없어 보인다. 잘 지은 내부는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아치형으로 건설한 자연석이 눈에 띈다. 균형이 잘 잡혀 있어서 튼실해 보인다. 온도와 습도가 일정해서 와인이 발효 숙성되기에는 적당한 곳이라고 한다. 일교차가 심한 인간의 마음 온도와 비교된다. 인간 마음에 높낮이가 있는 것은 신이 준 숙제일지도 모른다. 온도가 너무 높거나 낮으면 탈이 나게 마련이니 적절하게 조율하면서 살라는 뜻일 게다.
와인 터널은 천연의 휴양지다. 상시 15도 정도여서 여름 여행에는 더없이 좋다. 잠시 카페에 앉아 와인을 시켜두고 다리쉼을 한다.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홍시를 무더위에 먹는 얼얼한 맛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메뉴이다. 어느 이국땅에 온 듯한 묘한 기분이다. 와인을 혀끝에 대어 본다. 닿는 감촉이 떫다. 타닌의 텁텁함이다. 제대로 숙성이 되지 않아서 목구멍이 뿌드드하다. 신혼 첫날밤의 떨떠름한 그 무엇 같다. 숨죽이고 설레며 잔뜩 긴장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운 그런 기분이랄까.
내가 와인 맛에 서툴 듯이 삶도 디캔팅이 되지 않아 부작용이 생겼다. 타닌이 혀를 마비시키는 듯한 그런 순간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었다. 삶은 간단하지 않았다. 수학 교과서처럼 공식만 넣으면 술술 풀리는 그런 문제가 아닌가 보다. 조금 익숙해지려 하면 또 다른 문제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끝도 없이 도전하게 하고 지치게 했다. 세상을 좇으면 되지 않는다는 것도 풀리지 않는 숙제를 받아보고서야 알게 된 것 같다. 삶의 처방전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평온한 척하지만 가슴에 가시 하나쯤은 품고 살지 않는가. 그 가시로 가족을 향해 찌른 것이 배가 되어 돌아올 때 아차 싶던 아뜩함에 뼈가 저린 경험이 있었다. 혼자 상처를 처매면서 울던 일도 삶의 뒷면에 있었다. 마흔 즈음에야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평화롭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자꾸만 열리려 하는 마음을 닫아두기 위해 자존심을 부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쉰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포기하고 나서야 편안해지는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는 답을 얻는다. 남은 생은 진흙탕에 남긴 바퀴 자국을 서서히 지워가며 살고 싶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안도할 수 있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느 노란색 페인트칠을 해놓은 대문 앞에서 두런거리던 희망을 보던 일. 안간힘을 빼서 행복해 보였었다.
욕심을 빼면 눈이 열리는 것 같다. 책을 읽다가 마지막 문단에 이르러서야 주제를 발견하듯 삶의 답도 지긋함에서 얻어지는 게 아닐까.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균형을 맞춰나갈 때 평안을 맛보는 것이리라. 알코올 도수가 70도나 되는 브랜디를 와인에 넣어 발효를 중지시키면 포도의 단맛과 과실 맛이 남게 된다. 부부 싸움 뒤에 오는 이불 속의 한바탕 들썩임 같다.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면 잠에서 깬 와인이 아로마와 부케를 발산한다. 부드러운 향이 폭풍 후의 고요를 맞는다. 와인의 빛깔이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 있듯이 달콤한 맛, 쓴맛, 신맛이라는 삶의 고비를 거치고서야 비로소 숙성되어 지는 것 같다. 비싼 수업료를 치른 후에 맛보게 되는 1등급 와인이 되는 것이다. 삶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서 3등급이 1등급도 되지 않을까. 아무리 고급 와인이라도 음미할 줄 모른다면 소주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격이리라.
와인은 맛을 열기 위해 디켄팅이란 과정을 거친다. 쓴맛, 신맛을 거치면서 첫 키스처럼 부드럽고 달콤해진다. 고집도 꺾고 비강의 텁텁함도 떨쳐내면서 중후한 맛을 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균형 잡힌 맛이다. 나뭇잎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질서를 지키는 것과 같다. 오른쪽에서 잎을 틔우면 다음에는 왼쪽에서 잎을 낸다. 그들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삶의 균형을 잡아간다. 자연이 주는 교훈이다. 질소 가스를 넣고 다시 펌프질해서 내부 공기를 빼야 제맛을 내는 와인처럼, 삶의 결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나를 빼는 일인지도 모른다.
멍에와 쟁기를 잇는 두 가닥의 타줄은 조율을 잘해야 앞에서 끄는 사람이나 미는 사람이 편안하다. 앞에서 끄는 사람이 남편이든 아내이든 한 쪽에서만 팽팽하게 당기면 끊어지고 말 것이다. 이럴 때는 줄을 풀어 느슨하게 힘을 빼줘야 땅을 갈 수 있다. 인생도 이처럼 적절하게 힘을 배분할 줄 알아야 순조로울 성싶다. 이해와 양보, 배려라는 균형인지 모른다.
내가 미처 내지 못했던 맛이 소믈리에의 손을 거쳐 부드럽고 섬세해진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디캔팅하는 모습이 성스럽기까지 하다. 누구도 채워주지 못했던 마음자리가 가만히 있어도 편안해진다. 균형 잡힌 맛 때문일까. 입안이 꽉 차고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심오하고 잔 향이 오래도록 남는다. 여운이 오래 남을수록 훌륭한 와인이라고 한다. 눈보라 속에서 피어난 동백꽃을 보는 것 같다. 삶도 균형이 잡혀 탄탄하면 이런 맛을 내지 않을까.
감나무에 어둠이 내린다. 벌겋게 타오르던 태양도 낯빛을 숨겼다. 그림자를 싣고 굽이굽이 돌아오는 길에 하현달이 걸렸다.(14. 7매)
와인 터널, 와인 터널의 구조 및 온도의 균형성, 숙성되지 못한 와인 맛 디캔딩 등등을 이야기하면서 삶을 이들에 반추해 본 작품이다. 각 부분마다 둘 사이의 비교가 무리없는 연결고리를 찾고 있는가?
이 작품은 순탄하지 않은 삶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터득하고자 하는 데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균형의 유지가 그것이라 한다. 이 작품을 이렇게 바라볼 때, 멍에와 쟁기를 잇는 타줄의 삽입은 주제의 강화에 협력할지는 모르나 구조적 통일성은 깨뜨리는 흠결이 될 수 있다.
(12) 항변
멀리 사는 막냇동생이 김치를 보내달란다. 나이 마흔 중반을 지나고 있건만 아직 밑반찬이며 김치 종류는 큰언니네 걸 내놓으란다. 아무리 다니며 먹어봐도 언니네 것만큼 맛있는 건 없단다. 얻어가려는 수단인지 정말인지 알 수 없지만, 또다시 부리나케 만들어 한통 가득 넣어 보내준다.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면서 끝에는 꼭 같은 자매인데 왜 저는 음식솜씨가 없는지 모르겠다며 언니는 유전자를 잘 타고 났다 보다고 한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은 때부터 남편은 손님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툭하면 친구들이 된장찌개 먹고 싶어 왔다며 안방에 들어앉았다. 직장에 업무차 온 손님까지 아침 대접할 식당이 없다면서 꼭두새벽에 깨워 아침준비를 시켰다. 영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한 내게 현관문을 나서는 손님들은 음식솜씨가 좋다는 인사를 하고 갔다. 남편은 장모님이 잘 가르치셨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시댁 방문 때에도 반찬 하는 일은 맏며느리의 절대 권한처럼 주어졌다. 새댁 때 했던 파무침이 별미였다고 이십 년째 칭찬이다. 매운 파를 그대로 버무리다가 식초 물에 담가 매운맛을 빼고 멸치액젓에 조청을 넣어 단맛을 낸 것이 색달랐나 보다. 가을이면 무밭 하나를 다 솎아낸 산더미 같은 열무를 손질해서 김치를 담가 다섯 집이 나눈다. 동서들과 시누는 집에가서 담가 먹으라 해도 들은체도 않고 형님이, 언니가 해야 맛이 있단다.
요즘 들어 딸아이가 요즘 들어 부쩍 시집가도 엄마 옆에 살겠다는 소리를 부쩍 자주 한다. 속내가 뻔하다. 밥상 앞에 앉으면 전에는 엄마가 뭐도 해주고 뭐도 해 줬었는데 하며 주섬주섬 음식이름을 주워댄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음식다운 음식해 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 외식문화 발달 탓도 있겠지만, 음식 만드는 여러 과정이 이제는 번거롭고 힘겹게 느껴진다. 이런 내게 아직도 옛 모습에 대한 기대치가 여전하다.
나 솜씨 타고난 것 없다. 엄마에게 배운 건 더욱더 없다. 우리 엄마는 부잣집 막내딸, 그것도 외할머니 마흔 넘어 낳으신 늦둥이다. 위로 다섯 이모에 외삼촌까지, 그 앞에 늘 애처로운 막둥이였다. 여덟 살까지 등에 업혀 다녔다는 그 응석을 짐작만으로도 알만하다. 시집은 농사꾼에게 와서 들에 한번 나가본 일 없는 분이다. 집안 살림도 할머니가 다 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 사업 시작으로 하게된 도시 생활은 기가 막히는 엄마의 홀로서기였다. 음식솜씨는 참으로 없었다. 아침내내 만들어준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면 굵은 멸치가 머리째 누워있고 무 말랭이는 말라서 며칠이 지난 것 같았다. 친구들 콩 자반은 반들반들 촉촉하니 맛도 있건만 내 콩반찬은 밭에서 금방 들어와 앉은 것처럼 때굴때굴 제각각 굴렀다. 그때부터 슬쩍슬쩍 친구들 반찬을 훔쳐봤다. 집에 와서는 슬금슬금 엄마 반찬 만들기를 간섭했다.
급기야 중학교에서 가사실습을 하고 난 뒤부터는 내가 만들기 시작했다. 도시락 반찬에서 시작된 이 일은 나이 들어가면서 식구들 끼니때 반찬까지 훈수를 뒀다. 주말이 되면 동생들이 언니야 누나야 맛있는 거 해 달라고 난리가 났다. 요리책을 구해놓고 밥 고로케도 만들고 고구마 과자도 만들고, 온 가족이 즐거워했다. 새로운 걸 만드는 재미도 좋았고 해 놓으면 식구들이 맛있다며 먹는 것도 좋았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하던 음식 만드는 일을 딸이 맡아서 제일 신 나는 건 엄마였다. 하고 난 뒤에는 한 보따리의 칭찬을 부어줬다. 음식이 조금 넉넉할때는 이웃에 나누어 주며 우리 딸이 만들었다고 자랑을 음식의 서너 배나 얹었다. 어찌 손을 놓을 수 있었으랴.
결혼 후 밥상은 또 다른 숙제였었다. 식성과 음식종류 양념까지 모두 달랐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알면 더 힘 드는 것 같았다. 대충대충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내 맘에 들도록 밥 한상 차려 내는데 두 시간이 걸렸다. 그 대책 없는 열성이 그렇게 사람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일 줄이야. 그러고 보니 이런 나를 만든 게 엄마가 맞긴 맞다. 엄마가 음식을 맛있게 만들었다면 난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내 솜씨라는 것은 능력과는 아무 상관 없이 필요에 의해서 조금 더 발달했을 뿐일 것이다. 단언컨대 솜씨는 필요와 관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칭찬에 실려서 익어 간다. 좀 더 잘하고 못하는 차이, 좀더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노력은 어떤 모양새로든 열매를 맺는다. 음식에서 취향과 입맛은 제각각이다. “너거 먹고 싶은 건 너거가 만들어 묵어라.” 요즘 나는 이렇게 항변하고 싶다. 솜씨는 필요와 관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칭찬에 실려서 익어 간다.
나날이 발달하는 식문화를 접하며 그 입맛 녹이는 음식들에 기가 질린 퇴역 주부의 변이다. 해 놔도 먹을 사람 없는 밥상을 만들기 싫은 심술이다. 중년의 변신을 꿈꾸는 어설픈 반란이다.
화자의 음식 솜씨에 대한 주변의 칭찬과 그런 솜씨를 갖게 된 계기를 매우 자연스럽게 펼처놓고 있다. 문장의 연결이 가져오는 일관성도 잘 갖추어져 있다. 잘 쓰여진 작품이다. 그런데, 의미부여가 문제다. ‘솜씨는 필요와 관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칭찬에 실려서 익어 간다.’는 것으로 주제를 삼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항변’이니 ‘중년의 반란’이니 하는 것으로 의미화하기에는, 그 이전 과정에서 제시된 단락들의 초점 지향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지나친 비약이 나타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제목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13) 올케
가을의 초입이다. 활짝 벙글은 어린 황국에 내려앉은 햇살이 유난히도 눈부시다. 오늘따라 창공은 더 멀리 달아나 청명하다 못해 깨어질 듯 무채색 곡유리 창이다.
작은 올케가 아기를 낳았다. 쌍둥이다. 복도 많지, 이란성 쌍둥이라고 했다. 하루하루가 무섭게 변화하는 인간의 진화인가. 태어난 지 몇일 안 되었건만, 젖 먹이고, 재우고, 씻기를 한달은 족히 하여 바깥세상에 제법 적응이 된 아기모습이다. 코가 오똑하고 팔과 다리는 마음대로 꼬물꼬물거리고 눈은 지긋이 떳다가 감았다를 재미삼아 반복한다. 입술은 오물오물 제법 의미로운 배내짓을 한다. 애기를 한번도 안키워본 사람마냥 신기하다. (비유로 처리된 종속절의 주어와 주절의 주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신기하다’의 주어를 상정해 보면 이 문장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쌍둥이를 낳은 올케는 올해 마흔이다. 나이는 40이다. 한창 나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지만 아기를 낳기에는 늦은감은 없지 않다. 처음 수태가 되었을 때 낳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를 고민하길래 식구들은 너무 늦은 나이에다 약 한 가지를 복용는 중이니 생각 잘해보란 말을 선뜻 해주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식구들 모두는 제대로 표현을 할 수는 없었지만 늦은 자식을 봐서 고생할까 내심 걱정을 한 건 사실이다. 질녀가 셋이나 있기도 하고, 동생내외가 나이 들어서까지 아이들 키우려면 여간 고생이 아닐게 뻔하기 때문이다. 자녀가 여럿이다 보면 다른 집들보다 교육비와 양육비가 많이 든다. 어쩌면 동생이 감내해야할 고생을 생각해서 반대입장에 섰다고 하는 게 더 솔직한 심정일 게다.
고부간의 힘든 일도 털어낼 만도 하건만 오히려 흠잡을데 없이 훌륭하다는 말만 늘어놓는 나의 친정 엄마가 내게 속마음을 보인다. 자식은 낳을수록 귀하고 새롭지만 이젠 저희 부부건강을 돌아보며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나 잘 키우는 게 옳지 않느냐고 용감한 제안을 했단다. 의외였다고 한다. 위하는 마음에 그리 말한 시어머님을 힐끗 쳐다보는 모습이 많이 섭섭하다는 표정었다고 한다. 엄마는 맏딸인 날 향해 걱정이 늘어졌다. 저희를 위해서 큰마음먹고 한 말이 맘에 걸린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부터는 가족 모두는 말 조심에 주의를 기울였다. 단 천하태평 내 여동생만 지복그릇 지가 갖고 나는데 무에 걱정이냐고 했다.
진통이 오고 첫 번째 울음을 크게 터뜨리고 나온놈이 아들이다. 요즘은 아이를 낳을 때 남편이 같이 참여하나보다. 동생은 방금 세상밖으로 나온 사내 아이를 사진에 담았다. 말로는 ‘요렇게 귀여운 공주들이 있으면 되지 아들해서 낳아 뭐하냐‘ 던 동생이지만 그 기분은 말과는 분명 다르리라. 드디어 동생네 집에도 구색이 갖춰졌다. 현관문을 열면 여식애들만 쪼르르 있던 집에 자신을 닮은 아들 하나 더 섞인다는 건, 살다 보니 얻은 반가운 선물이 되리라. 동생은 아들이 아기가 태어나기 전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반응은 안 보이는데 내가 너무 앞서가는 걸까. 내 혼자서 오만 생각을 만들어 낸다. 동영상 한컷이 또 돌아간다. 오분을 사이에 두고 둘째놈이 세상밖으로 나왔노라고 신고를 해댄다. 이번에는 까랑까랑한 울음소리다. 영락없는 여식아이 목소리다. '아따 고놈 성깔 대단하겠는데’ 대단하다는 건 세상살이 헤쳐나가기엔 아주 안성맞춤이라고 여긴다. 내 마음도 어지간히 급하지. 조놈이 오분 먼저 난 지 오래비를 눌르기라도 (직접 인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구어체 그대로, 소리나는 대로 적지 않아야 합니다.) 할까봐 고모되는 나로써 은근히 신경이 간다. 젖을 먹고도 먼저 난놈은 쿨쿨 잘도 자지만 둘째놈은 빽빽 소리를 질러 댄단다.
오래비 깰라 시끄럽게 하지마라고 공주를 향해 농을 던져도 올케는 빙그레 웃는다. 남아선호의 색채를 곁들인 농을 듣고도 맘에 걸림이 없는가 보다. 저번에 셋째 낳았을때는 할미에게 맡겨놓은 아이들 걱정에 얼굴에 근심이 자욱하더니 이번에는 세상편한 얼굴이다. 집에두고온 여식아이들 김밥 싸서 소풍을 보내야 하는데도 아무런 걱정을 않는다. 다 잊은 모양이다. 아들이 뭐길래? 남들 가진 것 다 가져보고싶다면 몰라. 아들만 둘 가진 내가 보기엔 아들이고 딸이고 거기서 거긴데....
딸 아들 구별말고 건강하게 잘키우자 는 의식이 자리잡은지 오래다. 부모가 바라보는 자식에 대한 개념이 확연히 달라졌다. 종족보존에 있어 기준이 되던 남아선호 사상도 언제부턴가 물 흐르듯 인간생명 중심주의로 순리대로 흘렀다. 미래에는 부부간 경제활동의 주체자가 남편이 아닌 아내가 되기도 하는 실리적인 가족형태로 변모해 갈 것이다. 동생내외도 딸만 셋이 있지만, 다른 형제의 아들을 부러워한다든지 아들 하나 낳아볼려고 보려고 노력하는 의중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들아기가 생기고 난후 얼굴에 도는 생기를 볼라치면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고만 보여지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어가든 말든 본인 입장이 되어보면 있을건 있어야 되는가 보다. 올케의 얼굴은 보름달아래 피어난 환한 박꽃이다. 동생내외도 이제 구색은 갖춘셈이다. 올케의 더 밝아진 모습에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니 다행 이상이다. 저 아이들을 어찌 키울까 하던 내 생각은 오히려 부질없는 근심이었다.
조리원에서 집으로 옮겨온 쌍둥이는 언니들의 떠드는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잘먹고 잘도 잔단다. 세 공주가 쌍둥이 옆에 잘려고 서로 다툰다고 한다. 언니 셋이 있다는건 쌍둥이에게 복이고 쌍둥이는 세 공주들에게 신비로움과 행복이 되어 주었다. 지복그릇 지가 타고난다고 한 작은고모인 내 여동생 말이 맞아 떨어졌다.
최근 부부 맞벌이 시대에 접어들면서 자녀양육문제가 대두되었다. 기혼 가정에 한자녀 이상 출산하는 가정이 드문관계로 인구감소 현상이 극심하다. 국가적인 문제로까지 치닫다 보니 세 번째 자녀출산가정은 교육비를 비롯해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졌다. 동생내외는 형제가 많으면 서로 도우며 저절로 커간다고 했다. 자주적인 독립성 강한 인성을 갖추게 되는 장점이 있으며, 아울러 국가로부터 양육의 혜택도 받을수 있어 생각보단 아이양육비에 허덕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자식, 재물, 명예, 무엇이든간에 남 가진거 나도 취한다는건 희망적이고 즐거운일이다. 내것이 아닌걸 탐내지 않고 내게 어울리지 않는 욕심만 가린다면 말이다.
세 번째 동영상이 스마트폰에 “까톡” 하며 ’피용’ 뜬다. 토끼같은 질녀들이 쌍둥이를 뱅그르르 애워싸고 앉아있다. 제일 큰 놈은 아기에게 우유병을 물리고 있다. 늦깍이 엄마의 얼굴에 안온한 미소가 머문다.
벽에 걸린 작은 그림 한점에 내 시선이 멈췄다. 활금물결 일렁이는 풍요의 가을들판. 가을걷이를 막 끝낸 아낙의, 폭이 넓어 풍성한 앞치마. 올케의 눈가에 가득 고인 미소가 평화롭기 그지없다. (16.1)
이미 세 명의 딸을 둔 동생 내외가, 늦동이로 쌍둥이 남매를 낳아 기뻐하는 모습을 가을걷이를 끝낸 아낙의 평화로운 미소에 비유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동생 내외의 기쁨과 그들의 양육에 대한 화자의 근심이 잔잔한 긴장을 조성하는 가운데, 조카들의 탄생을 축복하는 화자의 은근한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14)둥지
두 사람이 우두커니 앉아있다. 어떠한 미동도 없이 T.V만을 뚫어지라 보고 있다. 딱히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애꿎은 커피는 주인의 체온을 느끼지 못하고 식어 가고 있다.
막내 녀석이 중학생이 되면서 우리 집에 새로 생겨난 밤 풍경이다. 학교에서 사교육 절감 차원으로 아이들을 붙잡고 있다. 아침 일곱 시 반에 등교하면 밤 아홉 시 반에 귀가한다. 아이가 있어 끊이지 않던 대화도 언제부턴가 필요한 말 외에는 오가지 않는다. 마치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각자의 영역이 생겨 버린 것 같다. 밤 아홉 시가 되면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러 간다. 사내아이 둘 복닥거리던 거실은 이제 허허로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많은 시간이 갑자기 주어져 무엇을 해야 할지 숙제가 되었다.
삼 남매를 키우던 어머니는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 혼자 집을 지킨다. 혼자 보내는 밤은 얼마나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질까. 내 둥지가 비기까지 혼자 계신 어머니의 빈 둥지를 눈여겨보지 못했다. 일상에 묻혀 하루가 가고 또 다른 하루가 내게 주어졌다. 나이가 들면 외로움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들었지만, 그 외로움은 어머니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조차 관심 밖이었다.
침묵을 깨고 남편이 저녁 시간을 이용해 운동하자고 제안했다. 저녁에 넋 놓고 있는 것보다 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 흔쾌히 허락했다. 집 근처에 있는 골프 연습장을 찾았다. 세련되고 현대적인 분위기는 나를 압도했다. 적응되지 않았다. 하나같이 갖추어 입은 옷하며 비싼 골프가방은 ‘이 정도는 되어줘야 공을 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내 모습을 훑어보았다. 준비 없이 온 나는 스스로 이 장소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하더라도 갖추어야 할 기본이 있는데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오지 않았나 싶었다. 내가 여기서 공 칠 이유를 모르겠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은 있다며 곧 적응하게 될 거라며 나를 만류했다.
공을 칠 때 손목에 힘을 빼라고 한다. 말처럼 몸이 쉽게 따라주지 않는다. 힘을 빼는 데 삼 년이 걸린다고 하니 꾸준한 연습이 필요했다. 나도 모르게 손목에 힘이 들어가 공은 반대방향으로 날아간다. 가르치는 사람은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흐름에 몸을 맡기라고 한다. 세상살이도 움켜쥐려고 하면 더 멀리 도망치지 않던가. 물 흐르듯 살아야 모든 일이 순조로움을 (목적절이므로 주어+술어를 갖추어야) 운동을 통해 배운다. 욕심을 부리니 작은 공마저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큰아이 세 살 때 일이다. 그때도 지금 못지않게 조기교육 열풍이 불던 때다. 나는 뒤질세라 일찌감치 조기교육에 편승해 세 살 된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그것도 모자라 한글도 깨쳐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를 다그쳤다. 설익은 모성애가 아이를 얼마나 지치게 하였을까 생각하면 마음 깊이 후회된다. 내 눈먼 이기심을 일깨워 준 사람은 어린이집 선생님이었다. 아이가 소심하고 눈물이 많은 것은 나의 양육 태도 때문이라고 긴 편지에 적혀 있었다. 읽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내 욕심에 가려 아이가 아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아이의 삶을 어떤 형태로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워졌다. 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내가 품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이를 올가미에 가두고 말았다. 아이의 장래를 걱정한다는 핑계로 내 욕심 채우기는 아니었는지 되짚어본다. 공을 칠 때 힘을 빼는 데에도 삼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데 기다려 주지 못했다. 아이의 손만 잡고 달리면 되는 줄 알았다. 달린 만큼 아이의 마음은 아팠으리라.
아이가 앞서 가는 데만 집중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한 발짝 물러나는 연습을 했다. 소심한 내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하던 영어와 학습지를 그만두고 놀이터로 나갔다. 아이는 흙을 만지며 얼굴이 밝아졌다. 작은 아이는 형의 아픈 기억의 담보로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큰아이에게 빚진 마음이 든다. 성장은 어제와 다른 오늘일 터인데 어미 노릇이 처음이라 많은 부분 서툴렀다. 넘치는 것은 모자라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큰아이가 가르쳐 준다.
늦은 밤 아이들이 돌아왔다. 허허로웠던 거실에 온기가 돈다. 혼자 계신 어머니와 겹친다. 우리 아이들도 언젠가는 둥지를 떠날 것이다. 그때 나도 빈집에서 외로움을 친구삼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내리사랑보다 치사랑은 왜 이리 힘이 드는 걸까. 생각만 하다 세월이 가버린다. 얼기설기한 둥지에서 건강하게 자라 준 아이들이 고맙다. 아이들의 웃음에 내 코가 실룩거린다. 오늘 하루 힘들었다는 아이들의 푸념도 정답게 들린다.
골프를 치는 원리에서 아이들 교육방식에 대한 성찰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큰아이에게 영어교육을 시켰던 경험을 드러내는 데 동원된 구체화된 진술방식이나 적절한 비유에서도 작가의 글재주가 확인된다. 골프의 원리에서 삶의 지혜를 깨우치는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이 글은 이런 의도로 씌어진 글이 아니다. 그러니, 글의 전체성이라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뭔가 석연찮다. 이유가 무엇일까. 제목이 둥지다. 주제도 둥지에서 이끌어내야 한다. 서두와 결말이 둥지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특히, 서두에서의 둥지와 결말에서의 둥지가 같은 둥지이면서 같지 않다. 아이들이 있고 없음에서 오는 온도 차이이다. 그 중앙에 아이들 이야기가 들어 있다. 언뜻보기에 구조적으로도 잘 쨔여진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15) 프러포즈
러시아 여행 중에 아내의 생일이 끼어 있었다. 집에서라면 물심양면으로 생일을 챙겨줄 수 있겠지만 여행지에서 대체 어찌 해야 할까. 여행길에 오르며 그 생각이 내내 머릿속에 남았다. 미역국은 언감생심이고, 바쁜 일정에 케이크조차 장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축하한다는 말로 그냥 때워버릴까 생각하니 뒤가 켕겼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찾아보면 괜찮은 길이 있는 법, 생각이 거기 미치자 내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여행일정을 체크해보니 열흘간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바로 이튿날이 아내의 생일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횡단 열차로 밤낮 없이 달리다가 무료한 시간에는 끽연 공간에서 노래를 불렀다. 수면 중인 분들을 고려해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이것이야!” 그것은 아내의 생일날 저녁식사 시간 때 스물 남짓 일행들 앞에서 아내에게 노래를 불러 공개 프러포즈를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혼 전 아내에게 제대로 프러포즈한 기억이 없다. 멋진 남편들이 가끔 은혼식 금혼식에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주기도 하지 않던가.
여자의 마음은 시베리아 평원에 부는 여름 훈풍처럼 보드랍다가도 스탈린 양식의 첨탑처럼 뾰족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젊은 세대의 멋진 프러포즈 이벤트를 티브이에서 보다가도 꼭 자신의 경우를 돌아보는 게 여자다. 기억의 창고에서 남편한테 받았던 프러포즈를 아무리 떠올려 보지만 그게 형통할 리가 없다. 더구나 자신이 과거 남편한테 먼저 프러포즈한 경우는 뒤늦게 억울한 나머지 남편이 밉살스럽기만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이유 없이 뾰로통해 있거나 원망하는 어투로 쏘아댄다면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히스테리의 타깃이 되지 않으려면 미리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어리석게도 여자의 본성에 무지해 시쳇말로 간 큰 남자로 살아왔다. 늦게 철이 들어 마침 시베리아 여행을 계기로 절치부심 중인데 나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향후 십년은 아내에게 대접받고 살지 싶다. 아내의 쇼크가 클수록 효과는 높기에 끝까지 비밀을 지켜야 한다. 무슨 노래가 좋을까. 감미로운 오페라 아리아가 제격으로 보였다. 선뜻 조르다노의 오페라 <페도라>가 떠올랐고, 로리스 백작이 부르는 아리아 <어쩔 수 없는 사랑(Amor Ti Vieta)>에 방점을 찍었다. 티격태격하는 사랑싸움이 재미도 있지만 황녀 페도라의 태도가 어쩌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바로 그 내숭과 빼닮았다.
틈만 나면 객차 사이의 끽연 공간에서 노래를 불렀다. 러시아인들은 웬 담배를 그렇게도 많이 피우는지, 우리처럼 금연구역이 따로 없고, 남녀 공히 담배를 입에 물고 다녔다. 담배연기에 취약한 내 호흡기는 이틀 만에 사단사달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자 목구멍이 깔깔칼칼하고 따끔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목감기가 오더니 이내 코감기로 번졌다. 목이 잠기면 노래를 할 수 없어 프러포즈 이벤트고 뭐고 물 건너 갈 게 뻔했다. 내가 노래하는 것을 단장이 들었는지 우리 객실 앞을 지나며 나중에 바이칼 호숫가에서 노래 몇 곡 불러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했다. 부랴부랴 일행한테 감기약을 구해 복용했다.
삼박사일 사인용 침대칸에서 또 다른 부부와 동거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부가 서로 만나 함께 살아온 인생역정을 돌아보고,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자녀들이 커서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여생을 보낼지 포부를 말하고 덕담을 나누었다. 대놓고 배우자 흉을 보다가도 종내에는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자인하는 쪽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런 가운데 깜짝 이벤트를 꼭꼭 숨기고 아내를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날렸고,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아내가 빤히 쳐다볼 때는 눈치를 챈 게 아닌가 싶어 화들짝 놀랐다.
새벽에 하바로브스크를 지나 여명에 반짝이는 아무르 강(흑룡강)을 바라보았다. 두 손에 닿을 듯 차창 너머 자작나무 숲이 스쳐 지났다. 그러다 삼나무 숲이 나타나기도 했다. 여름날의 시베리아는 약간 더웠고, 창문에서 드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어찌 이다지도 땅이 넓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사일 만에 바이칼 호수 근린도시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온천 리조트에 짐을 풀었다.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숙면을 취했지만 감기증세는 완화되지 않았다. 이벤트가 수포로 돌아갈까 봐 걱정이었다. 바이칼에서 목감기를 이유로 노래 부르기를 사양한 나는 프러포즈 계획을 단장에게 밝혔다.
이르쿠츠크에서 일박을 하고 시베리아 기차를 탔다. 사박오일을 달려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도 감기는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역사와 문화의 도시를 둘러보고는 예술의 거리 아르바트에서 시인 푸시킨의 흔적과 조우했다. 어린 아내를 지키려고 깐죽대는 무뢰한과 결투를 벌였다가 요절한 푸시킨처럼 끝까지 열혈남아로 남아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황혼의 아르바트에서 어느 기타리스트의 연주가 매력적이었고 환상적인 감동을 주었다. 그날 밤의 식당은 오붓하고 음식 맛도 좋았는데 이튿날도 그곳에서 식사한다니 다행이었다. 어떻게 프러포즈 할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며 한참이나 궁리하느라 바빴다.
이튿날 미리 가이드에게 케이크와 장미를 부탁했다. 저녁식사가 나오자 단장이 갑자기 일어나 모종의 이벤트가 있음을 알렸다. 케이크와 장미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엉겁결에 앞에 나가 좌중을 향해 아내 생일을 축하해달라고 말하고, 37년 전 하지 못한 프러포즈를 해도 되겠느냐 묻고는 노래를 시작했다. 감기여파로 입안이 바짝 마르고 목소리 또한 컬컬했다. 노래를 마친 후 아내한테 가서 영화처럼 무릎 꿇고 장미를 바치는 게 순서인데 하릴없이 그냥 자리로 돌아오자 모두들 “포옹해, 포옹해”라고 외쳐 아내를 꼭 안아주었다. 가이드가 뒤늦게 장미와 케이크를 들고 나타났지만 이미 상황은 끝나고 말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아내는 식당에서 내 옆구리를 찌르며 한번, 그날 밤 침대 머리에서 또 한 번, 신기하다는 듯 내게 물어왔다. (15매)
여행 중에 아내의 생일 축하를 위한 이벤트를 궁리하고 마침내 실행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리 대수롭지 않은 평범한 소재이고 발상인데도 이 글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감동이라기보다 흥미로움 때문이다. 가슴 뭉클한 사랑의 감동보다는 스서펜스를 수반한 구성의 장치 때문이다. 계획한 이벤트가 무사히 진행될 수 있을지라는.
(16)가토(加土)
전화기 속에서 목이 몹시 잠긴 장모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큰일 났네. 동네 사람들이 장인 산소 수멍 만들어 놓은 거 보고 산소 함부로 건드리만 안된다고 난리가 났네. 나는 말짱하던 목이 왜 맥지 아픈고 으이? 시간 나거든 빨리 내리 와서 으애 좀 해보게”
대답할 겨를도 없이 용건만 전한 장모님 전화는 바로 끊겨 버렸다. 따져보고 망설일 일이 아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효도하려는 선의의 마음이 잘못되면 장모님의 건강 책임까지 모두 덤터기를 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미적거릴 여유도 없이 토요일 오후 바로 처가로 향했다.
작년 가을 장인이 돌아가시고 봉분 앞에 석축을 쌓을까 하다가 그냥 잔디를 심었다. 그리 높지가 않았기에 인위적인 석축보다는 일단 잔디를 심고 일 년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묘지의 면적이 넓은 관계로 산소에 고인 많은 물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잔디를 쓸고 내려갔다. 몇 군데나 보기 싫게 움푹 파여 골을 만들었다. 처가에 내려갈 때마다 파진 골을 때우고 다시 잔디를 입혔지만 비만 오면 들여놓은 공은 매번 허사가 되고 말았다.
비닐을 덮을까 차광막을 칠까 고민하다가 아주 기발한(?) 방법이 떠올랐다. 산소 끝자락의 낮은 곳 세 군데를 택해 PVC 파이프를 땅속에 묻었다.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다가 잔디가 벌면 걷어낼 요량이었다. 비가 왔다. 신기하게도 물은 지붕의 빗물이 물받이 파이프를 타고 내리는 것처럼 묻어놓은 물길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이제는 비가와도 축이 무너지거나 잔디가 쓸려가는 일은 없을듯했다. 그것을 보고 장모님도 크게 만족해했었다.
그랬던 장모님이 동네 어른들 말씀을 듣고는 하루아침에 입장이 돌변한 것이다. 갑자기 목이 아픈 것까지도 그것과 결부시키는듯했다. 장모님 앞에서 미신이라고 우기거나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라며 따질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70여 년 동안이나 굳어진 장모님 생각을 돌려놓을 능력이 내게 있지는 않았다. 기울인 정성이 아까웠지만 바로 철거하여 당신의 목이 갑자기 아픈 이유가 혹시 묘지를 생각 없이 손 본 사위 탓이란 의심을 빨리 지우고 싶었다. 파이프를 숨기려고 덮어두었던 잔디를 걷어내고 파이프를 빼냈다. 그 후 빗물에 축이 다시 무너져 내렸지만, 잔디가 다 덮일 내년을 기다리며 흙을 다시 채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 부모님 산소는 고향 마을에 있다. 동네가 훤히 보이는 큰길 옆에 자리하고 있어 산소만 살짝 다녀오기가 쉽지 않았다. 집안 대소가 어른들도 찾아뵈어야 하고 손바닥만 한 동네에 겨우 몇 가구 남지 않은 이웃에도 일일이 들러 인사를 드려야 했다. 여러 집에 선물을 다 준비하기도 그렇고 어르신들께 모처럼 가면서 빈손으로 가기도 뭣하고 하다 보니 산소 가기가 힘들었다. 가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결국 실행하지 못하고 여러 번 미루어지다 보니 장마철이 지나갔다. 밭이든 산소든 자주 돌봐야 깨끗해지는 법인데 그러는 사이 다짐과는 달리 한 키나 되는 잡초는 잔디를 녹여버렸다. 멧돼지까지 봉분을 그냥 두지 않았다. 큰길에서도 잘 보이던 산소는 금세 풀 속에 숨어버렸다. 말로는 최고의 효자인척하면서 부모님 산소 하나 제대로 가꾸지 못한 불효에 동네에 낯을 들 수가 없었다.
한식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멧돼지가 망가뜨린 봉분을 손질하고 수북이 자란 잡초는 예취기를 돌렸다. 꽃 대궐을 꿈꾸며 산소 가에 심어놓았던 철쭉은 꽃 한번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채 풀과 함께 잘려나갔다. 아까시나무는 어느새 산소를 향해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줄기를 잘라내고 붓으로 제초제를 찍어 발랐다. 분무기를 짊어지고 클로버가 무성한 자리에 농약을 치고 잔디를 새로 옮겨다 심었다. 축은 장마철의 많은 비로 인해 침강이 진행되었다. 근처의 흙을 파서 그곳을 돋우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작업을 마치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들 된 도리를 비로소 한 것 같아서였다.
한식날이 아닐 때 산소에 손을 대면 큰일 난다는 말은 어릴 때부터 들어 왔기에 철칙처럼 따랐었다. 누구는 산소에 함부로 손을 댔다가 장님이 되었고, 또 어떤 이는 큰 낭패를 당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산소를 손보면서도 겁내지 않았던 것은 내 마음을 알아주실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떤 분들인데, 아무리 날을 잘못 택했더라도 나에게 해코지 하지는 않을 것이란 믿음이 들었다.
말끔히 정돈된 잔디에, 산소 가에 심어놓은 남천이 빨갛게 물들고 있다.
두 산소의 ‘가토’를 하면서, 미신과 풍습의 문제를 다루었다. 전통적인 풍습이 미신이라며 몰아붙이지 않고, 조상들이 자신의 마음과 정성을 알아 줄것이라는 말로 미신적 속설을 부정하고 있다.
(17)마지막 리비도(Libido)
전반적으로는 수필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글이다. 굳이 시점의 문제를 말하라고 한다면, 수필은 작가 관찰자 시점이다. 그런데, 이 글은 상당 부분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하고 있다. 또한, 진술방식에 있어서도 다분히 수필적이다. 설명적 진술을 위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서술과 묘사로 이르어지는 문학장르인 것이다. 구성에 있어서도 소설적 구성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수필일 뿐이다. 수필이라면, 이 정도의 주제를 전하는 데 있어서 굳이 이토록 길고 긴 진술로 낭비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수필의 일반적인 관습에 맞게 압축하고 축소해서 다시쓰는 수정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