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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鬪爭期에 잇는 文藝批評家의 態度-동무 金基鎭君의 評論을 읽고」(朴英熙)
(1)
『투쟁기(鬪爭期)에 잇는 문예비평자(文藝批評者)의 태도(態度)』라든지 혹(或)은 부로즈와 문예평자(文藝評者)의 퇴폐(頹廢)된 논조(論調)에 대(對)하여서 우리는 늘 논의(論議)하여서 왓다. 어느 때는 분격(憤激)도 하여 어느 따는 『우리에게도 진정(眞正)한 평자(評者)』가 잇서야겟다고 하엿던 때가 늘잇섯든 것이다.
그리든 차에 『조선지광(朝鮮之光)』12월호(月號)에 발표(發表)된 동무 김기진군(金基鎭君)의 문예평(文藝評)을 볼 때에 늘 숙제(宿題)로 나려오던 예(例)의 제목(題目)이 다시 그 진리(眞理)를 차지려고 자열(自熱)되엿다. 그럼으로 나는 이 기회(機會)를 이용(利用)하여서 또 다시 푸로문예(文藝)와 푸로평자(評者)가 한가지 가질 본질적태도(本質的 態度)를 논(論)하려하는 것이다. 혹(或)은 생각하기를 김군(金君)과 나는 오래된 친우(親友)으 또 갓흔 동지(同志)라고 하면서 이러한 논의(論議)를 이리키는 것은 무슨 그 새이에 파탄(破綻)이 생기지나안이하엿나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誤解)에 불과(不過)한 생각이다. 논쟁(論爭)이라는 것은 개인(個人)과 개인(個人)이 공리적 욕구(公利的 慾求)에서 나오는 것이 안이라 더욱 우리의 논의(論議)라는 것은 우리 문화(文化)의 사회적 과정(社會的 過程)에서 늘 통일(統一)을 목적(目的)하고 진리(眞理)를 세우기 위(爲)해서 서로 불충분(不充分)한 것을 논박(論駁)하며 태도(態度)의 불선명(不鮮明)을 책(責)하며 따라서 우리의 문화(文化)를 사회적(社會的)으로 건설(建設)함에만 잇스니 우리는 늘 이러케 통일(統一)될 때까지는 논의(論議)가 대단히 필요(必要)한 것이다.
먼저는 푸로문예(文藝)를 평(評)하는 평자(評者)의 태도(態度)를 말하기 전(前)에 푸로작가(作家)는 엇더한 용의(用意)를 가질 필요(必要)가 잇는가를 말하고 따러서 순서(順序)를 밟버갈것이다.
(2)
푸로문예(文藝)라는 것은 엇더한 것인가? 무산계급(無産階級)을 주제(主題)로 한 것이냐? 그러면 노동자(勞動者)를 주제(主題)로 한 것이냐? 물론(勿論) 무산계급(無産階級)을 주제(主題)로 하며 노동자(勞動者)를 주제(主題)로 한다는 것을 그러타고 말함는 것 보다는 자연(紫煙)히 그러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주제(主題)로 한다고 푸로문예(文藝)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엇지해서 노동자(勞動者)의 생활(生活)을 묘사(描寫)하는 것으로써 푸로 문예(文藝)라면 벌서 오래전(前) 자연주의적 시대(自然主義的 時代)의 작품(作品)이 얼마나 만히 노동자(勞動者)를 주제(主題)한 것이 만헛스며 따러서 얼마나 만히 푸로문학(文學)이엿든가? 진실(眞實)한 프로적(的) 문예(文藝)는 현대무산계급(現代無産階級)의 생활(生活)에서 유동(流動)하고 잇스며 계급의식(階級意識)으로부터 나오는 무산계급(無産階級)의 xx과 그xxx지시(指示)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필연적(必然的) 못토가 되어 잇는 것이다. 그럼으로 『아당(我黨)의 기관지(機關紙)와 문학(文學)』이라는 논문(論文)에 xxx 이러케 말하엿다.
문학적 활동(文學的 活動)은 『푸로레타리의 모든 일의 한 부문(部文)이 되어야 한다. 노동계급(勞動階級)의 xx로 하여곰 발동(發動)할 기계(機械)안에 잇는 한 적은 치륜(齒輪)이 되어야 한다. 문학(文學)은 조직(組織)되고 안출(案出)하며 통일(統一)되며 xxxx 아당(我黨)의 모든 일 가운데의 한 부분(部分)이 되어야 한다』고 하엿다.
그럼으로 푸로작가(作家)는 늘 무산계급(無産階級)의 『예술가(藝術家)』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문화건축인(文化建築人)의 일인(一人)이라는 것이 적당(適當)한 말일 것갓다. 상론(上論)한 문구(文句)는 곳 부르즈와의 평론가(評論家)나 문예가(文藝)家)를 격노(激怒)케 할 것이다. 그들은 『예술(藝術)은 자유(自由)이지 어느 당(黨)의 한 부분(部分)은 안이다』고 하는 까닭이다. 즉(卽) 말하면, 계급(階級)을 넘어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문예(文藝)가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社會)의 모든 현상(現象)을 승인(承認)하고 그것을 해설(解說)하는 이상(以上) 그들의 문예(文藝)는 벌서 부르즈아적(的)-즉(卽) 자본주의사회(資本主義社會)의 어용(御用)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치 안타고 하기까지 우둔(愚鈍)한 허위(虛僞)를 소유(所有)하고 잇는 것이다. 그럼으로 누구든지 만일 상론(上論)한 것을 가리처 『비 예술적(非藝術的)』이라 하면 그는 확실(確實)히 부르즈와적(的) 평론가(評論家)라고 안이할 수 업는 것이다. 그럼으로 작가(作家)가 계급(階級)을 초월(超越)하지 못하며 문예품(文藝品)의 내용(內容)이 계급(階級)을 초월(超越)하기가 불능(不能)한 이상(以上) 푸로문예(文藝)의 작가(作家)는 역시 무산계급(無産階級)의 xxxxxxx 위(爲)해서 역시(亦是) 계급적(階級的)인 것을 부인(否認)할 수 업는 것이 사실(事實)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가장 명확(明確)한 결론(結論)에 도달(到達)하엿다. 그러하게 되면 문예비평가문제(文藝批評家問題)인 것이다. 혹(或)은 뭇기를 엇더한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가 이 양계급(兩階級)의 문예(文藝)를 평(評)할 수 잇스랴? 하는 것이다. 만일 자본주의사회(資本主義社會)의 모든 사회적 현상(社會的 現像)을 해석(解釋)하는 부르즈와 문학(文學)을 평(評)하든 사람이 자본주의사회(資本主義社會)의 모든 사회적 현상(社會的 現像) xxxx 푸로문예(文藝)를 평(評)할 수 잇다하면 그 평자(評者)는 계급(階級)을 초월(超越)해서 그런 것이 안이라 어느 문예(文藝)이고 더 옹호(擁護)하려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즉(卽) 부르문예평자(文藝評者)가 푸로문예(文藝)를 평(評)한다 하면 그는 확실(確實)히 푸로문예(文藝)를 박해(迫害)하려는 수단(手段)이다. 그럼으로 작가(作家)가 계급의식(階級意識)을 초월(超越)할 수 업는 것과 갓치 역시(亦是)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도 계급(階級)을 초월(超越)할 수 업다는 것은 설명(說明)을 기다리지 안코도 알만한 일이다. 만일 그래도 불고(不顧)하고 완전히 계급(階級)을 초월(超越)한 평가(評價)가 잇서서 양계급(兩階級)의 문예(文藝)를 평(評)한다 하면 그 평자(評者)는 일인(一人)이 양성(兩性)을 소유(所有)한거나 갓흔 의미(意味)에서 완전(完全)할지는 모르나 계급적(階級的)으로 보면 확실(確實)히 불구자(不具者)인 것을 세인(世人)은 말할 것이다. 한사람이 남이 소유(所有)하지 안이한 것을 즉(卽) 일인단성(一人單性)인데 어느 사람이 양성(兩性)을 가젓다 하면 세인(世人)은 그 사람을 완전(完全)한 인간(人間)이라고 하지 안코 영원(永遠)히 불구(不具)한 사람으로써 가련(可憐)하게 생각한다. 불구자(不具者) 자체(自體)로 보면 갓흔 인생(人生)인 것이 분명(分明)하다. 그러나 인생(人生)의 사회적 기능(社會的 機能)이 결여(缺如)되엿슴으로 불구자(不具者) 인 것을 우리는 잘 안다.
(3)
그럼으로 푸로문예(文藝)를 평(評)하는 사람은 상론(上論)한 점(點)으로 보아 확실(確實)히 계급적(階級的)이 되며 xxxxxx할 것도 우리는 잘 안다. 또한 어느 의미(意味)에서 보면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는 푸로문예작가(文藝作家)를 적극적(積極的)으로 지도(地圖)할 수 잇는 능력(能力)을 가저야 할 것이며 그 지도(地圖)의 표준(標準)은 부르즈와적(的), 혹(或) 개인주의적(個人主義的), 예술지상적(藝術至上的), 향락적(享樂的)에 잇는 것이 안이라 늘 조직체적(組織體的), 집단적(集團的), 계급적(階級的), 사회(社會)xxxx 잇는 것을 망각(忘却)해서는 안이된다. 그럼으로 맑스는 말하였다.
『철학자(哲學者)는 세계(世界)를 여러 가지로 설명(說明)함에 불과(不過)하엿다. 그러나 중요(重要)한 문제(問題)는 세계(世界)를 xxxx잇다』고 하엿다. 갓흔 의미(意味)에서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는 작품(作品)을 가지고 사회(社會)를 여러가지로 해부(解剖)하며 설명(說明)하엿다. 그러나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의 중요(重要)한 문제(問題)는 작품(作品)을 엇더케 계급적(階級的)으로 xxxxxxx하는 것을 민중(民衆)과 작가(作家)에게 선전(宣傳)하는 자(者)이다.』라는 말은 잘 대조(對照)될 줄노 안다.
부르즈와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는 작품(作品)의 구조(構造)에 중요(重要)한 착점(着點)을 두엇다. 그러나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는 작품(作品)에 나타나는 의식(意識)과 사회적(社會的) xxx 대조(對照)하여서써 푸로작품(作品)의 가치(價値)를 말해야 할 것이다.
김군(金君)은 『소설(小說)이란 한개(個)의 건축(建築)이다. 기둥도 업시 석가래도 업시 붉은 집웅만 입히여 노흔 건축(建築)이 있는가?』라고 하엿다. 물론(勿論) 소설(小說)를 『예술적(藝術的)』으로 완성(完成)식히는 데는 혹(或) 완전(完全)한 문화주택(文化住宅)을 건설(建設)하는데는 그야 기둥이나 석가래만이 필요(必要)한 것은 안이다. 기외(其外)에도 만히 잇스니, 양회(洋灰), 철근(鐵筋)콩크릿트, 유리, 진흙 …… 등(等) 기외(其外)에도 더 완전(完全)한 소위(所謂) 문화주택(文化住宅)을 만들려면 색소(色素)잇는 커텐도 필요(必要)할 것이며, 세공(細工)을 가(加)한 벽(壁)도 필요(必要)할 것이며 한번 안즈면 몃핏트식(式) 숙 드러가는 베드와 쿠슌도 필요(必要)할 것이며 전등(電燈)도 필요(必要)할 것이니 기외(其外)에도 한(限)이 업시 필요(必要)할 것이다. 사치(奢侈)와 가공(加工)은 무한(無限)한 것이다. 그럼으로 그 발달(發達)의 상금(尙今)것 해 온 것이 부르즈와문학(文學)의 묘사법(描寫法)의 대부분(大部分)이다. 자연주의시대(自然主義時代)의 소설대가(小說大家)는(불국(佛國) 쏘라) 사람이 아래층에서 이층(二層)에 올나가는 데 묘사(描寫)로써 삼사(三四)페지(紙)를 허비(虛費)하엿다. 이것으로 보아 소위(所謂) 김군(金君)의 말노하면 『실감(實感)』이 만히 잇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단언(斷言)한다. 푸로레타리아의 작품(作品)은 군(君)의 말과 갓치 독립(獨立)된 건축물(建築物)을 만들려는 것이 안이다. 상론(上論) 말과 갓치 큰 기계(機械)의 한 치륜(齒輪)인 것을 또다시 말한다. 푸로레타리아의 전문화(全文化)가 한 건축물(建築物)이라 하면 푸로레타리아 예술(藝術)은 그 구성물중(構成物中)에 한아이니 석가래도 될 수 잇스며 기둥도 될 수 잇스며 개와짱도 될수 잇는 것이다. 군(君)의 말과 갓치 소설(小說)로써 완전(完全)한 건물(建物)을 만들 시기(時機)는 아즉은 푸로문예(文藝)에서는 시기(時期)가 상조(尙早)한 공론(空論)이다. 따러서 푸로문예(文藝)가 예술적(藝術的) 소설(小說)의 건축물(乾縮物)을 만들기에만 노력(努力)한다면 그 작가(作家)는 푸로레타리아의 문예(文藝)를 망각(忘却)한 사람이니 그는 푸로작가(作家)는 안이다. 다만 그는 푸로생활묘사가(生活描寫家)에 불과(不過)하다. 군(君)은 『묘사(描寫)의 공과(功果)는 실감(實感)을 줌에 잇다』라고 하엿다. 그러나 나의 생각으로 말하면 『묘사(描寫)와 공과(功果)는 가공(加工)의 미(美)를 창조(創造)함에 잇다』하고 십다. 또한 군(君)의 그 실감(實感)이라는 것은 무엇을 표준(標準)한 말인지도 좀 막연(漠然)하다. 소설(小說)을 소설화(小說化)하게 하는 실감(實感)인지 그러치 안으면 계급(階級)xx 과 xxxx대(對)한 실감(實感)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만일 소설(小說)을 소설화(小說化)하게 하는 실감(實感)을 의미(意味)한 것이면 나는 군(君)에게 항의(抗議)를 제출(提出)하지 안는다. 그것은 예술적(藝術的) 비평가(批評家)라는 결론(結論)에 도달(到達)한 까닭이다. 그러나 만일 군(君)의 그 『실감(實感)』이 푸로 작품(作品)이 가저야할 계급(階級) xxxxx대(對)한 실감(實感)이 업다고 책(責)한다 하면 이것은 감사(感謝)하게 동지(同志)의 충고(忠告)로서 감수(甘受)할 것이다. 그러나 군(君)의 그 『실감(實感)』은 사회적 표준(社會的 標準)이 업시 누구의 작품(作品)이고 묘사(描寫)가 부족(不足)해서 실감(實感)이 업다는 결론(結論)에 도달(到達)한 것을 보면 확실(確實)히 군(君)의 논거(論據)는 예술지상적(藝術至上的) 초계급적(超階級的) 개인주의적(個人主義的)이라고 보게 된다. 다시 군(君)은 『나는 문예가(文藝家)의 친절(親切)한 진실(眞實)한 의미(意味)에서의 주석(註釋)되기를 노력(努力)해 왓스며 또한 주석자(註釋者)의 광영(光榮)을 장래(將來)에 허(許)한다면 이 또한 나의 만족(滿足)이다』라고 하엿다. 부르즈와문예작가(文藝作家)가 사회(社會)를 묘사(描寫)함에 반(反)하야 부르즈와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는 그 작품(作品) 주석(註釋)하는 것이다. 그리해서 브르즈와작품(作品)은 비로소 민중(民衆)에게 신념(信念)을 엇게 된다. 그러나 푸로레타리아 문예작가(文藝作家)는 부르즈와 사회(社會)의 암면(暗面)을 폭로(暴路)해서 사회(社會)를 묘사(描寫)하는 것이 안이라 사회(社會)xxxxxx한다. 따라서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는 계급(戒急)xx 과 xxxxx대(對)하야 작품(作品)의 적극적 전개(積極的 展開)를 위(爲)해서 지시(指示)하며 혹(或)은 책(責)하는 것이니 전자(前者)는 예술가적(藝術家的) 비평가(批評家)오, 후자(後者)는 문화비평가(文化批評家)인 것이다. 문화비평가(文化批評家)는 계급(階級)을 초월(超越)한 예술(藝術)의 독립성(獨立性)을 생각하지 안는다. 따라서 군(君)의 비평가적 태도(批評家的 態度)는 어느 편(便)에 잇는가를 탐구(探求)함에 적지 안은 불만(不滿)을 준다. 즉(卽) 비평가(批評家)(부르즈와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인지 문화비평가(文化批評家)(계급문화(階級文化)의 비평가(批評家))인지를 찻기에 좀 암연(暗然)하단 말이다.
더욱이 군의 논문중(論文中)에 『「나」라는 주인공(主人公)의 자기해부(自己解剖)의 정신(精神)을 결핍(缺乏)한 것이며 따러서 이 작품(作品)을 심각(深刻)한 것으로 맨들지 못한 점(點)이다.』라고 하엿다. 아마 이 문제(問題)가 푸로문예(文藝)를 운위(云謂)하는데 제일(第一)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는 말하면 「나」라는 것을 엇더케 표현(表現)하는 것에 따라서 그 작품(作品)의 가치(價値)를 좌우(左右)할 수 잇는 것이다. 부르즈와문예(文藝)에서는 「나」라는 개인(個人)을 표준(標準) 한다. 그럼으로 그 문예(文藝)의 결론(結論)은 「나」라는 개인(個人)의 인생관(人生觀) 「나」의 우주관(宇宙觀)으로 종결(終結)한다. 그러나 푸로 문예(文藝)는 집단적(集團的)인 것만큼 「나」라는 개인(個人)은 「나」개인(個人)의 의식여하(意識如何)로 사회(社會)를 해석(解釋)하려는 것이 안이라 집단적(集團的) ․ 사회적(社會的) 의식여하(意識如何)에 동요(動搖)되는 개인(個人)의 의식(意識)을 표현(表現)하는 것이니 전자(前者)는 독단적(獨斷的)이며 후자(後者)는 사회적(社會的)이다. 이럼으로 부르문예(文藝)의 개인해부(個人解剖)와 푸로문예(文藝)의 개인해부(個人解剖)가 상이(相異)하니 전자(前者)의 개인(個人)은 묘사중(描寫中)에 나타난 개인(個人)이요, 후자(後者)의 개인(個人)은 가두(街頭)에 모은 군중중(群衆中)에 잇는 개인(個人)이다. 그럼으로 내가 이 작품(作品)에 불만(不滿)이 잇다하면 그것은 개인주의적(個人主義的) 자기해부(自己解剖)가 안이라 사회적(社會的)으로 본 자기해부(自己解剖)이니 즉(卽) 비참(悲慘)한 사회현상(社會現象)에 부다친 개인(個人) 자신(自身)이 얼마나한 xxxxx적(的) 과정(過程)에 잇는가를 해부(解剖)함에 부족(不足)한 점(點)으로부터 나오는 불만(不滿)일 것이다. 그럼으로 진실(眞實)한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라 하면 전자(前者)를 책(責)할 것이 안이라 후자(後者)를 책(責)할 것이다.
더욱이 작품(作品) 『철야(徹夜)』 에 잇서서 군(君)은 말하기를 논리적(論理的)이라고 말하엿다. 그러나 소설화(小說化)되는 소설적(小說的) 기교(技巧)가 부족(不足)해서 실패(失敗)한 작(作)이라고 하엿다. 그러고 『작자(作者)는 최후(最後)의 「계급운운(階級云云)」의 말을 쓰기 위(爲)해서 명진이를 쓰고 이 글을 썻다』고 하엿다.
이 말을 보면 암연(黯然)한 가운데에 『계급 운운(階級云云)』에 대(對)하여 군(君)은 불쾌(不快)한 감정(感情)을 가지고 잇는 것을 지적(指摘)하기 쉬웁다. 소설구조(小說構造)에 잇어서 『철야(徹夜)』를 부정(否定)하고 『계급 운운(階級云云)』을 시인(是認)한 말이라하면 군자신(君自身)의 논법(論法)에 의(依)해서 모순(矛盾)이다. 그것은 석가래와 기둥이 불구(不具)한 까닭이다. 그럼으로 군(君)은 자본주의예술적(資本主義藝術的) 견지(見地)에서 문화주택(文化住宅)의 제구(諸具)가 불비(不備)한 것으로 책(責)하엿 스며, 따라서 『계급 운운(階級云云)』을 경시(輕視)하엿다. 그러나 작자(作者) 군(君)의 사상(思像)과 갓치 『계급의식(階級意識)』xxxxxx 쓴 것이 사실(事實)이다. 그러면 만일 군(君)이 진실(眞實)한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라 하면 이 작품(作品)의 정신(精神)을 부정(否定)하지 못할 것이 안인가? 『그러케 쓴 것이 결국(結局) 계급 운운(階級云云)을 쓰려고 한 것이니 이것이 어듸 소설(小說)이냐?』하는 의미(意味)가 포함(包含)된 말이다. 그러면 소설(小說)은 무엇을 써야만 진정(眞定)한 작품(作品)이 되는가? 만일 군(君)이 『철야(徹夜)』에 잇서서 계급의식(階級意識)의 xxx 전체(全體)로 보아 힘이 부족(不足)한 것을 말하며 원인(原因)이 박약(薄弱)한 것을 책(責)한다 하면 이것 역시(亦是) 감수(甘受)할 것이다. 그러나 일정(一定)한 사회적(社會的) 표준(標準)이 업시 기둥과 석가래가 조흔 놈이 업다고 건축토대(建築土臺) 전체(全體)를 부정(否定)한다는 것은 맛치 부귀(富貴)한 사람이 초가집을 보고 그 가옥적(家屋的) 존재(存在)를 부정(否定)하는 것이나 갓다. 이곳에는 계급의식적(階級意識的) 차별(差別)이 잇는 것이니 나의 견지(見地)로서는 화제(話題)도 되지 안는다. 다만 군(君)에게 바라는 것은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가 되기 전(前)에 『계급의식 운운(階級意識 云云)』에 호감(好感)을 갓기를 바란다. 그것은 실여도 사회적(社會的) 현상(現象)이니까 사회인(社會人)으로써 알 필요(必要)가 잇는 것이다.
(4)
또다시 푸로작품(作品)의 묘사(描寫)에 대(對)해서 말하겟다. 무엇보다도 실례(實例)를 들어서 보자!
동지(同志) 미카엘·골드씨씨의 단편(短篇) 「A Great Deed Was Needed」「큰 행적(行蹟)을 요구(要求)하엿섯다」라는 것은 참으로 힘잇는 작품(作品)이다. 그것은 예술적(藝術的)은 안이다. 그러나 푸로 문화적(文化的)이다. 푸로문예(文藝)는 예술(藝術)을 요구(要求)하지 안는다. 그 내용(內容)은 동맹파업(同盟罷業)을 실행(實行)한 노동자군(勞働者群)이 가로(街路)로 부르지지면서 xxxxxxx xxxxx 팡을 집어 먹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作品)이야말로 기둥도 업고 석가래도 업고 문지방도 업는 널판지와 갓흔 작품(作品)이다. 그러나 그 작품(作品)의 정신(精神)은 푸로적(的) 견지(見地)에서 사회적(社會的)이며 집단적(集團的)이다. 그 작품(作品)의 정신(精神)은 비록 기동은 업슬지언정 무산계급(無産階級)을 위(爲)하여서는 xxxxxxx. 이 작품(作品)은 엇더케 해서 xxxxxx다는 것을 군(君)갓흐면 요구(要求)하엿슬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原因)은 쓰지 안트라도 임이 사회현실적(社會現實的)으로 표현(表現)된 사실(事實)이다. 또한 상점(商店)에 xxxxxx 노동자(勞働者)를 볼 때 군(君)은 그 노동자(勞働者)가 그러한 행동(行動)을 감행(敢行)할 때까지에 심적(心的) 고민(苦悶)과 과정(過程)을 묘사(描寫)로서 요구(要求)할 것이다. 그러나 임이 그것도 사회자체(社會自體)가 훌륭하게 우리에게 묘사(描寫)하여 주엇스니 또다시 길게 쓸 필요(必要)가 업는 것이다. 갓흔 이유(理由)에서 일무직노동자(一無職勞働者)(지옥순례(地獄巡禮)에서)가 기갈(飢渴)에 원인(原因)해서 xx하엿다 하면 그 노동자(勞働者)가 현대사회조직(現代社會組織)으로부터 엇더케 암연(暗然)한 구렁텅이로 빠저 드러가는 것을 가장 xxx으로 쓰는 것이 그 노동자(勞働者)의 생활(生活)을 기록(記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노동자(勞働者)가 이러케 감행(敢行)을 할 때까지 혹(或)은 하게된 원인(原因)을 묘사(描寫)하라는 것은 그것은 노동자(勞働者)의 생활(生活)을 참관(參觀)하자는 것이니 그 노동자(勞働者)의 생활(生活)의 전개(展開)는 안이다. 다만 그러한 작품(作品)은 「더스도이에후스키」식(式) 묘사법(描寫法)인 것이다. 그럼으로 군(君)은 건축적(乾縮的) 전형적(典型的) 태도(態度)에서 작가(作家)의 정신(精神)을 무시(無視)하엿스며 「작품(作品)의 시대적(時代的) 고민(苦悶)」을 지적(指摘)하지 안엇다.나는 여하(如何)한 작품(作品)에 그 작품(作品)의 시대적(時代的) 반영(反影) 내지(乃至) 시대적고민(時代的苦悶)이 업는 것은 업다고 한다. 그러나 군(君)은 그것을 망각(忘却)하엿다. 다만 묘사(描寫), 실감(實感), 심각(深刻)이 너무도 초계급적(超階級的)으로 이상화(理想化)하엿기 때문이다. 다만 군(君)은 누구의 작품(作品)이든지 혹(或)은 여하(如何)한 정신(精神)을 표현(表現)하려는 작품(作品)이든지 그 작품(作品)이 작품화(作品化)하기에 묘사(描寫)가 잇스면 곧 작품(作品)으로 시인(是認)할 것이다. 작품(作品)은 늘 시대적(時代的) 고민(苦悶)과 생활(生活)의 사회적(社會的) 인생관(人生觀)이 잇서야 한다. 더욱이 푸로작품(作品)이랴!
군(君)은 이럼으로 xx건축물(建築物)일지라도 구조상(構造上) 모순(矛盾)이 업스면 곳 그 건물(建物)을 칭송(稱頌)하고 그 주인(主人)을 찬송(讚頌)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퇴폐(頹廢)한 문명비평가(文明批評家)의 태도(態度)이지 결(決)코 푸로문예(文藝) 비평가(批評家)의 태도(態度)는 안이다. 우리는 허식(虛式)보다는 의식(意識)을 이저서는 안이된다.
그러나 그러타고 푸로문예(文藝)의 상식(想式)이 업느냐 하면 그러치 안타. 이에 대(對)해서 레닌의 말을 인용(引用)해서 보자.
「xxxxx의 푸르레타리아는 가장 완전(完全)한 형식(形式) 가운데서 그들을 설명(說明)하며 이 원리(原理)를 발전(發展)시키기 위(爲)해서 노동자단체(勞働者團軆)의 문학(文學)의 근본원리(根本原理)를 생각하지 안으면 안이된다」고 하엿다. 그럼으로 그 완전(完全)한 형식(形式)이란 묘사(描寫)의 형식(形式)이 안이라. 그 주의(主義)를 xx하는데 xxx수단(手段)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묘사(描寫)의 시대(時代) 해석(解釋)의 시대(時代)는 브르즈와사회(社會)와 한가지 지내갓다. 다만xxxx, 건설(建設)의 시대(時代), xx의 시대(時代)가 잇스니 그것이 우리의 시대(時代)이다.
(5)
이에서 우리는 또다시 문예비평文藝批評에 당도當到하자! 일본日本의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인 청야계길씨靑野季吉氏는 말하엿다.-「오날 우리 압해 잇는 문예비평文藝批評에는 두 가지의 당연當然한 길이 잇다. 한아는 내재적內在的 비평批評이라고 말한 것이고 한아는 이것에 대응對應해서 외재적外在的 비평批評이라고 해도 조흘 것이다. 내재적內在的 비평批評이라는 것은 역시 비평가批評家가 나타난 작품作品의 내부內部로 뚤코 드러가서 그 구성요소構成要素를 분해分解하며 그 결합結合을 조사調査하며 당연當然히 그곳에 잇서야 할 조화調和가 업는 것을 지적指摘하며 내용內容과 기교技巧의 관계關係 그 파탄破綻을 보기도 하는 비평批評이니, 그것을 설명적說明的 비평批評 또는 문예적文藝的 비평批評이라고 해도 무관無關할 것이다.
또 한가지 외재적(外在的) 비평(批評)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나타난 예술작품(藝術作品)을 일개(一個)의 사회현상(社會現象)으로써 나타난 예술가(藝術家)를 일개(一個)의 사회적(社會的) 존재(存在)로서 그 현상(現象) 그 존재(存在)의 사회적(社會的) 의의(意議)를 결정(決定)하는 비평(批評)이니 이것을 전(前)것과 대립(對立)해서 문화사적(文化史的) 비평(批評)이라고 해서 무관(無關)할 것이다.」
그러나 상금(尙今)까지는 군(君)의 비평(批評)과 갓치 문예비평(文藝批評)이라면 늘 문학사적(文學史的)으로 해석(解釋)을 중시(重視)하여서 왓다. 그러나 우리의 작품(作品)이 「예술지상적(藝術至上的) 작품(作品)」이 안이니 내재적(內在的)으로 평(評)하는데 이 작품(作品)의 발전(發展)이 잇는 것이 안이라 작품(作品)이 일개(一個)의 사회적(社會的) 현상(現象)으로써 평가(評價)하여야만 한다는 것은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의 마땅히 취(取)할 방법(方法)이다.
그러면 군(君)은 말하기를 여하(如何)한 작품(作品)이고 작품(作品)인 이상(以上) 그 작품(作品)을 묘사(描寫)업시 엇더케 살rpt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상론(上論)한 바에서 임의 지적(指摘)하엿거니와 임이 사회적(社會的)으로 표현(表現)된 사실(事實)이 업서도 조흘 묘사(描寫)는 안이하는 것이 조흐니 그 푸로문예(文藝)는 묘사(描寫)로서 가치(價値)를 나타내는 것이 안이라 그 작품(作品)에 나타난 xxx열정(熱情)으로서 그 작품(作品)은 힘을 엇는 것이다. 「힘」을 설명(說明)하는 데는 묘사(描寫)로 하는 것이 안이다. 역시(亦是)「힘」으로써 설명(說明)하는 것을 군(君)도 잘 알 것이다. 따라서 상론(上論)한 비평(批評)을 트로츠키는 「문예비평(文藝批評)의 사회적(社會的) 방법(方法)」이라고 한 것이다.
윌리암·제임스는 어느 날 자기강연(自己講演)을 듯는 청중(廳衆)에게 말하기를 제군(諸君)은 지금 고요하게 침착(沈着)하게 안락(安樂)하게 의자(椅子)에 안저 잇스나 제군(諸君)의 고요한 것과 안락(安樂)은 다만 사방(四方)의 벽(壁)이 잇는데 불과(不過)하다. 지금 사방(四方)의 벽(壁)이 문허저서 별(別)난 세계(世界)-(그곳에는 기갈(飢渴)과 고통(苦痛)과 어둠이 잇는)-가 돌연(突然)히 전개(展開)될 것이면 제군(諸君)은 그 고요한 것 안락(安樂)한 것을 보존(保存)할 수가 업게 된다. 그래서 제군(諸君)의 생활(生活)에 대(對)해서 생각할 것이다. 그 안락(安樂)한 것은 다만 그 사방(四方)의 벽(壁) 때문이다. 그러치만 그것이 문허지든지 문허지지 안튼지 그 별(別)난 세계(世界)는 역시 존재(存在)하여 잇는 것이라는 의미(意味)의 말을 하엿다.
그럼으로 상금(尙今)것 나려온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는 이 사방(四方)의 벽(壁)이 잇는채 그 안에서 세계(世界)를 해석(解釋)하엿스며 그 안에 잇는 생활(生活)를 묘사(描寫)하엿다. 그러나 이 벽(壁)을 문흐고 외계(外界)에 별(別)다른 현실(現實)로 이 군중(群衆)을 끄을고 나갈 비평가(批評家)는 업섯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러한 비평가(批評家)를 요구(要求)한다. 해석(解釋) 말고 이 사방(四方)의 가리엿는 벽(壁)을 문허서 버리고 별(別)난 세계(世界)로 끄을고 나아갈 비평가(批評家)가 잇서야 한다. 따라서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는 계급의식적(階級意識的) 의미(意味)에서 xxx선의 갓흔 x사이 어야겟다. 비평가(批評家)는 창작가(創作家)가 벽(壁)을 문흐려고 하는 것을 방관(傍觀)하며 군중(群衆)의 힘의 강약(强弱)을 비평(批評)해서는 안이 된다. 푸로문예비평가는 이 군중과 한가지 벽을 문흐기에 합력할 것이다.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는 이 계급(階級)xxx상에 나와서 한가지 노력(努力)하여야 할 것이다. 비평가(批評家)도 사회인(社會人)인 이상(以上) 계급의식(階級意識)을 초월(初月)할 수 업고 더욱이 푸로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로서야 물론(勿論) 그 계급의식(階級意識)을 초월(超越)할 수 업다. 나는 끗흐로 동무 김군(金君)에게 바라는 것은 군(君)의 문예비평가적(文藝批評家的) 노력(努力)은 건축학적(建築學的) 전형(典型)에 무르지 말고 문화건축(文化建築)에 일문화비평가(一文化批評家)로서 향상(向上)하기를 바라며 나는 내 작품(作品)이 사회현상(社會現象)에 빗초여 아즉도 초보(初步)인 것을 내 자신(自身)이 비평(批評)할 수 잇다. 그러나 나는 내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그 노력(努力)하는 의식(意識)의 가치(價値)는 부정(否定)하기도 실코 또는 상해(傷害)를 밧기도 실타! 물론(勿論) 군(君)도 군(君)의 일정(一定)한 견해(見解)가 잇겟스며 또는 사람마다 각각(各各) 생각이 잇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개인(個人)의 의견(意見)이 안이라 사회적(社會的) 의식(意識)이 필연적(必然的)으로 그러해야 할 것을 개인(個人)으로써 표명(表明)한 것에 불과(不過)하다. 우리는 진리(眞理)에 순응(順應)하고 불합리(不合理)xxxxx투쟁기(鬪爭期)에 잇는 문예비평가(文藝批評家)의 태도(態度)는 반다시 계급적(階級的)으로 명확(明確)하기를 바란다. 더 말하지 안어도 군(君)은 넉넉하 추상(推想)할 것임으로 이에 붓을 논다.
(『조선지광』 제63호, 192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