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08]
농장에 과수의 전정을 시작해야 하고, 올 여름 태풍에 넘어진 육송도 일으켜 세워야 하고,,,
늦 여름 파종한 배추며 무우, 갓, 쪽파, 상추등을 얼지 않도록 수확하거나 비닐로 덮어야 하는데..............
창원에 사는 8촌 동생의 장남 개혼이 경북 청도에 있어 ........만사 제쳐 두고 아내와 함께 드라이브 삼아.....여행 길을 떠났다.
오랬만에 장거리 여행이고... 집안 일가 친척을 이 기회에 만날 수 있어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다.
가는 도중 ...생각지도 못한 차량의 고장으로 (전원이 모두 나감)...차쟁이로서 자존심과 아내에게 미안스러움도........
다행히 결혼식 시간은 늦게 도착하였지만...일가 모두를 만나 ................안부 여쭙고..............
정다운 얼굴에도 세월은 피해 갈수가 없었는지.....형님들의 하얀 머리와 누나들의 짙은 화장기 뒤편엔 잔 주름이 .........
웃는 얼굴 뒤엔 가는 세월의 아쉬움이 자리한다.
돌아오는 길에 평소 한번 가보고 싶었던 밀양의 영남루와 아랑각 그리고, 국민 작곡가이자...
음악적 선구자인 [박시춘] 생가를 보고 싶어 차를 돌렷다,
젊은 시절 간혹 이 지방을 다니곤 하였지만 항상 일 때문에 지나쳐 왔다.
지금 아니면 언제 다시 또 올까???
가랑잎이 휘 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모이루고 돌아 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아~~아 ~~그 목소리 그리워,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고향 내집에는
정한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아~~아~~쓸어 안고 싶었소.
이 노래는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의 유명한 "전선야곡" 이다...
나는 6.25 전쟁시 태어나지 않았지만, 휴전이 시작될 무렵 태어나 전후 고난의 시절을 보내었다.
내가 군에 입대하여 훈련소 생활을 할 적엔 항상 이 노래 가사가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울 때에 ....
그리고, 차가운 동계 야간 훈련시 둥근 달이 떠 있을 적에 이 노래를 마음 속으로 부르며...그리운 마음을 달랬다.
노래방에라도 가면..... 역시 머리 속에는 어머니와 고향을 떠 올리며 가수 김철의 "향수에 젖어" 노랫말과 함께
이 노래를 애창하였다. 즉, 노래방 나의 18번곡 중의 하나이다.
나이가 들면서............나는 저음의 구수한 가수 박일남이 부르는 이 "전선 야곡"을 애청한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님 !!
우리의 대중 가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곡가이다.
그 분의 고향이 이곳 밀양~~
영남루 주변에 그 의 생가와 노래비, 동상이 제막 되어 있다.
여기서,
그 분의 약력을 인물 사전에서 인용 소개한다.
박시춘(1913. 10. 28 ~ 1996. 6. 30)
경남 밀양 출신 / 대중가요 작곡가.본명은 순동(順童).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다분히 풍류적인 분위기를 즐기면서 자랐으며, 일본 유학시절 중학생의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면서 트럼펫·바이올린·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방법을 익혔다. 특히 기타를 치는 솜씨가 뛰어났고 한때는 연예단에서 영사기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우라타[浦田] 연예단 시절 〈몬테카를로의 갓난이〉·〈어둠 속에 피는 꽃〉 등의 곡들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했다.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후 1930년대말부터 1960년대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 곡이 넘는 대중가요를 작곡,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아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1939년 조선악극단의 일본 공연에 참여할 때는 현경섭·송희선 등과 함께 '아리랑 보이즈'라는 남성 보컬팀을 만들어 공연했으며, 일제말과 195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악극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 한국방송공사(KBS)의 경음악단을 이끌면서는 방송가요와 영화음악도 다수 작곡했다. 1958년에는 영화음악에서 한걸음 나아가 직접 오향영화사를 설립해 영화제작도 했으며 〈육체의 길〉과 같은 히트작을 내기도 했다. 대한 레코드 작가협회 초대회장(1958),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1961), 예술윤리위원회 부회장(1966) 등 대중문화계의 요직을 역임했다. 1965년 이후로는 창작활동을 중단했으며, 1982년에는 대중가요 창작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받았다. 애상성 짙은 트롯 가요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그의 작품들에는 비교적 밝고 소박한 곡들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첫 히트곡〈애수의 소야곡〉 외에 〈가거라 38선〉·〈럭키 서울〉·〈비내리는 고모령〉·〈전선야곡〉·〈굳세어라 금순아〉·〈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그 분의 동상앞에 서니...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라는 말의 의미가 되세겨 떠 오르고................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밀양시내를 굽이쳐 흐르는 강 줄기와 어우려진 영남제1루에 올랐다.
조선 후기 대표적 목조 건물로 1844년에 중건 되었단다.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현존하는 3대 누각중의 하나이며, 그 중 가장 오래된 누각으로
보물 147호이다.
[영남루 앞에서.....미쑤 리와 포즈]
[조선의 16대 비경 중의 하나인....영남루에서]
[아랑의 전설이 깃든 아랑각]
[유정 사명 대사의 동상...]
[경주 산내에서 발원한 이 강물은 흘러서 삼랑진에서 낙동강 원류와 만나고..........]
겨울 하루해가 짧았다....
첫댓글 밀양 곳곳을 다녀오셨군요^^
여행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이게 하고
풀어헤쳐진 몸과마음을 단정하고,깔끔하게 다듬어주는것 같습니다.
두분 참~ 보기좋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