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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골(대성동 마을~영신봉)
지리산 대성골은 오래전부터 보기드문 기도처로 뭇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근세에 들어서는 6.25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상잔의 피를 흘린 역사의 현장으로서 알려져 있다. 화개동천 맨 안쪽에 숨어 있는 협곡의 수림과 남향으로 배치된 기암절벽, 그리고 그 위용의 품위를 한 단계 높여주려는 듯 흐르는 물줄기는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로 손색이 없다.
세석평전을 거느리는 영신봉의 위엄은 세석과 더불어 대성골을 이상향의 대상으로 삼게 만들어 오랜 옛날부터 과학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도객의 발길을 대성골로 이끈다. 특히 대성골 가운데서 가장 깊숙이 숨겨져 있는 영신봉 아래 영신대는 지리산에서 최고의 기도처로 각광받으면서 치성객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 영험스런 자태는 금방이라도 소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듯해 치성객의 애간장을 태우기에 충분하다.
우리 민중의 정서를 방증하는 대성골은 6.25동란 중에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전장으로 변하기도 해 우리에겐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성골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던 수백여명의 빨치산들이 몰살당했다. 정충제 씨가 기록한 “실록
이들 기록마다 빨치산 몰살 규모와 일시 등이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대체로 그 시기는
이른바 백야전 사령부의 제3기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대성골에 모인 빨치산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수백명이 처참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몰살당한 빨치산의 수를 미뤄볼 때
비운의 사연을 간직한 대성골을 찾아가는 길은 화개동천을 따라 잘 포장된 길을 올라 대성교에서 시작된다. 등산로는 대성교에서 시작되는 길과 조금 위의 의신마을에서 시작되는 두 갈래다.
세석에서 12km, 대성교에서 등산로는 시작부터 가파른 길이지만 의신부터는 평탄한 길이 시작돼 1km.만 지나면 하나로 된다. 이곳이 옛날 능인사가 있었다는 절터이다. 해발 500m 지점이기도 하다. 능인사 터에서 완만하고 뚜렷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후박나무가 우거진 대성동 마을에 도착한다.
대략 대성교에서 2km 거리에 위치한 대성동에는 10여 가구가 산골 생활을 하면서 민박도 치고 토종닭, 산채, 동동주 등을 팔고 있다. 자가발전으로 전깃불을 이용해오다 1995년 12월에야 한전에서 전기를 공급받기 시작했다. 원래 대성동 마을은 현재의 위치보다 4km 더 들어간 곳에 있었으나 1960년대 후반 정부의 배려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4km 윗쪽의 원래 마을터를
대성동 마을에서 세석까지는 10km.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등산을 험난한 코스가 별로 없이 비교적 평탄한 길이 계속된다. 남부 능선과 갈라지는 1,400m 갈림길에 못 미쳐 3km 구간이 조금 힘들 뿐 등산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조금 지루한 산행은 각오해야 하는 게 대성골 등반의 특징이다. 대략 오르는데 4시간30분에서 5시간은 걸리며 내려오는데도 3시간30분 정도를 각오해야 한다. 대성골을 오르다 보면 협곡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다. 대성골 안에는 수곡골과 작은 세개골, 큰 세개골 등 3개의 자계곡이 있다. 이 가운데 큰 세개골을 대성골의 본류로 볼 수 있다. 큰 세개골은 영신봉에서 시작되는 계곡으로서 영신봉 아래에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로 꼽히는 영신대가 있다. 수많은 기도객이 대성동 마을에서 영신대를 찾아가지만 지금도 쉽게 찾기 힘들다. 대부분 서너 번 이상은 오르고 내리는 고생을 겪어야만 영신대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숨겨져 있다. 영험스런 자태를 오래도록 감추고 싶은 탓인지 큰 세개골 속의 영신대는 아는 사람들만의 몫으로 아직도 남겨져 있는 것이다.
영신대
지리산의 넓고 넓은 골짜기에는 도를 닦거나, 기도를 하거나, 푸닥거리를 벌이는 곳이 부지기수로 많다.
백무동 입구의 굴바위를 비롯한 곳곳에 무속신앙 신봉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리산에서 도를 깨치겠다며 소위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지세나 경관이 절묘한 명당 자리를 찾아내 은밀히 기도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기도처는 일반 등산객들의 눈에는 쉽게 목격되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지리산에서 자신이 공부를 하고 있는 곳이 어디이든,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라고 입을 모으는 명당이 곧 영신대이다.
지난날 영신사란 사찰이 자리했던 이곳은 영신봉(1,651m) 바로 남쪽 사면의, 대성계곡 본류가 발원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영신대로 가는 길은 세석고원에서 지리산 종주산행 코스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영신대에 기도를 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주로 찾고 있는 루트이기도 하다. 이 영신대를 산행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등산 코스로 찾을 때는 대성계곡 본류를 따라 오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대성동을 경유하는 등산코스는 '대성계곡 코스' (대성교∼세석고원)만 등산지도에 표시가 돼 있다. 그러나 대성계곡 본류를 따라 영신대로 오르는 산길이 은밀하게 이어져 있다.
현지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이 비밀루트를 오르내리며 당귀와 같은 약초를 채취하기도 하고, 영신대로 물품을 수송해 주기도 한다. 또 의신마을 주민들은 이 루트의 중간지점에 있는 대성폭포에 단체로 올라 봄맞이 놀이 등을 벌이기도 한다.
이 코스는 큰세개골 이정표에서 처음 찾아드는 길이 애매하고, 상당한 혼란을 느낄만한 구간도 있어 산행경험자의 안내를 받아 오르도록 해야 한다.
영신대로 가는 길은 큰세개골 이정표가 서있는 곳까지는 대성골 코스를 따라간다. 대성동을 지나 작은 세 개골 다음 골짜기가 큰세개골이다.
큰세개골 이정표에서 세석고원 쪽의 길을 따라 200m 쯤 더 올라간 지점에서 왼편(계곡 방향) 숲 속으로 영신대와 연결되는 비밀통로가 시작된다.
이 통로 입구는 꼼꼼하게 주의를 하며 보지 않으면 찾기가 어렵다.
일반 등산객의 눈에 띄지 않게끔 아무런 흔적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너 걸음만 들어가면 호젓하고 기분좋은 오솔길이 잘 연결돼 있다.
큰세개골에서 세석고원으로 오르는 기존의 등산로는 또다른 능선에 올라서기까지 온통 너덜지대로 대성계곡 코스 가운데 가장 투박하고 힘이 드는 곳이다.
그런데 큰세개골을 따라 계곡을 끼고 영신대로 오른 비밀통로 오솔길은 흙 밖에 없는 평탄한 길이 한동안 계속 이어진다.
작은 지계곡을 건너가면 집터 흔적 같은 것이 나타나고, 다시 부드러운 오솔길이 30분 가량 계속된다. 그 뒤에 오솔길이 대성계곡 본류와 만난다.
큰세개골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오른편의 큰 계곡을 따라 올라가도 되지만, 이 오솔길이 시간과 힘을 절반 이상 절약해 준다.
일단 계곡을 만난뒤 오솔길은 계곡 바른편으로 20분 가량 더 이어진다. 그 뒤로는 무조건 계곡을 따라 오르게 된다. 영신대는 대성계곡의 상류 끝, 이 계곡물이 처음으로 발원하는 곳에 있다. 대성계곡 본류를 따라 끝까지 오르면 영신대에 닿게 되므로, 큰세개골 위 3Km 지점부터는 계곡산행이 된다.
이 계곡 주변은 설악산의 아름다운 산세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
계곡 양쪽에 암벽이 내리꽂히면서 협곡을 이룬 형상이 그렇다. 그런데도 계곡은 폭이 넓고, 대체로 알맞은 크기의 바위들이 자연 그대로 자리하고 있어 오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계곡의 바위를 밟고 계속 오르다보면 누구의 발길 흔적도, 휴지 조각 하나 없는 곳이다 보니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무릉도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성계곡 상류의 이 골짜기는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길 같은 느낌마저 준다. 어떤 곳은 깨끗한 반석 사이로 맑디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마치 수중궁전 같기도 하다. 곧 이어 만나게 되는 대성폭포의 거대한 바위벽을 타고 오를 때는 천국의 성문으로 오르는 듯한 느낌도 든다.
계곡을 따라 계속 오르다보면 눈을 의심케 하는 것과 마주친다. 거대한 대성폭포이다. 대성계곡 상류에는 '학소대'라고 일컫을만한 똑같은 형상의 암봉 세 개가 적당한 간격으로 서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오똑한 독립 암봉 위에 소나무들이 청정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 첫째 암봉 아래 대성폭포가 장쾌한 모습으로 걸려 있다. (이 폭포는 일명 선유폭포로 불린다.)
아마도 지리산에서 가장 큰 규모일 듯한 이 폭포가 어째서 지리산 등산지도에서조차 표시가 되지 않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 폭포는 지그재그로 4단에 걸쳐 이뤄져 있는데, 그 총길이가 120m 가량으로, 아래 쪽에선 윗부분을 볼 수조차 없다.
이 폭포의 왼편으로 누구나 무난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 나있다.
또 4단 폭포의 중간 부분에는 100명 정도가 넉넉하게 앉아서 놀 수가 있는 넓은 반석이 있다. 의신마을 주민들이 상춘놀이를 즐기는 명당이다. 또 이 반석 바로 뒤편에는 '선녀탕'으로 불리는 직사각형의 욕조 반석이 있는데, 절묘하게 물길이 열려 있다. 이 폭포 왼편에 높이 서있는 독립 암봉과 똑같은 형상의 암봉 셋이 차례로 골짜기를 타고 나타 나는데, 마지막 암봉을 표적으로 삼으면 된다. 그 마지막 암봉 아래편에 영신대가 자리하고 있다.
대성폭포에서 영신대까지는 약 1시간의 거리인데 계곡을 계속 따라 오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폭포를 지난 뒤 바른편의 사태가 나있는 계곡으로 들어서지 말고 한참 오른 뒤 폭포 옆의 암봉과 같은 모습의 두 번째, 세 번째 암봉을 목표로 삼으면 도움이 된다. 이 코스는 큰세개골 입구에서 계곡길과 다시 마주치는 구간이 가장 문제가 된다. 그러나 마지 막으로 영신대와 이어지는 구간에서도 상당한 혼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마지막 구간은 극심한 비탈을 이루고 있어 체력의 소모도 적지 않다. 그러나 비경의 자연세계를 뚫고 오르는 이 코스야말로 독특한 산행의 묘미를 안겨준다.
가파른 비탈을 기어오르다시피 하여 영신 대에 닿으면 이곳 일대의 정경이 별세계를 빚어 놓고 있다. 먼저 집채 같은 바위가 길을 막고 버티고 있다.
이곳 에는 초막이 세워졌다가 헐리고는 하는데, 나무기둥이며 세간들이 따로 묶여진 채 바위 아래편에 놓여있기도 하다.
그 오른쪽에 샘터가 있고, 샘터 옆에 돌더미를 쌓은 작은 제단이 있다.
초막을 세우고 하던 자리에서 바위틈으로 이어진 석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또 하나의 샘터가 있다. 용왕당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나타나고 학소대와 같은 독립암봉의 바로 앞이 된다. 암봉 정면 앞에 좀 더 큰돌을 쌓아올려 모신 크기의 제단이 있다.
마당에도 중간 크기의 제단이 있다. 마당 에서 서북쪽으로 내려서면 미륵불, 칠성당이라 불리는 곳이 나란히 있지만, 모두 노천으로 별도의 시설물은 없다.
그 너머 숲속에 천막이 있고, 놀랍게도 이곳에 거주하는 기도객들이 빨래를 널어놓고는 한다.
영신대 일원은 바위마다 촛농이 쌓여있고, 타다 남은 향, 제기나 생활용구 들을 비닐에 싼 채 바위 밑에 놓아둔 것이 많아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이곳에 많은 기도객들이 시장처럼 몰려들고 있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모습들 이다. 이곳에선 '천왕성모의 생일' 이라면서 많은 음식을 마련해놓고 특별한 제를 올릴 때도 있다.
크고 작은 바위마다 잔돌을 쌓아 올려놓았는데, 어떤 바위에는 생돼지머리가 놓여 있어 끔찍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영신대는 이제 비밀스럽게 도를 닦거나 공부를 하는 도장이 아니라, 온갖 무속신앙 이 잡다하게 얽혀 소란스러운 곳으로 전락한 모양이다. 영신대를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라 믿고 이곳에서 오랜 기간 공부를 하다가 근래 떠나왔다는 한 은둔 거사는 최근의 영신대 모습을 크게 통탄했다. "영신대는 지리산 최고의 자리인데, 어찌된 심판인지 철학관 하는 사람, 점바치들이 치성객들을 이끌고 몰려드는 바람에 아주 망쳐놓았어요. 이제 그들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들은 영신대에는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고 말았어요."
실제 영신대의 오늘의 모습은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영신사의 옛 사찰이 있던 곳이 오늘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마저 크게 훼손 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1472년 김종직이 지리산을 기행 하면서 이곳에 있던 영신사에 들렀다.
그가 영신사에서 지켜본 것을 기록한 글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큰 감명을 안겨준다. '영신사에 들어갔는데, 절에는 스님이 한 사람 뿐이었다.
절의 벼랑 아래에 돌부처 1좌가 있었다. 세조대왕 때 매양 사람을 보내어 향화를 받든 곳이다. 돌부처의 머리 한쪽이 일그러졌는데, 이것 역시 왜구가 손상시킨 것이라 한다. 아, 왜구들은 참으로 잔인한 도적이다. 사람을 죽이고, 생사람 껍질을 베끼기를 얼마나 많이 하였던가? 천왕봉의 성모석상과 이곳의 돌부처도 똑똑하게 흔적을 남겼으니,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를 끼쳤을 것이다. 돌부처는 오른팔에도 반점 같은 상처를 입었는데, 이것은 불에 태운 흉터였다.
돌부처의 한 부분을 조금씩 태우면 미륵세상을 만날 것이라고 하여 이렇게 상처를 남겼다고 하니, 황당무계함이 이와 같다 할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내세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다투어 돈과 포목을 바치고 있으니, 그 정성이 차라리 가증스러울 뿐이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이런 비판적인 견해와 함께 영신사 주변 자연경관을 소상하게 적고 있다. '돌부처의 북쪽에는 두 바위가 높이 솟았는데, 소위 창불대다. 한쪽 바위의 아랫 부분은 패이고 튀어나 매우 울퉁불퉁한데, 위는 날카롭고 쭈뼛했다. 그 위에는 네모꼴의 평평한 돌을 얹어 넓이 가 겨우 한 자 쯤 되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소원을 이루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위태로움을 무릅 쓰고 그 위에 올라가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동쪽 바위틈에는 샘이 솟는데, 이를 옥천이라 불렀다. 샘의 물이 매우 달고 달인 차맛과 같으면서 차다고 하기에 마음은 있었으나 가보지 못했다.
샘의 서쪽에는 흙벽돌로 쌓아올려 지은 높은 건물이 보였는데, 그 건물이 옛 영신사라고 하였다. 거기서 서북쪽 높은 바위에 한 작은 석탑이 있었다.
섬세하게 다듬어져 매우 아름다웠으나, 이것도 왜구들이 넘어뜨린 것을 탑 속에 쇠기둥을 꾀어 고쳐 세웠기 때문에 몇 층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영신대에서 오른편 비탈로 오르는 길이 나 있다. 영신봉 쪽으로 산사태가 나있어 길은 약간 우회를 한다. 10여분을 오르면 영신봉 이정표가 서있는 곳, 지리산 종주산행 루트와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세석산장은 10분 거리이다.
대성계곡을 따르지 않고 세석 산장에서 영신대를 찾아가는 것은 불과 30분 정도의 거리로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지리산 종주산행 루트를 따라 가면 영신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영신대 이정표가 아니면 길을 찾는 것도 쉽지가 않다. 의신마을에서 대성계곡을 따라 영신대에 오르는 시간이 4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하산은 세석고원으로 올라 대성계곡 코스나 거림골 코스 등 정상적인 등산 루트를 따르는 것이 좋다. 영신대서 대성계곡으로 곧장 하산하는 것은 위험하다.
빨치산 몰살의 비운을 간직한 정갈한 맛의 협곡
쫓겨 지친 대원, 소대, 비무장이 속속 박다내골(일명 의신골, 하동군 화개면)로 모여들었다.
박다내골은 험한 바위가 우뚝우뚝 솟은 험상궂은 골짝
저마다 배낭을 털어 비상 쌀알을 씹는다 나눠준다.
지휘관들은 수군수군 머리를 짰다.
박다내골을 눈치챈 토벌대는 사단병력을 총동원
박다내골을 몽땅 포위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태세
포탄과 총알이 나무뿌리를 날리고 바위를 쪼갰다.
악, 악, 여기 저기서 육박전
아, 처참한 비명 아우성
굉음, 눈보라, 흙보라, 피보라
비행기는 가끔 소이탄을 떨어뜨려 빨치산을 태워 죽인다.
포위 나흘째
올가미는 바작바작 좁혀왔다.
박다내골 마지막은 비장해
딴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팔로군 출신 인민군 장교 5연대장 김모는
'조국과 인민이 주는 마지막 훈장'이라며 동료 여섯을 그들 소원대로 차례로 쏘고 남은 한 방으로 자기의 심장을 쐈다.
죽은 자 가운데는
이때 단 한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으니 5연대장의 연락병 임창해(당시 20세)다.
허리에 총을 맞고 신음중 국군에 구출되었다.
이 '죽음의 골'에서
1952년 9월 광주형무소에서 노영호의 동생
그는 여전히 허리부상을 앓고 있었다.
둘은 꿈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예, 수백 명은 죽었을기라요."
"경냄이 녹아난기가......비무장까지 합치모온 8백은 넘을끼더."
(
대성골 참극의 진상은?
이상의 기록은 1952년 1월 18일 소위 백야전(白野戰) 사령부 제3기 토벌작전 때 이곳 대성골에 사면초가격으로 몰린 빨치산 수백 명이 처절한 죽음을 맞이했던 사실을 적은 것이다. 의신마을
그런데 '실록
우선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을 군경측 기록인 '공비연혁'을 보면
'남부군' 하권을 보면 당시(남부군에서는 백야전 사령부가 3기 작전기간을
영험한 대성골 등반은 의신마을에서부터
위와 같은 비운의 사연을 간직한 대성골의 등반은 대성교나 의신(義信)마을에서 시작된다. 세석까지는 계곡과 능선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어 짙푸른 수해(樹海) 속으로 파묻히다가 다시 탁 트인 전망으로 이어지는 등반의 묘미도 느낄 수 있다.
세석까지는 12㎞이고, 대성동계곡에 큰 폭포나 소가 별로 눈에 안띄어 경관은 뒤떨어진다. 그렇지만 그래도 때묻지 않은 느낌을 주는 계곡 중의 하나이다.
하동 구례방면에서 화개(花開)를 거쳐 진입하게 되므로 시간만 주어진다면 화개동천(花開洞川) 주변의 명승과 역사의 숨결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등반기점은 두 곳이지만 대성교에서 가파른 지능선을 오르는 것보다 의신마을에서 출발하는 것이 다소 수월한 편이다. 옛날 의신사(義神寺, 1478년경 건립되고 서산대사가 거처하던 곳으로 전한다)라는 절이 있었던 지금의 의신마을은 임진란 당시 전란을 피해 모여든 3성씨(姓氏)에 의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그후 여러 사람들이 이주해와 한때는 이곳 산골 오지마울이 130여 호에 달하기도 했으나 6.25를 거치면서 마을이 전소당하고 또 이농현상 등으로 인해 지금은 40여 가구 170여 명의 주민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의신마을에서 동남방향으로 자갈 깔린 넓직한 길을 가노라면 산비탈을 일궈 놓은 밤나무 등 과수단지가 나온다. 이곳을 가로지르는 전망 트인 길이 계속된다. 남부능선에서 화개천 방향으로 주름치마폭처럼 첩첩이 흘러내린 산자락이 장관이다. 뒤돌아보면 명선봉 - 토끼봉 연릉이 위엄있게 가늠되고 의신마을과 주변 논배미가 선명하다.
야산지대 특유의 소나무숲 오솔길을 따라 몇 번인가 산구비를 감돌아 오르면 평지길로 나오고 감나무 몇 그루가 잡초더미 속에 덩그랗게 서 있는 절터에 도착한다. 대성교 쪽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엤 능인사(能仁寺)터이다. 샘물도 흐르고 평지도 얼마간 보인다.
계곡과 멀리 떨어진 등반로는 완만하고 뚜렷하다. 한참 가다 계곡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듯하던 길이 다소의 오르막 돌길을 거쳐 후박나무가 우거진 대성동에 이른다. 주변에 논밭터가 보이고 민박집 건물과 상점도 두서너 집 있다.
지금의 대성동(大成洞)마을은 원래 원(愿)대성리에 있던 마을이 1960년 후반 이곳으로 옮겨와 형성된 것이다. 당시 이곳에서 4㎞ 더 들어간 산골에 있던 원대성리 마을주민들의 불편을 감안하여 정부의 배려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대성교 위쪽 협곡을 막아 수력발전소를 세운다는 개발 계획도 있었지만 그후 유야무야된 듯하다. 대성동에서 오던 길을 바라보면 사방이 온통 꽉 막힌 느낌이 드는 게 그런 소리가 나왔음직하다.
옛 원대성마을은 잡초더미에 묻히고
대성동 이정표에서 바위벼랑 사이로 비껴 올라서면 계곡과 멀어진 완만한 오르막길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곳곳에 논밭터, 집터 흔적이 무성한 원대성마을터에 도착한다. 좌측 산비탈 위쪽에 너와집 한 채가 보이는데 서울에서 기도객 한 명이 들어와 살고 있다고.
원대성마을에서 조금 가면 좌측에서 흘러 내려온 계류와 만나는 곳인 작은 세개골이 나오고 여기를 건너서 산죽숲길로 접어들게 된다. 옛 움막터 흔적이 곳곳에 보이고 큰세개골까지는 어렵지 않은 길이다. 좌우측 산비탈이 깎아지른 듯 협곡을 이룬 곳에 비교적 넓다란 공터도 보이는 곳이 큰세개골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계곡을 건너 미끄런 흙길을 오르게 되는데 경사도 있고 비가 올 때면 여간 질퍽거리지 않는 곳이다.
잠시 평탄한 곳을 지나가 돌밭길로 올라서면 좌측으로 작은 지류를 끼고 가게 된다. 여기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동쪽으로 휘어진 듯한 길을 따라 힘든 비탈길에 올라서면 지능선 평지가 나온다. 여기서 동북방향으로 꺾어서 지능선에 올라붙어야 하는데 다소 까다로운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무덤 있는 곳을 지나서 참나무가 무성하고 큼지막한 기암이 솟구친 오르막길은 그칠 줄 모르다가 잠시 후 한숨 돌릴 수 있는 평편한 반석이 우측에 나온다. 10여 명 정도는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곳이고 전망도 후련하다. 여기서 남부능선의 고사목과 기암들의 아기자기한 맛도 훌륭하지만 대성골의 깊고 넓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것은 더욱 일품이다.
산사태 난 곳을 조심스레 비껴 오르면 해발 1,400m 갈림길이 바로 나오고 이제는 별 어려운 오르막길이 없는 탄탄대로가 펼쳐진다. 이곳 갈림길에서 남쪽길이 청학동, 불일폭포 등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길이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잠시 오르면 거대한 기암이 우뚝 솟아 있고 보통사람 한 키 정도의 참나무숲이 펼쳐지는 능선길이 마냥 즐겁다.
협곡을 오르면 세석의 전모가 드러나
멀리 촛대봉이 당당하게 그 위용을 뽐내듯 서 있고, 완만하고 드넓게 흘러 내린 세석의 지세가 대파노라마를 연출해낸다. 거림골 상류의 물소리도 정겨운 하모니를 이루는 경관이 아주 멋진 곳인데 세석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도 단연 최고다.
잠시 밑으로 내려가던 길은 어느덧 완만한 평지를 지나게 되며 속속에 옛 집터 흔적이 무성하다. 구한말 일제시대부터 세석을 청학동이라 믿은 비결장이들이 찾아들어 이 일대에서 많이 살았다고 전한다. 지금의 세석고원이 근대 이후 나타난 모습이기 때문에(몇 백 년 전의 큰 산불 때문이라고) 청학동으로서의 구비요건을 나름대로 완벽하게 갖춘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리라는 점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일제시대 정신대를 피해 이곳에 숨어 지냈다는 신흥(伸興)의 어느 할머니 얘기로는 당시 번듯한 기와집에 장독, 절구통까지 갖추고 근처 평지를 일궈 감자 등도 심으며 넉넉하게 살았다고 한다. 흔히 청학동에 관한 말로 떠도는 "처음 들어온 사람은 망해 돌아가고, 중간에 들어온 사람은 흥하며 늦게야 들어온 사람은 터가 없다"(先入者還 中入者興 未入者不及)는 얘기와는 달리 그 후 전란통에 이곳은 폐허로 변한 듯하다. 그러나 단재
한편 '남부군'에서 이태 씨가 말하는 세석고원의 토담집의 위치도 이곳에서 동쪽으로 얼마큼 내려간 곳인 것 같다. 지금은 '세석입구'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거림골에서 올라오는 등반로가 나 있지만 과거에는 음양수샘 밑 이곳 평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도 옛 허우천 씨 초막이 있던 곳으로 희미한 옛길이 있다.
지리산에서 가장 신비하고 멋진 음양수샘
이곳 옛 집터에서 조금 오른 곳에 음양수(陰陽水)샘이 있다. 완만한 평지에 거대한 돌출바위가 있고 그 밑에서 신묘하게도 두 줄기의 샘물이 흘러나온다. 지리산의 여타의 샘보다 운치도 있고 신비한 느낌이 드는 석간수(石間水)샘인데도 예로부터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간이천막을 치고 주변에서 기원하며 지냈다고 한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부터 각종 천막들이 철거되어 지금은 그러한 모습을 찾기 힘들다. 햇볕이 드는 곳이 양수(陽水), 그늘진 곳이 음수(陰水)라고 하며 두 줄기의 물은 음양화합의 의미처럼 한 군데로 합쳐진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여름철에도 물맛이 아주 시원한 이 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대성골에는 호야(乎也)와 연진(蓮眞)이라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오직 자식이 없다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는데 어느날 곰이 찾아와 연진여인에게 세석고원에 음양수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 물을 마시며 산신령께 기도하면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연진여인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홀로 이 샘터에 와서 물을 실컷 마셨는데 호랑이의 밀고로 노한 산신령이 음양수샘의 신비를 인간에게 알려준 곰을 토굴 속에 가두고 연진여인에게는 세석 돌밭에서 평생 철쭉을 가꿔야 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연진여인은 촛대봉 정상에서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 산신령을 향하여 속죄를 빌다가 돌로 굳어져버렸고, 아내를 찾아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 산신령의 저지로 만날 수 없게 되자 가파른 절벽 위의 바위에서 목메어 연진여인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모습처럼 애련한 꽃을 피운다고 하며 촛대봉의 바위는 바로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음양수샘에서는 참나무숲을 지나 구상나무숲으로 들어가게 된다. 도랑물이 군데군데 흐르고 편한 길이다. 세석 입구 이정표에서 거림골에서 올라온 길과 만나고 세석 중앙을 흐르는 개울을 따라 10여 분 오르면 세석산장에 도착한다.
교통과 숙박
화개에서 의신마을로 들어가는 버스가
의신마을과 대성동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야영할 만한 곳으로는 대성교 주변과 큰세개골, 음양수샘 등에 군데군데 있고, 장마철만 피한다면 계곡가에서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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