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롱불
임병식 rbs1144@daum.net
저녁이 일찍 내려앉은 집 안에는 오래된 호롱불 하나가 있었다. 유리갓에는 묵은 검댕이 얇게 내려앉아 있었고, 불꽃은 작은 숨결처럼 가늘게 흔들렸다. 그 불빛은 어둠을 몰아내기보다 깊어지는 밤을 가까스로 견디게 하는 빛에 가까웠다.
나는 지금도 작은 불빛만 보면 오래전 그 호롱불부터 떠올린다.
그리고 누나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다. 통증이 심해지면 밤새 신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날도 그랬다. 방 안은 낮게 깔린 신음과 숨죽인 기척으로 가득했다. 끝내 어머니는 약을 지으러 읍내로 나섰다. 산고개를 넘어야 하는 먼 길이었다.
해는 금세 산 너머로 기울었다.
처음에는 금방 돌아오실 줄 알았다. 그러나 밤이 깊어가는데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누나는 한참 방문 쪽만 바라보다가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벽에 걸린 호롱불을 들었다.
“엄마 마중 가자.”
나는 말없이 누나의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집을 벗어나자 어둠은 생각보다 깊었다. 호롱불은 발끝 가까이만 희미하게 비출 뿐, 그 너머는 온통 검은 밤이었다. 산길은 울퉁불퉁했고, 바람은 나뭇가지를 스치며 낮은 소리를 냈다. 마을 뒤 산에는 도깨비불 이야기와 짐승 이야기가 떠돌곤 했다. 평소 같았으면 감히 나서지 못했을 길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무섭다는 생각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었다.
호롱불 불꽃이 길게 흔들렸다.
누나는 재빨리 두 손으로 불빛을 감쌌다.
하지만 잠시 뒤, 불은 끝내 꺼지고 말았다.
순간 사방의 어둠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우리는 걸음을 멈춘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발밑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디선가 마른 잎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산속의 적막은 살아 있는 것처럼 숨을 쉬었다. 나는 겁에 질려 누나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잡았다.
“누나, 무서워.”
잠시 뒤, 어둠 속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손 놓지 마.”
누나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손은 끝내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어머니는 지친 걸음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밤길에서 맞은 찬 기운 때문이었는지, 누나는 오래도록 앓았다.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세월은 많이 흘렀다.
등불 대신 환한 전등 아래 살아가는 지금도, 문득 흔들리는 작은 불빛을 보면 그날 밤이 떠오른다.
꺼져가는 호롱불 아래에서 끝까지 내 손을 놓지 않던 누나.
어둠 속에서도 자신보다 어린 동생을 먼저 품어 주려 했던 작은 손.
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을 밝혀 준 것은 호롱불의 불빛이 아니었다.
바람에 꺼진 등불은 그날 밤 사라졌지만,
누나가 건네준 그 온기만은 아직도 내 삶의 어두운 길목을 비추고 있다.
(1990)
첫댓글 참 슬픈 사연 이구료.
애닮다 어찌 하리요
누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답니다.
1991 여수문학발표.
누나 사연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아프네요. 제3자인 나도 그런데 당사자들이야 오죽했겠나 싶네요.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으니 말입니다. 저라도 밤길 트라우마가 생겼을 거 같습니댜.
그당시는 사춘기 시절로 감성이 예민할대로 예민한 때인데 누나와의 사별은 참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누나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픕니다.
2025 동부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