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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에도 노제가 필요한가
3박하는 동안에 거의 회복되어 길 떠나게 된 2015년 5월 16일.
반세기 이상 전, 한국의 프랑코가 등장한 날의 이른 아침.
그가 국민의 군대로 국민이 피흘려 되찾은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함으로서 30여년
독재가 시작된 날이지만 나는 며칠간의 디아레아를 털고 다시 걷기 시작한 날이다.
내 심경은 간밤에 오카리나로 연주한 두곡 속에 다 표현되어 있다.
6개월의 장도에서 겨우 10일이 지났을 뿐인데 이처럼 묶여있어야 한 3박4일.
까미노에도 노제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이 디아레아 3박4일 중 2박3일을 노르떼 길의 노제 기간으로 갈음하면 아니될까.
정상 상태라 해도(디아레아와 무관한) 1박은 필요한 과정이므로 제외하고.
알베르게를 나설 때 호수몬따나와 뜨거운 포옹에 이어서 다른 오스삐딸레로와 함께 촬영하고
e-mail 주소도 받으며 귀국하는대로 사진들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도둑맞았기 때문에 보내줄 사진과 주소(e-메일)가 없다.
그렇다 해도 이 불행을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알베르게의 주소 알아내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도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있는 나는 정녕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Danger
past, god forgotten/위험이 사라지면 신도 잊혀진다)는 속담 속의 영감인가.
변명거리는 있다.
"나쁜 일은 무리지어 왔다가 따로따로 나간다" 또는 "날아왔다가 걸어나간다"잖은가.
귀국하자마자 교통사고(뇌출혈)를 당해 입원한 아내 수발 외에는 마음쓸 겨를이 없었고 이어
딸의 개복수술까지 겹쳐서 시급한 내 탈장수술은 무기한 뒷전으로 밀린 판국이니.
나의 헤르니아(hernia) 수술이야 말로 귀국하는 대로 해야 하는 우선순위 최상위의 일이건만
기약 없이 미루고 있는 판이었으니까.
알베르게가 빌바오의 서단 고지대의 노르떼 길가에 있으므로 아침 출발이 편한 이점이 있다.
환자로 이틀을 쉬었기 때문인지 처음 30여분은 적응이 되지 않는 듯 했으나 곧 편해졌다.
비는 그쳤으나 음울한 날씨에 독일영감 샤아르를 짝으로 하여 알베르게를 떠났는데 내 사정을
알게 된 큰 딸로 부터 오는 메시지와 전화가 진행을 더디게 했다.
원상 회복에 2박과 2.25유로(약값)가 들었을 뿐인데 귀국해서 기운차린 후 다시 가라고?
항공료는 차치하고 왕복 비행시간만도 25시간인데 선택할 만한 대안인가.
희미하게나마 마지막으로 일별하는, 3일 전에 올라왔던 마의 길에 새삼 소름이 끼쳤다.
겨우 해발 200m쯤의 코베따 산(Monte Kobeta) 허리를 도는 길인데 그처럼 힘겨웠던 까닭을
몽땅 디아레아에 씌워도 될까.
늙은이의 한계라는 설상(雪上)에 디아레아가 가상(加霜) 역할을 했을 뿐 아닌지.
간 밤에 호수몬따나가 아직 덜 회복된 몸에 알맞다며 권한 길은 빌바오 강안(Ria del Nervion
de Bilbao)을 걷는 낭만의 길이지만 나는 '노르떼 길 난도 상'이라는 전통 까미노를 택했다.
이것은 적당한 타협을 거부하는 내 방식이며 샤아르도 내 뜻에 동의하여 함께 시작했다.
까미노에서 노란 화살표는 진행방향을 알리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다만 복수의 루트 지역에서는 혼란스러울 때가 있으며 지도와 컴퍼스에 의한 점검에 소홀하면
비싼 값을 치루게 되기 일쑤다.
이 곳 빌바오에서도 자칫 방심하면 남서쪽인 발마세다(Balmaseda)로 빠지고 말겠다.
프랑스 길 산또 도밍고 데 라 깔사다(Santo Domingo de la Calzada) 또는 부르고스(Burgos)
로 가는 바요나 길(Via de Bayona/Camino Vasco del Interior)로 들기 십상인 길이다.
화살표가 숨어버렸거나 아예 사라져서 당황하게 하는 곳도 더러 있기 때문에 잠시라도 방심
해서는 안될 길목이 함정처럼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니까.
노르떼 길은 알베르게 앞으로 난 코베따 길에서 BI-3742(Zorrotza Kastrexana) 길로 바꿔 탄
후 악마의 다리(Puente del Diablo)를 통해서 까다구아 강(Rio Cadagua)을 건넌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하고많은 이름 중에 하필 악마의 다리?
산따 아게다(Santa Agueda) 길을 따르고, 관개 수로를 우회하여 아롤레짜(Arroletza) 산으로
오르는 중에 카트를 끌다밀다 하며 산으로 오르는 중년녀를 만났다.
튼실은 하나 자체의 중량이 여간아니겠는데 이런저런 짐을 잔뜩 실어 엄청 무거운 카트를 어렵
사리 다루고 있는 오지리(Austria) 여인.
옆에서 보기에도 민망한 이 일을 그녀는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까.
헝가리 손녀 에디나를 비롯해 유럽 여인들의 억척스러움으로 볼 때 아마도 산띠아고에 골인할
것으로 믿어지는데 그녀가 되레 늙은 나를 걱정해 주고 있으니....
발, 다리에 심각한 부상이 있어도 그들은 우리네와 달리 전통적, 고전적 순례 방식을 고집한다.
18c 중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 21c에 지근인 스페인에서 꿈틀거린다?
구겐하임 효과(Guggenheim Effect)?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이라는 랜드마크의 강력한 지원 덕인가?
공업도시에서 문화도시로의 변신의 성공사례라는 빌바오지만 이는 도심의 경우일 뿐 산업화,
공업화 또한 외연을 넓혀가고 있는 것 같다.
끄루쎄스(Cruces), 레뚜에르또(Retuerto)를 지나 인구 10만을 넘긴 바라칼도(Barakaldo)와
세스따오(Sestao), 뽀르뚜갈레떼(Portugalete)까지 날로 박차를 가하고 있는 듯 하니까.
2번째 이베리아 반도 생활이 겨우 2주간에 불과하지만 4년 사이(2011년~2015년)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변화는 이곳에도 산업화 바람이 불고 있다는 점이다.
18c 중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 21c에 지근인 스페인에서 꿈틀거린다?
무공해 환경을 위해 값비싼 생활비를 감수한다는 밴쿠버(Vancouver/Canada)와 닮은꼴이라
보아온 이베리아 반도의 소도시들에서.
더구나 대부분이 도심 보다 인적이 드문 산간벽촌, 강과 해안지대 등 청정지대를 통과하므로
무공해지역인 까미노가 오염된다면?
심각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까미노가 야금야금 공해지대로 잠식당해 가고 있다.
4년 전에는 이 땅의 시골에서 한국산 자동차를 보면 흥분했는데 지금은 거대한 광고판과 함께
자동차 전시 및 판매 영업소 보는 것이 그 때에 자동차 1대 보기 보다 더 쉬울 정도다.
걸음을 멈추고 한국의 기아자동차 전시장을 기웃거렸으나 아무도 없다.
궁금한 점들이 있을 듯 해서 였는데 아뿔싸, 주말이구나.
공단 주변은 으레 혼란스럽기 마련인 도로.
연결로를 따라 축구장을 비롯해 스포츠, 여가 시설을 스쳐가는 길에 들어섰다.
마을 단체 간의 경기인 듯 축구가 진행중이며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고 있는데, 술 냄새는 나지
않아도 주정꾼 같은 한 중년남이 다가와 길을 잘못 들었단다.
노란 화살표를 보며 왔다 해도 뒤 돌아가 갈림길에서 다시 확인해 보라고 우겨대는 그.
멀지 않은 길이라 되돌아가서 확인까지 했으니 이 놈 속으로 쾌재를 불렀겠다.
뻬레그리노 임을 모를 리 없는데도 늙은이 골탕먹이는 것이 취미?
고약한 취미를 가진 놈의 말에 끌려가는 늙은이가 한심하게 보였겠지?
바라칼도의 산 비쎈떼 교회(Parroquia de San Vicente Martir) 앞에서도 세요를 받고 가라는
한 초로남의 말에 혹해서 세요 사무실 찾느라 한참을 낭비했다.
바라칼도는 빌바오 강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스카이아 주에서 주도 빌바오 외에는 유일하게
10만명이 넘는 인구의 도시다.
시내에 빌바오 박람회장(Bilbao Exhibition Center)이 자리하고 있을 만큼 생활권이 빌바오인
빌바오권역의 중도시.
한때는 활성적 산업지역이었으나 빌바오가 포화상태가 되어가기 때문인가.
지금은 신 상업지역, 주거지역으로 거듭나고 있단다.
3일간 디아레아로 고생한 늙은이로 보이지 않을 만큼 몸 상태가 좋아서 줄곧 앞뒤를 바꿔가며
함께 왔던 샤아르는 내가 세요를 받으려고 교회사무실을 찾아 헤매는 사이에 앞서 갔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 보기에는 그에게 특정한 질병은 없는 듯 하나 날로 더욱 힘겨워 했는데 한계를 느끼고 귀가
(歸家)한 건 아닌지.
갈린도 강(Rio Galindo)을 따라 걷다가 철길과 우르비나가(Urbinaga)를 지나면 세스따오다.
비스카이아 주의 가장 중요한 철강산업지로 제철소(Altos Hornos de Vizcaya)가 있었다는데
4만을 헤아리던 인구가 28.300(2014년기준) 미만으로 줄었으며 감소세가 더욱 심해 간단다.
인구추이표에 따르면 개창된 1805년에 주민 340명이었던 마을이 100년 만에 10.000을 넘겼고
1981년에 39.933명으로 피크(peak)를 이룬 이후 감소 일로, 30여년에 4분의 1이나 줄었다.
철강산업의 퇴조에 따른 감소라 하겠는데 극복할 대책은 있는지.
병상을 박차고 빌바오 ~ 뽀베냐의 35km를....
지금은 문화, 관광도시로 거듭나 있는 빌바오지만 이전의 중공업, 철강도시로 자리매김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빌바오 강(Ria del Nervion)일 것이다.
필수인 선박의 자유로운 출입을 위해 뽀르뚜갈레떼(Portugalete)의 하구(대서양 Cantabrico
해)를 빌바오 한 복판까지 깊숙이 끌어들였으니까.
이렇게 해서 조성된 빌바오 ~ 뽀르뚜갈레떼의 20km에 육박하는 빌바오 강안 길이 노르떼 길
(Camino)의 보행자 대체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14c초, 마리아 디아스 데 아로(Maria Diaz de Haro)가 주도하여 조성했다는 뽀르뚜갈레떼.
뽀르뚜갈과의 국경이 아득한 지역인데도 국경지대의 도시로 인식하기 십상인 지명이다.
'Ugaleta'(우갈레따)라는 바스크어 지명에 바스크어 'Portu'(스페인어Puerto/항구)를 전치해
지명 'Portugalete'를 만들었다는 것.
초기에는 빌바오 항의 최대 경쟁항이었으나 16c초에 빌바오 항에 무역항의 주도권이 넘어감
으로서 한 때 인구 58.000명이 넘는 항구도시가 지금(2015년)은 46.718명으로 감소했단다.
인구의 감소가 완만하며 둔화상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산업도시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것이
그 효과일 것이다.
세스따오를 벗어나서 뽀르뚜갈레떼로 진입할 때 눈을 끌어가는 가장 뚜렷한 물체는 소위'걸려
있는 다리'(hanging bridge/Puente Colgante)라는 현수교(스페인어'꼴간떼'= 영어'행깅').
이바이사발(Ibaizabal/빌바오) 서쪽 하구의 양안(Portugalete와 Getxo)에 세운 두 탑을 잇는
이 다리(Bizkaiko Zubia/Vizcaya Bridge)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라 있다.
바스크 출신 건축가 알베르또 데 빨라씨오(Alberto de Palacio)가 설계,1893년에 완공된 높이
45m, 총길이 약 160m인 이 다리의 등재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세기의 전통적 철제 구조물 제작방법으로 당시에는 신 경량 기술인 강철 밧줄을 사용했다.
고공에 매달린 곤돌라(gondola)를 이용해 사람과 짐을 운반한 세계 최초의 다리로 유럽, 아프
리카와 북미 등의 각지에서 이 다리를 벤치마킹 했으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다리는 별로 없다.
경량 강철 밧줄을 혁신적으로 사용함으로서 산업혁명 시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철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다리다"
다리 아래로 대형 선박들이 상시 항해할 수 있다는데 우리나라의 부산 영도다리가 떠올랐다.
일제에 의해 1934년 11월에 준공되었다는 길이 214.63m, 높이 7.2m인 한국 최초의 연륙교로
유일한 일엽식(一葉式) 도개교(跳開橋)다.
부산 중구와 영도구를 연결하며 뿌엔떼 꼴간떼와 달리 중대형 선박을 통과시키려면 다리의 한
쪽을 들어올려야 한다.
꼴간떼 다리 보다 41년이나 늦게 건설했는데도 실용성이 떨어진다면 교량건설 기술의 차이?
이 두 다리는 단순한 기술적 비교 보다는 주된 용도의 차원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므로 기술적
우열은 의미 없을 것이다.
사흘을 빼앗겼을 만큼 디아레아로 고생한 몸이라 뽀르뚜갈레떼에서 마감하려 했건만 의외의
쾌조에 아직 많이 남아있는 해(太陽)가 더 진행하고 싶게 충동했다.
뽀르뚜갈레떼의 알베르게를 이미 한참 지났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다음 알베르게의 소재지인
뽀베냐 까지 10km 남짓 된다는 말에 자신감이 불끈했다.
당장 비를 쏟아낼 듯한 날씨인데도 지체 없이 걸음을 재촉했는데 이딸리아노 한 쌍과 함께 뒤
따라오던 한 에스빠뇰이 달려와 나와 동행하며 가이드를 자임했다.
이딸리아인들이 더 걷기를 포기했다나.
몇km를 함께 걸은 에스빠뇰 청년과 헤어진 후 다시 홀로가 되었다.
우측 하구에 자리한 빌바오 외항이 멀잖게 다가왔다.
영국 남단의 포츠머스 항(Portsmouth)을 왕래하는 여객선 페리의 발착항이다.
(Brittany Ferries Bilbao S.L./Transporte Maritimo)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 잰걸음으로 오늘의 목적지인 뽀베냐가 지척으로 다가
오는 마을 라 아레나를 통과했다.
바스크 지방에서는 마지막이며 데바 해변 이후 유일한 해변(Playa de la Arena) 마을이다.
1km쯤 되는 듯 한 해변의 백사장을 걷고 바르바둔 강(Rio Barbadun)에 놓인 보행자 월강용
철다리를 건너면 아담한 마을 뽀베냐(Pobena)다.
주민 200명 안팎의 자그마한 마을이지만 전에는 학령기 아동이 꽤 있었던가.
뽀베냐의 알베르게가 옛 학교 건물이라니.(우리의 분교에 해당하는 미니학교)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 통폐합의 상징인 노랑버스(School-bus)가 작은
마을들을 누비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우리와 대동소이한 현실에 직면해 있지 않은가.
이농 현상이 우리처럼 심하지는 않다 해도 농촌의 폐가 보는 것이 어려운 일 아니며 넓은 땅에
인구 증가는 제자리걸음이니 그럴 수 밖에.
전화위복이 된 황당한 도나띠보
기부제(donativo/donation)로 운영한다는 뽀베냐의 알베르게.
2명의 남녀 관리인은 볼런티어(volunteer) 오스삐딸레로라는데 관리 경험이 일천한가.
첫 인상은 투숙자 관리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
'도나띠보'란 자기의 형편(능력)대로, 비공개 비정액 금전을 성심껏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오스삐딸레로들은 자기네 면전에서 기부함에 돈 넣기를 강요하고 있다.
황당하기 짝없는 이런 기부제는 전번(2011년)의 5개루트 2천여km를 포함해 내가 묵은 무수한
알베르게에서 초유의 일이다.
기부제의 알베르게에서 내가 내는 금액은 10유로 정액이다.
알베르게의 호. 불호와 무관하게 여유로운 듯한 곳에서는 기부를 생략하고 빈곤해 보이는 집
에는 내 알베르게 이용료 상한선인 10유로를 기부박스에 넣는다.
10유로를 기부했으므로 상한선을 넘은 것은 아니지만 면전에서 강요당하다니 이게 무슨 기부?
등록을 마쳤기 망정이지 등록 전이라면 즉시 나와버렸을 것이다.
알베르게에서 실내화(second shoes) 사용은 이의를 달 수 없이 필요하다.
매일,종일 걷는데다 온갖 악취가 절어있는 신발은 집단생활에서 대표적 공해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내화의 사용범위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바꿔 신은 두번째 신발이 실내에 국한하지 않고 실외로 나가 제1 신발의
역할을 한다면 갈아신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알베르게 당국에서 실내화를 제공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제1
신발을 신도록 해야 하는 당위를 강조하지만 먹혀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 신발은 수년째 애용하고 있는 중고 샌들(sandal) 2컬레.
하나는 실내용으로 사용하다가 실외용이 수명을 다하면 대체할 것인데 비슷하기 때문에 바꿔
신었음에도 간혹 오해가 따르기도 한다.
그 때마다 가벼운 사과를 받고 부드럽게 넘겼는데 같은 일이 벌어진 이 집에서는 달랐다.
오스삐딸레로의 황당한 기부 강요에 불쾌감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내화 시비까지 겹쳐 끝내 참지 못하고 알베르게를 포기했다.
전액을 되받은 나는 지체없이 마을 중심부 광장으로 갔다.
교회(Ermita de Nuestra Señora del Socorro) 경내에도 무난한 집터가 있으나 알베르게를
찾아가기 전에 눈여겨 봐둔 곳이다.
3면을 벽으로 막았고 지붕이 있는 버스정류장인데 천막 집터로 최적의 장소다.
마지막 버스가 해지기 전에 있기 때문에 버스 이용자에게 미안하지 않아도 되고.
닭장 같은 2층 침대(bunk)에서 뒤채는 것에 비하면 보금자리인데다 알베르게에서 되받은 10
유로는 저녁식사(bocadillo)를 하고 담배 1갑을 사고도 남았으니 전화위복 아닌가.(담배는 잠
못이루는 밤에 이따금 필요악이다)
이번 까미노 걷기 최초의 천막집 짓기를 마쳐갈 때 낯익은 에스빠뇰이 다가왔다.
오후에 길 안내한 청년인데 무슨 용무가 있는지 이 마을에 왔다가 천막을 치고있는 나를 본 것.
내 천막에 대해서는 함께 걸을 때 이미 말했거니와 실제로 확인한 그는 양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감동적인 표정을 지었다.
낮에 81살 늙은이가 한 말이 믿기지 않았던가.
작은 마을인데도 여러 개의 바르(Bar)가 있으며 밤 늦게까지 사람들로 시끄러운 바르 앞 광장.
이 마을의 성인 남녀가 모두 출동해도 이만큼 되지 못할 텐데 주차장에 차량이 즐비한 것으로
보아 밤이면 이웃 마을들의 원정객(?)이 주를 이룰 만큼 인기있는 바르들인가.
이슥한 시간에 오카리나를 꺼내어 내 18번 2곡(Amazing . . 과 Nobody Knows . . )을 불렀다.
3일을 앓은 몸으로 30km가 넘는 길을 걷고도 말짱하다면 당연하지 않은가.
노래를 마치고 누으려 할 때 중년 한쌍이 찾아왔다.
천막칠 때 유심히 보았는데 오카리나 연주(에메이징 그레이스)가 감동적이어서 방문했다나.
크리스천이냐고 물으며 자기네가 비노(vino/wine)를 대접하고 싶은데 응해 달라는 그들.
바르에서 내가 마신 술값을 대신 지불하는 사람은 이따금 있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 땅에서 크리스천은 가톨릭을 의미하며 나는 프로테스탄트지만 가톨릭에 대해서는 예전과
달리 매우 호의적이라는 내 답에 그들은 그 까닭을 또 물어왔다.
타 종교 또는 종파에 비해 더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회구원 프로그램을 높이
평가한다는 내 대답에 고무되었는지 그들은 흡족해 하는 듯 했다.
출출한 참에 술 얻어마신 값으로 한 빈말이 아니라 가톨릭은 상전벽해로 표현될 만큼 변했고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시대의 변화는 더욱 괄목상대의 경지다.
(이 구간(빌바오~뽀베냐)에 대한 기억은 유난히 가물거린다.
힘주어(꾹꾹눌러) 쓴 연필글씨는 지우개로 지워도 연필자국이 남으며 그 자국만으로도 내용을
살려낼 수 있지만 가볍게 쓴 글씨는 깔끔하게 지워지는데 마치 후자 같다.
변화가 많은 길이라 100여컷 넘게 디카에 담았을 뿐 전혀 메모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도저히 살려낼 수 없는 꺼져버린 불 같다.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마친 수술의 회복이 더뎌서 PC 앞에 앉아 있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구겐하임 미술관(상)과 꼴간떼(Puente Colgante/hanging bridge/중, 하)
첫댓글 연재를 시작하시었기에 반가움이 앞섭니다, 사모님의 차도는요? 저희는 잘 지나고 있아오며, 7월과 8월은 San Francisco 에서 손녀들과
산으로 쏘다니다 오겠읍니다.
신경 쓰시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가물거리는 남은 기억이나마 꺼져버리기 전에 기록하려고 애는 쓰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쉽지 않네요.
저의 내자의 병세는 확연하게 호전되어 가벼운 나들이는 할 수 있습니다.
염려해 주시는 양주의 성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동부에서 서부, 적잖은 시차가 있는 긴 여정이지만 아주 행복한 날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