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그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영상시인으로 칭송받고 있다. 시적이고 철학적이며 종교적으로 영화를 풀어내서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다. 타르코프스키는 사상 최고의 작가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희생>은 삶 즉 인생의 희생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알렉산더라는 은퇴한 교수이자 연극배우가 제 3차대전인 핵전쟁이라는 대재앙을 막기 위해서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탈바꿈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집이나 사람들 그리고 아들까지도 바칠 희생을 함으로써 구원의 길로 들어서고자 노력하는 이야기이다.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구원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가장 적절한 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이분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류의 모든 죄악이 서려있는 십자가를 지신 정말 위대하고 거룩하신 분이심이 틀림없다. 그 외에도 인도가 낳은 위인인 간디 선생이나 성스럽고 복받으실 마더 테레사 같은 분들이 이 한 몸 희생하면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했다.
희생이란 여기서는 무슨 뜻일까라는 생각이 자꾸 자꾸 난다. 물질문명 그리고 기계화에 파괴되어만 가는 이 세상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삭막하고 대화가 줄어만 가는 이런 사회를 냉소적인 어조로 꼬집고 있다. 즉 죽은 나무란 메말라가는 인간의 영혼일 수도 있고 아니면 냉혹하고 차가운 사회일 수도 있는데 그런 나무에 매일 계속해서 물을 주면은 언젠가는 꼭 꽃을 피울 거라는 것이다. 말미에 이것은 사실로 판명이 난다. 믿기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정말로 죽은 나무가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상당히 의심스럽고 이해 안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나 나오는 봉사나 벙어리 등을 치유한 그런 예수님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예수님만이 그런 기적을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라 고센이나 알렉산더 같은 평범한 인간도 성심성의 것 애정을 가지고 노력만 한다면 죽은 나무를 살린다는 그런 기적은 거짓이 아님을 알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고 역설하는 듯 하다.
영혼이 죽어서 말라비틀어져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데에는 어떤 애정이나 희생이 없고서는 안된다는 것 같다. 타르코프스키 선생은 영혼이 매말라있는 사람들에게 온정의 물을 줄 수 있는 희생자이자 구원자가 필요함을 영화 속에서 역설하고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다 좋고 훌륭한 영화들이며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그런 명작·걸작들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솔직히 잠 오고 지루하며 대단히 납득이 안가는 그런 영화에 속한다. 마치 한 편의 시를 읊고 있는 것 같고 또 한 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대단히 철학적이고 예술적 경향이 다분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대단한 희생을 은연중에 각오하게 만든다. 밀려드는 잠세계에 빠져들지 않도록 눈에 힘을 주고 2시간 20 여분동안 정말 인내력이 강한 희생을 무언중에 강요하고 있다. 진정으로 참을성 있게 봐주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 <노스탤지어/향수>에 이어서 <희생>은 나의 고개를 떨구게 만들면서 나를 고개숙인 남자로 만들어버렸다. <노스탤지어>는 그런 대로 자다깨다하면서 가능한 열심히 봤건만 이 <희생>은 나의 눈꺼풀에 주문을 걸 듯이 나의 눈을 순식간 감기도록 만들어버렸다. 나 혼자 절반쯤 보다가 끄고 자버렸다. 타르코프스키 선생, 대단허요!!!
<희생>을 보다보면은 종교 특히 카톨릭에 관해서 자주 등장함을 잘 알 수 있다. 종교란 무엇이고 그 역할을 또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는 사람들이 아주 위기에 처해있을 때 또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 갑자기 하느님 아버지, 부처님 등등하면서 종교를 찾곤 한다. 우리 인간은 이기적이게도 하느님이 우리를 찾거나 필요로 하실 때는 모른 척하다가 우리가 위급할 때에나 신을 찾곤 한다. 그래도 보통 종교는 회개와 참회의 수단으로 자주 이용된다. 사소한 실수로 큰 죄를 지었거나 씻을 수 없는 행동을 함으로써 남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는 등의 일을 한 사람들이 뉘우침의 수단으로 종종 불교든 개신교 혹은 카톨릭이든지 종교를 통해서 사죄와 죄의 고백을 구한다.
<희생>을 보고 있노라면 스웨덴이 낳은 거장인 시네아스트 잉마르 베리히만의 <제7의 봉인>과 이태리 네오리얼리즘을 이끌었던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이 먼저 생각난다. 물론 <길>에서는 직접적으로 종교에 의한 구원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젤소미나라는 성녀를 통해 잠파노라는 인간 말종이자 아주 불쌍하고 죄많은 위인을 구원하려고 했으나 잠파노의 옹졸하고 강한 비련함에 상처를 받고 그의 구원사업은 실패로 돌아간다. <제7의 봉인>은 독특하게도 중세시대의 십자군 기사가 죽음의 사자에게서 평범한 사람들 즉 광대부부나 다른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죽음의 사자와 체스 한 판을 두면서 대화를 통해서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애쓴다. 여기서는 하느님이 진정으로 계시냐는 존재의 문제와 종교의 광신성과 비정함 등을 비판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흑사병이라는 엄청나게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데 종교라는 것과 하느님이라는 존재는 전혀 이들을 신경쓰지도 않고 종교지도자라는 속물들은 마치 벌레보듯이 본체만체하면서 비정하게 모른체 함을 아주 냉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이 바로 <희생>이라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아파서 또 배고파서 죽어가는데 종교라는 것은 그저 신자 숫자에나 신경쓰고 이런 이들에게 관심도 없어서 신이라는 존재는 이런 이들을 보호해주지도 않으며 그 신의 존재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진다. 그럼으로써 무신론자들이 늘어만 가는 것이다. 힘들 때 왜 신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느냐며 원망 섞인 소리가 나오면서 종교에 등을 돌리게 된다. <희생>에서의 종교는 알렉산더라는 한 인간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종교를 믿지 않고 있다가 일순간에 주의 기도문을 열렬히 암송하는 신심이 깊은 신자로 탈바꿈시켰다. 이런 냉담자를 감싸안을 수 있는 성모 마리아의 은총과 보살핌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알렉산더가 대재앙에서 많을 사람들을 구하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지며 희생하는 데에 아이슬란드에서 온 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마리아와 동침해야만 인류를 최대의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단다.
다소 황당한 얘기이지만 종교적인 면에서 봤을 때, 그런 대로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성모 마리아가 누구인가? 그녀 아니 그분은 불쌍하고 버림받은 영혼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안으신다. 마치 현대의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아무리 살인 같은 대죄를 지었다고 한들 알 수 없는 그 큰 힘으로 모든 것을 다 감싸안아서 보살펴 주실려고 노력하신다. 이렇듯 영화 속에서의 마리아도 처음에는 동침을 정중히 거부하지만 인류 구원이라는 엄청난 멍에를 맨 그리고 대단한 임무를 띄고 온 알렉산더가 자살하려고 관자놀이에 총을 갖다대는 순간에 그를 사랑과 동정으로 감싸안으며 엄마처럼 무조건적으로 그의 청을 들어준다.
<희생>은 장면의 이동이 거의 없고 카메라가 무리하게 움직이는 것도 없다. 한 장면을 찍는데 거의 한 10분정도를 패닝한 체로 좌우로 움직일 뿐 틸팅 즉 상하로 움직이는 것도 다소 드물다. 거의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으며 클로즈업도 자주 안한다.
<희생>의 전체적인 느낌도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데 카메라가 연극공연의 관객처럼 물끄러미 혹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도 바로 연극의 그것이다. 너무나 연극적인 요소가 넘쳐난다. 셋팅도 가구도 없이 뻥 뚤려있는 그런 무대이다. 연극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있다. 침대가 나오는 장면에서 거의 조명없이 창문의 빛만으로 어둠 속에서 침대를 찍는 장면이 나오는데 <향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 침대가 인간을 구속하고 가두는 새장 같은 느낌이 든다. 가끔씩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 새장을 뚫고 나가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외치는 듯 하다.
극중에서 마리아가 알렉산더의 생일축하파티를 준비하고 집에 갈려고 하던 참에 알렉산더의 부인이 시킨 것을 되새기던 장면이 참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카매라가 패닝한 체로 약간 클로즈업하면서 계속 한 장면을 주시하고 있는데 마리아가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서 '음식데우기, 촛불, 와인' 이라고 말하면서 속삭이듯이 외운다. 참 기묘하다고 볼 수 있다. 나도 연극 무대에서 한 번 공연해본 경험이 있어서 잘 아는데 이것은 극이 잘 흘러가다가 중요한 장면에서 한 배우가 극의 핵심이 되는 대사를 관객을 향해서 내뱉는 것이다. 그럼으로 촛불이라는 말을 강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 촛불은 그의 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한다. 왜 이 촛불을 강조하는 것일까? 인생이 촛불처럼 흔들려서 일까 아니면 인생이 촛불처럼 활활 타오르기를 원하는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자주 부르는 가객 정태춘의 촛불이 떠오른다. 인생이라는 님을 생각해서 밤새도록 그 님을 위해서 촛불을 밝혀두리라.
<희생>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데니스 호프만 주연의 <세일즈맨의 죽음>과 폴 뉴먼이 감독한 존 말코비치 주연의 <유리동물원>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연극적 요소도 넘쳐나고 동양적인 요소도 또한 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에 널려서 헤엄치고 있다. 일본음악을 듣고 태극무늬가 있는 남자 기모노옷을 입고 있다. 지금은 기억을 못하지만 알렉산더는 전생이 일본인이라고 한다. 어찌해서 이렇게 동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하고 의문이 든다.
구로사와 아끼라의 <라쇼몽>을 본 적이 있다. 한글 자막이 없어서 일본말 원문으로 봐야만 했지만 그 영화는 거꾸로 약간 서양적인 면이 돋보이는 것 같았다. 배우들의 연기가 조금 과장되면서 서양배우들의 그것이 되어 버렸고 우리에게 낯익은 음악인 무곡 볼레로를 변형시켜서 일본적이면서도 볼레로 특유의 경쾌하면서 힘있는 음이 살아나도록 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우연히 베리히만과 인연이 닿아서 스웨덴 왕립극단 배우들과 그 베리히만 사단과 일하게 되었다. 아마도 <향수>나 <희생>을 찍은 곳도 스웨덴의 드넓은 땅이 아닐까 싶고 독일어처럼 들렸고 러시아말같이도 들렸던 언어가 바로 스웨덴 말일 것이다. <희생>에는 삶의 희망과 구원 그리고 희생이 이 모든 것이 혼합해서 조화되어 메마르고 죽어가는 영혼들의 마음 속에 사랑과 정이라는 물을 뿌려주고 있다. 기계와 물질에 찌들려만 가는 우리네 인생살이가 이보다 더 슬픈 순 없다. 사랑도 애정도 돈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고 상처를 받는 세상이다. <희생>을 보면서 조금 이해하기는 힘들었으나 어느 면에서든지 조금씩 양보하고 희생하는 인생을 살다보면 삶의 희망과 광명이 죽은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활짝 돋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