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은님 뜻이옵니다./전성욱교우 출가동기
출가를 하고 나서 자주 대하는 질문 중의 하나가 ‘어떻게 출가를 하게 됐나요?’하는 것이었다.
이에 처음 발심하여 출가를 결심했을 때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있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스케일이 큰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하고 답을 했었고,
영산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많은 인연들의 도움이 있어 출가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하고 답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질문을 접하게 된다면 나는 ‘사은의 도움 덕분입니다.’하고 답할 것이다.
나는 전라북도 정읍의 한 산골마을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대부분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정읍과 전주에서 보냈다.
그리고 우리 회상과의 인연은 대학을 진학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학교에는 원불교동아리(시립대원불교학생회 일명 시원회)가 있었는데 그 동아리의 회장이
학과선배이자 고등학교선배였다. 마침 새학기가 시작되어 신입생 유치경쟁이 치열한 시기였고,
나는 그날로 ‘차 마시는 동아리’라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입회원서에 싸인을 하고 말았다.
(문희수 형님 고맙소^^) 난 한참동안을 정말 그 동아리의 정체성을 ‘차 마시는 동아리’로 알고 지냈고,
나중에 동아리소속이 종교분과에 속해있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머릿속에는 한 단어가 스쳤다.
“사이비!” 그러나 사람들과의 인연은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아니 오히려 거부하는 마음이 강했던 나였지만,
종교적 색채보다는 대학문화(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가 지배하던 동아리방이
나에게는 부담없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시원회와의 인연은 대학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대학생활의 자유가 한없이 지속될 것만 같던 그때. 나에게도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고민해야할 시간이 여지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인생의 방향로를 찾지 못해 헤매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웠다.
바로 그때 구원의 손길이 나를 이끌었으니 다름 아닌 동아리후배의 ‘공부하러 가자’는 권유였다.
몇 번을 피하다가 ‘딱 한번만 가보자’는 회유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교당을 찾았다.
그날 교당에서 화요정전공부방이 열렸고, 김제원 교무님께서 강의를 하시는데
그 말씀들이 모두 나에게 하시는 것 같았다. 특히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지려 준비하고 있던 나에게
‘돈 벌고 직업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은 나에겐 충격이었다.
나의 고민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로 전환되었다. 그후 나는 교당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면서
교무님과 많은 문답을 하였다.
정말 행복한 하루 하루였다. 또한 그 속에서 교무님의 모습을 통해 나의 비전을 보았다.
교무님처럼 살면 되겠다. 가치있는 삶을 통해 영생의 행복을 찾은 교무님의 파안미소를 보면서
나의 마음속에는 ‘출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막상 결심을 하고 보니 세상속의 화려함이 나를 유혹한다.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다.
어찌하나.. 나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대학선방을 찾았다.
선을 나면서 스스로에게 묻고 허공에 대고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기도도 드려보았다.
‘성욱아 어떡할래’, ‘어찌할까요 사은님’.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선방을 나서는 내 마음속에는 ‘출가’라는 단어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더 이상은 흔들리지 말아야겠다 마음먹고 그 다음주에 바로 당시 종법사님으로 계시던
좌산 상사님께 출가의 서원을 올렸다.
좌산상사님께서는 ‘그래 열심히 한번 해봐라’하시며 손을 꼭 잡아주셨다.
이제 어느덧 5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참 다행이다 싶다. 내 어찌 혼자 힘으로
이 길을 갈 수 있었으리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이끌어준 사은의 은덕이 있었음이라...
지금 내안에는 인생의 방향로를 알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교화의 싹이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