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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인도 첸나이 한인사회의 살아있는 전설,문인,레스토랑운영자,호텔회장,주방총장,골프천재,한인회총무인 조상현의 글을 옮겨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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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조상현입니다.
숨쉬고 살아 있음이 무미한 날들입니다..
저는 오늘, 가고 없는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그를 만나기 위해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1년, 여름 같지않은 여름 야학 하나가 문을 열었습니다. 전남 광주시 임동성당 근처 조그만 상가건물 지하에 자리잡은 연지학당 이란 야학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사회에 나와 배움에 목마른, 광주 지역의 소위 공순이 공돌이들, 가정주부, 군복무 중인 방위병, 가정주부들이 학생이었고 전남대학교에 적을 둔 레오라는 동아리의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근로 청소년학교였습니다.
중고등학교 6년 과정을 3년으로 단축해 직장인 학생들의 검정고시 준비와 노동법 같은 의식화 교육이 주된 교육 방침이던 그 야학의 교장도, 교감도, 선생님들도 다 어린 대학생이었으니, 열일곱부터 쉰이 넘는 연령층이 다양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함께하는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라이온스클럽 이라는 한 사회 단체로부터 지원이 끊긴 제정적인 문제까지 선생님들 몫이 되었지만 그들은 야학을 저버리지 않았고 사비를 털어서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선생님들이나 학생들 모두 참 어렵고 곤란한 처지였습니다.
선생님들 대부분이 운동권 학생들이었으며 전라도 각지에서 올라온 자취생들과 하숙생들이었는데 낮에는 저마다의 학과 강의는 물론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각종 시위와 시국행사에 참여해야 했고 밤에는 야학에 나와 야학생들을 가르쳐야 했고 문제 많거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보호자역할, 후견인 역할을 자처해야 했고 취업을 알선하러 공장들을 방문하고 야학 제정을 확보하기 위해 독지가를 찾아 나서야 하는 몸과 마음이 온통 바쁜 분들이었습니다.
복사기 하나 없어 학습자료나 시험지를 밤새워서 일일이 납을 먹인 종이에 철필로 새겨 롤라에 잉크를 묻혀 밀어 인쇄하는 등사기라는 것으로 준비해야 했고, 틈이 나고 기회가 되면 일일 찻집을 운영하여 야학 제정을 마련해야 했고, 성적이 처지는 학생을 새벽까지 개인지도 했고, 4월과 8월, 1년에 두 번 있는 검정고시를 앞두고는 보름씩 한 달씩 합숙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르바이트에 연애에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던 정의롭고 치열하게 살던, 정도 많고 사랑도 많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1982년, 여전히 꽃조차 필 엄두를 못 내던 늦은 봄날, 교실 앞쪽에 과목별로 예닐곱 명의 새로 오신 어린 선생님들이 제자 될 학생들에게 자기 소개를 하는 뜻 깊은 자리가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나와서 인사하던, 유난히 얼굴이 까맣고 목소리가 크고 사투리가 심하던 촌티 나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김 원호’ 나보다 세 살 위의 그분을 선생님과 학생의 신분으로 그렇게 만났습니다. 나는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으며 형은 나를 상현이라 불렀습니다.
지난 7월 8일 그토록 사랑하던 세상과 아끼는 사람들을 남겨둔 체 홀연히 갔습니다. 그날도, 다른 동반자께 양해를 구하면서까지 나를 대신 끼워 넣어, 인도에서 고생하는 동생이라고 인사시키고 1번홀에서 혼자 파 하고 그리 좋아하더니 두 홀을 채 못 돌고 쓰러져 한마디 말없이 그렇게 갔습니다…
형의 나이, 우리 나이로 마흔 아홉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오 십대가 남자들에게 위험하고 잔인한 나이라 하지만 내 주위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왜 하필 형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그날의 모든 것이 다 후회되고 죄책감과 무력감에 온 마음이 슬프고 온 몸의 혈이 막히고 숨통이 멎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아닌데, 형이 돌봐 줄 사람이 너무 많은데,
성질 급한 형은 그렇게 서둘러 갔습니다.
형은 어느 자리에서나 항상 앞에 있었습니다.
소풍을 가던, 당구장을 가던, 포장마차를 가던 늘 분위기를 주도하고 이끌고, 안보이면 유난히 표가 나고 궁금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얼마나 정이 많았던지요.
광주 동구청 어딘가에 형의 작은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식당에 가끔 학생들을 데리고가 주말 아르바이트를 시키고 용돈을 챙겨주곤 했고 육개장에 양지고기를 두어 주먹씩 넣어주곤 했고, 굶고 온 학생들의 야참과 도시락을 챙겼고 하루라도 결석하면 집에까지 찾아와 이것 저것 사정을 살폈고 야학 사람들의 연애문제까지 상담하던 그야말로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해 가을, 월출산으로 야유회를 갔을때, 온 들판과 산등성이에 빨갛게 익은 감나무를 보고 감동하고 좋아하던 형의 순수함은 이제 단 한장 사진으로만 남았습니다.
막내인 날 포장마차에 데리고 가 딱 소주 한잔만 따라주며 닭발이라도 많이 먹으라며 약을 올리고 재미있어 하던 형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수업이 없는 날도 가끔 주머니를 털어 떡볶이며 호떡이며 사 들고 와 주린 배를 채워주던 그 따뚯함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60여명 입학에 졸업을 앞두고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것을 너무도 안타까워하며 같이 가정방문을 하던 그 함박눈 내리고 별이 쏟아지던 밤, 형과 함께 걷던 그 얼음 서그럭거리던 그 웅덩이길을 어찌 잃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형과 일 년여를 보내고 헤어진 게 83년 2월18일, 서울로 올라오고 연락이 두절된 채 두고두고 잊지 못하던 형을 2000년 3월 이곳 인도 땅 첸나이에 다시 만났습니다.
손님으로 온 형을 단박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16년의 세월이었지 감사와 고마움을 잊었기 때문은 아니었다는 것을 형은 알았는지………….
마침, 형은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 가려던 시점이었고 나는 인도에 막 첫발을 내디딘 참이라 그 짧은 시간에 회포를 풀고 옛이야기 하기에 부족하고 모자란 시간 이었지만 사람의 삶과 고뇌와 진심이란 것이 말 안 해도 알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그때 알았습니다.
다만, 다시 만난 것이 기뻤고 그 짧은 동안 맘 써준 것이 인도생활 살피고 익히고 적응 하는데 크나큰 도움과 힘과 용기가 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궁금해 하고 챙기고 걱정하더니 칠팔 년 전에 삼진해운이란 해운회를 창립하여 그야말로 해운업계의 입지전적인 회사로 발 돋음 하며 타고난 사업가의 진가를 맘껏드러내는 형을 보며 내 일인 듯 기쁘고 뿌듯했습니다.
너무도 바쁘게 사는 형을 알기에, 어쩌다 한국방문 때 혹여 연락을 안하고 인도로 돌아오면 득달같이 전화해서 그 듣기만해도 웃음 머금게 하는 살벌하지만 구수한 사투리로 욕을 해대던 정 많은 그 마음에 무어라 고맙단 말 한번 못 했는데
한국 갈 때마다 새로운 메뉴 배워 가라고 한 시간씩 차 몰고가 문전성시라는 식당에서 밥 사주고 거래처나 지인들 술자리 때 불러 인사 시키고 종합검진 받으라고 예약해 주고, 고향에서 낚지 올라 왔다고 부르고 인도 출장 때 마다 고기며 인삼이며 솔잎이며 급한 물건 가져다 주고 냄새 나는 홍어 싸 들고 와 받아먹는 사람보다 더 좋아서 흐뭇해 하고 한국 방문 때마다 자리 만들어 골프 치게 하고 사십 대가 위험하다고 건강 챙기라고 충고하고 술 많이 먹는다고 욕하고 사업 자꾸 벌인다고 걱정 하더니………………
부끄럽다는 것은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라 했는데, 그렇게 맥없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형이 야속하고 원망스럽지만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쩌면 나는, 그 무기력함을 무기로, 형처럼 가지 않기 위해 더 잘 살려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 같은 마음으로 형과의 30년 인연을 돌아 보면서도 나는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고 뼈저리게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형이 죽던 날도 저녁을 먹고 배설을 하였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느끼는 배고픔과 배부름에 대해서 수치스러웠으며
오일장 내내 설사와 식도염의 고통 속에서도 형의 죽음을 슬퍼하고 영원한 안식을 염원하면서도, 감히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술로 감당하여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먹었고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형이 조문객을 위해 마지막으로 형의 고향에서 올려 보내준 홍어며 전복이며 안주 삼아 목구멍에 소주를 부었습니다. 더 이상 놓을 자리가 없어 먼저 온 조화의 리본을 떼어내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특권에 대해 씁쓸했고 세상일을 걱정하는 나 자신이 속물임에 머리가 먹먹했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끝이 어디인지 죽음 뒤에는 무엇이 오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좋다는 말이나, 죽은사람만 불쌍하다 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형은 불쌍하지도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형의 죽음은 단절과 파괴나 소멸이 아닌, 형의 인격적 완성이었으며 두 아들을 통해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인생의 고비였으며 조금 굵은 마디였을 뿐임을 믿습니다.
이제 형은 갔습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형은 한줌 재가되어 갑산공원 양지바른 언덕에 깊고 고이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 모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때 형이 살았던 첸나이는 여전히 소란스럽고 번잡하며 형의 회사 삼진해운이 있는 공덕동 오거리의 차들도 사람들도 변함없이 바쁘고 분주합니다.
형과 나의 인연을 두고, 혹자는 질기다 하고 혹자는 억겁이라 했습니다. 그 억겁이라는 시간의 단위야 너무 깊고 멀어서 재고 감당할 수가 없지만 그 억겁의 인연이 수 억겁이 흐른 후에라도 다시 맺어질 것을 믿습니다.
화장터에서 장지에서 쏟아지는 장대비보다 많은 눈물을 삼켰을, 형을 가슴에 묻었을 형의 부모님과 형수와 두 아들과 핏줄들.............. 그리고 삼진해운이 건강과 평화와 축복과 발전의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그토록 많은 꿈을 가지고 살고 싶어했던 형이 남긴 삼진해운을 많이 도와 주시고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사를 창립하고 성장시킨 사람은 김원호 사장이었지만,
그리고 형은 갔지만, 여러 가지 시스템이나 구조와 재무가 건실하고 또한 회사를 끌고 갈 경험 많고 훌륭한 임직원들은 여전히 삼진해운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육백여 분 중에 혹시라도 과거 삼진해운 김원호 사장 생전에 형으로 인해 섭섭함이나 크고 작은 상처라도 있었다면 형을 대신해 사과 드리고 용서를 청합니다. 모쪼록, 형이 한없이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어 주시고 알아 주셔서, 그 것이 어떤 것이든, 형의 본의가 아니었을 것이니 널리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했던 내일입니다. 바쁜 우리를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영혼을 돌아보는 시간들 되시고 사랑과 가족과 건강을 챙기는 원주 되시기 바랍니다.
조상현 배상. ................................................................................................................................................................................................................................................................................................................................................................
동양에는 "겁(劫:kalpa)" 이라는 시간 단위가 있다 천지가 한번 개벽하고 다음 개벽이 시작될 때까지의 시간을 뜻한다, 1000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집채만한 바위를 뚫어 없애거나 1000년에 한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이 사방 40리의 바위를 닳아 없애는 시간, 혹은 사방 40리의 철성(鐵城)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에 한 알씩 꺼내 다 비워질 때까지를 겁(劫) 이라고 하기도 한다.
* 불교에서는 이런 광대무변한 우주의 변방 중 변방인 지구에 그것도 미물이 아닌 사람으로 태어나 함께 살게 되는 인연을 범상하게 보지 않는다,
같은 나라에 태어난 것은 1000 겁에 한번 하루 길을 동행 하는 것은 2000 겁에 한번 하루 밤 함께(?)묵는 것은 3000 겁에 한번 부부로 맺어지는 것은 8000 겁에 한번 형제로 만나는 것은 9000 겁에 한번 부모나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것은 1 만겁에 한번의 확률 이라고 한다.
* 그런데도 우리는 우주의 시야(視野)로는 티끌 하나도 아닌 자기 존재를 과신 하면서 몇 백 몇 천겁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들을 너무 소흘이 하고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흔히 쓰는 억겁의 인연이란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한잔의 술자리, 한번의 입맞춤, 한번의 사랑을 할 수 있는 우리는 진정 축복받고 선택된 만남들이 아닌가, 지금의 우리의 만남들이 " 소중한 인연 " 이 되도록 "이곳, 지금" "오늘 현재" 야 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귀한 선물이라는 금언 들을 되새기며 하루하루를 귀히 여기며 사랑하며 살자. |
첫댓글 글도 잘 쓰시고 우정도 깊은 사랑할줄 아는 조상현님, 가까이 하시며 지내면 복을 받을 것이외다! 위로해 드리시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