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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그룹 | |
글로벌 경영시대와 어울리지 못한 몸집 불리기 |
김우중씨는 이른바 ‘박정희스쿨’의 경영학과 모범생이었다. ‘하면 된다!’ ‘중단 없는 전진’이라는 박정희 철학을 기업경영 현장에 적용해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신세대 경영인들이나 회사를 키운 뒤 30∼40배 비싼 값에 되파는데 익숙한 요즘의 벤처기업인들보다는 상대적으로 국가와 국민, 회사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이 박정희스쿨 졸업생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나 김씨는 박정희스쿨 출신의 부정적인 측면도 그대로 갖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힘 있는 정치권과 관계와의 은밀한 뒷거래에 익숙하고 종잣돈을 빌려 이 사업, 저 사업을 벌이는 차입경영, 팽창주의의 화신이었다. 기업인들은 물론 금융인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금융 귀재(鬼才)’이기도 했다.
차입(돈 빌리기) 위주의 몸집 불리기식 방만 경영으로 요약되는 그의 경영 패러다임은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새롭게 전개된 글로벌 경영시대에 어울리지 않았다. 내실을 다지지 않은 성장전략의 모순이 드러났지만 그는 시대의 변화에 발 빠르게 적응하기보다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경영스타일을 밀어붙였다. 그는 분명 고도성장기 한국 경제를 일으킨 일등공신이었다.
또 그의 일에 대한 열정은 귀감을 살만했다.
세계경영이란 이름 아래 방만한 경영을 하던 대우로서는 갚아야 할 빚은 많은데, 새롭게 돈을 빌릴 곳을 찾지 못했다. 우리 정부도 대우 지원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김씨는 이래저래 코너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부도위기에 몰린 다른 기업인들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신이 일구어놓은 거대기업 대우를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회장은 여기서 자충수를 두었다. 금융기법, 금융거래에 해박해 이 방면의 귀재로 통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독(毒)’이 되고 말았다. 김 회장은 부실을 조기 공개하고, 축소경영, 구조조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공법을 택하지 않고 사기 수법과 다름없는 회계장부 조작 등을 통해 부실상태를 감추면서 위기를 넘기려다 결국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대우란 거대한 기업은 한순간에 몰락하게 되었다.
※출처 : http://blog.empas.com/suesejin/2282762
CMS | |
쿠폰 제작업체 CMS의 로봇 제작 |
유통 쿠폰 제작 업체가 기계․부품산업 진흥에 나섰다. 대형 할인점용 쿠폰 제작업체인 CMS(대표 차석경)가 2족 보행이 가능한 인간형 로봇을 국내 민간 기업 최초로 개발해내서 화제다.
CMS는 롯데마트 하나로마트, 홈플러스, 까르푸 등 할인점에서 사용되는 각종 할인쿠폰을 제작 ․ 공급하는 업체로 과거에 70억4000만원 매출을 올렸다. 지난 2001년 12월에는 코스닥 등록 심사도 통과했다.
CMS의 차석경 사장은 “서울산업대학교와 산학 협력으로 총 13억여원을 투자해 1년6개월여 만에 1살 인간 지능을 가진 2족 보행기능 로봇 ‘보노보’를 개발했다”고 밝힌바 있다.
보노보는 전체 관절 수 26개로 이뤄져 2초에 한 걸음 정도 걸을 수 있다. 특히 기존에 국내에서 개발된 유사 로봇들이 발목에 센서를 달았던 것과 다르게 발바닥에 압력센서를 장착해 인간의 움직임과 유사하게 걸을 수 있게 했다.
로봇 개발에는 산업대 교수진 13명 및 소속 학부생들과 함께 CMS 자체연구진 8명이 참여했다.
쿠폰 사업이 주력인 CMS가 2족 보행로봇 개발에 뛰어든 것은 과거 기술벤처 테크노비전을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기업부설 연구소도 함께 설립됐다.
차 사장은 “할인점 쿠폰제작 사업과 로봇사업은 거의 연관성이 없지만 부품산업 활성화를 위해 과감하게 투자했다”면서 “보노보 개발 성공을 통해 로봇용 모터 개발력 등의 우위성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CMS는 기술적 보완을 마무리하여 보노보 공식 시연회를 가졌고, 또 산업자원부와 정보통신부로부터의 자금지원도 추진 중에 있다.
CMS는 기존의 자신의 사업에 전혀 상관없는 로봇 사업에 과감히 투자함으로서 그 쾌거를 이룩하였다.
※출처
www.fnnews.com의 2005. 03. 29 기사에서 발췌(김경수 기자)
http://www.fnnews.com/html/fnview/2005/0329/092026275320121200.html
손오공 | |
에니메이션을 통해 완구사업의 매출 효과를 극대화 |
‘삼장법사의 수석 보디가드’인 손오공은 국내에서 뜻밖에도 ‘장난감업계의 강자’로 꼽힌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 좀 한다하는 사람들에게 소오공은 게임 개발 ․ 유통업체로 꼽힌다. 코흘리개 아이들을 둔 부모들에겐 또 다른 모습이다. <하얀마음 백구>나 <탑블레이드> 같은 것을 만들어 낸 곳이 바로 손오공이다. 손오공이란 이 업체, 마치 마법 여의봉의 힘을 빌려 수시로 변신하는 <서유기> 속 손오공 같다.
손오공은 누가 뭐래도 완구업체다. 1987년 최신규 사장이 ‘서울화학’이란 이름으로 설립한 장난감회사가 손오공의 전신이다. 96년 12월 지금의 회사명으로 바꾼 뒤 장난감 로봇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완구회사로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면서 이 업체는 애니메이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오르면, 관련 캐릭터 상품을 제작, 판매함으로써 완구 사업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완구사업의 매출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전략을 쓴 셈이다.
그 결과는 아주 적중했다. 투자 위험을 줄이는 것도 아주 좋았다. 애니메이션의 제작 단계부터 일본 협력사와 손잡고 3:7 비율로 나눠 투자, 제작한 다음 일본에 먼저 방영해 봄으로써 어린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이 과정으로 검증된 애니메이션은 국내로 들어와 방송을 탔고, 히트작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탄생한 작품들이 <영혼기병 라젠카>, <하얀마음 백구>, <탑블레이드>, <붐이담이 부릉부릉>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상품들을 만듬으로써 손오공은 국내 완구시장에서 22.9%의 점유율(2003년 기준)로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손오공이 게임에 눈을 돌린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여기에는 <스타크래프트>를 만든 세계적 게임개발사인 블리자드와의 인연이 기폭제가 됐다. 지난 2003년 블리자드의 <워크래프트3 : 프로즌 쓰론>을 국내 독점 유통하면서 손오공은 일약 게임업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전국 할인점과 PC방 등 막강한 유통망을 확보한 손오공의 유통력이 블리자드의 구미를 당긴 것이다.
지난해 말에는 국내 온라인게임 업계의 최대 화젯거리였던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 국내 유통까지 거머쥐었다. WOW는 재작년 1월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자마자 <리니지>를 제치며 온라인 게임의 기린아로 치고 올라왔다. 완구업계 1위에 이어 온라인 게임업계에서도 강자로 부상한 것이다.
손오공은 지금도 또 다른 사업을 찾고 있으며, 또 다른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이라 한다.
※출처
Economy21 3월 29일 P.20
방어 전략을 시도한 기업들
NOKIA | |
업계 1위가 아니거나 될 수 없는 사업은 과감히 포기 |
모토로라 등 미국의 쟁쟁한 기업을 누른 세계최대 휴대폰 메이커다. 이 회사의 요르마 올릴라(48) 회장은 "북유럽의 잭 웰치"로 불린다.
"2등은 필요 없다.1등만 살아 남는다"라고 말하는 철저한 제일주의자다. 업계 1위가 아니거나 될 수 없는 사업은 과감히 포기하는 미국 GE의 잭 웰치 회장과 닮은 점이 많다. 그는 지난 10년간 노키아호를 이끌면서 핵심 분야 즉 정보통신분야만을 남기고 시너지효과가 없는 다른 사업들은 모두 정리했다. 그는 일찌감치 정보통신을 장래성 있는 사업으로 판단하고 70년대부터 이 분야의 신기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는 아날로그 방식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는 멀리 내다보고 디지털 기술 개발에 몰두한 것이다. 그렇게 미래 시장을 예견하고 행동에 옮긴 그의 판단과 결정을 옳았다.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제품개발 전략도 노키아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노키아는 신제품 연구 개발을 끊임없이 진행했다. 물론 신제품을 출시만 한다고 해서 기업이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노키아는 신제품을 출시하되 고객의 욕구와 시장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미리미리 파악하여 안목으로 신제품 연구 개발에 연결시켜서 고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이렇게 노키아는 미리부터 장기적인 안목으로 앞을 내다보고 과감하게 발전 가능성이 없는 사업은 버리고 발전 가능성 있는 사업에 전력을 다한 결과 휴대폰 시장에서 세계 1위 기업이 될 수 있었다.
※출처
http://dbsearch.yahoo.co.kr/biz/?OP=4&SVC=&ITEM=KCT00035H&PG=0&FD=&CT=&PR=&QU=기업전략&SM=&SF=&SH=0
새천년 경제리더 인터뷰 요르마 올릴라' (1999.10.15)
두산그룹 | |
거침없는 구조조정은 현재까지도 진행중 |
두산그룹은 한국 최고(最古)의 기업이자, 구조조정의 전도사라는 2개의 닉네임을 갖고 다닌다. 공기업인 한국중공업을 인수, 기존의 맥주, 음료회사 등 식음료에서 중후장대한 제조업종에 도전장을 던진 두산그룹은 수익과 미래성장성 위주의 경영전략 실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혁신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1896년 ‘박승직상점’으로 시작한 두산의 역사는 무려 108년에 달한다. 하지만 동시에 1990년대 국내 대기업 중에서는 처음으로 구조조정을 시작하여 발 빠른 변신에 성공했다. 실제 90년대 중반,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구조조정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때 두산은 구조조정을 시작했고 당시에는 비판도 있었지만 외환위기 이후에는 ‘예지력’을 인정받았다. 외환위기 이후, 3M과 코닥, 네슬레 등 알짜사업을 팔고 계열사를 통합하는 등 거침없는 구조조정 작업을 통해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 이미 새로운 100년을 시작한 두산은 우선 대표기업으로 부상한 두산중공업(구 한국중공업)의 경쟁력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두산중공업의 수익구조 개선을 위해 두산은 사업구조를 조정하고 원가절감에 나서고 있다. 또 선진 외국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국제 경쟁력 향상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룹 전체적으로는 중장기 경영혁신 과제를 설정·추진하고 있는 성장성과 수익성 위주의 ‘밸류 드라이브(Value Drive)’기조를 확고히 뿌리 내려 나갈 계획이다.
특히, 향후 사업 구조(포트폴리오)를 ▲중공업 건설 등 기술력을 바탕으로 삼는 테크놀로지 그룹 ▲㈜두산을 중심으로 한 컨슈머 그룹 ▲기타 서비스 그룹 등 3대 영역으로 재편할 방침이다.
컨슈머 그룹은 마케팅 능력 증대에 주력하고 테크놀로지 그룹은 기술력 확충과 생산성 향상에 초점을 맞춰 비용 측면에서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다는 것이 목표다.
두산은 이제 술회사 이미지를 벗고, 중공업을 위주로 한 ‘산업재’ 전문그룹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룹의 사풍도 전통과 보수에서 개혁과 혁신으로 바뀌면서 창업 200년을 향하고 있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두산은 가장 오랜 전통을 이어오며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해 왔다”며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전업종이 시장에 1∼2위가 되도록 성장엔진 발굴에 역량을 집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http://blog.naver.com/logihong.do?Redirect=Log&logNo=80004225244
파이낸셜뉴스 2004-07-20 김규성 기자
한화그룹 | |
한화의 “사업포기”는 최근 더욱 가속도가 붙고 있다 |
재계 서열 8위의 한화는 2003년 초만 하더라도 심각한 자금난으로 인해 재계에서 부도가 나거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업체로 선정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한화의 김승연 회장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새로운 사훈을 내걸고 '문어발식 확장'과 대비되는 '가지치기'에 발 벗고 나섰다. 당시 김회장은 그룹회생을 위해 개인주택과 주식 모두를 담보로 내놓기도 했다. 그 정도로 한화의 김승연 회장은 사활을 걸고 필사적이었다.
한화는 2003년 1년여 동안 그룹 몸집을 비대하게 만든 합작회사들을 과감히 해외매각했다. 97년 12월 한화바스프우레탄(1200억원)을 매각한 이래 한화 NSK정밀(200억원), 한화GKN(32억원), SKF한화(22억원)를 정리했고 지난 1월에는 한화자동차부품 등을 매각해 모두 1497억원의 자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한화는 그동안 부동산 매각에도 주력, 계열사들이 보유한 30여개의 부동산을 1800억원어치나 매각했다.
한화의 '사업포기'는 최근 더욱 가속도가 붙고 있다. 그룹 매출의 35%나 차지하는 한화에너지의 경우 현대정유에 넘기기로 하고 협상을 진행중이다. 지난 1월20일에는 계열사인 한화투신의 경영권을 해외에 위탁한다고 발표해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화는 한화투신의 지분 20%만 갖고 있는 미국의 얼라이언스 캐피털사에 경영권을 넘겨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선진금융기법을 도입해 경쟁력을 높이기로 방침을 정했다.
한편 김승연 회장은 구조조정으로 불가피하게 회사를 떠난 5000여명의 옛 직원들에게 올해 초 친필 연하장과 달력을 보내준 데 이어 사보도 계속 발송하기로 해 재계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회장은 "비록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헤어졌지만 회사가 다시 정상화되면 희망자는 언제든지 다시 불러들이겠다"고 임직원들에게 거듭 강조하고 있다.
97년말 1200%에 이르던 부채비율을 1년만에 220%로 획기적으로 낮추는 데에 성공한 한화는 앞으로 화학과 레저관광산업을 제2의 주력업종으로 삼아 '재벌'이 아닌 '전문기업' 체제로 운영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출처
http://blog.naver.com/twinpooh.do?Redirect=Log&logNo=60006986710
원가우위 전략을 시도한 기업들
지오다노 | |
원가절감과 소매 마진 축소를 통한 규모의 확대 |
지오다노는 1970년 창업주인 레이 지미(Lai Chee Ying Jimmy)가 생산 공장 코미텍스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그 후 10년 동안 생산 공장을 가동하던 지미는 80년에 비즈니스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지오다노를 런칭 시켰다.
지오다노는 원래 고가 브랜드였지만 브랜드 포지션을 저가시장으로 전환하면서 볼륨마켓을 겨냥 원가절감과 소매 마진 축소를 통해 규모의 확대에 나선 것이다. 250 홍콩달러까지 하던 티셔츠가 ′90년에는 90달러까지 가격이 다운이 시도됐다. 유통형태도 고급 부틱에서 대리점체인 비즈니스로 전환했다. 이때 지오다노는 현재의 기업 매뉴얼인 ‘Value for money’ ‘Simplicity’ ‘Speed’ ‘Service’ 등 4가지를 원칙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지오다노가 기업쇄신을 꾀한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역시 소비환경 변화에 근거한다. 브랜드 인지도에 연연해하던 소비자들이 합리적인 가격과 상품의 질을 우선하기 시작했다. 경제성장과 함께 사회환경이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소비자들은 가치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
결국, 지오다노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마진축소와 대량생산정책을 결정. 물량을 많이 가져가면서 원가절감을 시도하고 결국 소비자 가격을 다운시킨다는 전략이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재탄생한 지오다노는 ′91년 기업공개와 함께 제3단계 성숙기에 접어든다. 볼륨마켓겨냥과 함께 큰 폭의 기업성장을 달성한 지오다노가 해외시장개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지오다노가 잘 통하는 시장은 성숙기가 되기 전의 마켓(Emerging Countries Market)이다. 이것은 항상 지오다노가 신시장을 개척할 때의 척도가 된다. 최근 몇 년간 지오다노 그룹은 전체적으로 매출 신장이 정체되고 있는데 이는 아시아 마켓의 통화 문제로 에머징마켓이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통화가치 하락은 지오다노의 리테일과 생산활동을 위축시키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룹의 리테일 바이어들이 의존했던 중국의 생산시설 사용이 어려워져 더 비용이 적게 드는 해외 소싱으로 전환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지오다노는 최근 위기를 기회로 인식하고 투자의 폭을 넓히고 있다. 대출금과 여러 운영비용을 기존 수준에서 더 다운시키고 있다. 많은 아시아국들의 통화 가치 하락 속에서 경영은 로컬 마켓에서의 소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잡고 있다. 또 여러 마켓을 연결하는 리테일 네트워크를 확장함으로써 로컬 소싱 물류의 여러 문제를 완화시킬 뿐 아니라 통화가치 하락을 겪는 국가에서 수입의 압박을 덜고 있다.
※출처
http://kdaq.empas.com/qna/572288 섬유저널의 조관우 기자
미 샤 | |
성공원인은 단 한가지, 싼 브랜드 화장품을 국내 최초로 내놨다는 것이다. |
미샤, 더페이스샵, 캔디샵, 도도클럽… 최근 개당 3300원 하는 저가화장품 바람이 거세다. 그 바람의 진원지는 미샤. 지난해 120억원에 불과하던 미샤 생산업체 에이블 C&C 매출액이 올해는 상반기에만 500억원을 넘어섰다. 올 한해 예상매출액은 1200억원. 1년만에 10배 성장. 요즘 같은 내수 침체기에 엄청난 성공인 셈이다.
미샤의 성공 원인은 단 한가지다. 싼 브랜드 화장품을 국내 최초로 내놨다는 것. 개당 3300원은 일반적인 화장품 가격의 10분의 1선. 어떻게 이 같은 파격적인 가격으로 화장품을 공급할수 있을까. 원래 화장품 원가는 소비자가의 5%도 채 되지 않는게 보통이다. 여기에 광고비와 회사 운영비, 포장비 등 각종 비용이 포함돼 공장 출고가가 정해진다. 그러나 공장 출고가도 소비자의 30~40%선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보통 2~3단계를 거치는 중간 유통채널의 마진이 된다. 미샤는 이 중간 유통마진을 대폭 줄였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미샤의 근본 태생이 온라인 전용 화장품이었기 때문. 지난 99년 세상에 태어난 미샤 화장품은 원래 온라인에서 팔기 위해 만들어졌다. ‘뷰티넷’이라는 여성포털을 운영하면서 ‘거품을 뺀 싸고 좋은 화장품을 만들어달라’는 소비자 욕구가 대단하다는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소비자 욕구에 어떻게 하면 부응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서영필 사장은 우선 생산원가 낮추기를 고안해냈다. 화장품을 만들어 간단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는 게 끝. 포장을 따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부분의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다음은 유통마진 줄이기. 온라인 전용 판매를 통해 소비자와 직거래를 했기 때문에 중간 유통마진만큼 가격을 줄일 수 있었다. 이 결과 3300원이라는 초저가를 책정해 낼 수 있게 됐다. 미샤가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얻자 서 사장은 오프라인 판매를 결정했다. 그러나 기존의 오프라인 유통 채널인 화장품 전문점을 통한 판매는 처음부터 꿈도 꿀 수 없었다. 하나 팔아 1000~2000원 남는 제품을 소매점들이 적극적으로 팔아줄리 만무할 일. 새로운 유통채널을 개척하지 않고는 오프라인 진출은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게 미샤 화장품만 취급하는 미샤 전문점이다. 전 전문점을 직영점으로 만들면, 역시 소비자와 직거래 형태가 되기 때문에 유통마진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다. 2002년 3월 신촌, 신림동, 노량진 3곳에 드디어 미샤 전문점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온라인 회원들의 입소문을 바탕으로 오프라인 직영점 판매는 날개 달린 듯 했다.
결국 미샤의 성공 배경 뒤에는 유통마진 줄이기라는 아주 상식적인 내용이 자리잡고 있다 할 수 있다. 유통혁명을 이뤄내면서 초저가 화장품이라는 신시장을 개척해냈고, 당당히 화장품 시장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greenmaom.do?Redirect=Log&logNo=140007801501
한국미놀타 | |
핵심 부품의 원가를 낮추었다 |
미놀타는 2002년 7월에 흑백 레이저 프린터 “PagePro 1250W"를 동급 타사 제품보다 30% 저렴한 가격에 출시하여 점유율을 크게 높였다. 그리고 2개월 후에는 컬러 레이저 프린터 ”Magicolor 2300W"를 업계 상식을 깬 대당 699달러에 판매를 했다. 이 모델의 판매호조로 분속 6매 이하 컬러 레이저프린터 제품군이 북미 시장에서의 점유율이 2001년 13%에서 2002년 46%로 급상승했다.
그렇다면 미놀타가 이렇게 업계 상식을 깬 가격으로 레이저프린터를 팔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단순히 핵심 부품의 원가를 낮추었던 것이다. 미놀타는 핵심 LSI를 생산하는 협력업체 ‘날텍’과의 공동 기술 개발로 신제품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제어기판 단가를 종전의 2/3 수준으로 절감했다. 그 내용은 프린터 이미지 생성 방법 중 “언어 방식” 과 “호스트 베이스 방식”이 있는데, 대부분의 회사들은 생산비가 높지만 제조가 쉬운 “언어방식”을 채택해서 제품을 만든다. 그러나 날텍은 “호스트 베이스 방식”의 새로운 LSI를 개발하여 제어기판 단가를 종전 6,000엔에서 2,000엔 대로 대폭 인하하였다.
그리고 미놀타는 날텍을 단순 하청업체가 아니라 제품 개발의 동반자로 대우하면서 기술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 요구되는 협력업체의 기술력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그 결과 미놀타는 프린터 시장에서 원가를 낮춰서 많은 판매를 이룩할 수 있었다.
※출처
http://www.seri.org/db/dbCeoV.html?s_menu=0102&pub_key=db20031022001&search_gubun=1&sYear=2003
차별화 전략을 시도한 기업들
나루미야 인터네셔널 | |
십대 초반의 브랜드 |
아동복 브랜드인「메조피아노」및「엔젤블루」, 혹은 캐릭터「나카무라군」,「하나짱」등을 알고 계십니까? 의류업계 종사자나,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라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들은 나루미야 인터내셔널(이하, 나루미야로 표기)이라는 아동복 메이커의 주력 브랜드와 캐릭터로, 초등학생을 중심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나루미야의 브랜드를 입은 십대 초반의 "카리스마모델"이 등장하기도 하고, 신작 발표회에 자녀를 동반한 부모들이 열광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열기는 단순한 붐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불경기에 1장에 6,800엔이나 하는 아동용 티셔츠나, 1만 2,800엔의 청바지의 판매호조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빗나갔다. 나루미야에는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놀랄만한 비즈니스모델이 존재한다. 엔젤블루 점원의 예를 들어보겠다.
「어서 오세요」. 엔젤블루의 점원인 아가씨가 아이에게 말을 걸어 왔다. 「이름이 뭐야?」라는 물음에「낫짱」이라고 아이가 대답했다. 「낫짱은 몇 살이니?」,「8살」. 대화 중에 부모님들도 끼어든다. 「딸아이의 8살 생일을 맞아 축하선물로 옷을 사주려고요」, 「그렇구나, 낫짱은 좋겠다. 어떤 옷이 좋아?」하고 점원이 기뻐하며 아이에게 묻는다. 「어디 좀 같이 돌아볼까」하며 점원이 아이를 데리고 가주니, 부모들도 안심하고 편안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새 아이는 점원과 친해졌고, 다양한 상품을 고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낫짱, 이 팔찌, 나도 했어. 자 봐, 똑같지?」하는 식이다. 딸아이는 매우 즐거워하며, 할머니에게 받은 돈으로, 티셔츠, 팔찌 그리고 벨트를 구입했다.
귀가 길에 아이가 말했다. 「있잖아, 아빠. 다음주에도 그 가게에 또 가고 싶어」, 「응? 왜?」.「왜냐면 그렇게 친절한 언니는 처음인 걸」. 그렇다. 이렇게 그 점원은 아이게게만 말을 걸었었다. 보통 아동복코너에 가면, 점원과 얘기하는 것은 부모들로, 딸아이는 점원과 부모가 선택한 물건을 "옷 갈아 입히기 인형" 처럼 입어보고 결정한다. 그러나 나루미야의 비즈니스 방법론에서는, 아이가 점원과 같이 "옷 고르기를 즐긴"것이다. 이런 차별화된 서비스 전략으로 나루미야는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다른 미키마우스 같은 것들을 제치고 시장 점유율을 점점 높여가고 있다.
※출처 http://dbsearch.yahoo.co.kr/biz/?OP=4&SVC=1&ITEM=KAT02727O&PG=0&FD=&CT=1&PR=&QU=&SM=&SF=&SH=1
요미우리 신문에 실린 기사를 무역협회에서 번역한 글입니다.
민들레 영토 | |
어머니의 사랑을 고객들에게 무한 서비스 |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거리라면 어디서나 눈에 띄는 건물, 중세의 성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곳,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곳이 바로 ‘민들레영토’이다. 현재 전국 21개 지점, 4천 평의 매장에서 600여 명의 직원이 하루 평균 1만여 명의 손님을 맞는 ‘민들레영토’의 시작이 10년 전 신촌의 기찻길 옆 10평짜리 작은 공간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민들레영토’의 지승룡 소장이 카페마담이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는 실패한 성직자이며 무일푼의 실업자에 불과했다. 손님이 많은 주말에 혼자서 오래 앉아 있었다는 이유로 카페에서 쫓겨난 후 그는 바닥에 떨어져 반짝이는 동전 같은 ‘희망’을 주었다. 그것은 여섯 살 때 가졌던 ‘마담이 되겠다’는 꿈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떡볶이를 먹다가 떠오른 ‘가래떡을 팔아 사업자금을 마련하겠다’는 엉뚱한 발상을 곧 실천에 옮긴다. 그리고 6개월 후 신촌의 기찻길 옆 무허가건물에서 변변한 간판도 없이 ‘민들레영토’를 시작했다. 무허가건물이었으니 간판을 달 수도 없고, 차를 팔 수도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문화비’라는 이름의 공간 이용료를 받는 것이었다. 10년 전 문화비 4천원은 지금까지도 가격을 올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첫날 2명에 불과했던 손님이 하루 1만 명으로 늘어나게 한 가장 큰 요인은 지승룡만의 독특한 서비스 전략이다. 손님을 대할 때 “드시고 더 드세요”라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대접하기로 한 것이다. 민들레영토는 지금도 리필과 오감을 충족시키는 감성체험공간, 그리고 감성사원의 대한민국 최고의 서비스로 어머니의 사랑을 고객들에게 무한 서비스하고 있다. 카페를 확장하고 이전하는 과정에서도 늘 어려움이 뒤따랐지만 그때마다 지승룡 소장은 새벽 4시에 카페 문을 여는 등 특유의 열정과 경영철학을 가지고 난관을 극복해갔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민들레영토’는 미국의 스타벅스와 경쟁하는 대한민국 카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
민들레영토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경영방식을 창조했다. 이 작은 성공사례가 우리 기업들에게 새로운 모델로 학습되었으면 한다. 또한 민들레영토가 미국, 일본, 중국으로도 나아가 성공사례를 만들어 한국적인 경영 모델이 해외에서도 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출처
http://kdaq.empas.com/kpart/kpart_view.html?sn=1490993
롯데 제과 | |
‘얘야, 껌 씹고 자는 거 잊지 마라.’ |
롯데제과 자일리톨 껌은 2003년 9월부터 껌 시장 판매 1위를 기록하면서 껌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자일리톨껌이 처음부터 인기를 얻은 것은 아니다. 시장에 첫 선을 보인 것은 97년 6월 '자일리톨F'라는 이름으로 일반 껌과 똑같은 형태로 나왔다. 이 껌은 자일리톨이라는 성분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부족해 비싼 껌이라는 인식만 주고 월 평균 1억원어치도 팔지 못했다.
마케팅실과 연구소에서는 이 제품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2년 동안 포장과 제품 형태 설계에서 마케팅 전략수립, 소비자 조사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진행했다.
‘얘야, 껌 씹고 자는 거 잊지 마라.’ 재작년 7월 선보인 30초짜리 역발상 TV광고 한 편이 껌시장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껌=충치’란 고정관념을 깬 롯데제과의 자일리톨껌 광고였다.
자일리톨껌은 이 광고 한 편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껌, 음료, 발효 유, 우유 등의 식품업계에 자일리톨 신드롬을 탄생시켰다. 이 광고가 처 음 등장할 때만 해도 자일리톨껌이 껌시장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을 것이 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일리톨껌의 매출은 시판 초기만 해도 일반껌과 별차이가 없었으나 재작년 7월 자일리톨 성분이 100% 들어간 알약 형태의 코팅껌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작년 매출은 1월 40억원, 3월 60억원, 7월 85억 원, 8월 95억원, 9월 105억원이고 10월엔 120억원이다. 자일리톨 껌은 그동안 최단 기간 1위 브랜드, 100억원 매출 돌파 등 여러 가지 신기록을 수립하고 있다.
자일리톨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껌이 맛을 바꾸고 향기를 바꿔서 새 제품을 출시했지만 롯데에서는 건강을 생각하게 하는 성분을 집어 넣음으로써 껌을 좋아하는 고객들 뿐만 아니라 껌을 씹어서 이가 안 좋아질 염려를 하는 고객들까지도 일부러 껌을 씹게끔 만든 것이 성공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kdaq.empas.com/qna/3062522
초점 전략을 시도한 기업들
P & G | |
비누는 7가지, 샴푸 6가지, 식기 세제 4가지, 치약 4가지, 화장실용 화장지 4가지 |
미국의 소비재 회사 P&G는 초점 전략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초점 전략의 대명사 격인 곳이다. 다음은 이 기업이 초점 전략를 주요 마케팅 기법으로 수렴하고 있는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Procter & Gamble은 서로 다른 10가지의 다른 상표 세제를 (Tide, Cheer, Gain, Dash, Bold 3, Dreft, Ivory Snow, Oxydol, Solo 등) 생산하고 있다. 비누는 7가지, 샴푸 6가지, 식기 세제 4가지, 치약 4가지, 화장실용 화장지 4가지를 생산, 판매한다. 이에 더하여 이들 상표들은 각기 3~4가지 종류의 크기가 다른 포장이 있으며 가루로 된 것, 액체로 된 것, 향기가 있는 것 또는 없는 것 등으로 또다시 그 종류가 나누어진다.
이처럼 제품 종류를 복잡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소비자의 층이 다양하고, 각 소비자 층 마다 욕구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의 소비자에 맞도록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세제를 구입할 때는 경제적인 세제, 표백이 잘 되는 것, 천을 부드럽게 하는 것, 냄새가 산뜻한 것 그리고 강한 세제, 약한 세제 등의 특징에 따라 소비자 각자가 원하는 것을 구입한다. 결국 이처럼, 10가지 세제를 만드는 이유는 소비자가 원하기 때문인 것이다. 예전의 일방적인 단일 제품의 마케팅 방법으로는 더 이상 치열한 경쟁에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P&G가 이처럼, 시장을 세분화하여 각각의 소비자 층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 결과 아직까지도 미국의 세제 시장을 50%이상이나 점유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나의 단독 상표로 50%이상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한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출처
http://blog.naver.com/hongjig/140001542440
현대자동차 | |
기존의 소비자를 포용하고 새롭게 주고객 층으로 등장하게 된 전문직 중년여성을 목표고객으로 |
IMF 이후의 자동차 산업은 다른 어느 산업분야보다도 더 힘들다 못해 빈사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는 이제 차는 가질 만한 사람들이 거의 소유하고 있으며 크게 결함이 없다면 계속 탈 수 있을 만큼 품질에도 문제가 없다는 제품 포화기 상태라는 의미였다. 상향 지향 구매패턴도 감소하고 교체주기도 연장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IMF시대에 경차는 주목 받고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의 전체적인 면을 고려해 보면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차가 인기 있는 것이 소비자의 트렌드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기보다는 모두 현실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위축되었지만 중형차 시장은 조금씩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소나타 시리즈들은 소비자들에게 중형차로서의 중후함과 품격이 느껴지는게 아니라 가벼운 느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거기에 SM5와 레간자의 적극적인 시장도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현대자동차는 시장조사를 실했는데 그 결과 기존 자동차 시장에서는 40,50대 남자가 주 고객층이었으나 고학력의 많은 여성들이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면서 경제적 자립과 함께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어 여성과 20대의 젊은 층이 자동차 시장의 주요고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형차 시장의 소비자를 분석해봤을 때 94년과 97년을 비교했을 때 남자보다 여자의 중형차 구입 비율이 많게는 3배이상 높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현대자동차는 소비자들이 중형차를 통해 소형차와는 다른 사회적 위상을 얻고자 한다는 점과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기존의 주 고객 층이었던 40-50대 남성과 더불어 30-50대 여성도 중형차의 주요 고객으로 성장하였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들을 EF소나타의 목표시장으로 선정하였다. 현대자동차는 이미 중형차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었기 대문에 기존의 소비자를 포용하고 새롭게 주고객 층으로 등장하게 된 전문직 중년여성을 목표고객으로 하는데 회사의 자원이나 기술등에 별 무리가 없었고 IMF여파로 경쟁사가 부도나는 등 경쟁요인 역시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전문직 30-50대 여성과 자영업을 하는 40대 남성을 목표시장으로 하여 목표시장에 EF소나타가 효과적으로 침투하기 위하여 EF소나타가 기존 소나타보다 현대적이고 개방적이며 개성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Positioning 하였다. 이는 경쟁 제품인 크레도스가 보수적이고 고품격을 지향하나 현대적인 세련된 느낌이 부족한 것과 차별화 된 Positioning이었다. 즉, 최첨단 안전사양과 세계 명차 수준(캄니,어코드)의 승차감, 여유 있는 파워 그리고, 30년 이상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기술력에서 차별화하였고, EF소나타는 기존의 소나타의 이미지가 아닌 고급지향의 차별화 된 이미지로 자리매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logihong.do?Redirect=Log&logNo=80009891655
엔시소프트 | |
시대와 상황, 그리고 소비자들의 분석 |
97년 자본금 8억 총 인원 24명이서 시작한 조그만 벤처기업 엔씨 소프트는 98년 사업 다각화의 목적으로 ‘바람의 나라’ 라는 온라인 게임을 제작한 온라인 게임계의 거물 송재경을 영입 리니지 제작에 착수한다.
98년 베타를 시작한 이례로 리니지는 국내에 게임산업이 성공할수 있다는 사례를 기록했고,
불과 2003년까지 6년 만에 그 조그마했던 엔씨소프트는 자본금 무려 1500억가량이 이르는
공룡기업이 됐다. 이미 그 덩치상으로는 세계 최강의 게임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도이다.
리니지의 주요 성공원인은 시대와 상황, 그리고 소비자들의 분석이다.
일단 IMF로 넘쳐나는 실업자와 물가상승은 사람들에게 소비심리를 위축시켰다. 그래서 할 일 없이 집에서 놀던 백수가 넘쳐나던 시절이였다. 상황은 그 당시 우리나라는 막강한 IT인프라가 갖춰지던 시대였다. 갑자기 전국에 PC방 열풍이 불어닥쳤고, 많은 사람들이 피씨방에 몰려들었다. 리니지는 교묘하고도 뛰어난 전략으로 이 많은 백수와 중학생, 고등학생 심지어 일반인들을 아울러 게임에 빠지게 했고, 또 게임 아이템의 현금 거래를 일상화 시키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게임상의 아이템이 현금으로 거래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게임하는게 돈버는거다’란 웃기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고 많은 백수들은 리니지속의 아이템 획득에 열을 올려 더욱 게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엔씨소프트 CEO인 김택진은 집에서 얻은 몇 억하고 본인의 친구들과 마련한 8억으로 회사를 차린지 7년 만에 엔시소프트를 우리나라 최고의 온라임 게임 기업으로 만들었다.
※출처
http://kdaq.empas.com/qna/3398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