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순 시인의 산문집 『내 영혼의 풀무질』을 읽고
수필가 우승순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걸까, 꽃이 피면 봄이 오는 걸까.
이맘때쯤이면 생각나는 한시(漢詩)가 한편 있다. 봄을 찾는다는 심춘(尋春)이다. 작자미상의 이 칠절은 어느 수행자의 오도송(悟道頌)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봄을 찾아 짚신이 닳도록 사방을 헤맸지만 정작 봄은 뜰 안에 있었다. 봄은 마음일 수도 있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겠다.
盡日尋春不見春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맸건만 봄은 보이지 않고
芒鞋踏罷籠頭雲 짚신이 닳도록 언덕 위의 구름만 밟고 다니다가
歸來笑撒梅花臭 돌아와 (뜰 안에) 웃고 있는 매화 향 맡으니
春在枝頭已十分 봄은 이미 매화 가지에 무르익어 있었네.
머지않아 온 대지가 춘의(春意)로 가득찰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최현순 시인께서는 작년 10월말 산문집 『내 영혼의 풀무질』을 출간했다. 당시 나도 환경 에세이집(『플라스틱 행성의 기후변화 이야기』)의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바빠서 몇 편만 추려서 읽었다가 요즘에 일독했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되어있는데 1장은 시작(作詩)과정의 에세이, 2장은 일반 수필, 3장은 지역신문 등의 기고문, 4장은 독후감 마지막 5장은 운명에 관한 이야기로 짜여있다. 시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1장의 작품들이 흥미로웠다. 현상이나 느낌을 어떻게 시어로 표현하는지 배울 수 있어 좋았다. 3,4,5장의 내용들은 내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내용들이라 감히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되어 1, 2장의 내용만으로 독후감을 쓰다 보니 수박 겉핥기가 되었다. 독후감도 부탁받고 쓰면 부담가는 업(業)이 되지만 내 맘대로 쓰면 편안한 낙(樂)이 된다.
이 글을 안 쓰고는 못 배긴 이유는 출가(出家)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다. 저자의 산문시 ’나는 머리를 빡빡 깎고 싶다‘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절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았다‘는 구절을 접했을 때 깜짝 놀랐다. 전생의 카르마가 있었던 것일까? 저자도 ’운명에 관한 이야기2‘라는 글에서 자신이 전생의 파계승이었다고 추측한 대목이 나온다. 그 습(習)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등학생인 자식이 진학을 포기하고 입산한다고 했을 때 어머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그 마음의 부담을 에둘러 ’부모‘라는 노래로 삼킨듯하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 알아보랴~”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그 가사 내용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해준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해 가을이 깊어지면서 끝내 지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쿵!“ 하며 내 마음은 커다란 오동잎과 함께 떨어지고 말았다 ........ 귀갓길 언덕배기까지 환한 보름달이 동무해 주었던 그날 밤, 마침내 나는 어머니와 마주앉았다. “대학은 안 가도 된다. 하지만 휴학은 말고 졸업만 하렴.”....... 침묵이 흐른 뒤 어머니의 안쓰러운 표정을 뒤로하고 건너온 나는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 중에서
출가도 시절인연이 닿아야 한다. 고2 때부터 홀로 청평사라는 절을 찾았던 저자는 졸업하고 입산하여 머리를 빡빡 깎았지만 몇 개월 후 다시 환속한다. 그 때의 심정을 “산에 있으면 집이, 집에 있으면 산이 그리운 갈피를 못 잡는 마음이었다.”고 술회하며 출가가 아닌 현실도피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란 말이 있듯 보리심을 내는 그 순간이 곧 깨달음의 마음과 일맥상통할 수도 있다. 저자가 훗날 불혹의 나이에 경주의 석굴암 본존불을 참배하면서 왈칵 눈물을 쏟았던 까닭도 발보리심을 다시 만났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전생의 운수 행각 중 어느 생에 있었던 오랜 해후의 벅찬 가슴이 한 번에 터진 것이었을까?”라고 회고한다. 은퇴 후 텃밭을 가꾸고 수확한 깨를 털면서 ’깨道하다‘는 시를 지을 만큼 구도(求道)에 대한 목마름은 가슴 저 밑에서 어머니의 강처럼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저자의 가슴을 꽉 채웠던 울분은 무엇이었을까? 울분에 대한 감정이입은 ’마의태자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버리고 고려에 항복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개골산으로 향했던 마의태자의 심경은 짐작조차 어렵다. 이 글의 부제가 책의 제목인 ‘내 영혼의 풀무질’이다. 설명키 어려운 그 영혼의 풀무질이 저자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 꺾인 좌절 속에서 불안하기만 했던 성인식의 통과의례 때도, 철조망안 내무반에서 푸른 제복에 담보된 내 청춘이 길들일 때도 막걸리는 복부 한쪽 편에서 부글부글 끓으며 울분 속에 삭고 있었다.
- 막걸리는 추억이다 - 중에서
가장 ‘心쿵’했던 글은 ’과부 아내‘였다. 글 쓰는 사람의 배우자는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 발 물러서서보면 내 주변엔 문학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그냥 나 좋아서 하는 혼자만의 꼴값떨기가 아내를 생과부로 만들고 그것이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측은지심을 일깨운 바로 그 대목이다.
건넛방 나만의 공간에서 책을 펼치고 책상에 앉아 문득 안방 문틈을 바라보니 침대서 아내가 옷가지 등을 정리하는 모습이 얼핏 눈에 어렸다. 뭔가 안쓰러운 느낌이 들어다 할까........언제부턴가 아내는 생과부가 되어 안방 싱글 침대에 홀로 담겨 있다. 마주 누워서 손이라도 잡아야 잠이 들던 아내, 스산한 계절이면 더욱 살갑던 예쁜 아내를 맨숭맨숭 저녁상을 물리고도 하릴없는 겨울밤 열린 문틈으로 오랜 비품을 대하듯 바라본다.
- 과부 아내 - 중에서
이외에도 사양지심의 ’나도 상을 받고 싶다‘, 수오지심의 ‘책이 책(責)하다’, 시비지심의 ‘시기와 질투의 찌질함에 대하여’ 등이 인상 깊었다. 한시로 독후감을 시작했으니 그 끝도 운을 맞추어야 할 것 같다. ‘유배지의 여덟 취미’란 글에서 저자는 다산(茶山) 선생의 글을 접하고 언뜻 한 소식을 접한 듯하다. 조고각하(照顧脚下), 회광반조(回光返照)
折取百花看(절취백화간) 백 가지 꽃을 다 꺾어 봐도
不如吾家花(불여오가화) 우리 집 꽃만은 못 하네
也非花品別(야비화품별) 꽃이 달라서가 아니라
祗是在吾家(지시재오가) 그냥 우리 집 꽃이어서지
정약용의 유배 시절에 쓴 시 ‘꽃구경(訪花)’을 접하고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야말로 집에 있는 꽃을 두고 밖으로 백가지 꽃을 꺾으려고 헤매던 게 아니었던가?
- 유배지의 여덟 취미 - 중에서
밝은 대낮에도 눈을 감으면 캄캄하다. 그러나 눈을 번쩍 뜨는 순간 어둠은 사라진다. 나는 평생 눈 뜰 생각은 못하고 눈을 감은 채로 어둠을 없애려고 발버둥 쳐왔다.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에서 지구를 던져버렸듯이 언제쯤 이 몸뚱어리에서 ‘나’라는 라훌라를 부숴버릴 수 있을까......
유록화홍(柳綠花紅)에 영혼의 풀무질이 힘겨우시거든 편안히 일독해 보시라.
2023.2.15. 우승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