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문득 아름답게 죽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때’
이원우(수필가/소설가/오순절 평화의 마을 자문위원/ 장기 ․ 시신 기증 등록자/전 부산 명덕 초등학교장/천주교 부산 교구 은빛 사목 지원단장))
아침 신문을 펼쳐 들다 말고 얼른 성호경을 그었다. ‘뇌사 여고생 7명에게 새 생명 주고 하늘로…’라는 눈에 뜨일 듯 말 듯한 기사가 실려서다. 혈관 기형으로 17년 동안 고통을 받아오던 소녀 박민지 양, 이틀 전 아버지에게 두통을 호소하다 병원으로 옮겨졌더라는 것. 그러나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뇌사’ 판정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10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각막과 간, 신장과 심장 판막 등을 다른 환자들에게 나눠 주고 영면했단다.
내 눈시울을 적신 것이 또 있다. 아버지가 마땅한 소득도 없이 기초 생활 수급자 보조금으로 어렵게 생활해 왔는데 말이다.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를 따라 그 아픈 몸으로 지역 장애 시설에서 자주 봉사 활동을 하였다는 게 아닌가? 게다가 소녀의 아버지는 조의금도 받지 않은 채 장례를 치르고, 시신은 화장했다는 것. 그 한 줌의 뼈는 먼저 간 어머니의 산소에 뿌려졌단다.
나는 김수환 추기경이 사후에 각막을 기증해서 70대 노인의 눈을 뜨게 했을 때, 남들이 보기에는 얄미울 정도로 덤덤했다. 오히려 왜들 저렇게 떠들썩한지 이해가 안 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였다. 생각해 보라. 그분은 생명이 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사제(司祭) 옷 입는 그 순간부터 평생 강조해 왔다. 그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대한 약속이기도 했다. 따라서 선종하면서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의 일부를 도로 주님께 돌려 드리는, 아주 당연한 일을 한 게 아닌가 말이다.
내가 가톨릭 신자이면서 그분을 욕 되게 할지 모르는 이런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나 자신 6년 전 이미 시신과 장기 기증을 서약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해 죽어 이름을 남기자는 세속의 성급함 일지 모른다며 나무라도 좋다. 어쨌거나 나는 ‘한마음 한 몸 운동 본부’ 등에 내 이름 석 자가 올려져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비상대기’란 단어가 따라다녀야 할지 모른다. 우리 둘이, 개뿔도 없는 주제에 큰 소리 뻥뻥 칠만하지 않은가?
각설하고. 오늘 낮에 겪었던 일을 적는다.
그제 한 약속이 있었다. 제자인 내가 정말 사랑하는 제자인 B 관장(복지관)삼랑진 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는 불행하게도 몇 년 전의 나처럼 많이 아팠다는 소문이었는데, 그와의 해후(邂逅)에서 나는 약간은 안도하였다.
여기서 잠깐 그와 나의 끈질긴 인연을 밝히자.
메리놀 병원에서 나는 숨을 거둘 뻔하였다. 죽음과 삶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그렇게 실감한 적이 일찍이 없었다. 지푸라기가 뭔가, 나는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아니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힘도 없었다.
B 군이 왔다. 소문을 듣고서. 그는 병원장인 J신부와 중학교 동기라면서, 수시로 드나들었다.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았고, 때로는 병원비를 대신 내기도 하였다. 아무 예고 없이 1분에 1백 번 이상 맥박이 뛴다니, 그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가 무심결에 흘린 말이다. 심장이 두 개라면 하나는 선생님께 드릴 텐데요.
내 귀를 의심하였다. 그리고 눈시울이 젖는 걸 느끼고 손수건을 꺼냈다. 심장이 두 개 어쩌고저쩌고? 더 이상 극진한 스승에 대한 제자의 사랑이 있겠는가?
다시 두서너 해가 흘렀다. 나의 투병 생활은 그렇게 끈질기게 계속되었고. 그는 교장실로 가끔 나를 찾아오곤 하였다. 어떤 땐 노인 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한쪽 다리를 끌다시피 하면서 내가 거기 가 있으면, 동기들로 위문단을 구성해 오기도 하였다. 노인들은 의도적으로 그 공연에 더 많은 박수를 보냈다.
그러던 내가 회복된 것이다. 그의 근황이 궁금하던 터에, 이웃 N 복지관장으로부터 그의 이병(罹病) 소문을 전해 들었다. 우선 좀 쉰다는 말도 N 관장이 전했다. 그래 몇 번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이 안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서 소식이 온 것이다.
수십 년 만에 부은암(父恩庵)-나에게는 추억이 있는 곳이다-에 들러 한 잔 얻어 마시고, 수백 년 전 사명대사가 용맹 정진했었다는 동굴을 찾았다. 동행한 그의 친구 내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수백 미터를 올라갔는데, 아주 가팔랐다. 겨울 아니면 수풀이 덤부렁듬쑥 우거져 헤쳐 나가기 힘들 정도였다. B 관장의 체력이 아무래도 내게 뒤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드디어 동굴 앞, 나는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그런데 나를 제외한 넷은 다 불자(佛子)인 듯 나름의 예를 표시했다. 두 관장은 기(氣)체조 동작을 번갈아가며 했고…….하산 길이 당연히 더 힘들었다. 튼튼한 밧줄이 없으면 젊은 사람도 몸조차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중간쯤이었을까? 나는 숨을 잠시 돌릴 겸 멈춰 섰다. 그런데 아득히 펼쳐진 시야(視野)에 그만 넋을 잃은 것이다. 내가 열두서너 살부터 40대 초반까지, 몸을 송두리째 담았었던 삼랑진이라는 고장의 전경(全景)에 수십 년 세월이 오버랩 되는 것이다.
가벼운 탄성이 흘렀다. 모두의 입에서, 죽는다던 내가, 많이도 살았다 싶은 게 아닌가?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想念)의 종착역이 이것이었다. 아 이대로 여기서 아름답게 죽었으면…….
물론 그건 찰나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부은암 위 그 특정한 곳에서의 그 혼란(?)의 의미는 나 자신이 아니면 이해 못한다. 아, 설명할 방법이 없어 답답하구나. 다만 이런 얘기는 하자. 내 육신은 어느 곳에서 스러지든 이미 모든 걸 남에게 주기로 했잖은가 말이다. 내가 너무 상식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내 곁의 아픈 제자 B관장의 얼굴이 크게 다가오는 것은 물리(物理)가 아닌 영혼의 귀결이다.
여기서 이 보잘 것 없는 얘기는 끝맺음하자. 밀양에까지 가서 헤어지면서 손을 잡을 때, 나는 B관장을 위한 하나의 간절한 바람을 말없이 그에게 옮겼다. 기억하게. 나와 자네 사이에 ‘핫라인’이 있네.
사실 나는 용감하기만 했지 무식하다. 장기를 어떤 절차에 의해 남에게 기증하는지 모른다. 다만 내게 재량(?)이 있다 치자. 나의 뇌사 상태 때 신장만은 B 관장에게 주고 싶다는 뜻이다.
행여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번 그에게 전한다. 결코 미담(?)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이러는 건 결코 아니라고…….그래도 찬찬히 곱씹는다. 소녀 박민지만은 이승에서 짧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약력」 <새교실> <수필 문학> <한국 수필> 추천 ․ <한글 문학> 소설 신인상 ․ 전 명덕 학교장 ․ 전 유네스코 부산 협회 부회장 ․ 전 부산 북구 문인 협회장 및 문화 예술인 협회장 ․ 전 덕성 토요 노인 대학장․ ‘부산 노래’ 취입 ․ 가요 콘서트 7회 ․ 부산 어머니 오케스트라와 협연 3회 ․ 천주교 부산 교구 은빛 문화 사목 지원단장 ․ 평화의 마을 자문위원 ․ 지은 책 수필집 <어머니의 초상화> 외 13권(개인 문집) ․ 자랑스런 부산 시민상 봉사 본상 및 KNN 문화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