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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령남씨 의산군파 원문보기 글쓴이: 남인우(14회)카페지기
순위 |
제목 |
발행 년도 |
발행인 |
특기사항 |
1 |
의령남씨 계유보(癸酉譜) |
숙종19년(1693년) |
함경감사 南益薰 편저 영의정 南九萬 序文. |
남씨 최초의 체계적 족보. 권1~3.빈,신자승, 동,흡 만입보 怊의후손 他譜見으로 미 입보 |
2 |
의령 남씨 무인보(戊寅譜) |
영조34년(1758년) |
호조참판, 홍문관/예문관대제학 南有容 |
수, 권1~8. 휘 子 붕 추가 응생-극신-국운,기영순으로 차종손 3자 입보 |
3 |
의령 남씨 갑자보(甲子譜) |
순조4년(1804년) |
영의정 南公轍 |
수, 권1~14 응생-극신-국운,위운,기영순으로 차종손 기영 3자 입보 |
*1818년(순조 18년) 남이장군 역모혐의 신설(伸雪)후 1821년 차종손 봉사 예조 승인 후 의산궁 및 구봉서원 건립 등 활발한 활동 전개 | ||||
4 |
의령 남씨 경오보(更午譜) |
고종7년(1870년) |
이조판서 南秉哲. 승정원 우부승지;南相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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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의령 남씨 경자보(庚子譜) |
고종37년(1900년) |
예조판서 南廷哲 한성부 우윤 南命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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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의령 남씨 병인보(丙寅譜) |
소화1년(1926년) |
규장각 직학사南奎熙 미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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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의령남씨 족보 |
1936 |
남형우 간편 |
함평 손불 지사리 남건우 카페 |
7 |
의산위갑오파보(甲午派譜) |
1954.10 |
구산리 농화당 간행 |
술선록1권, 족보2권 기영 장자 입보 |
8 |
남씨 대동보 정유보(丁酉譜) |
1957. |
회장 - 남상철, 위원장-상순, 부위원장-재찬 |
3관 남씨 최초의 대동보 총22권 1권-상계, 2~7권-영양관, 8~13권-안동파, 14~20권-의령관, 21~22권-고성관 * 기영 장자 입보 |
9 |
의산위정사파보(丁巳派譜) |
1977.10.30 |
구산리 남정용 |
족보위주파보1권 발행 초의 2子로 함북파 용(龍)입보 * 기영 장자 입보 |
10 |
남씨 대동보 기미보 |
1979년 |
남병국 |
4권 * 기영 장자 입보 |
11 |
의령 남씨 신미보(辛未譜) |
1991. 8. 15 |
남광우 |
의령6권 * 기영 3자 입보 |
12 |
남씨 대동보 계유보(癸酉譜) |
1993년 |
회장 남덕우 |
수권외 17권 * 기영 장자 입보 |
13 |
의령남씨 병술보 |
2006.4.1 |
회장 남종우 |
수권외 6권 중 의산위파 4권에 수록 * 기영 3자 입보 |
가. 남씨 족보의 기원
남씨의 족보의 기원은 남사고(1509-1571)로부터 비롯되는 것같다.
영양관의 남사고는 울진 사람으로 조선 명종 때의 인물로 풍수, 천문 등 예언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1993년 발행 계유보 수권 425쪽에 보면
英陽宗人 蔚平譜
居 蔚珍 平海 故云.
譜中 云稱 南師古 古譜 似 此譜.
宜寧 南尙致 家譜云 舊譜 格菴 師古 所撰 而沒 基全書 이라는 글이 나오는데 이를 풀이하면
영양 종인 울평보 (이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과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울진 평해 사람이므로 (이 족보를) 이렇게 (울평보라) 부른다. 이 족보에는 "남 사고 고보" 라는 말이 나오는대 이 족보와 비슷하다.
의령 남상치의 가보에는 "구보는 격암 남사고가 (편)찬한 것인데 지금은 그 전부가 없어졌다"라는 말이 나온다.
계유보 이전에도 족보를 발간하고자 하는 최초의 노력은 문헌상으로는 계유보 발행 20여년 후 1712년 발행한 안동 임진보(壬辰譜) 서문에 최초로 나타난다.
이 서문에는 1622년(광해군14년) 융달(隆達)이 편찬한 안동 임술보(壬戌譜) 밀직공 영양관 파보로서 약칭 <안동보>라고 하는데, 그 서문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 있는데 여기서 융달은
"서울에 사는 전에 현령을 지낸적이 있는 대현(大俔)은 의령의 후손인데 여러해 동안 족보간행의 일을 하여 처음으로 족보를 이룩하여(始得基槪譜成) 담양(潭陽) 문중에서 간행하려하다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의령은 본래 영양과 한 파인데 이제 영양파가 빠지면 이는 족보가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하고 이에 영양보(英陽譜)를 구하여서 그 근원을 밝히고자 하여 천리(千里) 길을 멀다하지 않고 나에게 와서 부탁하니 내 비록 불민하나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으리오. 이에 거황(居煌), 군태(君太)와 함께 널리 세보(世譜)를 구하고 고적(古跡)을 고증하고 모든 비문(碑文)과 지문(誌文)을 문중 어른에게 물어 세대와 파를 바른 연후에 몇 권을 간행한다....." 라고 적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1622년을 전후해서 안동파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족보를 만들려고 시도했음을 볼 수 있다.
나. 남씨 최초의 체계적인 족보 의령 남씨 계유보 발행
우리나라에서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족보는 숙종(재위: 1675-1720)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는 족보가 없으면 사회적인 행세를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양반이라도 족보가 없으면 상민(常民)으로 전락하게 되고, 또 양반에게는 군역(軍役)이 면제되는 특권이 있는데, 족보가 없으면 군역을 치르야 했었다.
그래서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심지어 상민들은 적당한 대가를 치르고 남의 족보에 끼어드는 폐습도 생기고, 본관은 하나인데, 파(派)가 몇 개씩 갈라지고 그 파가 족보를 따로 만들어, 당파 싸움이 심해 지면서 족속의 단결을 위해 족보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져 갔다.
이와 같이 숙종대는 족보의 전성기였다, 거의 대부분의 성씨가 이때에 만들어졌으니, 조선왕조 이전의 기록은 대부분 믿을 없는 것이 통례가 되어 있다.
남씨 족보 역시 이 범주를 벗어 날수 없다.
영양, 안동, 의령, 고성 중에서 그 당시 가장 번영을 누리고 있던 의령이 안동 임진보가 나오기 20년 전에 전 의령파 종인의 족보를 만들었고, 이후에도 가장 활발한 족보편찬을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697년(숙종 23년)8월에 발행된 의령 남씨 계유보가 남씨 최초로 발행한 정확한 족보로서 제일 오래된 것이다.
이 족보에는 당시 영의정 이었던 남구만 공이 서문(序文)을 썼는데, “1697년 이전에 신구이보(新舊二譜)가 있었는데, 그 기재 사항이 부실하여 故 판서 선(銑)이 수정하고 故 참판 익훈이 여러 종문을 방문하여 가첩을 수집해서 첨가하여 만든 것”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최초의 구보(舊譜)는 1500년 말부터 1600년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남사고 고보>로 보고 있다.
또 이 족보 서문에는 “3파(영양,의령,고성)로 분파되기 이전의 500여년 동안의 기록은 대부분 유실되어 버리고, 시조 영의공 남민(敏)의 신라 표착 사실도 당나라 서적 또는 동사(東史, 조선 역사)에도 그 기록이 없고, 후세 사람들의 구전(口傳)과 수문(隨聞)으로 기록 하였기 때문에, 3파로 분파된 1세조 이상의 대(代)는 전해 내려오는 기록이 부정확하고, 1세조 이하는 정확한 기록이라 믿을 수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동도 유림이 많으므로 곧장 족보편찬에 들어가, 1712년 임진보(壬辰譜)를 독자적으로 안동파만을 수록하여, 안동파 최초의 체계적인 족보를 발행하였다.
영양인은 주로 영양, 울진, 청송 등의 산골에 사므로 족보편찬이 의령보다는 30여년, 안동보다는 15년 정도 늦어졌으며 이후도 그렇게 활발함을 보이지는 않는다. 고성은 수가 너무 적으므로 족보편찬이 활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 영양관(英陽貫)의 발간 족보
정미보(丁未譜): 1727년(영종3년) 영양관 송정공파 남재명(齋明)의 주관으로 응창, 준명등과 협의하여 한권으로 된 영양관 최초의 체계적인 족보를 발행 하였는데, 약칭 <영해보>라고 한다
을유보(乙庾譜): 1765년 발행, 안동파가 독자적으로 안동파만을 수록하여 발행
경오보(庚午譜): 1810년 발행, 영양파와 안동파가 최초로 합본하여 발행.
경인보(庚寅譜): 1890년 발행
갑술보(甲戌譜): 1934년 발행
* 고성관 고성군파(固城貫 固城君派, 이후 고성파라 약함)
신미보(辰未譜): 1751년 최초의 체계적인 고성파 족보 발행
임진보(壬辰譜): 1772년 발행
병진보(丙辰譜): 1856년 발행
병진보(丙辰譜): 1916년 발행
다. 대동보 발행
남씨의 족보사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족보의 단일화에 대한 열망과 그 좌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남씨의 영양, 안동, 의령, 고성 모두가 자신들이 원래는 한 조상의 자손이라는 데에 있어서는 일치를 하고 있으나 윗대 조상들의 계보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안동파와 의령관과의 계보문제이다.
안동파도 자신들의 시조(始祖)가 군보(君甫)라 하고 있고 군보이하 자신들 조상의 계보를 갖고 있으며 의령파도 자신들의 시조가 군보라 하며 안동파와는 전혀 다른 자신들의 계보를 갖고 있다.
영양, 안동, 의령, 고성의 제계파가 단일한 족보를 만들려는 노력은 1622 경 첫 족보를 만들고자 할 때부터 시도되었으나 빈번히 좌절되다가, 영양과 안동은 1810년 경오보(庚午譜)때부터 합보(合譜)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양과 안동이 이렇게 먼저 합보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양과 안동은 그 조상들에 있어서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기 때문이고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족보를 편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조상의 상계가 어긋난 부분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이를 바로 잡고자 하여 각 문파의 대표들이 모여 논의를 하였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다가, 1955년 참판 익훈의 8대손이요, 조선말 천주교도 학살 사건 때 순교자인 승지공 남종삼의 손자인 의령인 우하(又何) 상철(相喆)공이 남씨대종회 (南氏大宗會)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피선된 후, 대종회의 일대 사업으로 "대동보 편찬위원회"를 만들어 3관 남씨들의 절대적인 협찬으로 삼년여년의 각고 끝에 정유(丁酉)대동보를 1957년에 발행하게 되었다.
정유대동보에서의 해결방법은 영양관의 시조 홍보(洪輔), 안동파와 의령관의 시조 군보(君甫), 그리고 고성파의 시조 광보(匡甫)를 시조 남민의 1세로 하고 영양파와 고성파는 다른 파들과 곂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그들 고유의 족보를 홍보와 광보 밑에 그대로 붙이고, 안동파와 의령파는 각 파에서 주장하는 군보(君輔)의 아들을 4형제로 해서(공약.혁지.익지.효윤) 공약(公若)을 안동파로하고 나머지 형제분은 의령인으로 상계를 결정하였다.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고 타협적인 방안이었지만, 의령관에서는 상계가 종래 전해지던 사실과 달라지므로 심히 반대를 해서 종인들 간에 불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때 각파의 합의와 연구 끝에 상계를 통일하였으나, 정유대동보 발간 이후 이 후 상계(上係)에 대한 논의가 재현되자 대종회장은 "상계연구회"를 만들어 각 파 간의 의견과 연구자료를 교환케 하였으나, 역시 의견의 일치를 보지못했다.
1693년 의령인이 발간한 계유보 서문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 령중추부사 구만(九萬)은 "족보는 신구이보(新舊二譜)가 있었는데 연대가 멀고 그 기재사항이 심히 간략하여 -중략- 지금에 이르러 오직 밀직공 이상은 의심을 의심으로 전하였으며 밀직공 이하는 믿음으로 전할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상계의 문제는 영원한 숙제일 것입니다.
라. 남이장군의 신설(伸雪)과 위산위파의 활발한 활동
의산위파의 족보는 1693년 계유보가 발행 되어을 시 차종손인 초(怊)의 후손은 타보견(他譜見)이라고 기록 되어 있고, 미쳐 입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65년 후 의령 남씨 무인보(戊寅譜)가 나올 적에, 파조 의산군의 2子로 붕(倗)이 추가되면서, 남이장군의 피화(被禍)시 이와 연류되어 진도에 유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길이 멀어 계유보에 미쳐 입보하지 못하였다는 사유와 함께 후손들이 입보되었다.
이때 현제 차종손인 초의 후손은 응생-극신-국운,위운,기영 순으로 기영은 3자로 입보된 체 오늘날 까지도 의령보에는 장자가 아닌 3자로 내려 있다.
의산위파에서 획기적인 변화는 181년(순조 18년) 당시 우의정을 지내고 있던 방손(傍孫) 남공철 공이 유자광의 무고에 의해 자행된 남이장군이 억울한 역적 혐의를 신설(伸雪)해 달라고 상소하므로서 복관작(復官爵)되어진 사건이었다.
이에 부곡면 일대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의산군 남휘(暉)와 남이장군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서울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차종손으로서 봉사(奉祀)로 윤허(允許) 받게되어 장자(長子)의 계대를 잇게 된다.
이후 의산군의 불천지위(不遷之位)를 지내기 위한 의산궁과 의산군 묘우(廟宇) 그리고 구봉서원을 세우는등 위대한 선조의 후손으로서 위상을 떨쳐 나갔다.
1954년 최초의 위산위 갑오 파보와 1977년 정사파보를 발행하면서 남씨 대동보 발행 시에는 기영을 장자로서 입보하였으나, 의령남씨 족보에는 최근까지도 기영을 3子로 입보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참고 : 의령남씨 함평 손불 지사리 세종회 공식 카페, 주소 : http://cafe.daum.net/namkunwoo
의령남씨 역대 족보 편찬사 도표
카페 검색 안동파 화수회- 남재권 영양남씨(英陽南氏) 제하의 글
재부 남씨 종친회 회원명부 (1992년) 남맹우 회장의 족보 소고의 글
최초의 의령남씨 족보-계유보(癸酉譜1693년 발행) 소개
출 처
이 자료는 창원 남기태(基泰)공(의령남씨 직제학공파 26세손) 가택에 소장되어온 족보를 의령남씨 함평 손불 지사리 세종회 카페 (http://cafe.daum.net/namkunwoo)에서 발굴하여 게재한 내용임
총 3권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 3권은 1979년 대동회에서 가져간 후 반납을 하지 않아 두 권만 확인 하였다.
발행 년도
본 족보는 의령남씨 최초로 1693년(숙종 19) 계유(癸酉)년 남익훈(南益熏)이 함흥에서 편집·간행하였으나,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공이 남씨의 유래를 위주로 쓴 머리글(序文)을 丁丑(1697)년에 쓴 것으로 보아, 완성을 1697년에 한 듯하다.
2책 말미에 “계유년에 함흥부에서 간행했다(癸酉歲咸興府開刊)”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1693년 함흥부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문에 따르면, 의령남씨는 17세기 이전에 이미 두 종류의 구보가 있었지만 내용이 매우 소략하여 남선(南銑)이 이를 수정하였지만 이 역시 미비점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남익훈(南益熏)이 동종을 탐방하고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보다 완본(完本)을 편찬한 다음, 임지인 함경감영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당시의 책판은 남익훈의 아우 남치훈(南致熏)이 경주부윤에 임명되자 해운으로 경주로 옮겼고, 부윤직에서 해임되자, 다시 의령 소재 남진용의 산소 아래로 옮긴 것을 진주목사로 부임한 막내 동생 남지훈(南至熏)이 영구 보관을 위해 장판실(藏板室)을 지어 보존하였다고 한다.
내용 구성
족보. 분량은 4권 2책이며, 권1은 1책, 권2∼4가 1책이다.
표제와 판심제 모두 “의령남씨족보”이다. 크기는 반곽이 가로 20.5cm, 세로 26.6m이며, 유계(有界), 서문은 8항 16자,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체제는 표지(表紙), 서문(序文), 보도(譜圖)로 구성되어 있다. 범례와 발문은 없으며, 1책의 맨 말미에는 남재(南在)의 시문과 남재·남심(南深)의 왕지(王旨)가 판각되어 있다.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서문에 따르면, 의령남씨는 신라 때 귀화한 남민(南敏)의 후손으로 그 원류는 영양남씨(英陽南氏)였다.
그러나 고려말 남진용(南鎭勇)의 세 아들 중 장자(長子) 남홍보(洪甫)만 영양남씨를 유지하고, 차자(次子) 남군보(君甫)가 의령남씨, 삼자(三子) 남광보(匡甫)가 고성남씨로 분관하게 되었다.
즉 의령남씨는 남군보를 시조로 하는 영양남씨의 한 분파임을 알 수 있다.
보도(譜圖)는 8층 횡간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매 면은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字標)가 매겨져 있다. 권1의 첫 장에는 남씨의 시조 남민의 약전을 기록한 다음 중간 부분에 8층 횡간을 그어 맨 위의 남주(南倜)부터 그 아래로 7세손 홍보·군보·광보 형제까지 수록하였다.
남주를 맨 상단에 둔 것은 남민과의 계대(系代)가 미상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다음 장에서는 의령남씨의 시조인 남군보에서 그의 현손대까지 수록하고 그 하단은 공백으로 처리한 다음 장을 바꾸어 남재부터 수록하고 있다.
이는 이 족보가 군보의 손자 천로(天老)의 장자 을번(乙蕃)→재(在)·은(誾)·실(實)·지(贄) 계열과 차자 을진(乙珍)→근(瑾)·이(珥)·규(珪)·집(緝)·속(續)·약(約) 계열을 중심으로 편집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런 방식으로 1책에는 군보의 11세손까지, 2책에는 대략15∼16세손까지 수록되어 있다.
각 인물의 주기는 17세기 이전에 활동한 사람은 비교적 자세한 편이고, 이 이후의 인물은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전자의 경우 현달한 인물은 자(字), 호(號), 과거(科擧), 관직(官職), 시호(諡號), 봉호(封號), 묘향(廟享) 관계, 묘소(墓所) 위치, 배위(配位)의 성관(姓貫), 처부의 이름, 묘소 위치 등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고, 그 나머지 인물도 과거, 관직, 묘소의 위치, 배위의 성관, 처부의 이름은 반드시 기재하고 있다.
사위와 외손은 대부분 본관이 생략된 채 과거 또는 관직만 기록되어 있다.
자녀는 선남후녀(先男後女)에 입각하여 등록되었으며, 외손과 서자녀도 수록되어 있다. 외손은 대략 3대를 수록하였고, 서자계열은 수록에 있어 대수 제한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단 다른 족보와는 달리 서자는 측자(側子), 서녀는 측녀(側女)로 표기한 것이 이채롭다.
양자로 나간 경우는 본생(本生) 항목의 이름 하단에 “출위○○후”(出爲○○后)라 표기하고, 양계(養系)에서는 이름 위에 계(繼) 자를 표기하여 출계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왕지는 1399년(건문 1) 남심이 통훈대부에 임명될 당시의 왕지와 1415년(태종 15) 9월 남재가 “순충분의동덕개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령부원군 수문전대제학세자부(純忠奮義同德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宜寧府院君修文殿大提學世子傅)”에 임명될 때 작성된 왕지이다.
이처럼 선대의 시문이나 왕지(敎旨) 원본을 판각하는 예는 다른 족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매우 드문 경우라 하겠다.
이 족보는 의령남씨 족보 중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로서 체제와 내용이 비교적 충실하여 자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선남후녀적인 수록 방식과 출계 사항을 명시한 점 등을 고려한다면 유교적 종법 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17세기 중후반 족보의 전형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유보(癸酉譜) 서문(序文) 〔해설〕
남씨가 성(姓)을 얻게 된 것은(得姓) 신라 때부터 비롯하였으니, 전하는 기록에 당나라 천보 (天寶) 14년(신라 경덕왕 14년 서기755년) 현종(玄宗)이 촉(蜀)으로 행차(行次)할 때에 시종(侍從)한 김충(金忠)이 안렴사(按廉使)로서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漂流)하다 신라 예주(禮州)에 도착하니, 곧 지금의 영해(寧海 현제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 죽도)이었다.
公이 말하기를 중외가 하나의 천하이니 모두가 왕토라 이곳에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경덕왕이 당나라 천자(天子)에게 아뢰어, 이곳에 살겠다는 소원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이에 경덕왕은 중국 여남(汝南)사람이라 하여 “南”씨 성(姓)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이라 개명하여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여 영양(英陽) 땅에 살게 하고 호적을 받게 되었다 라고 한다.
그 후 고려 후기에(1,200~1,300년대로 추정) 형제 3인이 계셨으니. 군기주부동정(軍器主簿同正) 홍보(洪甫)와 추밀원 직부사(樞密院 直副使) 군보와 고성군(固城君) 광보(匡甫)이시다.
홍보(洪甫)는 이어 영양을 본관으로 하고, 군보(君甫)는 의령으로, 광보(匡甫)는 고성으로 이관하여 계보(系譜)가 비로소 3관(貫)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諱 군보의 후손 諱 재(在)는 우리 태조를 도와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어, 의령 부원군의 봉호를 받고 영의정이 되시어 시호(諡號)는 충경(忠景)인데 태조(太祖)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시니 의령남씨가 번성해서 지금의 명사(名士)들도 그의 후예(後裔)가 많은 것이다.
족보는 신구(新舊) 두 가지가 있지마는 연대가 몹시 오래되어서(久遠) 기록이 심히 엉성하고 빠진 것이 많기에(疎漏) 판서 諱 선(銑)이 수집(蒐輯)하고 수정하였으나 그래도 역시 미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판서 형조참판 익훈(益熏)이 여러 종친을 찾아다니며 첨가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成帙) 함경도 안절사로 있을 때 간행하여 널리 족인(族人)들에게 반포해서 먼 후손들로 하여금 득성한 유래와 분파한 까닭을 알게 하였으니, 그가 조상을 덕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내는(追遠) 정성과 수족(收族)하는 정의(情誼)가 가히 근후(勤厚)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족보 중에 기록된 것을 보면 수적(受籍)한 때로부터 이관(移管)한 때 까지는 500여년이나 되었는데, 서첩(書牒)에는 겨우 7代 뿐이니 그 간에 빠진 것이(遺漏) 많았음을 가히 알 것이다.
천보년대(天寶年代)에 당 현종(玄宗)이 촉(蜀)에 행차할 때 시종한 신하로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에 표착하였다는 기록은 당서(唐書)에나 동사(東史)에 하나도 없고, 안렴(按廉)이란 직명도 또한 천보년대에는 없었으니, 이것이 모두 후세 사람들이 말로만 서로 전해서 들은 대로 기록하였으니, 고증(考證)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와서 오직 “밀직공(密直公) 이상은 의심스러우나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고, 밀직공 이하는 믿을 수 있으니, 믿는 대로 전할 뿐이다”함이 마땅한 것이리라.
민마부(閔馬父)의 시를 인용한 말에서 이른 것은 멀고 먼 조상들이 정하신 법을 감히 마음대로 할수 없는 것이라 지금 그의 의심나는 것과 믿어 운 것이 유래한지가 오래 되었으니 어찌 감히 없앨 수 있으리오.
대개 들으니 주(州)나라 제도에는 성(姓)을 받은 것을 관장하는 사예지관(司裔之官)이 있어서 세대로 소사의 직이 있었으니 성씨(姓氏)의 세족(世族)이 어찌 국가의 정치에 관여해서 관직을 설치하였음이 이와 같이 중(重)하고도 복잡하였을까? 나의 생각으로는 천하란 것은 일국(一國)이 확대 된 것이고, 일국(一國)이란 것은 일인(一人)이 확대 된 것이니 지금에 일인(一人)의 몸으로서 성(姓)을 얻어 그 적(籍)이 두드러지고 겨레가 있어서 그 종족(宗族)을 세우며 보(譜)가 있어서 그 세대(世代)를 적(籍)하고 그 계통을 세워서 후세에 천명(闡明)되었는데 그의 유풍(流風)이 남아서 친애함이 먼 촌(寸)에 까지 미치니, 유교(遺敎)가 없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일인(一人)이 일족(一族)을 이루게 한 것이다.
그러면 족(族)에서 국(國)으로 국(國)에서 천하(天下)로 그의 교화(敎化)가 점점 미쳐가는 것은 손을 뒤집는 것같이 쉬운 것이다.
성왕(聖王)의 정치에서 이것을 귀중히 하였음이 어찌 의의(意義)가 없는 것일까?
생각 하건데 이와 같기 때문에 수보(修補)하는 일을 중시(重視)해서 그 근원을 고찰하고 그의 파계(派系)를 분변(分辨)하는 것은 숭덕(崇德)하고 상현(尙賢)해서 그의 선대를 욕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의공(英毅公)은 외교를 담당하는 신하로서 후덕(厚德)이 후대에 까지 덮어서 마침내 해동(海東)에 성족(盛族)이 되었고, 충경공은 혁명하는 때를 당하여서 우매(愚昧)할 때 경륜으로서 건국의 대공을 세우셨으니 이에 후손들은 마땅히 그의 공렬(功烈)을 이어 받아서 무궁한 내세(來世)에 실추됨이 없게 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만약 세차(世次)가 나타나고 관작(官爵)이나 들어내서 높고 낮음이나 비교하고 갑을(甲乙)이나 정한다면 이것이 어찌 금일에 수보하는 본의(本意)가 될까 보냐.
휘 익훈(益熏)의 중씨(仲氏) 휘 치훈(致熏)이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서 바닷길로 각판(刻板)을 운반해 오고 그가 퇴직해서는 또 의령에 밀직부군의 묘하(墓下)로 그 계씨(季氏) 진주목사 휘 지훈(至勳)이 그것을 이송해 와, 그곳에 각판을 영구히 보관할 건물을 세워서 보존할 계획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歲) 숭정기원주갑후 정축(숙종 1697년) 8월 일
후손 대광보곡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구만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