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밀롱가¹ 에는 퇴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땅고를 추면서 하루의 피로를 씻고자 하는
사람들로 작은 들썩임이 인다. 잔잔한 음악은 가만히 음미하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어도 그들의
모습에서 여러 가지 빛깔의 감성을 발견해 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밀롱가¹ 를 다니면서 어느덧 친근해진 얼굴이 다가와 춤을 청하면, 홀딩을 하고 음악에 맞춰 스텝을 딛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아지경에 빠져 이 세상에 오로지 나와 파트너와 음악만이 존재하는 환상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반면 밀롱가는 치열한 생존의 법칙이 존재하는 고요한 전쟁터이기도 하다. 춤이 잘 되는 날은 그만큼 기분 좋고 신나지만 반면
나와 잘 맞지 않는 상대를 만났을 경우에는 3분이 30분처럼 느껴지는 고역을 겪기도 한다. 춤 솜씨 하나로 벽꽃² 에서 스타를
넘나들며 천국에서 지옥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 내리락 하기도 한다.
낯선 사람과 설레는 기분으로 홀딩을 하고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기대감, 익숙하지 않아서 오히려 신선한 낯섦, 새로운 사람이 춤을 추는 동안 점차 친구가 되는 충만감이
가득 차 있는 이 곳은 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좌절, 행복을 번갈아 맛보며 헤어나오지 못하는 늪과도 같다.
<아르헨티나의 한 밀롱가 - 살롱 까닝의 모습. Photo by Borges>
며칠 전 밀롱가에서 한 땅게로³ 가 춤을 추다 말고 바 앞에 앉아있던 필자에게 파트너를 데리고 왔다.
"이 아가씨 동작 좀 봐주세요. 아무래도 이상해요."
그리고 내 앞에서 시연을 해 보인다. 보기에 아무 무리가 없어 보인다 했더니 다시 봐달라며 몇 번을 반복해서 시연을 한다. 여전히 문제가 없노라 했더니 그 땅게로가 파트너에게 말하기를
"아까는 이렇게 하지 않았었어. 지금은 괜찮네. 지금처럼 해. 아까는 진짜 이상했다니까..."
춤을 추는 내내 얼마나 상대 땅게라에게 이것 저것 지도를 했을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오죽했으면 춤을 추다 말고 와서 필자에게 봐 달라고 했을까.
밀롱가에서 불문율처럼 지켜지고 있는 규칙 중 하나가 바로 "가르치지 말기" 이다. 밀롱가는 땅고 라는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요금을 지불하고 들어온 일종의 "노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안에서 누군가가 나의 춤에 대한 평을 하고 더불어 지도까지 하려 든다면 나는 춤을 추는 내내 계속 지적 받은 부분에 집착을 하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춤을 추는 즐거움을 빼앗겨 버리고 말 것이다. 스트레스를 풀고 충족감을 얻으려 갔다가 오히려 해결되지 못한 문제거리를 떠안고 개운하지 못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이러한 시도로 인해 그 사람의 즐거움을 빼앗을 권리가 없다는 뜻도 된다.
그런데
춤을 배우는 사람들과 그들을 아끼는 선배들은 간혹 배움에 대한 갈망과 지나친 열정으로 밀롱가 내에서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특히나 선배 땅게로³ 가 후배 땅게라³ 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여러 땅게라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춤만 추려고 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자기 리드나 좀 잘하지..."
"처음에는 가르쳐 줘서 좋았는데 지금은 매번 그러니까 짜증나요."
"그래도 친한 사람인데 이제 와서 싫은 내색 할 수도 없고 곤란해 죽겠어요."
땅고는 남자가 리드를 하지만, 팔로워(Follower)가 일방적으로 리더(Leader)에게 맞추는 춤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매번 다른 파트너를 만나 변화에 시시각각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팔로워의 일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내가 A양과 춤이 잘 되었다고 해서 똑같은 방법으로 B양과 춤을 췄을 때에도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B양이 실력이 나쁘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땅게라마다 신장과 몸무게, 몸이 반응하는 속도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와 추고 있는 땅게라가 리드를 잘 받지 못한다면 그건 그녀가 초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내가 더 편안하게 파트너를
안심시키고 능숙한 리드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뜻도 된다. 고수 땅게로라면 초보인 파트너와도 아무 무리 없이 춤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파트너의 단점을 지적하기 보다는 그녀의 몸에 더 귀 기울여 듣고 맞추어 주도록 하자.
그녀에게 전달하고픈 무엇인가가 있다면 말이 아닌 몸을 사용해서 알려주자.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정확한 리드를 천천히
반복해서 또박또박 알려주면 차츰 몸의 귀가 열려 리드를 잘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땅고의 모든 테크닉은 몸이 가장 편안하고
긴장이 풀려져 있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편안하고 정확한 리드는 땅게라의 자연스러운 동작을 이끌어 낸다>
얼마전 인터넷에 우연히 우리나라 서비스업에 대한 글이 올라온 것을 읽었었다. 그 글에는 수많은 답글이 달렸었는데 주로 우리나라
서비스업을 한탄하는 글들과 불쾌한 손님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공방전이었다. 그 답글들 중에 누군가가
일본의 한 서비스업체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회사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고 한다.
1. 손님은 항상 옳다. 2. 아무리 생각해도 손님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 때는 1번을 상기하라.
읽으면서 참 무서울 정도로 서비스업에 대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머리에 남았었는데, 이 날 밀롱가에서 문득 이 문구가 떠올랐다. 만약 문장을 살짝 바꾸어 대비한다면 어떨까.
1. 땅게라의 팔로우는 항상 옳다. 2. 아무래도 땅게라의 팔로우가 잘못됐다고 생각될 때에는 1번을 상기하라.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여 넣고 싶다.
3. 부득이하게 가르쳐야 할 때에는 말이 아닌 몸으로 가르치자.
(주) 1. 밀롱가(Milonga) : 땅고를 추기 위한 장소를 말한다. 힙합 바(Hip Hop Bar) 나 락 바(Rock Bar) 와 같은 개념의 땅고 바(Tango Bar) 라고 생각하면 된다. 2. 벽꽃 : 춤 신청을 받지 못하고 앉아만 있는 여자를 일컫는 말. 3. 땅게로(Tanguero), 땅게라(Tanguera) : 땅고를 추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남자는 땅게로, 여자는 땅게라 라고 부른다. 복수형으로는 땅게로스(Tanguer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