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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노아(noa noa)
『노아 노아』에는 타히티에서의 고갱의 생활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감상적인 입장에서 쓴 것들이 많으며 더러는 그의 성격에 걸맞게 과장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그가 왜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는지 등을 비롯해 타히티 생활의 여러 면을 이해하게 된다.
타히티에서 2년 동안의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타히티에서 쓴 수기에 삽화를 곁들여 필사본 『마오리의 고대 신앙』과 『노아 노아』를 엮었다.
고갱이 『노아 노아』를 완성한 것은 1893년 말이었고 이 원고를 젊은 시인이자 작가 모리스에게 주었다.
모리스는 원고를 1908년 10월까지 갖고 있다가 출판사 에드몽 사고에게 팔아 출판사에 대한 자신의 빚을 갚았다.
모리스는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면서 “저는 매우 가치 있는 고갱의 원고를 갖고 있습니다”라고 운을 뗀 뒤 다음과 같이 적었다.
30페이지 이상이 되는 노트북으로 고갱이 타히티에 처음 갔을 때의 이야기가 고갱 자신의 친필로 적혀 있으며 귀사는 이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
귀사가 지불할 수 있을 만큼 가능한 한 많이 지불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고갱의 친필 원고는 1962년 파리에서 매매되었고, 1979년에 다시 거래되었으며, 1980년 타히티에 소재한 폴 고갱 뮤지엄에서 빌려서 전시했고, 1984년 로스 앤젤레스에 소재한 게티 센터가 구입했다.
고갱이 『노아 노아』를 자비로 출간하기를 원치 않은 것은 화가의 글이 최종적으로 출간되는 것은 무리라고 보았고 작가가 교정을 본 뒤에 출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과 작가가 협력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서 자신은 경험을 토대로 있는 그대로 적었지만 책으로 출간될 때는 모리스와 같은 작가가 손질해서 문명사회와 야만 사회를 잘 비교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순진하고도 야만적인 타히티인들의 삶과 데카당스적인 유럽인의 삶이 작가의 손질에 의해 극명하게 비교되기를 바랐다.
모리스는 시인이면서 작가로서 몇몇 상징주의 잡지에 컬럼을 정기적으로 쓰고 있었고 『메르큐르 드 프랑스 Mercure de France』지에 평론을 쓰고 있었다.
고갱이 그를 만난 것은 1890년 말 오데온 극장 근처 데카당스 작가들이 자주 모이는 작은 레스토랑에서였다.
고갱은 모리스를 만난 후 그에게 타히티에 관해 장황하게 말했고, 뒤랑-뤼엘에서의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을 청탁했으며, 『노아 노아』의 초고를 교정하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1893~94년 겨울, 두 사람은 원고 교정을 위해 자주 만났으며 이 시기에 고갱은 제목을 『노아 노아』로 할 것으로 결심했는데 이는 타히티 어로 ‘향기 fragrance(또는 perfume)’란 뜻이다.
두 사람의 협력으로 『노아 노아』는 12장으로 구성되었고 고갱 스타일의 문장과 모리스 스타일의 문장이 절묘하게 융합되었다.
직접적인 장황한 이야기 전개가 간략하고 매끄러운 문장으로 지성적이 되었다.
문장은 모리스가 1897년 가을 『라 레뷔 블랑세 La Revue blanche』를 통해 소개하는 과정에서 더욱 더 손질이 가해져 고갱 본래의 이야기체는 대부분 사라지고 모리스 특유의 맛이 물씬 풍겼다.
모리스는 단어와 문장만 고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순서를 바꾸기도 했고 한 챕터를 완전히 제거하기도 했다.
모리스는 1897년 9월 10일 완성시켰는데, 달라진 내용을 고갱이 사전에 읽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모리스는 손질한 『노아 노아』를 『라 레뷔 블랑세』의 책임자 펠릭스 페네옹에게 보냈고 몇 주 후 페네옹은 마오리족의 종교에 관한 부분을 뺀 일부를 10월 15일과 11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했다.
『라 레뷔 블랑세』에 소개된 후 모리스는 이 사실을 고갱에게 알리면서 잡지사가 책으로 출간할 예정임을 자신했다.
고갱은 1897년 12월에 10월자 『라 레뷔 블랑세』를 받아 읽었지만 돈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모리스는 자신이 기여한 점을 들어 잡지 원고료와 책으로 출간될 경우 받게 될 저작료의 절반은 자신이 가져야 한다는 내용을 고갱에게 전했다.
고갱은 곧 모리스에게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매우 나쁘기 때문에 저작료를 나눌 수 없다면서 저작료가 많지는 않더라도 그 돈이 자신으로 하여금 자살할 생각을 접게 해줄 수 있으므로 그 돈을 나눠 갖겠다는 건 죄를 짓는 일이라고 답장했다.
그래도 고갱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몽프레에게 편지를 보내 모리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예의 주시하게 했다.
그러나 『라 레뷔 블랑세』는 독자들이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노아 노아』를 책으로 출간하기를 포기했다.
모리스는 새로운 출판사를 물색해야 했다.
그는 고갱의 글에 호감을 가진 말라르메에게 삽화가 없는 단순한 형태로 출간할 수 있도록 말라르메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 샤르펜티에-파스켈레를 소개해줄 것을 청했다.
말라르메의 추천으로 샤르펜티에의 뒤를 이은 출판업자 파스켈레는 그렇게 하기로 했지만 마냥 뒤로 미루었다.
모리스는 출판사 두 곳을 더 알아보았지만 선뜻 나서는 곳이 없었다.
몇 곳을 더 알아보다 지친 모리스는 자신이 돈을 대기로 하고 벨기에의 정기간행물 『액티온 휴마인 L’Action humaine』을 발행하는 에밀 샤르펜티에와 계약을 맺은 후 1901년 4월에 출간하여 프랑스로 들여와 팔았다.
모리스는 고갱에게 『노아 노아』가 출간되었다면서 100권을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고갱은 받기를 거절하면서 삽화가 없이 출간된 이 책은 “휴지”에 불과하다고 화를 냈다.
고갱은 궁금했던지 몽프레에게 편지를 보내 한 권을 보내라고 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고갱은 끝내 이 책을 받아보지 못했다.
삽화가 없이 출간된 것에 화도 났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혜택을 누리지 못한 고갱은 『노아 노아』의 후속편을 쓰라는 모리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갱과 모리스가 협력해서 완성시킨 원고는 현재 프랑스의 오르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게티 센터가 구입한 것과는 달리 삽화, 사진, 목판화, 수채화 등이 삽입된 것으로 겉장은 담배색 가죽으로 되었으며, 고갱 자신이 일일이 페이지를 적어 넣은 204페이지가 앨범처럼 묶여져 제본되었고, 『노아 노아: 타히티로의 항해 Noa Noa: Voyage to Tahiti』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타히티로 돌아가서 보충한 글과 그림들이 추가된 것이다.
이것이 오르세이 뮤지엄으로 옮겨지기 전에 루브르 뮤지엄 데생보관실에 있었으므로 “루브르 필사본”이라고 부른다.
경험에 근거한 고갱 특유의 이야기는 하얀 종이에 브라운 잉크로 적혀 있으며 많은 삽화가 곁들여 있다.
타히티 토속 신앙에 관심이 많은 고갱은 <별들의 탄생>712을 펜과 수채로 그렸고 이 작품에 관해 『노아 노아』에 적었다.
테후라도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입으로는 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의 마음은 마오리족 올림푸스 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그들의 신, 타로아와 예수를 어떻게 연결 짓는지 난 모른다. 난 그녀가 둘 모두를 숭배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특히 별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샛별과 저녁별을 프랑스말로 뭐라 부르는지 물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들은 달이 지구와 마찬가지로 둥글고 지구에서처럼 곡식이 풍부하며 달에도 사람이 산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들에 의하면 오라나무(뱅골 고무나무의 변종)의 씨앗은 달에서 지구로 운반된 것이다. 하얀 비둘기가 이 씨앗을 가져왔는데 이 비둘기가 달에 가는 데 두 달이 걸리고 그곳에서 다시 지구로 오는 데 두 달이 걸렸다. 이 비둘기가 지구에 도달했을 때는 깃털이 모두 닳아 없어져버렸다. 비둘기는 마오리족에게 가장 빠른 새로 통했다.
타히티인들은 나름대로 별에 이름을 붙였다.
<테하나마의 선조>716는 1893년 봄에 그린 것이다. 성직자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테하마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처럼 정면을 바라보는 포즈를 취했다. 머리에는 꽃을 장식하고 왼손에는 부채를 든 채 자신이 아름답게 그려지기를 바라고 있다. 배경에는 양팔을 벌인 신상이 있는데 여신 히나Hina를 상징하는 힌두의 성상이며 그 밖에 저승사자 투파파우tupapau의 옆모습이 보인다. 머리 뒤 배경은 이스터 아일랜드Easter Island의 유명한 론고론고rongorongo 명판으로 오늘날까지 해독되지 못하고 있다. 고갱이 배경으로 사용한 이 명판은 아마 그가 만국박람회에서 보고 얻은 자료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는 <테하나마의 선조> 배경의 상형문자를 “앉은 여인”, “왕”, “북을 두드리다”로 해독했다.
남태평양에서 지상낙원을 고대하던 고갱의 꿈이 현실로 성취된 건 불과 몇 달 동안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아주 열심히 그렸으며 애정과 관능적 환희가 어우러진 평화를 누렸다. 그는 테하마나에게서 고대 종교에 관해 들었다고 했지만 고갱이 타히티어에 능통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가 고대 종교에 대한 지식을 얻은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그는 파페에테의 한 식민지 관리로부터 1839~45년 타히티 주재 프랑스 영사였던 자크 앙투안 뫼렁후가 반 세기 전에 쓴 『오세아니아 여행기 Voyages aux Iles de Grand Ocean』(1837)를 구해 읽었다. 이 여행기는 고대 폴리네시아인의 종교·의식·풍속을 자세히 다룬 책이다. 그가 쓴 많은 양의 원고는 이 책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고갱은 고대 신앙과 허구를 교묘하게 뒤섞어 자신이 원하는 류의 작품들을 그려나갔다. <히나와 파투>721는 이런 류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여신 히나는 인류에게 부도덕성을 허락했다. 타히티인의 신화에 관해 고갱은 적었다.
히나가 파투에게 ‘인간에게 생을 되돌려주든지 사후에 소생시키든지 하라’고 말하자 파투가 응답했다. ‘안돼, 난 인간을 소생시키지 않겠어. 대지는 사망할 것이며 초목도 사망할 텐데 그것들은 자기들이 기른 인간이 멸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멸망할 것이다.’ 히나가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 나는 나대로 인류에게 달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히나에게 속한 것은 계속해서 살게 될 것이다. 파투에게 속한 것은 멸망할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필히 멸한다.’
이 신화는 히나와 파투를 이원화해서 달을 섬기는 사람은 영생하지만 대지를 따르는 사람은 필히 멸하게 된다는 타히티인들의 인생관과 우주관을 보여준다.
<히나와 파투>가 1893년 11월 뒤랑-뤼엘 화랑에 소개되었을 때 드가가 구입했다.
타히티 생활 2년 째인 1892년에 그려진 <Market Day> 는
그의 상징주의와 종합주의 냄새가 배여있는 그림이다
강렬한 색채를 평면적으로 적적 발라놓은 여인의 의상과
의도적으로 각을 지어 직선을 사용해 끊어놓은 듯한
여인들의 인체와 부자연스러워보이는 동작은 모두가
그의 의도적으로 원시생활의 생활과 서구문화와의 단절을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의 장치같다.
타히티인들의 조상이 이집트계라고도 하는데
여인들의 모습이 이집트 전통의 특징도 보여준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타히티의 장날인데,
장날이면 아마도 서구의 많은 신식 물건을
살 수도 있고 구경도 할 수 있는,
일상을 조금 벗어난 나들이의 날일테다.
여인들은 그들의 외출을 준비하기 위하여
(더운 날씨에도) 세련된 의상을 입고 손톱도 다듬는 등
몸단장을 잔뜩하고는 설레며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을테다.
고갱에겐 이런 여인들과 그들의 문화가 낯설게 보였을것이고
여인들에겐 장날의 서구 물건들이 낯설고 신기했을것이다.
다만, 오른쪽 전경에 배치된 여인 한 명만은
또래들과 어울려 있지 않게 동떨어져서는 혼자만
아직도 타히티 여인으로서 자신의 일상적 의상을 걸치고 있다
고갱은 타히티의 덜 깨어난 문명을 옹호하고 동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변신하고 있는 타히티 여인들을 물끄러미 부러운듯 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전경의 여인은 도대체 무엇인지,
원시주의를 동경했다는 고갱의 더욱 애매한 태도를 부각시킨다.
이런, 고갱에 대한 의심은 1892년작
<Spirit of the Dead Watching (죽음의 영영이 지켜봄)>에서 더욱 나타난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노아노아"라고 불리는 일기를 남겼는데,
그 일기에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어느날 밤 늦은 시간에, 그의 연인 테하마나가 갑자기 겁에 질려
커다랗게 눈을 떴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은 바로 죽음의 영영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두려움 속에서 테하마나를 고갱이 곁에서 달래줬 는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 다가웠던 두려움이 유럽남자 고갱에게는
비이성적이고 원시적인 신기한 상상속의 이미지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런 공포에 질린 여성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나 느끼고
게다가 그 상황을 상상하며 재밌다는 듯 기록이라도 할 요량으로
그림으로 그려놓는 것은 지극히 원시 문화에 대한 고갱의
남성주의 태도가 보여진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덜 문명화 되어 더욱 본능적 감정에 충실하고,
그것이 긍정적인 집단무의식으로 자유로이 표현되는 이 곳에서
어쩌면 고갱은 남성으로서의 생물학적 자유로움을 만끽했는지도 모른다.
손만 뻗으면 쉽게 따 먹을 수 있던 도처에 널린 풍성한 열대 과일들과
흑갈색 피부에 달린 두 가슴을 일상으로서 드러낸 여성들을
고갱은 혹시 헛갈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고갱은 타히티에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한 원시 생활 경험하기 위해
그 곳엘 찾아가긴 했지만,
원주민의 음식 대신 유럽에서 가져 간 음식들을 줄창 먹었고,
끊임없이 여성들의 뒤를 밟으며 그들만을 그려댔다.
여인들에게는 전통으로 여겨졌을 가슴을 드러내는 풍습이
고갱에게는 언제나의 짜릿한 볼거리와 쾌락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으며
13살 미성년자와 혼일을 하고도 여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
남성으로서의 쾌락과 자유로움을 마음껏 누렸으리라고도 볼 수 있겠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단 말이 기나긴 1년 넘어의 생활에선
일백퍼센트 통하지는 않을 지란 것은 이해가 간다.
(해외 여행을 떠날 때 한국인들이 고추장이나 김치를 챙겨가는것처럼)
하지만, 고갱이 찾아 갔던 타히티는 과연 그가 존경하고 동경하고
배우고 싶고 닮고 싶어 떠났던 원시인지,
팍팍한 프랑스의 생활을 단순히 벗어나 그 자신에게 마음껏
자유와 쾌락을 주었던 곳일까.

첫댓글 제가 좋아하는 고갱에 관해서 올려주심 감사 합니다..언젠가 타히티 섬으로 가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 보고 싶은 게 꿈 입니다만 이루어 질런지는 모르겠네요..인간과 원시적 생활을 동경하는 작가의 마음이 타히티로 가게끔 하지 않았을까요 ㅎ...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전 이 작품에 반해서 팬(?)이 되었죠 ㅎ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