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림일기
일기쓰기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 같습니다. 은결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기를 쓰려면 한참동안 끙끙 댑니다. 그러다 몇 줄 써 놓으면, 그 일기를 보면서 은결이의 생각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을 다시 쓰게 합니다. 그렇게 쓴 일기를 10칸 노트에 옮겨줍니다. 이왕이면 띄어쓰기 공부도 함께 시킬 요량으로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림일기 공책에 그대로 옮기게 합니다. 그러다보니 일기를 쓰는 일이 한 시간 넘게 걸립니다. 더구나 그림까지 그려야 하니 보통 작업이 아닙니다. 은결이가 글도 잘 쓰고 글씨도 아주 예쁘게 씁니다. 그러나 그림을 잘 그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케치도 해주고 더러는 색도 함께 칠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손님이 오셔서 혼자 하라고 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은결이는 거침없이 쓱쓱 스케치를 하더니 색칠을 하는 것입니다. 그 그림 속에는 은결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진짜 아이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그림일기 숙제를 하면서 은결이의 많은 생각들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에 대한 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은결이는 대뜸 할머니가 소리 지른다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자주 꾸중하신다는 이야기도 썼습니다. 그런데 은결이는 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할머니가 참 좋다.’ 라고 말입니다.
날마다 은결이를 찾아 학원에 오시는 할머니, 은결이가 말썽을 부릴 때마다 어쩌면 좋으냐고 속상해 하시며 때때로 울기까지 하시는 할머니, 은결이는 할머니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손자이고, 할머니는 은결이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할머니입니다.
23. 은결이가 받은 상장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식을 하는 날입니다. 아침 일찍 은결이가 방학숙제를 가지러 왔습니다. 그림일기와 수학 공부한 것, 그리고 종이접기 달력과 독서감상화, 또 그림 세 장과 만들기, 우리 고장 견학문 등 제법 많습니다. 혼자 들고 가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아이들 엄마처럼 교실까지 함께 가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오셔서 교문까지만 데려다 주었습니다. 은결이도 숙제를 한 것이 좋은지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합니다. 할머니 역시 웃음이 가득합니다. 그저 잠시 수고했을 뿐인데 은결이와 은결이 할머니가 저의 수고보다 더 많이 기뻐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기쁨은 다시 배가 되어 제 기쁨으로 고스란히 돌아온 것입니다.
1주일 후, 과제물에 대해 시상이 있었습니다. 각 반에서 세 명에만 주어지니 상을 타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은결이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은결이가 상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은결이가 좋아할 것 같습니다. 무언가 자신도 다른 아이들처럼 잘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키가 크고, 힘이 세고, 겁나는 것이 없고, 그래서 1학년 중에서 짱인데 그런 짱 말고 진짜 짱이 되게 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영리하니까 공부도 짱이 되면 좋겠고요. 힘이 세니까 약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도 짱이 되면 좋겠고요 친구들 간에 어려운 일도 스스로 하는 진짜로 짱인 은결이를 보고 싶었습니다. 어느 덧 나쁜 은결이라는 이름대신 착한 은결이라는 수식어가 슬슬 붙기 시작했지만, 담임선생님이 150도 정도 달라졌다고 거듭 칭찬을 해 주셨지만 은결이 스스로가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진짜 짱인 은결이를 꿈꾸었습니다. 받아쓰기가 첫 번째 걸음이었다면 이번 방학숙제가 두 번째 걸음입니다. 은결이를 가르치다 보니 모든 엄마들처럼 저도 은결이에게 그런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은결이는 과제물에서 은상을 받아왔습니다. 상장을 받아들고 은결이는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상장을 얼른 보여주지 않고 자꾸만 웃습니다. 아마 은결이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맞혀 보라는 뜻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꾸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슬며시 장난을 걸었습니다.
“은결아, 방학숙제 시상식 있었지?”
“네.”
“누가 상 탔니?”
“선생님, 누가 상 탔을 것 같아요?”
“글쎄, 내가 너의 반 아이들 이름을 모르니까 누가 상을 탔는지 알 수 없지. 선생님이 아는 것은 세 명이 상을 탄다는 사실이야.”
“세 명이 탄 것을 알아요? 그럼 내가 탔을까요? 못 탔을까요?”
“물론 너는 못 탔지. 너보다 잘해온 아이들이 많을 텐데 뭘.”
순간 은결이가 막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틀릴 때가 있네. 나 상 탔어요.”
“정말? 에이. 아니지? 거짓말이지?”
“아니에요. 진짜 탔어요.”
“그래? 그럼 꺼내와 봐.”
은결이는 조심스럽게 상장을 꺼내옵니다. 그리고 제 앞에 두 손으로 내밉니다. 아, 거기에는 은상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와! 진짜 상 탔네. 와! 우리 은결이 대단하다. 우리 은결이 너무 멋져. 우리 은결이 진짜 잘했어. 은결아, 방학 때 고생한 보람 있지?”
은결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는 내친 김에 한술 더 뜹니다.
“은결아, 1학년 때는 시험이 없지만 2학기에는 시험이 딱 한 번 있단다. 은결이가 조금만 노력하면, 그러니까 선생님과 하루에 한 시간씩만 공부하면, 은결이는 머리가 좋아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결이에게 아주아주 좋은 머리를 주셨거든. 그래서 한 시간만 공부해도 은결이는 다 백점 맞을 것 같아. 피아노가 끝난 다음에 공부할래?”
은결이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저는 그런 은결이를 꼭 안아 주었습니다. 정말 긴 여름방학동안, 사실은 힘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힘든 시간의 피곤함을 단 한방에 날려 주었습니다. 자, 앞으로 은결이와 또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