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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이네 자연사랑1 스크랩 최규하 전 대통령 - 일제→미군정→한국으로 이어진 노예적 관료 근성
청임(淸琳) 추천 0 조회 262 10.08.10 11: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만주국 관리 지낸 최규하 전 대통령

 

일제→미군정→한국으로 이어진 노예적 관료 근성

 

수구 언론들이 심심하면 역대 대통령을 놓고 '도토리 키 재기'하듯 유치한 설문을 하면 항상 긍정적인 자리에 1위는 ‘박정희’가 차지하고 현직 대통령은 거의 뒷전이다.

설문 자체가 현직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항상 그 존재조차도 무시되는 최규하가 있다. 최규하는 군인 출신 박정희와 전두환 사이에서 불행한 최단명 대통령이나 아니면 우유부단하고 문약한 대통령으로 이미지가 굳어있다.

 

1919년 생인 그는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99년에는 어이없게도 원주시가 그의 생가를 복원하겠다고 나섰다가 여론의 호된 비판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사업을 백지화한 일도 있었다. 당시 시에서는 그의 구체적인 친일행적이 없다는 이유로 사업을 강행하려한 모양이다. 물론, 최규하는 일제가 만주에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관료 양성학교인 만주대동학원을 졸업한 후 2년만에 해방이 맞았다.

 

이 2년의 공백에 대해서 최규하 자신은 국회 청문회에 나서기를 거부하던 ‘뚝심’을 발휘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이 작성된 보고서인 ‘G-2’보고서에는 그가 ‘1942년 10월 1일에서 1943년 7월 5일까지 만주 장춘의 대동학원을 재학, 졸업하고 바로 그 다음날인 1943년 7월 6일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만주국 관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청산하지 못한 역사] 제1권에서)

 

박정희가 나온 만주군관학교가 총칼로서 일제에 충성하는 군사학교라면 대동학원은 펜으로서 일제에 충성하는 관료학교였다. 이 대동학교 입학자체가 일제 관료를 하겠다는 명시적인 의사표현인 것이다. 그런 그가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에 잠시나마 올랐으니 그의 꿈은 120% 이룬 셈이다.

 

이승만이 물에 빠진 친일세력들을 배에 끌어 올려놓았다면 박정희는 그들과 함께 조타실에 점령한 것인데 최규하는 친일관료들의 우리나라의 공직사회에 어느 위치에 서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물론 지금 그는 현직에 있지 않다. 하지만, 친일문제는 한 사람의 생명이 끝나면 해결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친일관료들이 남겨놓은 가장 큰 부정적 요인은 바로 생각 없이 상명하복만이 강조되고 개인적인 판단이 원천 봉쇄되는 ‘기능적(기계적) 테크노크라트’의 양성에 있다고 본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직업적인 관료는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일제시대 조선인 관료들은 구한말 → 일제 → 미군정 →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지배계층의 관료를 두루 거치면서 노예적 근성을 상속하고 말았다. 노예는 주인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기계적이고 노예적인 관료근성은 생각지 않는 공직사회를 만들었고 결국 제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군인들의 모습으로 돌변해 있었던 것이다.

 

상급자의 명령이라도 그것이 부당한 것일 때에는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독일과 같은 유럽의 관료사회의 전통은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나라. 경찰도 노동자로서 파업이 가능한 유럽의 나라들이 왜 부정부패가 적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관료 스스로 생각하고 봉사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시장과 도지사에게만 충성하는 공무원들. 그들은 일제시대엔 천황에게 해방 후에는 독재자에게 충성을 다한 최규하와 같은 친일관료들의 후예임이 틀림없다.

 

그는 1992년 [안중근 의사, 여순 순국 유적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고문, 1999년 [백범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고문 등을 맡으며 국가 원로 대접을 받고 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만주' 인맥의 대표, 최규하

그때 거기 지금 여기 / 인물 바로 보기- 최규하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요즘 나는 MBC 주말 드라마 <제5공화국>을 즐겨 본다. 겨우 20여 년 전 일을, 당시 권력자들의 치부를, 안방에서 배 두드리며 조롱하며 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때 그러한 진실을 알리고자 온몸을 내던졌던 수많은 민주인사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그날부터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최고 권력자의 공백을 틈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긴박한 과정을 그린 장면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안타까운 장탄식을 내뱉게 되는데, 그 가운데서도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최규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의 모습은 이러한 안타까움을 더욱 더 자아내게 만든다. “그때 최규하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전·노 일당의 발호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착시현상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최악을 만나면 차악이 선으로 보이는 법. 최규하 역시 박정희 독재의 든든한 버팀목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는 당시 박정희 권력의 중핵인 만주 인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0·26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해 전·노 등 새로운 독재세력의 등장을 의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만주국 출신들의 2선 후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도 함께 가져왔다.

 

만주국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이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드디어 중국 대륙을 침략한 뒤 193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푸이를 형식상 최고 권력자인 집정으로 앉히고 실질적으로는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지배하면서 꼭두각시 국가가 되었으나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린 나라이다. 일본은 만주국을 비롯해 드넓은 동북 지역을 점령하기는 했으나, 워낙 넓은 지역에다 일본의 침략 전선이 동북아에 그치지 않고 동남아 등으로 날로 확대되어 가고 있었기에 효과적으로 만주국을 지배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때문에 그들이 내세운 것은 일종의 이념 공세였다. 오족협화·락토만주 등이 대표적인 구호로 만주국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민족(일본·조선·한족·만주족·몽골)이 잘 협력해 만주를 낙원으로 만들자는 내용이다.

 

가곡 〈선구자〉의 작사가로 알려진 친일 문인 윤해영은 <락토만주>라는 시를 써서 만주국을 찬양하기도 했다.
오색기 너울너울 락토만주 꿈꾼다
백방의 전사들이 너도 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
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후략)

그러나 이와 같은 선전과 달리 실제로는 일본이 제1민족으로 만주국을 지배하는 것이고 다른 네 민족은 피지배 민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은 만주국을 지배하던 일본은 조선족을 2등 민족 대우를 하며 이선치화 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이선치화란, 즉 조선인으로 하여금 중국인을 지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주사변과 같은 무력으로 대륙에 진출한 일본에게 중국인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는 마당에 일본인들이 일선에 나서서 통치를 하면 더욱 중국인들과 마찰이 생기고 반일 감정은 더욱 고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지주와 소작농 사이에 마름이 존재하듯 조선인들을 마름과 같은 역할을 주어 수행케 한 것이다. 만주국 관립대학인 건국대학과 전문 관료 양성소인 대동학원은 그래서 조선의 청년들에게 바로 새로운 출세의 길로 여겨졌던 것이다. 최규하는 바로 이 만주 대동학원 출신이다.

 

 

만주국 공무원에서 제10대 대통령까지 최규하의 공직생활 36년 숨겨진 이야기

최규하 전 대통령이 10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선서하고 있다. <경향신문>

삶은 죽음으로 인해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지난 10월 22일 세상을 떠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어떤 가치를 부여받고 있을까. ‘성공한 외교관’과 ‘실패한 대통령’ 중 어느 쪽이 됐든 그의 삶은 역사적 유산이 됐다. 그는 8·15 광복 직후부터 외교관으로 한 시대를 주름잡았고 특히 4·5공화국의 교체기 헌정책임자로서 역사적 증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최고통수권자가 되기 전과 후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최고 권력의 자리가 곧 분수령이 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집권과 수권, 어디에도 의미를 두지 않아 생긴 일은 아닐까.

함석헌과 도쿄고등사범학교 동문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19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32년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다. 그의 명석함은 어린시절부터 돋보였다. 여섯 살에 효경, 일곱 살에 명심보감을 외웠다. 1937년 경성제일고보(경기고 전신)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41년 당시 도쿄대보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 마쳤다. 함석헌 선생과 동문이다. 그후 만주 친일 고위관료 양성기관인 다퉁(大東)학원에 정치행정학을 수학했다. 1943년 졸업하고 만주국 정부에서 관리를 지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그는 한 번도 시인하지 않았다.

광복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서울대 사범대학 조교수를 지내다가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948년 수립된 정부에서 농림부 양정과장을 맡았다.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이 영어구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찾다가 ‘최 과장’을 외무부로 스카우트했다. 1948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식량기구(FTO) 아주지역 미곡위원회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을 때 변영태 전 장관의 눈에 띈 것이다.

그의 영어실력을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 그가 총리 시절 홀리오크 총리 초청으로 호주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의 의회연설을 들은 호주 의원들이 수행기자에게 그의 영어 실력에 감탄하며 “최 총리는 어디서 공부했느냐”고 물으면서 “영어를 쓰는 우리보다 더 고급영어를 구사한다”고 놀랐다고 한다. 그의 영어실력은 도쿄고등사범대학에서 갖춰졌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이 당선 직후 청와대에서 첫 직무를 시작하는 모습. <경향신문>


그는 주일대표부 총영사, 주일대표부 참사관으로 있으면서 한일 외교의 기반을 다졌다. 당시 유태하 주일공사 밑에서 참사관으로 일했다. 하지만 당시 유태하 공사는 재일교포를 상대로 비자장사 등 비리를 저지르다 재일교포 사회에서 추방운동을 벌이는 등 원성을 샀던 인물이다. 유 공사는 4·19혁명 직후 직위가 해제됐으나 본국 소환에 불응하다 5·16 쿠데타 이후 처벌된 인물이다.

외무차관 맡으면서 역량 인정받아

최 전 대통령은 김영삼씨를 만나 약속한 대로 정치 일정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경향신문>

최 전 대통령은 그후 주일공사를 거쳐 외무부 차관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본격적으로 그의 외교 역량이 평가된 것은 그가 외무차관을 맡으면서부터다. 그는 외무부 부훈을 ‘헌신부난(獻身赴難, 몸을 던져 어려움을 헤쳐나감)’으로 내걸고 일에 몰두했던 시기다. 당시 외무부 출입기자였던 이재원 전 정무제1차관은 “‘재무부에서 송인상(현재 한국능률협회 회장), 외교부에서 최규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지런하기로 정평이 났다”고 말했다.

1960년 4·19로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5·16 쿠데타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문관으로 임명됐고, 다시 말레이시아 대사로 파견됐다. 박 전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다. 1967년 외교부 장관에 임명된 그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대일외교의 초석을 놓는 일에 매진했다. 1965년에 발발한 베트남 전쟁이 확전되던 상황에서 ‘최 장관’은 “베트남이 적화되면 동아시아 주변국도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을 주창했고 그 결실로 창립한 것이 아스파(ASPAC) 각료회의다.

그는 외교부 장관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특히 1968년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때 한 사이러스 밴스 특사와 회담은 유명하다. 또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MC)의 기초가 된 한·미 국방각료연례회의를 성사시킨 것도 업적으로 기록된다. 베트남 파병 한국군의 예우를 다룬 ‘브라운 이행각서’를 한국측에 유리하게 개정한 것도 업적으로 꼽힌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은 “얼마나 신경전이 심각했는지 협상을 마친 타워호텔 방엔 밤새도록 피운 담배꽁초가 재털이에 마

최 전 대통령의 하야를 알리는 경향신문 속보를 보고 있는 시민들.

치 산처럼 쌓였다”는 가십을 써 치열했던 외교전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추규호 외교부 대변인은 “고인께서는 특히 한·미방위조약 등 중요한 외교문서는 자구 하나하나까지 다 외울 정도”라면서 고인이 한·미동맹에 기울인 혼과 땀을 회고했다. 외교가에서 그는 김동조·김용식 전 외교부 장관과 함께 한국 외교의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 전 대통령은 당시 윌리엄 포터 주한미대사의 ‘맞수’였다. 포터 대사는 ‘백사’라는 국제적 별명이 붙을 정도로 노련한 외교관. 하지만 그는 포터 대사와 외교전에서 일전일퇴를 거듭할 정도로 호각지세를 이루며 당시 ‘구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재원 전 차관은 “두 사람이 협상테이블에 앉으면 현기증인 난다는 얘기가 있다”면서 “‘두 마리의 뱀이 상대의 꼬리를 물기 위해 계속 두뇌회전을 해서 생긴 어지러움증”이라고 설명했다.

업무 평가 공평무사하기로 유명

최 전 대통령은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매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 대신 업무에서는 공평무사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실시하는 ‘다면평가’와 같은 제도를 이미 30년 전에 도입했다. 외교부 국장급 이상 간부들이 인사 대상자에 대한 평점을 매겼다. 일종의 크로스 체킹을 통한 업무고과제인 셈이다. 이를 승진 혹은 해외공관 배치 때 활용했다.

최 전 대통령의 원주 생가.

그는 매우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외교적 문제의 소지가 있으면 절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영어에 관한 한 쌍벽을 이뤘던 당시 윤석현 외교부 차관과 영어 단어 하나를 놓고 하루 종일 싸울 정도였다고 한다. 외교적 손실을 줄이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 1971년까지 4년 동안 장수 장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역량이 바탕이 됐던 것이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1973년부터 75년까지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내며 남북대화와 오일쇼크 대처를 주도했다.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으로 두 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중동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 석유를 확보하는 데 공을 세웠다. 특히 한국 근로자의 ‘횃불도로공사’로 한국에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을 만나 이를 집중 부각시켜 한국에 대한 특별배려를 얻어냈다. 그는 “우리 국민이 밤세워 횃불공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본국에는 석유가 없어서 난리가 났다”고 설득,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비교적 만족할 만한 수준의 석유를 확보했다.

1975년 12월 최 전 대통령은 김종필 총리에 이어 국무총리서리로 임명됐고 이듬해 3월 국회의 동의를 받아 국무총리가 됐다. 당시 총리실 예산은 현격히 감소됐지만 행정적 지원은 풍족했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은 주말만 되면 수행비서도 없이 전국 민정시찰을 다녔다. 이재원 전 차관은 “당시 건설붐이 일고 있었다”고 회상하면서 “암행시찰 때문에 건설현장 책임자인 도지사와 군수 등은 늘 긴장했다”고 말했다.

고인이 1978년 강원도 사북탄광의 석탄채굴 현장을 방문했을 때 “고생하는 광부의 모습이 너무 가슴 아프다”면서 “석유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에서 나부터 에너지를 아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이 전직 대통령이 흔하디 흔한 에어컨 한 번 켜지 않고 살아온 이유이다. 50년 전 첫 딸이 태어났을 때 구입한 선풍기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용했다.

그는 또 중동을 방문했을 때 요르단에 가로수로 개암나무가 활용되는 것을 보고 그 씨를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전해주면서 가로수로 키워보라고 했을 정도로 꼼꼼했다. 하지만 개암나무 가로수는 실패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공식행사에 잘 나가지 않는 바람에, 그는 ‘대독총리’로 통했다. 1979년 10·26으로 인해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에 올랐고 그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만주국 공무원에서 36년 동안 한 계단씩 차례로 밟아 올라 마침내 대통령까지 오른 것이다.

최 전 대통령의 원주보통학교 졸업 때 사진. 흰 두루마기 입은 사람이 최 전 대통령.

사실 그의 대통령 옹립에는 신군부의 조종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집권 공화당 당의장인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후에 “생활화된 민주주의자, 절대권력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 국제적 배경이 있는 사람, 비(非) 경상도 출신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배경을 술회하기도 했다.

어찌됐든 그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직후부터 1980년 8월까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혼돈기에 국가원수였다. 그의 재임기간은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노태우씨 등 신군부의 폭력이 난무한 시기였다.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위압에 눌려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했고, 광주학살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

부인 홍기 여사는 2004년 7월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수 년 간 투병생활을 하는 부인 곁에서 “숨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지”라며 극진히 간병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2년여 만에 대전 국립헌충원에 합장됐다.

 

최규하와 권태응의 인생  

[890호] 2006년 11월 03일 (금) 11:16:03 도종환(시인)   
   
최규하 전 대통령은 경기고 33회 졸업생이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경기고 출신이다.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했으니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대통령이다. 경기고 33회는 인재들이 많다. 최규하 대통령 말고도 이영섭·민관식 등 법조계와 국회의 최고 자리에 오른 사람들도 있다. 그 33회 동기생 중에 권태응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제일고보 시절부터 일찍 민족의식에 눈떴다. 일본인 교사들이 “조센징인 주제에 건방지다”라고 차별적인 언행을 일삼으면 저항했다. 뜻이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U.T.R구락부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등산 모임을 하면서 ‘등산일지’라는 모둠 일기를 쓰고 돌려보며 사상과 의식을 맞추어가려고 했다. 한번은 졸업 앨범 기증 문제로 학급 회의를 하다가 “우리가 졸업하게 되는 것은 천왕 폐하의 홍은이 아니냐”라고 하는 앨범 위원들을 집단 구타하고 이로 인해 U.T.R구락부원 여덟 명은 보름간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이런 동기생들 사이에서 최규하는 강원도에서 올라온 말 없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1937년 졸업 후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난다. 권태응은 와세다 대학으로, 최규하는 도쿄 고등사범학교로 진학한다. 권태응은 동기생 염홍섭 등과 함께 도쿄에 유학 온 20여 명의 동기생을 모아 33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한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회합을 갖고 주제를 달리해가며 토의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다. 조선의 식민지 경제와 자본주의의 결함을 분석한다든가, 제국주의 열강이 치르고 있는 침략 전쟁의 성격을 파헤치며 일본이 패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내는 등 상당한 수준의 정치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 유학생들이 사치에 흐르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 경계하거나 파쟁과 대립을 벗고 단결해야 한다든가,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통해 조선 농민을 지도해야 한다는 것 등을 학습했다고 경찰 조서는 전한다. 물론 최규하라는 이름은 이 동기생들의 비밀 결사 모임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권태응은 스가모 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다 폐결핵 3기의 몸이 되어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된다. 동기생 홍순환과 함께 출소한 권태응은 도쿄 시에 있는 제국갱신회(帝國更新會)에 거주지를 제한당하고 와세다 대학에서는 1940년 4월 퇴학 처분을 받지만 최규하는 다음해에 대학을 졸업한다. 그리고 최규하가 친일 고위관료 양성 기관인 만주 대동학원에 입학할 때 권태응은 인천 적십자요양원에 입원한다. 거기서 생사의 기로를 헤맬 때 최규하는 대동학원을 졸업하고 만주국 정부 관리가 된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했고 식민지 체제야말로 모순의 근원이므로 식민지 체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믿었던 권태응은 병든 몸을 추스르며 야학을 하고 농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을 때, 어려서부터 말이 없고 착실하게 공부만 했으며 어떤 체제든 동화되어 거기서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며 사는 것이 몸에 배어 있던 최규하는 관료로서 승승장구한다.

일제의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없던 권태응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이들을 위한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로 잘 알려진 <감자꽃>이라는 동시집을 내고 3백여 편의 미발표 동시 원고와 농민 문제를 다룬 단편소설을 남긴 채 서른네 살의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최규하는 식민지 체제, 광복 공간, 분단 체제와 독재 체제 아래에서 36년간 관료로서 성실하게 생활하며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거쳐 10·26 이후에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윤동주와 정일권이 동창이면서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갔듯 권태응과 최규하도 다른 인생의 길을 살다 갔다. 권태응은 선반의 널빤지를 뜯어 거기에 묶어 야산에 묻혔는데, 최규하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모셨다. 지난해 광복 60년 기념식장에서 권태응이 독립운동가로 표창받는 것을 최규하도 알았을 것이다.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을 보고 뭐라고 한 줄 써놓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권태응이라는 이름조차 잊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식이나 젊은이들에게 어떤 인생을 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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