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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데이비슨 부활의 상징, H.O.G. 할리데이비슨의 임원진들은 더 이상 추락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1981년 2월 26일 13명의 임원들이 AMF로부터 할리데이비슨 모터 컴퍼니를 다시 사들이는 계획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이것은 공식화되어 공식 랠리에서 'The Eagle Soars Alone(독수리는 홀로 비상한다)' 란 표어를 내걸고 달리게 된다. 할리데이비슨이 AMF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할리데이비슨 모터 컴퍼니를 AMF로부터 다시 사들이는 계획에 참여한 당시의 임원진. 오른쪽 맨 끝, 서있는 이가 바로 창업주의 손주인 윌리 G. 데이비슨이다. 1980년도 초, 할리데이비슨은 저렴한 가격으로 수입되는 일본산 모터사이클이 미국내 제조사에게 해를 끼친다고 주장했다. 미국 국제 무역위원회의 조사를 거친 1983년, 배기량 700cc 이상 수입 모터사이클에 대해 45%이상의 수입관세가 부과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 때의 일이다. ▲수입 모터사이클에 대한 추가 수입관세가 부과되면서, 할리데이비슨은 회생 가능성을 높였다. 사진은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우측)이 펜실베니아 요크의 할리데이비슨 생산 공장을 방문했을 때의 것이다. 그리고 호그(H.O.G.). 즉, 할리데이비슨 오너스 그룹(Harley-davidson Owners Group)이 출범했다. 말 그대로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타는 라이더들의 모임인 호그는 제조사의 지원을 받는 거의 유일한 라이더 그룹이었고, 이것은 할리데이비슨 성장력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실제로 1983년 출범한 이래, 6년 뒤인 1989년에는 호그의 멤버 수는 9만 명을 넘어섰고, 2000년에는 5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할리데이비슨 오너스 그룹, 호그는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가장 높은 라이더 그룹 중 하나로 성장했다. 사진은 1984년의 광고 사진이다. 새로운 할리데이비슨의 도전은 7년간의 연구 끝에 등장한 새로운 엔진 ‘에볼루션’과 ‘소프테일’이 개발하며 결실을 얻었다. 할리데이비슨은 리어 서스펜션이 없는 하드테일(Hardtail)의 외관을 갖고 있으면서, 리어 서스펜션을 보이지 않게 감춘 소프테일(Softtail)을 통해 사람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진화란 뜻을 갖고 있는 에볼루션 엔진은 배기량 1,310cc(80큐빅인치)를 자랑했다. 이전 세대의 엔진과 비교해, 거의 모든 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뤄냈다고 평가된다. ▲소프테일 시리즈는 클래식한 하드테일을 연상시키는 프레임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는 리어 서스펜션을 장착해 클래식한 디자인과 승차감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모터사이클로 탄생했다. 더 나아가 할리데이비슨은 리어 서스펜션을 감추는데서 끝내지 않고, 스프링 타입의 프론트 서스펜션을 재탄생시켜 옛 향수를 자극했다. 이 과정에서 할리데이비슨은 주식 시장에 상장되는 등 회사의 구조를 더욱 튼튼하게 구축해왔음은 물론이다. 창립 85주년을 할리데이비슨의 고향인 밀워키에서 6만 명의 라이더들과 함께 자축했다. ▲스프링거는 과거의 영광을 실제로 구현한 모터사이클로 큰 인기를 누렸다. 이렇듯 할리데이비슨은 다시금 재기했다. 최신의 기술을 적용한 일본산 모터사이클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이다. 오히려 할리데이비슨은 과거의 스타일을 현대에 걸맞게 구현하면서 다른 메이커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결정타로 등장한 것이 1990년 발표된 FLSTF 팻보이다. ▲1990년 등장한 FLSTF 팻보이는 할리데이비슨의 또 다른 전설이 되었다. 영화 터미네이터2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타고 등장하기도 했다. 팻보이의 성공은 놀라운 것이었다. 실제로 팻보이가 등장한 1990년에 할리데이비슨은 배기량 750cc 이상 모터사이클 시장 1위를 탈환했다. 실제로 할리데이비슨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 팻보이는 많은 루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부인된 부분이긴 하나, 팻보이는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폭격기 B-29와 그 은색 도장이 흡사하다. 또한, 당시 투하된 원자폭탄의 별명인 ‘팻 맨’과 ‘리틀 보이’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이들이 만든 루머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할리데이비슨은 FLSTF를 통해 그간의 굴욕을 되갚아 주었다고 평가된다. ▲보잉 사의 폭격기 B-29. 팻보이가 B-29에서 따온 것이란 루머는 말 그대로 루머에 불과하다. ?Boeing photo 팻보이가 등장한 이듬해인 1991년에는 FXDB 다이나 글라이드 스터지스가 등장하며 다이나 계열의 새로운 라인업이 구축된다. 다이나(DYNA)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빅트윈 모터사이클로 직경이 작은 텔레스코픽 방식의 프론트 서스펜션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이나 계열은 운동성이 훌륭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포츠 모터사이클에 대한 의지, 그리고 미래 할리데이비슨은 이미 크루저 모터사이클 시장의 절대 강자였지만, 레이스 머신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 브랜드답게 여전히 스포츠 모터사이클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에 할리데이비슨은 1992년 뷰엘(Buell)을 인수하기에 이르른다. 이후 뷰엘은 할리데이비슨의 엔진으로 스포츠 모터사이클을 만들어냈다. ▲뷰엘은 할리데이비슨의 엔진을 사용한 스포츠 모터사이클로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 사진은 1995년 생산된 S1 라이트닝 뿐만 아니라 1994년에는 할리데이비슨 최초의 수랭 엔진을 사용한 VR1000이 데이토나200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DOHC 수랭 1,000cc 의 엔진은 물론 당시의 할리데이비슨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할리데이비슨의 기존 엔진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10,000rpm에서 135마력을 냈던 VR1000은 분명 놀라운 시도였으나, 성공적이었다고는 말하기 힘든 프로젝트가 되고 말았다. ▲할리데이비슨 최초의 슈퍼 스포츠 모터사이클 VR1000 울트라 클래식 일렉트라 글라이드의 30주년이 되는 1995년은 할리데이비슨의 미래에 있어 중요한 기점이 되는 해였다. 그것은 기존 카뷰레터 방식의 연료 공급 방식을 인젝션으로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자 제어 방식인 인젝션의 채용으로 보다 정확한 연소와 효율성을 높이게 됐지만, 기존 카뷰레터 방식을 선호하는 라이더들에게는 그리 반갑기만 한 소식은 아니었다. 말발굽 소리 같은 특유의 배기음을 더 이상 듣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1995년에 할리데이비슨에 새롭게 추가된 라인업, FLHR 로드킹 새천년을 앞둔 1999년, 할리데이비슨은 트윈캠88 엔진을 새롭게 공개했다. 1999년에 발표된 다이나와 투어링 라인업에 적용된 트윈캠88 엔진은 배기량 1,450cc를 자랑했다. 이 배기량은 기존의 할리데이비슨 엔진이 갖고 있던 최대 배기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1999년 할리데이비슨의 다이나 계열과 투어링 라인업에 일괄 적용된 트윈캠88 엔진. 20세기 초에 출발한 할리데이비슨의 역사는 21세기로 넘어섰다. 그간 호황을 누리던 때도 있었고, 한 때 도산의 위기도 겪으면서 할리데이비슨은 새로운 세기에 대비하고 있었다. 2001년에 발표된 2002년형 VRSC V로드는 모터사이클 팬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미래 지향적인 크루저 모터사이클의 디자인은 물론이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로 엔진이었다. 스포츠카 메이커인 포르쉐와 합작해 만들어낸 레볼루션 엔진은 말 그대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전설적인 너클헤드 엔진의 디자인을 본딴 것은 둘째치고, 수랭 방식의 레볼루션 엔진은 최대 115마력을 내뿜었다. ▲독일의 스포츠카 메이커 포르쉐와 함께 개발한 레볼루션 엔진. 대망의 2003년, 할리데이비슨에게 2003년은 100년의 역사를 만들어낸 말 그대로 역사적인 해였다. 할리데이비슨 아니 미국이란 나라에게 전통은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다. 100주년 기념 행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대한 것이었다. 2002년 7월 19일, 아틀란타에서 출발한 100주년 기념 투어는 캐나다의 토론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일본의 도쿄, 호주의 시드니 등을 거쳤다. 2003년 할리데이비슨의 고향인 밀워키에는 무려 25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투어의 마지막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할리데이비슨의 100년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내고 지켜온 자랑스러운 역사였다. 물론 할리데이비슨은 100주년을 맞은 2003년 이후로도 활발히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들의 판매망은 지금도 여전히 늘어나고 있으며, 할리데이비슨을 사랑하는 호그 회원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특히, 모터사이클을 타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 높은 브랜드 충성도를 자랑하고 있는 것 역시 할리데이비슨만의 자랑 중 하나다.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마니아들 가운데는 그 브랜드 로고를 문신으로 새기는 등, 각별한 애정을 자랑하는 경우도 있다. 사진은 할리데이비슨 박물관 개관 기념으로 전 할리데이비슨 CEO 짐 지머가 문신을 시술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러기 위해서 할리데이비슨은 여전히 라이더들에게 할리데이비슨으로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경험들을 제공한다. 다양한 액세서리의 개발은 물론, 보다 세분화된 모터사이클 라인업, 다양한 구매 프로그램 등이 그 세부적인 내용이 될 수 있다. 지난 2008년 오픈한 할리데이비슨 박물관 역시,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혹은 할리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을 원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최근의 할리데이비슨은 전통과 첨단의 길을 동시에 걷고 있다. 스프링거 모델의 현대적 재현인 크로스본이나, 전설적인 더트 트랙 레이서 XR750의 재현이라 불리는 XR1200, 에볼루션 엔진을 사용한 머슬과 같은 모델들이 바로 그 행보의 중심에 있다. 물론, 할리데이비슨에게 미래가 그저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미국 내의 소비심리 위축, 수요 고객 층의 노년화는 할리데이비슨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점 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문제들은 할리데이비슨이 다시한번 비상할 기회가 될 것 또한 분명하다. 창공을 누비는 독수리처럼 말이다. 기사 제공 : 바이커즈랩(http://www.bikerslab.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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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이커즈랩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커즈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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