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을 쓰다 보면 주제별로 써야 좋을지 시기별로 써야 좋을지 고민될 때가 있다. 지난 호 후반부에 경기도 광주에 있는 노인요양원 ‘작은 안나의 집’에서 상담사로 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썼다. 2008년 초의 일이다. 여기까지는 거의 시기별로 글을 써왔다.
하지만 노인요양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소설 콘스탄티누스> 이야기로 다시 넘어갔다. 그곳이 글을 쓰기에는 더 없이 좋고 한적한 곳이었기에 집필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해 가을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펴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은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작은 안나의 집에서 있었던 일에 집중하여 글을 쓰고 싶다. 지금부터 쓰는 글도 시간별로 진행된 건 아니다. 주제별로 나누어 쓰는 것이 내가 쓰기에도 독자들이 이해하기에도 편할 것 같아 그렇게 하겠다. 내가 아내와 함께 그곳으로 내려간 날은 2008년 3월 2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 ‘작은 안나의 집’과 방상복 신부님
작은 안나의 집은 정의구현사제단 멤버이신 방상복 신부님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에게 도움을 호소하여 마련된 기금으로 설립한 사회복지법인 시설이다. 신부님이 설립한 복지기관은 이곳 외에도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여기애인의 집’, 그리고 경기도 안성에 있는 ‘미리내 실버타운’과 ‘성 베드로의 집’이 더 있었다.
방상복 신부님에 대한 첫인상은 천주교 사제라기보다 연세 많은 스님이나 도사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를 삭발한데다 길고 흰 수염까지 기르셨기에 80세는 족히 넘어보였다. 게다가 미사를 집전할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갈색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셨다. 하지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신부님은 그해(2008년)에 환갑을 맞으셨다.
신부님은 기인기질이 다분했다. 요양보호사들과 어울려 노래방에 간 적도 있었다. 내가 곡을 정하지 못하자 ‘동반자’라는 곡을 부르라고 하여 아내와 함께 불렀던 기억이 난다. 어느 수녀원을 방문한 자리에선 커피를 새끼손가락으로 저어 마시기도 하셨다. 요양원 건물을 보수하는 날에 흰 수염을 휘날리며 커다란 해머로 벽을 부수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의 기행(?)은 개인적인 기질을 넘어 교구 내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요양원 내에 세워진 성모 마리아상은 가슴을 드러낸 채 물동이를 이고 있는 조선말기 한국의 전형적인 농촌 어머니 모습이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매우 발칙하고 경건치 못한 발상으로 볼 수 있었겠다. 일부 거룩한(?) 종교인들이 얼마나 눈살을 찌푸렸을까.
그곳에 간지 한 달이 채 안 된 어느 날이었다. “삼겹살 좋아하시나? 삼겹살!” 하고 갑자기 물으셨다. ‘신부님이 삼겹살을 좋아하시나보군!’ 하고 생각하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식당에 가서는 삼겹살에 손도 대지 않는 신부님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나에게 동행한 지인이 채식만 하신다고 귀뜸해주었다. 이에 신부님이 하신 말씀은 “내가 꼴깝 떠느라 그러는 거니 개의치 말고 많이 드세요.”였다.
호탕한 성격의 열린 종교인이었지만 방상복 신부님 자신은 물론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아쉬움을 느끼는 점이 있었다. 파푸아 뉴기니에서 선교사로 일할 때 걸린 풍토병으로 청각을 거의 잃어버린 것이다. 하여 신부님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요양원에 계시는 어르신 섬기기를 부모 섬기듯 했다. 가끔 저녁 식사시간에 어르신들의 국을 직접 떠드리기도 했다. 신부님의 이런 극진한 어르신 사랑으로 겪게 된 갈등도 있었다. 어르신 중에 요양보호사에게 자주 주먹을 휘두르는 분이 계셨는데, 20대의 젊은 요양보호사가 자신에게 주먹을 날리는 어르신의 팔목을 잡아 비틀어버린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원장님이 근신처분을 내린 후 신부님에게 보고했다. 신부님은 그를 즉시 해고해 버렸다. 나는 신부님에게 항의성 메일을 보냈다. “젊은 요양보호사의 우발적인 실수인데 처분이 지나친 것 같다. 어르신 공경하는 마음을 요양보호사에게도 나누어 주시면 안 되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경솔한 이메일이었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이었기에 비굴해지지 않겠다는 생각에 집착하여 더 강하고 공격적인 표현을 쓴 것 같다. 못난 자존심이었다. 이후 신부님과 한동안 서먹하게 지낸 기억이 있다. 청각장애를 갖고 계신 신부님과 마주보고 대화할 수 없었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2. 어르신들과의 데이트
어르신을 대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어르신은 젊은 사람이 다가가면 무조건 반기셨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참 재미있고 유쾌한 일도 많았고 슬프고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유쾌한 기억부터 조금 돌아보고 싶다.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가진 어르신이 계셨다. 연세 90이 넘은 분이었는데 아침마다 상담실 문을 제일 먼저 열고 들어오시는 분은 거의 언제나 그분이었다. 할머니 손엔 항상 사탕 몇 알이 쥐어있었다. 사탕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서는 태평가를 부르셨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나... 성화는 내어서 무엇 하나... 인생일장 춘몽인데 아니나 놀지는 못하리라... 니나노...” 할머니의 구성지고 고운 노랫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리아 할머니께서 들고 오신 사탕은 아무데서나 눈에 보이는 대로 들고 온 것이었다. 가실 때는 상담실에 놓여있는 간식을 들고 가기도 하셨다. 허락을 요청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보이면 들고 가셨다. 아마 누군가의 책상 위에 갖다놓으셨을 것 같다.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는 분이었지만 주변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어르신은 도둑질을 한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
어르신은 방상복 신부님을 너무 좋아해 어린 아이처럼 매달리기도 하셨다. 하루는 사는 게 힘들다며 종부성사를 해달라고 조르셨다. 신부님이 웃기만 하자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신부님! 종부성사!”, 신부님 왈 “내 종부성사는 쎄서 한번 받으면 바로 가는데...”
평균 연령 80이 넘는 어르신들 백여명이 계시는 시설이다 보니 일주일이 멀다 하고 장례를 치뤄야 했다. 그래도 ‘작은 안나의 집’은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운 어르신들이 많았지만, 같은 공간 안에 있는 ‘여기애인(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의 집’은 혼자서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작은 안나의 집보다 여기애인의 집을 주로 찾아가서 어르신들을 뵈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 하나를 꼭 소개하고 싶다. 아침식사 때마다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데 언제나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다. “내일 아침에는 여기다 꼭 약을 타줘! 정말이야...” 할머니는 스스로는 휠체어에 오르시지도 못할 정도로 쇠약하셨지만 눈망울은 또렷하셨다. 아침마다 할머니에게서 같은 말을 듣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와 눈을 맞추며 손을 잡아드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르신들 중에는 목욕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요양보호사에게 맡겨야 한다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여기애인의 집’에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는데 요양보호사 중에 남자가 없어 내가 목욕을 해드렸다. 정신이 또렷했고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시는 분이었기에 나도 옷을 다 벗고 씻겨드렸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 한두 달 뿐이었다.
대소변을 받아낸 기저귀를 갈아드리는 일도 적응이 되고나니 그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끝까지 힘들고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요양보호사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꼭 감고 수치심을 참아내는 어르신의 얼굴을 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곳에서의 경험 이후로 나는 적극적 존엄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 육십이 넘은 사람에게는 본인의 뜻에 따라 안락사를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급진적 존엄사 지지론자도 있다. 나도 적극 동의하고 싶지만 아직 사회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몸이 늙고 병들어 더 이상 존엄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는 분이 고통스런 연명을 간절히 거부할 때 사회가 이런 분의 요청을 거부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몇 년 전, 프랑스에서 80이 넘은 노부부가 호텔에서 동반자살한 일이 있었다. 두 분 모두 대학교수로 은퇴한 분이었다. 유서에는 적극적 존엄사를 허용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강한 항의의 글이 담겨있었다. “내 자유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에만 제한될 수 있다. 국가가 무슨 권리로 내 인생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을 제한하는가?”
3. 쓰러진 아내와 다시 시작된 방황, 그리고 새로운 실험
내가 상담사 일을 하는 동안 아내는 요양보호사로 일했다. 아내와 내가 함께 일해서 받는 월급이 새길문화원에서 받던 월급과 비슷했지만 그곳에서 무료로 먹여주고 재워주었고 따로 돈을 쓸 일도 별로 없었기에 생활은 훨씬 나아졌다. 신부님의 배려로 낮에도 시간을 낼 수 있었고 저녁시간은 자유로웠으므로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쓰는데 집중해 불과 두세 달 만에 초고를 거의 완성했던 것 같다.
고지식한 성격의 아내는 몸을 돌보지 않고 일했다. 손이 빠르고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내는 몸은 약하지만 강단은 센 편이다. 순간 악력이 세서 팔씨름을 하면 웬만해선 지지 않는다. 비슷한 체급의 여자하고 팔씨름을 하면 시작과 동시에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곳에서 일한지 두 달 쯤 되었을까?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한 아내가 쓰러져 사흘 동안 몸져누웠다. 링거를 꽂은 채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아내를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내를 쉬게 하고 싶었다. 나 혼자 일해도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며칠을 공상하며 밤을 새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내를 쉬게 하려면 내 전공을 되살리는 길 밖에 없었다. 교회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교회에서 일하는 직장인이 될 것이다! 나를 받아주고 생활할 수 있는 돈을 주는 곳이 있다면 생각을 멈추고 그분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성실한 직업인으로 일할 것이다!
몇몇 지인들에게 교회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흘렸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방황이었고 파렴치한 변덕이었다. 결코 이루어질 수도, 이루어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반응은 싸늘했다. “다시는 기독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큰소리 친 게 불과 일 년 전이었다.
다행히 방황의 시간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한 달 정도 지난 것 같다. 갑자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교회에 대한 극한 거부감은 사라져 있었다. 아내의 일과 함께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쓰면서 기독교에 대한 애정이 되살아난 게 아닐까!
나는 이 일을 계기로 새로운 실험을 하게 된다. 신학생 시절부터 지난 30년 동안 목회자로서 꿈꾸었던 비전을 모두 담은 인터넷교회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해 여름 내내 고민하며 인터넷교회 설립을 구상하고 준비했다. 출판을 앞둔 <소설 콘스탄티누스> 후기를 쓰면서 한국 교회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담았다.
그해 가을, 집에서도 문제가 터졌다. 일주일에 닷새 근무하고 이틀은 집에서 보내는 생활이 반복되었는데, 아내와 내가 요양원에서 지내는 닷새 동안 어머니가 아이들의 부모 역할을 대신 할 수밖에 없었다. 사사건건 챙기고 간섭하는 할머니와 두 아이들 간의 갈등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어머니와 아이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했고 내 자신이 요양원에 계속 있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상담사 일은 내 자신이 기피했고 요양보호사로서의 나는 매우 열등한 직원이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의논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내는 내켜하지 않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그해 말, 노인요양원 일을 시작한지 불과 9개월 만에 아내와 나는 사직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4. 나는 상담사라기보다 요양보호사였다
‘작은 안나의 집’에서는 상담사 일을 한 시간보다 요양보호사 일을 한 시간이 훨씬 길었다. 상담실에 앉아 찾아오는 분들의 사연을 들어주고 기도해주는 일보다 어르신들을 찾아가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곳의 일에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일 년도 못되어 떠난 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있었지만 가장 큰 부분은 상담사라는 일에 끝내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곳에 계신 분들은 모두 나를 ‘목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러 번 밝힌 대로 나는 기도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요양보호사건 어르신이건 나를 만나러 오는 분들은 목사라는 사람에게 상담하러 오는 분들이었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었다. 하여 상담이 끝나면 기도로 마치는 것이 그분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런 수순이었지만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나는 자주 상담실을 비우고 어르신들이 계신 현장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요양보호사들과 어울려 어르신을 돌봐드리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어느 날 원장님이 공개회의석상에서 말씀하셨다. “목사님이 하실 일이 그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상담을 부담스러워 한 건 기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사람 만나는 일이 힘겹다.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공상에 빠져드는 걸 즐기기도 했다. 또한 내가 누군가의 문제를 돕는다는 게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누군가를 상담해줄 만큼 인생이나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신앙심도 없고 자기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해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 누굴 상담해준단 말인가! 게다가 원래 낯을 많이 가리고 소심해 누군가 찾아오면 덜컥 겁부터 내니 상담자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지역교회 목회자가 되지 않고 교목 일을 선택한 것도 어쩌면 이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배타적 신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개신교 풍토에도 적응하기 힘들었고, 학교가 적성에 맞기도 했지만, 대인관계가 중요한 지역목회에 자신이 없어 학교로 “도망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 이 글은 <공동선> 2016년 01+02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