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浮石寺(부석사)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구) /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 곳 못왔더니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 /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 /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 / 천지는 부평처럼 밤낮으로 떠 있네
風塵萬事忽忽馬(풍진만사홀홀마) / 지나간 모든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 / 우주간에 내 한 몸 오리마냥 헤엄치네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 / 백년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歲月無情老丈夫(세월무정노장부) /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있네
* 김병연(金炳淵) 김삿갓 *
김병연(金炳淵, 1807년(순조 7년)~1863년(철종 14년))은 조선 후기의 풍자·방랑 시인이다.
속칭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선대의 조상을 살펴보면 9대조부는 병자호란때 척화대신으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의
사촌형인 형조참판을 지낸 김상준이며 5대조부는 황해도병마절도사 김시태,
고조부는 전의현감 김관행, 증조부는 경원부사 김이환이다.
그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다가 반란군 세력에 투항한 것을
비난하는 시로 장원 급제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을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한 시인이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가문인 김안근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5살 때인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때
그의 조부(祖父)이자 선천부사(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이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
원래 咸興 中軍(함흥 중군:정3품)으로 전관되어 온지 불과 서너달 되었다.
신임지에 와서 몇 달 동안 어수선한 일을 대충 정돈하고
겨우 한가한 틈을 얻어 숨을 돌리고 그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글도 짓고 술도 마시며
수일 동안 즐겁게 지내고 있었는데 새벽에 돌연히 반란군이 쳐들어와서
술에 취해 있는 防禦使(방어사) 김익순을 결박해놓고 眼鼻莫開(안비막개)로 항복하라
다그치니 갑자기 이런 지경을 당해서 얼떨결에 항복을 하는 바람에 가문이 몰락되었다.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으나
나머지 가족은 살려주기로 함에 따라 목숨만은 건지게 되었다.
그 후 황해도 곡산에서 가문에서 종노릇을 하던 사람의 집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3형제를 키워냈었다.
그 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후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과거에 응시했을 때 시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가 나오자 그는 서슴지 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답글형식의 내용을 쓴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이고 자신이 그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 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한때 유랑 도중 집 안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
<조부 김익순과의 관계>
당시 20세가 되었을 때까지 김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어머니가 그들의 할아버지가 적장 앞에 무릎끓은 대가로 역적으로 몰린 사실을
아들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왔던 것이었다.
또한 아들들마저 역적의 손자로 낙인되면 조정과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비난 등은 물론
목숨도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있기에 일부러 할아버지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이었다.
때문에 병연은 자신의 할아버지 익순이 사망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때문에
영월 백일장 때 나온 시제에서 김익순에 대한 내용이 나오자 그가 자신의
가족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를 싸잡아 비판하는 답글을 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야 어머니의 해명으로 인해 그제서야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그는 방랑길을 나서게 되고되 삿갓을 쓰게 한 시초가 되었다.
<그의 방랑길>
그가 본격적으로 전국 방랑길을 떠난 것은 20세 때 어머니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해명한 후부터였으며 그는 방랑길을 떠나기 전에 갓을 파는 집으로 가서 크기가 큼지막한
삿갓을 주문하고 집에서 긴 지팡이와 동국여지승람 등 지도책 등을 소지하고 떠났다는
일설이 있다. 충청남도 홍성군에 외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어머니와 처(妻)에게는 홍성의 외가에 다녀오겠다고 하면서 자신은
사실상 정반대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을 떠난 후 한때 잠시 집을 들렀던 것을 제외하곤
사실상 가족들과 일체 연락을 끊은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사망>
그는 20세에 방랑을 시작한 후로 가족과 연락을 일체 취하지 않았으나
한때 그의 아들 김익균을 만나 3차례 정도 귀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방랑을 계속했다.
그 후 사실상 마지막 방문지인 전라남도 화순에 들렀던 중 그 곳에서 죽었는데
아들 익균이 부고(訃告)를 듣고 화순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강원도 영월로
운구하여 지금의 곳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