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출생-사망 1630 ~ 1692
국적 네덜란드
활동분야 무역선 포수(砲手)
출생지 네덜란드 호르큼(Gorcum)
주요저서 《하멜보고서》(1668)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선원으로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1666년 억류생활 끝에 탈출하여 1668년 귀국했다. 그 해에《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한국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다
병영 하멜전시관에 있는 헨드릭 하멜 동상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은 1630년 네덜란드 호르큼(Gorcum)이라는 도시에서 출생하였다. 호르큼은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라인강의 지류인 왈강이 네덜란드 운하와 연결되어 있어 곡물을 운반하는 선박의 왕래가 잦았으며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하멜의 가족은 대대로 호르쿰에서 살았다. 16세기 네덜란드는 해외무역이 발달하면서 중국, 일본, 오세아니아, 아메리카에 걸쳐 해상무역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러한 해상무역을 배경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헨드릭 하멜은 165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 취업하였고 선박의 포수(砲手)로 바타비아(Batavia:현재의 자카르타)에 건너갔다. 당시 바타비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본사가 있었으며 동양의 향신료와 중국과 일본의 청화백자를 가져다가 유럽에 되팔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멜은 이곳에서 근무하며 서기(書記)가 되었다.
1653년(효종 4) 7월 하멜은 상선 스페르웨르(Sperwer) 호를 타고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가게 되었는데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하였다. 당시 제주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은 하멜 일행을 체포하여 감금하였고 당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조선에 귀화한 박연(朴燕, 네덜란드 이름 얀 얀스 벨테브레 Jan Janse Weltevree)이 한양에서 내려와 통역을 하였고 하멜 일행의 소속과 정체가 파악되었다. 하멜 일행은 제주도에서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10개월 동안 감금되었다가 이듬해 한양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하멜은 조선의 임금인 효종을 알현하였는데 이때 일본으로 송환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으며 자신이 포를 다루는 포수의 경험 때문에 신무기 개발을 지원하는 훈련도감에 배속되었다. 당시 조선은 북벌정책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문물과 지식이 무기개발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다.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자 하멜은 이들을 찾아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가 이런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1656년 3월 한양 훈련도감에서 이들을 담당하기가 힘겨워지자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에 소속되었다. 이곳에서 엄격한 감시를 받으며 잡역에 종사하였다. 당시 흉년으로 생활은 궁핍하여 먹을거리를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1660년에 전라병영에 부임한 절도사 구문치는 하멜 일행에게 비교적 관대하여 이들에게 집과 텃밭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잡역부로 7년 동안 전라병영성 근처 성동리 은행나무 근처 초가집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크고 오래된 은행나무를 보았다고, <하멜표류기>에 기록하고 있는것으로 보아 바로 이 은행나무가 아닌가 한다. 하멜 일행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7년간 이 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로부터 습득한 것으로 전해오는 담 쌓기 방식인, 중단 위쪽으로 얇은 돌을 약 15°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다음층에는 다시 엇갈려 쌓는 일종의 빗살무늬 형식(이 곳에서는 이 형식 을 '하멜식 담쌓기’라 부른다) 은 타 지방과 다른 독특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다.
1663년(현종 4) 흉년이 들자 하멜의 일행은 남원에 5명, 순천에 5명, 여수(麗水)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12명이 분산되어 배치되었다. 하멜은 여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었고 고된 노역과 생활고에 지쳐 탈출을 결심하였다. 1666년(현종 7) 마침내 7명의 동료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하여 일본 히라도(平戶)로 건너가서 나가사키(長崎)로 탈출하였다.
나가사키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 바쿠후에도 전해져 조선에 남아있는 네덜란드 선원들의 석방교섭이 진행되었다. 1667년 석방 교섭이 완료되어 조선에 남아있던 동료도 모두 석방되었고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
조국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은 그해에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 및 부록 《조선국기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 국내에서는《하멜표류기(漂流記)》로 알려진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억류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으로 그 가치가 크다. 《하멜 표류보고서》는 자신과 동료가 조선에 억류되어 14년간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가 출판되자 네덜란드와 유럽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이 유럽에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일본이 조선과의 무역에서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직접 교역을 위해 1000톤 급의 선박인 코레아 호를 건조하였으나 일본 바쿠후의 반대로 코레아 호는 조선으로 항해하지는 못했다. 하멜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1692년 2월 12일 사망하였다.
≪하멜표류기≫ 정본(正本)은 1920년 회팅크(Hoetink,B.)에 의해 발간되었다. 정본의 내용 구성을 보면,
제1부는 난파와 표류에 관한 기술,
제2부는 <조선왕국기 朝鮮王國記>로 되어 있다.
제2부는 한국의 지리·풍토·산물·정치·군사·풍속·종교·교육·교역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의 저자가 거의 14년 동안 군역·감금·태형(笞刑)·유형(流刑)·구걸 등의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을 하였고, 남북의 여러 지역을 끌려다니면서 당시 풍물과 풍속에 대한 사정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 대한 깊은 인상과 풍부한 경험을 잘 살려 기록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 않았던 서양 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최초의 저서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책은 프랑스·영국·독일 등 서양의 많은 나라들이 다투어 번역, 간행했고, 우리 나라에서도 1934년 ≪진단학보≫ 1∼3호에 이병도(李丙燾)가 영역본(英譯本)·불역본(佛譯本)을 저본으로 번역, 전재했다.
그 뒤 ≪하멜표류기 --漂流記≫가 일조각(一潮閣)에서 1954년에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1961년 이쿠타(生田滋)가 ≪조선유수기 朝鮮幽囚記≫라는 제목으로 번역, 간행했다.
첫댓글 친한 친구가 이번8월초부터 15일간 하멜의 출생지등을 답사하고 6명의 외국인과 하멜관련 회사를 차리고
부를 축적한뒤 3년후 강진 칠량면 소재지 자신의 야산에 하멜관련 기념관을 세우고자 꿈을 그리고 있습니다
부디 잘되기를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