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북 오두지맥
부뜰이와 천왕봉이 걸어온 오두지맥
지맥길19.7km(접속.이탈1.5km)/9시간51분
산행일=2017년12월3일
산행지=한북 오두지맥 1구간(양주/파주)
산행경로=말머리고개=>분기점(왕복)=>441.2봉=>
485봉=>수리봉(봉수대.530)=>521봉=>555봉=>고령산(앵무봉621.8)=>
보광사=>뒷박고개=>용미리제2묘지=>367.9봉=>박달산 갈림길=>163.5봉=>
채석장=>163봉=>용미리석불입상=>달구니고개=>군부대후련장=>
서대문동산묘지=>오산리고개
거리 및 소요시간=지맥길19.7km(알/접속1.5km)/9시간51분
요즘들어 이상하게 주말만 되면 비가온다.
여름이면 폭우라도 예정된 산행은 하겠지만 겨울비는 누구라도 맞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지난주에 비소식이 있어서 잇지못한 한강기맥(먼드래재~화방재)을 이여볼 계획이었는데.
이번주는 상황이 더 안좋다.
오후 12시가 넘어야 갤거라는 예보이다.
역시 진행하다 중단한 보현지맥이나 팔공지맥 쪽도 상황이 안좋기는 매 한가지다.
갈 곳이야 온천지가 갈 곳이니 비가 안온다는 곳을 찿다보니 양주.파주쪽이 아침6시면 갤거라고한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내일 산행지는 오두지맥으로 한다.
전날 저녁에 대강 준비를 해놓고 아침 4시반에 기상하여 5시에 집을 나서는데.
꽤 많은 양의 비가 주룩주룩내린다.
다시한번 기상청에 전화을 하여 양주.파주지방 일기예보를
문의하니 6시 이후로는 비가 안올거라 한다.
인천을 출발하여 송추IC에서 빠져 근처 24시 식당에서 시레기해장국으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오두지맥 들머리인 말머리고개에
도착하니 7시가 넘엇고 안개가 좀 끼였다.
오두지맥은 한북정맥에 한강봉과 첼봉 사이 꽤꼬리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파주에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북한땅을 바라보며 끝나는 산줄기이다.
분기점에 최 단거리로 오를 수 있는 곳이 말머리고개이다.
말머리고개는 오두지맥상에 있는 첯번째 고개로 분기점까지 갔다가 되돌아 와야한다.
한북 오두지맥(鰲頭枝脈)은 백두대간에서 분기하여 광덕산.백운산.청계산.운악산.
죽엽산.한강봉.도봉산을 거쳐서 장명산으로 이여지는 한북정맥이 한강봉(475m). 남쪽 약0.8km.
첼봉(521m). 북쪽 약0,8km.지점에서 서쪽으로 한 가지를 쳐 꾀꼬리봉(340m) 수리봉(510m→ 0.5),
앵무봉(621 m. → 0.3),.개명산(560m).뒷박고개.박달산(389m). 월롱산(229m).기간산(238m).
보현산(108m)을 지나 통일전망대가 있는 오두산(110m)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9.9km의 산줄기를 오두지맥이라 한다.
지맥의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임진강으로 들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공릉천이 되여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서해로 든다.
신 산경표는 한북정맥의 끝을 이 오두산으로 잡고 장명산쪽을 도봉지맥이라 부르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원 산경표의 뜻을 살려 한북정맥의 끝을 장명산으로 보고 이쪽
오두산 줄기를 오두지맥(鰲頭枝脈)으로 부르고 있다.
오두지맥상에는 오두산보다 높은 산이 많이 있으나 이 오두산은 옛 삼국시대 부터 군사의 요충지로
오두산성(관미성터)이 있고.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는 북한을 가장 가까이서 볼수 있는
세계유일의 분단현지인 국제적안보관광지로 통일안보교육장인 점을 고료하여
오두지맥이라 부르는데. 한남정맥에도 오두지맥이 있으니 한북 오두지맥(鰲頭枝脈)이라 한다.
오두지맥 진행 계획표
산행날자 | 구간 | 산행경로 | 거리(km) | 예상소요시간 |
2017.12.03 | 1구간 | 지맥분기점=>개명산=>오산리고개 | 17.49km+0.85 | 8시간09분 |
2017.12.10 | 2구간 | 오산리고개=>오두산=>통일전망대 | 21.87km | 9시간51분 |
계 | 2구간 | 동아지도gps구간 검색 | 39.36km+0.85 | 18시간00분 |
한북정맥에 분기점으로 올라가는 들머리
말머리고개에서 15분만에 분기점에 올라선다.
분기점에는 별다른 표시는 없고 나뭇가지에 리본 몇개가 이곳이 특별한 곳임을 알려준다
다시 돌아온 말머리재.
도로건너 마루금에는 크라운.해태제과 연수원이 자리잡고 있다.
말머리고개는 양주시 장흥면과 백석읍으로 행정구역이 나뉜다.
말머리고개 정상 직전에는 승용차 몇대정도는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크라운.해태 연수원 정문에서 좌측에 나있는 임도길로 올라간다.
고령산 쪽으로 올라간다.
크라운.해태 연수원 앞에서 3분쯤 올라가면 임도는 우측으로 돌아가고
좌측에 통신탑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 위치에서 우측으로 가파른 길을 올라간다.
연수원 뒷쪽인 마루금에 복귀하니 백석읍내가 보이는데.
짙은 안개로 조망은 포기한다.
말머리고개에서 20여분만에 삼각점이 있는 441.2봉에 올라서고.
오늘도 낙엽은 엄청나게 많지만 비가 몇차례 내리면서 숨이죽은 상태라 크게 미끄럽지는 않다.
오두지맥도 전방지역이라 곳곳에 군 시설물이 눈에 뛴다.
고령산 0.7km라는 안내목이 있는 485봉에서 직진으로는 장군봉으로
가는 길이고 지맥은 우측으로 급격히 틀어서 내려간다.
성터같은 것이 나타나면 여기가 봉수대가 있던 530봉인 수리봉
수리봉에서 조망이 괜찮다고 했는데.
안개가 얼마나 끼였는지 이거야 원.
그래도 비박꾼들 텐트가 세동이나 있다.
말머리고개에 내차외에 세대가 있었는데.
아마도 그차는 이들의 차일 것으로 짐작된다.
삼각점은 문산으로 되여있다.
정상에는 삼각점과 고령산 안내도가 있다.
의외로 갈림길이 여러번 나온다.
암봉에 올라서면
전망대 봉이라는데 보이는 건 암것도 없다.
산행지도에는 무명봉으로 555봉으로 표기되여 있다.
군사보호구역 이라며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문이 계속 나온다.
관리가 잘되여 있는 헬기장에 올라서고 지맥길은 약간 좌측에 개명산으로 진행되여야
하지만 개명산정상에는 군부대가 차지하구 있어서 진행을 할 수가 없다.
우측으로 진행하여 지맥마루금에서 벗어나 있는 앵무봉을 경유하여 보광사로
내려가서 보광사 일주문을 통과하여 음식점이 즐비한 길을 내려가면 367번 지방도로을 만난다.
이지역은 과거에 지뢰매설지역이라 위험하니 출입을 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일정한 간격으로 여러개가 있다.
앵무봉에는 앵무정이라는 사각정자가 있다.
이정표와 개명산 등산안내도가 있다.
누워있는 정상석.
고령산(앵무봉)
앵무정을 20여미터 지나면 헬기장이 있고 대리석 정상석이 있다.
개명산(開明山)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양주시 백석읍,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영장리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고령산과 개명산의 유래를 보자.
개명산(開明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에는 고령산(高嶺山) 또는
고령산(高靈山)으로 불리었다.
모두 산이 높은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 후로 한때는 계명산(鷄鳴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동여비고(東輿備考)[1682]에서는 고령산을 일명 계명산으로 부른다고 하였고,
『동국여도(東國輿圖)[1801년~1822년]에는 고령산(高靈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령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 전기부터 나타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1448년(세종 30) 12월 10일조의 기록에 삼군진무소에서
고령산 등을 강무장(講武場)으로 정할 것을 건의하는 기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고령산 또는 고령사(高嶺寺)[현 보광사(普光寺)]와
관련된 기사가 모두 7건이나 등장한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묘소인 소령원(昭寧園)이
고령산에 있었기 때문에 특히 영조와 정조 시대에 임금이 이곳으로 행차한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일제 강점기에 조사한『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백석면에 내고령리(內古靈里)와 대고령리(大古靈里)가 기록되어 있는데,
파주시 광탄면 개명산 자락 밑에도 현재 대고령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령산이라는
이름의 연원이 매우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의 개명산 자락에 보광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의 범종[1634년에 주조]에 “유대명조선국양주지고령산보광사신주보종서……
숭정칠년갑술칠월일주(有大明朝鮮國楊州地高嶺山普光寺新鑄寶鐘序……崇禎七年甲戌七月日鑄)”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산의 원래 이름은 고령산(高嶺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쪽과 서남쪽으로 봉일천을 끼고 있는 파주시 광탄면과 조리읍 방향에서 보면
동쪽에 남북 방향으로 길게 산줄기가 가로막고 있다.
개명산과 앵무봉이 양주시 장흥면에 있지만 서쪽 줄기는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다.
대고령과 보광사는 바로 이 영장리에 있으며 영장리에서 동쪽으로 높다랗게 보이는
봉우리가 앵무봉이고, 앵무봉 남쪽에 있는 봉우리가 개명산이다.
개명산 바로 뒤편에 형제봉이 있다.
그리고 앵무봉 북쪽에는 팔일봉이 있으며 팔일봉과 앵무봉 사이를
가로질러 영장리~은봉산에 이르는 지방도가 뚫려 있다.
도로를 끼고 마장저수지와 기산저수지가 있으며 마장저수지의
상류인 앵무봉 북편 자락에 안고령이라는 마을이 있다.
개명산의 높이는 565m이며, 양주시 장흥면에서 백석읍 방향으로 가다 보면 좌측에 보인다.
인근에 앵무봉과 수리봉[521m]이 있다.
개명산 아래에 있는 안고령은 고령산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며, 안고령 부근에 개명산의 12계곡이 있다.
안고령에 거성탱이라는 연못과 경수웅뎅이라는 늪지형 웅덩이가 있으며
국수당이라고 부르던 산신제 터도 있다.
또한 안고령에 주리골이란 마을도 있으며 주씨와 이씨가 사는 마을이어서
주리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안고령 북쪽에는 석골 또는 석곡이라는 마을이 있다.
돌이 많은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일단 보광사쪽으로 하산한다.
낙엽은 많지만 몇번 비를 맞으며 숨이 죽은 상태라 크게 미끄럽지는 않지만
가파르기가 만만치가 않아 아주 느릿느릿 조심해서 내려간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면 도솔암으로 올라가는 임도길을 만난다.
임도길로 보광사까지 내려간다.
보광사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4)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고려 고종 2년(1215) 원진국사가 중창하고 우왕 14년(1388) 무학대사가 삼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광해군 4년(1622)에 복원했다.
1740년 영조가 대웅보전과 광응전·만세루 등을 중수하고, 인근 10여리 밖의
영장리 능말에 있는 생모 숙빈 최씨의 묘 소령원의 원찰로 삼으면서 왕실의 발길이 잦았다.
당초 고령사였던 절 이름도 이 무렵에 보광사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영조의 생모 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는 어실각 숙빈 최씨는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 잘 알고 있는 "동이"의 주인공이다.
바로 앞에 영조가 생모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심었다는
3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자라고 있어 영조의 애틋한 효심을 엿볼 수 있다
범종각
사진을 클릭하면 사진이 열배이상으로 커짐니다.
작은 글씨도 정확히 볼수 있어요.
보광사를 대강 둘러보구 일주문으로 향한다.
보과사 일주문인 해탈문
보광사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고 좌측으로 올라가면
지맥마루금인 뒷박고개에 닫는다.
뒷박고개
뒷박고개에는 무슨 공사를 하는지 공사자제 들로 어수산하기 짝이없다.
고개 정상에는 허름하긴 하지만 분위기 있는 카페가 하나있다.
카페앞에 보면 울창한 대나무 숲 사이로 올라가면 온통 묘지이다.
여기가 지도상에는 서울시립공동묘지라구 쓰여있다.
돌아본 뒷박고개
뒷박고개에서 마루금에 올라서면 길도 제데로 없고 좌측으로는
서울시립공동묘지 이고 우측아래로는 포장도로가 마루금과 나란히 간다.
뒷박고개에서 그냥 도로로 올라가는게 편하겠다.
공동묘지를 10분쯤 걸으니 뒷박고개에서 올라오는 길을
다시만나고 마루금에 공사현장이 보인다.
기존 건물을 증축 하면서 새로운 건물도 짓는데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공사현장 좌측으로 올라가 본다.
널찍한 임도길이 있다.
임도길을 5분정도 올라가면 임도는 좌측으로 틀어지고 지맥길은 직진으로 올라간다.
봉우리에 올랏다가 내려가면 좌측으로 빙 돌아온 임도길을 다시 만난다.
다시 임도길로 진행한다.
5분쯤 올라가면 정면에 송전탑이 보이고 임도길은 좌측으로 틀어서
올라가고 지맥길은 우측으로 진행한다.
뒷박고개를 지나면서 부터는 이정표라고는 눈을 씻고바도 단 한개도 안보인다.
그래도 요소요소에 선답자들의 리본이 걸려 있으므로 조금만
주위을 살피면서 진행하면 알바할 염려는 없다.
지맥길도 임도길 수준으로 부드럽고 널찍하여 걷기에 아주좋다.
잠시후 헬기장에 올라서고 우측으로 진행
헬기장에서 내려가면 좌측에 커다란 바위을 지난다.
이 바위을 지나고 1분쯤 거리에서 좌측으로 내려서야 한다.
별다른 표시도 없고 길도 잘 안보이고 직진 길은 뚜렷하므로 방심하면 안되는 곳이다.
실제로 10여미터 지나서 경로에서 벗어났다는 경고음에 몇번을 왔다갔다 하면서 찿은 길이다.
갈림길에서 5분정도 내려가면 유격훈련장을 지난다.
여기저기 파손되였고 수리를 안한걸 보면 지금은 이런훈련을 안 하나보다.
우측으로는 군부대 철책이고 정면으로 박달산이 보인다.
훈련장을 내려서면 작은 포장도로을 만난다.
우측을 보면 군부대로 들어가는 도로임을 알수 있다.
도로을 횡단하여 절개지를 올라서면
다시 군용도로로 올라간다.
엄청나게 넓은 헬기장에 수류탄 투척훈련장 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수류탄 투척훈련장을 지나면 이중으로 된 군부대 철책을 우측에 두고 박달산으로 올라간다.
박달산 아래에는 출입금지 경고판이 여러개가 있다.
박달산을 지나면서 파주 우측으로 광탄면내가 내려다 보인다.
달구니고개를 500미터쯤 남긴 지점에서 마루금에는 가뜩이나 길이 히미한데
제 멋대로 벌목을 하여 진행하기가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안되겠어서 우측으로 내려서니 가족묘지가 나오고 공장건물을
요리조리 피해서 달구니 고개에 닺는다.
달구니고개 버스정류장에는 분수3리고개라고 표기되여 있다.
달구니고개 건너편에는 토마토 한식부페가 있는데.
일요일은 영업을 안한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자 도시락준비를 안했다 가는 큰 낭패를 볼 것이다.
도로를 횡단하여 좌측에 통신탑을 보고 올라간다.
올라가서 보니 한신콤프레서 공장이고 마당한켠에 통신탑으로 올라가는데.
가시 덩쿨에 칙넝쿨에 잡목이 장난이 아니다.
선답자들은 어디로 진행했는지 의문이다.
여기서 부터는 포탄낙하 지점이라네.
오늘은 일요일이니 포사격은 없을 것이다.
경고판만 있을 뿐 출입을 막는 시설물은 따로없다.
지도상에 168봉 같은데,
산행 지도에는 삼각점 표시가 없고. 삼각점은 방위표시만 있을 뿐
언제 어떻게 설치했는지 등급이 없는 삼각점이다.
체석을 하면서 마루금을 거의 다 파먹엇다.
우측 아래를 내려다 보니 어질어질 아찔하다.
한봉우리 지나서 돌아본 모습.
방목된 흑염소들 염소들은 왜 아슬아슬한 벼랑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두번째 봉우리 지나서 돌아본 모습.
분수리는 온통 공단지역이다.
163.5봉의 삼각점 왜 서울이지?
체석장을 지나고 무룹까지 쌓인 낙엽길을 10분정도 내려가면
용미리석불입상 뒷모습이 보인다.
용미리석불입상은 자연석 바위에 몸통을 새기고 머리을 따로 만들어서 올려놓은 형상이다.
자세히 보면 목부터 머리 갓까지 7층으로 되여있다.
옆 모습
파주 용미리 용암사의 마애불상에는 천년역사의 전설이 있다.
개성에서 남쪽으로 벽제를 거쳐 서울의 구파발로 들어서는 용미리 길목에 혜음령 고갯길이 있다.
현재 이 길은 차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리고 약 1.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길에는 고려시대의 남경 순행을
중심으로 한 혜음원터 용미리 마애불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가 있다.
제11대 왕인 문종(1046-1083, 재위)에서부터 제16대 왕인
예종(1105-1122, 재위)까지 약 80년간의 이야기가 길 위에 펼쳐진다.
서울은 문종 때 처음으로 남경으로 승격되었다가 폐지되었다.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의 지리적,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왕들은 자주 서울에 행차하여
백성의 민심을 살폈고 북한산의 승가사, 장의사 등의 절에 들러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빌었다.
이곳 혜음령 길은 개성에서 서울로 내려가는 지름길이어서 왕들도 이용하는 길이었다.
길 숲 사이로 내민, 두 개의 큰 바위 얼굴을 가진 마애불
혜음령 고갯길을 따라 펼쳐지는 주변 야산(장지산) 중턱의 숲 사이로 두 개의 큰 바위 얼굴이 보인다.
이 얼굴들의 주인은 용암사 경내에 있는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몸체로 삼은 거대 바위 위에 별도로 만든 두 개의 머리를 얹은 특이한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크고 둔중한 바위에 선각된 몸체는 투박하고 또, 자연의 바위를 그대로
이용하다 보니 균형감도 다소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옷소매가 가볍게 흩날리는 아름다운 모습에서는
바위 표면을 잘 다루었을 장인의 실력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가까이서 보면 머리도 정말 크다. 뭉툭한 코, 굳게 다문 큰 입에서는
토속적이고 해학적이면서 위엄있는 모습이 느껴진다.
나란히 서 있는 두 마애불 중에서 둥근 모자를 쓴 것은 남자, 네모난 모자를 쓴 것은 여자라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런 모자를 쓴 거대 불상이 미륵불로 많이 조성되었다.
마애불은 국내에서 손꼽을 정도로 크니 왕실에서 조성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고려 제13대 왕 선종(1083-1094, 재위)의 제3비인 원신궁주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꿈에 장지산의 두 도승이 나타나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공양하라고 하였다.
꿈에서 깬 궁주는 왕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고 왕이 사람들을 보내어
찾아보게 한 결과, 이곳에 있는 바위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곳에 두 도승을 새긴 것이 마애불이라고 한다.
원신궁주는 왕궁이 있는 개성에서 이곳까지 와서 정성껏 기도하였고
그 결과 첫째 아들 한산 후(왕 윤)와 두 아들을 낳았다.
거대 마애불 뒤에 숨어 있는 왕위찬탈의 역사
마애불을 새긴 선종은 문종(제11대 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문종의 제2비인 인예왕후 이씨에게는 10남 2녀의 자식이 있었다.
이 자식들 중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 세 명이 차례대로 순종(제12대), 선종(제13대)
그리고 숙종(제15대 왕)이 되었다.
불교에서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은 넷째 아들이었다.
선종은 제2비가 낳은 11세의 어린 아들을 임금(제14대 헌종)으로 만들어 놓고 죽었다.
병약하고 어린 왕 대신에 어머니인 사숙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으나
다음 왕위 후계자가 주요 문제가 되었다.
제3비인 원신궁주에서 난 한산 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과 왕이 되고 싶었으나
되지 못했던, 선종의 친동생 왕희의 두 세력 간에 왕위찬탈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원신궁주의 사촌 오빠인 이자의는 마애불에 기원하여 얻은 한산후를 밀었으나
왕희에게 제거당함으로써 싸움은 일단락되었다.
그 결과, 원신궁주와 아들인 한산후는 귀양을 갔고 왕위에서 물러난
헌종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이렇듯 왕위 계승에 불만을 가지고 조카를 폐위시키면서 자신이 왕위에
오른 왕 희가 제15대 왕인 숙종(1095-1105, 재위)이었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에,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숙부 세조의 이야기와 비슷하다.
자식을 기원하는 절실한 염원으로 조성된 마애불 뒤에 이런 역사가 숨어 있어서
다시 한번 더 마애불을 들여다 보게 된다.
본래의 조성 목적 이후 혜음령 고갯길 안전통행을 지켜주었을 마애불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던 혜음령 고갯길은 험하고 숲이 우거져서 호랑이나 도적들의 피해를 보았다.
무리를 짓거나 무기를 휴대하여도 죽거나 재물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경으로 자주 행차를 했던 제16대 왕인 예종에 의해 고갯길을 넘던
길손들에게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는 혜음원과 혜음사가 생겼다.
이때 임금의 행차에 대비하여 머물 수 있는 별원(別院)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서거정의 동문선 제64권에 김부식이 지은<혜음사 신창기>로 남아 있다.
사진을 클릭해서 보면 자세히 볼수 있다.
용미리마애불상에서 내려오면 78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용미리 양지마을에 내려선다.
용미리고개에도 양지가든 이라는 식당이 있지만 여기도 일요일은 영업을 안한다.
양지가든 끝지점에서 골목길로 들어간다.
버스정류장 이름은 한민고
양지마을 입석 뒷쪽으로 올라갔는데.
거의 길이 없는 상황이다.
그냥 좌측에 도로따라 올라가는게 편하겠다.
앞에보이는 집 뒷쪽으로는 길이 없는거 같다.
아래 마을로 내려가서 길을 찿아 산으로 올라간다.
잡풀에 잡목을 이리저리 헤치고 올라서니 좌측에서
올라오는 부드러운 길을 만난다.
부드러운 길을 잠시 걸으니 육각정이 있는 돌봉산이다.
여기서 오늘 처음으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온 두사람을 만난다.
여기서 지맥길은 매봉쪽으로 진행되는데 산행지도에는 없는 봉 이름이고
정작 매봉이라는 위치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지명을 알수 없는 작은 고개에 내려서고 도로을 건너 마루금에 올라서니
마루금에는 걷기좋은 임도길이다.
여기서 5분쯤 진행하니 좌측에 묘지 3기가 있는 곳에서
마지막으로 행동식을 먹으며 쉬여간다.
몇분 쉬고 진행하는데 1분도 안되서 마루금에서 벗어났다고 경고를 한다.
좌측을 살펴 보아도 길은 보이질 않고 선답자들의 리본은 앞쪽에서 나풀거린다.
한개도 아니고 서너개가 앞쪽으로 걸려있다.
믿고 따라가 보니 마루금에서 백미터 이상 이탈되였다.
다시 되돌아가서 정밀 조사를 해보지만 없는 길이 보일리가 없다.
지도에서 자세히보니 마루금 우측으로 서대문동산묘지가 있다.
대충 방향을 잡고 내려간다.
묘지에서 앞에보이는 저기가 마루금이라 혹시나 하고 다시 올라가 보지만 길은 없다.
마루금을 좌측에 두고 그냥 도로따라 3km정도를 오산리고개 까지 내려간다.
오산 2교차로 여기서 한북오두지맥 1구간을 마친다.
|
첫댓글 오두지맥을 출발하셨군요.
우중에 젖은 낙엽 밟으며 만만치 않은 행보를 진행하셨습니다.
전 오산리고개 내려서기전 매봉갈림길에서 알바로 내려섰던 기억이 납니다.
요즈음은 트랙이 있어 다행이지만 갈팡질팡하던 그때가 어렴풋이 떠올려집니다.
남은 구간 월롱산, 오두전망대의 변모된 모습도 궁금해 집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