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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북한이 연평도에 포사격을 가해 우리 군이 즉각 대응 사격을 하면서 서해 5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우리측은 해병대 병사 두 명이 전사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민간인 피해도 발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직 북한측 피해상황은 보고되지 않고 있습니다."
뒤로 젖힌 좌석에 몸을 맡기고 억지로 잠을 청하던 진상우는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고 화들짝 놀라 좌석을 세웠다. 부산의 한 사찰에서 불교대학 강의를 마치고 KTX로 서울로 올라오던 중이었다.
개신교 사람이면서도 개신교 내에서는 활동할 수 없게 된 처지는 상우나 하림이나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상우는 매주 하던 설교 대신 가끔 종교화합을 위한 강연에 나섰고, 한동안 박명준 피살 사건에 매달리던 하림도 명준을 대신해 한반도 평화와 상생을 위한 강좌에 불려다녔다. 급히 휴대전화를 꺼낸 상우는 하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림아, 뉴스 듣고 있니?"
"응? 무슨 뉴스?"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했단다. 사람이 다친 모양이야!"
"참, 나,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들 있을 거야, 젠장! 명준 선배가 이런 꼴로 살지 말자고 그렇게 이리 저리 뛴 건데··· 넌 지금 어디에 있는 거냐?"
"KTX 안이야. 지금 막 광명역을 통과했다."
"벌써 강의 끝내고 올라오는 거냐?"
"응, 그래! 명준 선배 일은 뭐 좀 잡히는 게 있니?"
"아니, 아직··· 상우야, 너 서울 도착하는 대로 내 사무실로 좀 와라."
"그래, 알았다. 잠시 후에 보자!"
상우는 힘없이 휴대전화 폴더를 닫았다. 북방한계선을 둘러싼 남북의 갈등은 이제 연례행사가 되었다. 상우는 얼마 전 대전의 한 시민단체가 마련한 강좌에서 해군함 침몰사건에 대해 강의하던 하림에 대한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천안함 사건은 수많은 의혹만 남긴 채 영원히 오리무중으로 빠질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호전적인 정치인들은 이런 와중에 한미연합군사훈련을 강행해 힘의 우위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자체 기술진에 의해 크루즈(순항)미사일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이 발표된 지 며칠이 지났습니다. 이 미사일은 사정거리가 무려 1500km에 이르러 북한 전역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 타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최근엔 또 하나의 첨단 미사일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철매-2라는 매서운 이름을 가진 이 무기도 우리나라 자체 기술로 개발되었답니다. 이 미사일은 미사일을 요격하는 미사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버금가는 성능을 지녔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의 국방력에 대해 또한 첨단 기술력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요?'
상우의 시선이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팔짱을 끼고 있는 덩치 큰 사내를 향했다. 사내는 앞자리 정 중앙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청중들은 대개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별 거부감 없이 하림의 강의를 들었지만, 상우는 하림의 강의를 들을 때마다 강의를 마친 후 갑자기 피살당한 박명준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짜식, 좀 살살 하지!'
사내의 따가운 눈길을 모를 리 없겠지만 하림은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남자라면 어린 시절에 한 두 번은 겪어본 일이 있습니다. 동네 아이와 맨주먹으로 싸우다 힘이 부치면 주위를 살펴 돌을 주워듭니다. 물론 상대아이도 돌을 들지요. 그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같이 돌을 놓습니다. 하지만 몇몇 독한 아이들은 집에 가서 흉기를 들고 나오기도 합니다. 상대가 기가 약하면 손을 들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흉기를 들고 나오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해서 겪는 아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대개 정해져 있지요.'
잠시 뜸을 들이며 청중을 둘러보던 하림이 상우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강의를 이었다.
'천안함 사건의 세세한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우리들의 소중한 아들들을 죽인 살인범이 누구인지는 분명합니다. 그 살인범은, 끝없는 대결국면을 조성해온 이 땅의 호전적인 정치인과 군인들입니다. 또한 그 구도를 만들고 이용하여 자기 국가의 이익을 도모해온 미국의 정치인과 군인들, 군산업체 관계자들입니다. 범인은 정확히 그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림의 강의는 어느새 박명준을 빼닮고 있었다. 말소리부터 눈짓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박명준을 느낄 수 있었다. 하림이 인기있는 강사가 된 비결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국적의 청년 정대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대표로 월드컵에서 뛰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법률적 조국을 한국이라고 부르며 마음의 조국을 조선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한 쪽을 기준으로 북조선 남조선이라 하지 않고 남한 북한이라고도 하지 않는 이 청년의 자유로움과 배려심이 돋보입니다. 저는 제 막내 동생보다 한 살 나이가 적은 이 청년을 본받아 앞으로는 남한 북한이라고도, 또한 북조선 남조선이라고도 하지 않고, 한국 조선이라고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남과 북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 청년의 호방한 기상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시 하림은 강의가 끝난 후 질문을 받고 엉뚱한 대답으로 강연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국가별로 전쟁을 치루고 싶을 만큼 미운 나라가 있으면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축구경기로 승패를 갈랐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과 조선도 축구 한 판으로, 미국과 조선도 축구 한 판으로 전 세계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화끈한 대결을 펼치고 진 쪽이 이긴 쪽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이 길고 지루한 대결국면을 끝냈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하림은 갑자기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며 고함을 쳤다.
'이놈들아! 제발 우리 소중한 아들들 함부로 죽이지 말란 말이야!'
상우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찾아간 곳은 동국대 정문 건너편에 자리잡은 허름한 5층 건물이었다. 4층에 오르자 세 개의 입간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반도평화연구소'라는 조그만 간판이 붙은 방이 하림의 사무실이었다. 상우를 본 하림은 급히 웃옷을 걸쳐 입고 나왔다.
"좀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림이 상우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넉살좋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핑계가 좋구나. 남의 방 얻어쓰기 눈치 보인다고 솔직히 말하면 어디가 덧나냐?"
상우가 팔등으로 친구의 옆구리를 질렀다. 짜식! 이제 명준 형 사건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 같구나.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지 별 수 있냐? 상우는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듯 대견한 눈빛으로 하림을 쳐다봤다.
"야, 어째 오늘 니 눈빛이 좀 느끼하다!"
"쳇, 별 놈 다 보겠네. 그래, 강의 섭외는 좀 들어오냐?"
"응, 명준 형 덕분에 바삐 돌아다니고 있다. 어느새 박명준 신학의 적자가 되어 있더라구, 흐흐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젠장!"
하림은 '아웃백'이라고 크게 쓰여진 음식점 문을 밀치고 상우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턱짓을 했다.
"도대체 왜들 저러는 거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미쳐가는 건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토해낸 상우의 탄식에 하림이 흐흐 웃으며 말을 받았다.
"두 놈들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지. 탈북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구! 내 생각엔 아주 정곡을 찌르고 있어. 북은 미쳤고 남은 썩었다! 들어봤냐?"
"그 말 못 들어봤으면 간첩이게? 그런데 그게 뭐 다를 게 있냐? 내 귀에는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로 들리는데?"
상우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스스로 겸연쩍어 쓴웃음을 지었다. 무심코 나온 간첩이라는 말이 이 상황에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수시로 쓰고 듣던 단어였는데 언젠가부터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오다니, 이 고약한 단어가 자신의 무의식층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인가?
"짜식, 종교문제는 칼날처럼 예리한 놈이 현실 정치문제로 들어가면 한없이 무디단 말이야. 미친놈은 그래도 제정신으로 돌아올 가능성이라도 있잖아, 그런데 썩은 놈은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답이 안 나온다구!"
하림이 눈을 위아래로 흘기는 시늉을 하며 다리를 꼬았다.
"뭘로 주문하시겠어요?"
자주색 모자를 쓴 종업원이 다가와 말했다.
"응, 여긴 돼지갈비가 괜찮더라. 난 그걸루 줘요, 돼지갈비!"
하림이 상우와 종업원을 번갈아 쳐다보며 주문했다.
"아, 네! 포크 립이요?"
아웃백 종업원의 말에 하림이 만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시 대답했다.
"응, 그래요, 그거, 돼지갈비!"
"아, 네···"
"이놈이 혀가 짧아 어려운 발음은 잘 못하니까 아가씨가 이해해요."
머쓱한 표정으로 서있는 종업원을 보고 웃고 있던 상우가 하림의 어깨를 철벅 치며 한 말이었다.
"그것만 갖다 드릴까요, 손님?"
"상우야, 너도 하나 시켜라, 오늘은 이 형님이 쏜다!"
"그래, 난 뭐가 좋을까···"
메뉴판을 뒤적이던 상우가 손으로 짚은 건 제일 값이 싼 토마토 머쉬룸 스파게티였다. 모처럼 대접하려는 하림의 마음은 고맙지만 값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전, 이걸루 주세요."
상우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하림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짜식, 봐주는 거냐?"
"봐주긴, 임마! 나 양식 별로 안좋아하는 거 다 아는 놈이···"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상우를 쳐다보던 하림은 종업원이 멀어져가자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상우야, 탈북자들이 하는 말에는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게 담겨 있어. 미친놈 피해서 왔더니 썩은 놈들 세상이라는 자조 섞인 탄식이지! 탈북자들 중에는 차라리 다시 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아, 남이나 북이나 참 큰일이다!"
"하림아, 너 너무 기우는 거 아니냐? 쟤네들 사정은 귀로 듣고 여기 사정은 눈으로 보면서 오는 차이가 아닌가 싶은 게 좀 걱정된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 반대라고 생각해! 오히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남쪽에 대한 자신감과 기대가 담겨있어. 네가 기독교를 정신없이 비판해대면서도 예수정신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남쪽은 비판할 정도가 되니까 비판하지만 저쪽은 아예 비판할 수준도 못된다 그거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북을 비판하는 건 아무 실익이 없어. 쟤네들은 수십 년을 자존심으로 버텨온 친구들이야. 역사적 정당성은 자기들에게 있다는 거지. 남쪽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그저 일본놈 미국놈 뒷구녕이나 닦아주고 번 돈으로 조금 살게 되었다고 해서 꿀릴 게 하나도 없다는 거야. 게다가 저쪽은 쌀은 없어도 무기는 차고 넘쳐난다구. 아무리 재래식이고 낡았다 해도 남쪽에 쏟아부으면 깡그리 갈아엎고도 남을 무기들이야. 여차하면 너 죽고 나 죽겠다는 거야. 남쪽에 완승을 거둘 수는 없겠지만 같이 죽을 힘은 충분히 갖고 있어!"
말을 잠시 중단한 하림이 돼지갈비 더미에 죽 칼질을 하고는 한 쪽을 집어들며 말을 이었다.
"다 잃어버린 놈을 코너로 모는 건 좋지 않아! 같이 죽자고 자폭하면 잃을게 많은 놈이 더 억울하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상우도 갈비 한쪽을 집어 입에 몰아넣었다.
"그래, 어차피 죽게 되었는데 아직 쓸만한 무기가 남아있다면 어떻게 하겠니? 게다가 꼴보기 싫은 놈이 바로 옆에 있는데! 그거 신나게 써보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냐구?"
하림이 다 발라먹은 갈비를 툭 던졌다. 또 한 쪽을 집어 입에 가득 넣고 빙글빙글 돌려 살점을 뜯어가며 하림이 말을 이었다.
"요걸 그냥 씹어먹을 순 없잖아, 가운데 박힌 뼈가 있는데! 살살 돌려가면서 발라먹어야지!"
"무슨 말이야?"
"감정대로 처리할 일이 아니란 거야. 자존심 팔아가며 열심히 일해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마련해놓은 게 꽤 있는 놈 입장에선 같이 죽으면 훨씬 더 억울하지 않겠어? 지금 저쪽을 자극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구. 이러다 한 방 터지면 남북은 그냥 다 죽는 거야. 상대만 죽이고 살아남을 힘은 어느 쪽에도 없어, 그냥 다 가는 거지! 어린애도 다 아는 상식 아니냐? 그런데, 만약에 말이야!"
하림이 다 발라먹은 돼지갈비 조각을 툭 던지며 상우를 쏘아보았다.
"북이 지금 핵을 몇 개나 갖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더 문제가 되는 건 그걸 장착한 북의 탄도미사일 사정거리가 계속 길어지고 있다는 거야. 지금은 알래스카까지 도달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지만, 조금 더 지나면 미국 본토까지 날아갈 수 있을 거라구. 미국으로선 마지노선에 접근해오는 북을 그냥 둘 수 없는 이유가 되겠지."
"그냥 둘 수 없다면, 어떻게 한다는 거야?"
"한반도를 포기하는 거지. 핵을 장착한 탄도 미사일이 미국 본토로 날아오기 전에 그냥 북을 깨끗이 쓸어버리는 거! 물론 북이 가만있지 않겠지. 그러나 본토를 공격할 수 없는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너, 지금 소설 쓰냐?"
"응, 실현 가능한 소설을 쓰는 거지, 결코 현실화돼서는 안될!"
하림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생각엔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중국과 러시아가 가만히 있겠니?"
상우가 마지막 남은 돼지갈비 한 쪽을 들어 하림에게 건네며 말했다. 빙긋이 웃으며 갈비쪽을 받은 하림은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거꾸로 접시에 세우며 말을 이었다.
"그건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중국과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보다 훨씬 더 우선순위에 있는 국가비상사태가 될 수 있는 문제야. 9.11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국가적 대재앙이 될 수 있거든. 그래서 미국은 북의 핵미사일이 자기네 본토로 날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남을 포기하더라도 북을 없애려 할 가능성이 있어. 그렇게 될 경우, 휴전선 북방에 있는 장사정포가 일제히 포천이나 의정부에 집결해 있는 미군부대를 향해 불을 뿜겠지. 미국으로서는 최악의 경우 삼만의 주한미군이 문제가 되겠고, 그건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어. 휴전선 가까이 있는 미군을 평택으로 옮기려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여차하면 평택항으로 집결해서 재빨리 빼돌리면 되니까. 게다가 평택은 평상시에는 중국을 견제하기 좋은 위치에 있어. 주한미군의 본거지로 평택을 선정한 건 그들로선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중국과 러시아는 어떻게 달래고?"
"걔네들이 가장 싫어하는 건 북이 괴멸된 후에 군사적으로 미군이 압록강이나 두만강 부근에 주둔하는 상황이 되는 걸 거야. 생각해 봐, 중국군이나 러시아군이 미국과 멕시코 접경 지역에 주둔한다면 미국 기분이 어떻겠어? 그러니까 미국으로선 사정거리가 미국 본토까지 도달하는 북한의 핵미사일이 개발되는 시점까지 가면 미군 철수를 비롯해서 모든 걸 양보하더라도 북한을 쓸어버리려할 가능성이 있다구!"
"한반도가 괴멸되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미군도 모두 철수한다?"
"그래, 중국이나 러시아로선 괜찮은 거래가 되겠지. 특히 중국으로선 골치 아픈 경쟁자 하나 사라지는 거구! 러시아나 일본도 정치적으로 손해볼 게 없어. 거의 정글이나 다름없는 중립지대가 들어서는 거니까. 그냥 한반도만 수십 년 공들인 탑이 무너지고 깨끗이 제로 상태로 돌아가는 거지. 미국이 불만이 있겠지만 본토가 핵을 얻어맞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할 거야!"
"이번 연평도 문제가 그런 국제정세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거냐? 북도 그런 판단을 못하는 게 아닐 텐데 왜 자꾸 도발을 하는 거냐구?"
"도발? 남쪽에서 볼 땐 북이 먼저 도발한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북에서 볼 땐 애초부터 남쪽이 먼저 도발을 했고, 무리한 점령과 도발을 계속하고 있는 거야. 남쪽의 당국자들은 연평도에서 가졌던 포격훈련이 우리 영해를 지키기 위한 군사훈련이고 통상적인 사격훈련일 뿐인데 그걸 문제 삼는 건 북한의 생트집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북방한계선이 미군이 일방적으로 그은 선인 건 알겠는데 그걸 영해라고 주장하는 남쪽 시각에 문제가 있다는 거냐?"
"짜식, 그 정도만 알아도 다행이다. 영해란 통상적으로 해안선을 둘러싼 연안수역을 의미하고 그 범위는 국제해양법상 12해리까지라는 것도 알고 있겠지?"
"12해리면 미터법으로 어느 정도 거리냐?"
"22km 정도!"
"그러면 남쪽이 사격훈련을 하고 있는 지역이 북한의 해안선에서 22키로 안에 들어간다는 거야?"
"그렇지. 연평도에서도 12해리 안에 들어가지만, 북의 황해도 해안에서도 12해리 안에 들어간다는 점이 문제야. 그래서 양쪽 모두 자기 영해라고 주장하는 거지. 그러니까 우린 우리 영해 안에서 포격훈련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북쪽 입장에서 보면 자기네 영해에 포격을 가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거야. 우리가 먼저 도발했다는 거지. 결국 문제는 NLL이야. 남쪽 사람들에게 NLL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영해의 경계이고, 우리 포사격 훈련이 NLL 남쪽에서 수행되었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말하지만, 그건 우리측의 일방적인 논리일 뿐이야. 황해도를 돌아가며 포위할 뿐 아니라 북한 연안의 12해리까지 침범하는 NLL을 우리 영해라고 주장하는 건 날강도들의 논리라는 게 북쪽의 생각이지."
"NLL하고 영토 개념은 엄연히 분리해서 이해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렇지, 그래! NLL의 진실은 거기에 있어. NLL은 남북한이 합의해서 설정한 게 아니고 휴전 이후 유엔군사령부가 일방적으로 선언한 거야. 그것도 내부용으로 말이야. 그러니까 NLL은 원래 우리 영해의 선으로 그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측 배나 비행기가 더 이상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은 거라구! 그래서 명칭도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이지. 그것도 남북을 가르는 해상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남쪽 선박이 북한 연안수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내부통제용으로 설정된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국제적으로 공포할 필요도 없었고 북한에 통보할 이유도 없는 거였어! 우리 군은 북한에 통보했다고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고 유엔사령부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지."
"그렇지만 우리가 실효적으로 수십 년간 지배해 온 건 사실 아니냐?"
"실효적 지배라. 그래 이쪽 입장에서 보면 실효적 지배란 말이 어울리겠지. 하지만 저쪽 입장에서 보면 강탈과 침략일 수 있어. 예를 들어 볼까? 대마도 이외에 포항 앞 바다, 그리고 마산 앞 바다에 조그만 일본 섬들이 또 있다고 가정해 보자구. 그리고 일본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서 그 섬들과 한국 해안 사이에 등거리 선을 그어 놓고, 그 선 아래, 그러나 우리 육지에 가까운 연안 수역을 수십 년간 지배해 왔다면 그게 일본 영해가 된다고 해야 하냐? 그건 전형적인 침략 논리일 뿐이야. 1999년부터 수차례 발생한 서해교전, 그리고 이번에 연평도 사태도 바로 그 부근에서 발생한 거야."
"그게··· 그렇게 되는 거냐?"
"그래, 우리에겐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벌써 30여 년 전에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도 NLL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시인했어. 그 때가 1975년인가 그럴 거야.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프랜시스 언더힐은 키신저보다도 두 해 전에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본국에 보낸 적이 있구."
"쳇, 그럼 이 문제 역시 우리가 일방적으로 속아온 거 아니냐? 어렸을 때부터 북은 옥수수죽만 먹고 다 굶어죽기 직전에 있는 것처럼 배워왔다가 1960년대까지는 북이 남보다 훨씬 더 잘 살았다는 걸 알고는 배신감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북방한계선 문제 역시 속고 있었던 셈이네."
"그래서 지난 참여정부에서 북쪽하고 머리를 맞대고 찾은 해법이 바로 공동어로구역, 서해평화협력지대였던 거야. 그런데 이 정부 들어서 그 합의를 모두 폐기처분하고 말았지. 그렇다면 현재 한반도 전쟁위기의 책임을 누가 져야하겠니? 현 정부는 영해의 포기는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만약에 이 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에라도 간다면, 우리가 승소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33
'주님, 도대체 왜 이 모양들일까요?'
'뭘 말이냐?'
'남과 북 말입니다. 끝없는 불신과 폭력, 책임 떠넘기기, 난 절대로 책임질 일이 없고 모든 건 네 잘못이라는 유치한 싸움, 도대체 21세기에 이 무슨 못난 짓들인지 모르겠습니다.'
'21세기? 21세기에 달라진 게 있었더냐? 너희들은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주님! 세상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상식과 합리에 의해 본능이 조절되는 세상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아니,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너희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약육강식의 본능에 따라 살고 있어. 예를 들어 볼까? 너흰 단지 이익을 위해 다른 생명체의 자유를 빼앗고 그들이 당하는 극심한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 사람에게 인권이 있다면 다른 생명체에게도 생명권이 있는 건데, 너희는 너희들 멋대로 그들의 생존권을 짓밟고 심지어 뛰놀 수 있는 자유까지 박탈하고 있지 않느냐.'
'그건 좀 다른 문제 같습니다. 저는 지금 동물의 생존권 문제가 아니라···'
'다를 것이 무어냐? 너희는 우주 생물체가 지구를 습격하여 인간을 학살하는 영화도 곧잘 만들더구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아라. 만일 소나 돼지가 인간의 지능을 갖고 있고 인간이 그들의 지능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인간의 지능을 가진 소나 돼지가 단지 인간의 전염병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줄이기 위해 수만 또는 수십만 명의 인간을 생매장한다면 어떻겠느냐? 그건 이해될 수 있는 문제냐? 자기중심적인 생각, 오로지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무엇이냐? 답해 보거라.'
'······'
'할 말이 없는 게로군,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앗, 잠깐만요, 주님!'
'띠리리리 링링링!'
'하림'이라는 발신자 이름과 함께 배경화면으로 떠있는 아날로그 시계바늘이 이른 새벽 4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림아,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상우야, 나 북경에 급히 좀 다녀와야겠다."
"뭐? 갑자기 북경엔 왜?"
"전화로 얘기하기 곤란하니까 지금 좀 나와 줄래? 중요한 얘기야. 아침 9시 비행기라 시간이 없다."
"인천공항으로 말이냐?"
"그래, 1층 서점 앞으로 와라."
"하림아, 너 혹시, 또 무슨 일 저지른 거 아니지?"
"만나서 자세히 얘기해 줄게."
"뭐, 뭐? 북한을 방문해? 너 미쳤냐?"
"더 크게 얘기하지 그러냐? 아예 여기 간첩 있다고 소리 지르든가."
하림이 느물느물 웃었지만 주변을 살피는 표정에 평소와 달리 여유를 느낄 수는 없었다.
"아, 미안하다. 어떻게 된 거야?"
"사실 몇 달 전부터 북쪽 사람들하고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어."
"그럼, 혹시, 연평도 사건도 넌 미리 알고 있었냐?"
"이놈이 미쳤나? 걔네들이 아마추어냐? 그런 얘길 나한테 다 해주게?"
하림이 주먹을 쥐고 상우의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다.
"명준 형 일로 저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 동안 명준 형과 나누었던 얘기가 있는데 그 일을 계속 의논하고 싶다는 거야."
"걔네들이? 너같은 피라미하고?"
"그래! 걔네들 눈에도 내가 피라미로 보이겠지만 그래도 명준 형이 가고 없는 지금의 상태에서는 그나마 명준 형을 대신할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애. 문익환 목사님 생전에 그 분과 깊이 나누었던 얘기를 명준 형과 이어서 했던 것처럼."
"괜찮겠냐?"
"뭐가?"
하림이 여유를 찾았는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새끼! 그러다 너 마저 다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돼서 그런다."
"누가 나를? 북이? 남이?"
"새꺄, 난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냐!"
상우는 정말로 화가 나서 손바닥으로 하림의 왼쪽 어깨를 힘껏 쳤다.
"아야, 이놈이 사람 잡네. 너 힘 좋아졌구나, 히히히. 상우야, 걱정 마라. 너나 나나 이제 와서 겁날 게 뭐가 있냐? 아, 아니지. 너한텐 정순씨가 있지. 그럼, 그럼. 그러니까 넌 얌전히 잘 계셔야 된다 이 말씀이야, 알았지 상우야? 정순씨 속 썩이는 짓 그만 하고 좀 자중하고 있어."
하림은 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상우의 볼을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34
단상 중앙에 앉은 장영식은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조찬기도회 개회시간이 막 지나고 있었다.
"대통령께서 입장하셨습니다, 모두 기립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발언에 따라 참석자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손을 흔들고 입장한 대통령이 단상에 오르자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고 일부 참석자들은 환성을 올리며 대통령을 환영했다. 장영식은 양손으로 대통령의 손을 맞잡고 중앙의 자기 자리를 양보하며 앉으라는 시늉을 했지만 대통령은 장영식을 중앙석에 그대로 앉히고 자기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암, 그래야지, 목사를 섬길 줄 아는 장로 대통령이라! 이래서 대한민국이 축복받은 나라라는 거야!'
장영식은 혼잣말을 하며 흡족한 웃음을 만면 가득히 피워냈다. 박수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사회자의 요청인지 명령인지에 따라 참석한 사람들이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대통령과 함께 한다는 선민의식과 자부심으로 참석자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지금부터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대통령님의 환영사가 있으시겠습니다."
"와-아!"
대통령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강단 앞쪽으로 나오자 몇몇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 박수를 쳤다. 참석자들이 모두 따라 일어서 한동안 박수가 계속 됐다. 박수는 대통령이 그만 앉으라는 손짓을 할 때까지 이어졌다.
"고맙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계시기에 이 나라가 이렇게 안정된 번영을 누리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특유의 쉰듯한 목소리로 환영사를 시작했다.
"아-멘!"
"할렐루야!"
여기저기서 터져나온 함성이 실내를 가득 매웠다. 대통령이 다시 손을 들어 장내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실을 왜곡하고 나라의 분열을 획책하는 불순 세력이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할 분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5분이 조금 지나기까지 계속된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고 자기 차례가 되자 장영식은 험험 헛기침을 하고는 단상의 마이크를 빼들었다.
"기도합시다!"
장영식이 다짜고짜 목청을 높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얼떨결에 눈을 감고 두손을 모으기 바빴다.
"아버지이! 아버지이! 아버지이!"
우는 소리로 시작된 장영식의 기도가 빠르게 참석자들의 마음을 휘감았다. 청중을 단번에 사로잡는 장영식의 특기였다.
"주여!"
"아버지이!"
순식간에 장내 분위기는 장영식이 이끄는대로 흘러갔다. 갑자기 눈을 뜬 장영식이 장내를 살폈다. 경호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마땅치 않은지 미간을 찌푸리며 불편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팔짱을 끼고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다. 장영식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을 뜨는 천벌을 받을 놈들이 있다니!
"우리 다같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겠습니다!"
참석자들이 앞을 다투어 무릎을 꿇었다. 경호원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릎을 꿇을 생각도 기도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오직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못된 놈들이 있나! 장영식은 경호원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경호원들도 무릎을 꿇으세요!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겁니다!"
장영식은 대통령도 무릎을 꿇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한 분도 빠짐없이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대통령이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눈치를 보던 경호원들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 다같이, 사탄의 세력이 멸하도록, 이···"
장영식은 차마 다음 말을 잇지는 못했다. 마음속에서는 이슬람교, 불교, 민족종교들, 무속 등 다른 모든 종교들을 하나 하나 언급하며 사탄의 세력을 멸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었다. 하지만 종교문제만은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한 대통령의 부탁을 차마 그 면전에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사회적 사탄의 세력이 멸하도록, 천안함 사건을 일으키고 연평도에 포격을 가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에 대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임하도록, 좌파 빨갱이들의 음모와 모략을 분쇄하고 주님께서 이 나라를 지켜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주여 세 번을 외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알랄라칼라물랄라···"
장영식은 차마 이교도들 특히 이슬람의 세력을 멸하게 해 달라고 드러내놓고 기도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을 방언기도로 토해냈다. 장내는 순식간에 기도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와 흐느끼는 소리, 방언으로 기도하는 소리가 장내를 가득 매웠다.
한 숨을 돌린 장영식이 눈을 뜨고 사방을 살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통령도 무릎을 꿇은 채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쉰 목소리를 토해내며 기도하고 있었다. 오직 하나님의 탁월한 종이며 영적 지도자인 자신만이 당당히 서서 길 잃고 해매는 이 불쌍한 무리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장영식은 곁눈질로 대통령의 기도하는 모습을 살펴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