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것이 뭐데? 3000번을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고 있던 차에 아파트 앞 가판에
웬 떡입니까? 세상에 모시 송편이 다 있네요. 나 어릴 적 우리 집 토방마루엔, 모시 잎
넣어 방아 찌어온 햅쌀을 육남매가 줄줄이 큰 상에 둘러앉아서 우리 장남"해석이, 해석이"
하시던 친할머닐 따라 밤새도록 송편을 만들었지요. 씻은 쌀을 빻은 후 온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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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기를 조절하는데 많이 치댈수록 떡이 더 쫄깃해 진답니다. 전라도 담양 식 송편은
참깨와 설탕을 2:1 비율로 섞은 소(속)를 넣어 마르고 달도록 팔품을 팔아야 겨우 한나라
가득한 반죽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커다란 찜통에 방금 빚은 송편과 솔잎을 켜켜이
쌓아 찌면 옆구리 터진 놈, 찌그러진 놈, 군만두처럼 납작 한 놈들이 기어이 한입 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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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게 하였지요. 이 화기애매한 고통체험을 엔트리 넘버 4 진호까진 기억할 것 입니다.
요새는 토방마루(태방마루)가 가공되지 않은 것도 50만원씩 합니다. 식탁 크기의 태방
마루는 원형그대로 살려서 용도에 따라 받침대만 달아주면 됩니다. 저는 식탁 2개를
합친 크기의 아일랜드 스타일을 만들고 싶습니다. 아 유 레이디 헌팅 준비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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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에 살았던 우리 집 남자들은 일 년이면 고작해야 두 번 대중목욕탕에 갔었지요.
그때마다 호랑이 같은 울 어머닌 당신의 작품을 샘플로(우리 집 여자들) 영락없이
때 검사를 강행하였고 울 아버지와 형제는 매번 된서릴 맞아야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 나이 40대입니다. 울 어머니가 목소리가 더 큰 이유를 어른이 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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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았는데 공처가고 애처가고 차치하더라도 일단 때만 불려온 것이 사실이니까
도망친 것입니다. 목욕탕은 '담양극장' 앞에 하나가 있었고 나중에 내 친구 재홍 이네
골목에 '석이네 목욕탕'이 생겼는데 우리는 주로 '담양 목욕탕'으로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목욕탕을 가면 꼭 음료수를 사주셨습니다. 솔직히 말해 진호와 나는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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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는 음료수 한 병 먹겠다고 목욕탕에 간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시나브로 아들놈 데리고 목욕탕 가는 꿈은 저같은 딸기 아빠들의 숙원 사업입니다.
40년 전처럼 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 울 아버지 손잡고 아파트 단지 내 사우나를 갔습니다.
벌써 귀성 길에 오른 사람들이 많아서 헬스클럽도 목욕탕도 한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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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푸에 면도질은 아버지 용안에 굴곡이 많아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초벌 비누칠을 하고 세신을 하는데 밀어 도 밀어도 떼가 많이 나옵니다. 아.부.지
올해 82세 되신 아버지의 육체는 영양분이 다 빠지고 검은 버섯이 온 몸에
피어있었습니다. 엉덩이부터 사타구니 쪽은 욕창이 진행되기 직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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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내가 미쳤습니다.
울 아버지하고 밥도 같이 안 먹는 놈이 아버지를 덥석 껴안아 드렸습니다.
"아버지 아파요? 아니, 시원해." 이제 보니 제가 울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저는 목욕탕 가면 비누칠 딱 한번 하고 나옵니다. 어지간 만하면 탕에도 들어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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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목욕을 끝내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사지 육신이 멀쩡한 놈이 다른 사람에게
몸을 맡긴답니다. 이발소 아저씨에게 아버지를 소개하고 칡즙 하나를 시켰습니다.
그 옛날 울 아버지 따라 욕 간에 갔을 때처럼 2,000원의 행복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집에 들어오다가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저 낳기를 잘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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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한 밑천 잡아야할 텐데 추석날은 세뱃돈이 없으니 꽝 아닌가?
"누가 추석날 세배 돈 안 주기로 한 것이여?" "어머니, 왜 우리는 용돈을 한 번을 안 주시냐고?"
방금 쿠쿠 밥솥의 밥이 다 됐다고 거친 숨을 토해 냈습니다. 이 냄새는 뭐다냐?
쌀밥 냄새를 맡아보셨나요? 단백하고 순결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이 냄새를 아시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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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고 나오면서 마중 나온 찬 공기는 개운하고 상큼합니다. 진호는 아버지 자전거에
실어 보냈고, 나 홀로 목욕탕 뒤쪽 골목투어를 합니다. 목욕탕 뒤에는 골목이 두 개인데
삼천리 연탄 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두만이네 만화방을 거쳐 담양 태권도장을 거쳐야
십여 분 만에 집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영천상회 안 집으로 이사 오고 난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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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스냅 사진을 찍자고 하십니다. 내가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것은 울 어머니
DNA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누나들 둘이 곱게 차려 입은 한복 속에 우리 형제만 사복을
입었었는데 난 영 촌스런 순둥이처럼 나와 버렸네요. 진호가 입은 청색 점퍼는 지퍼가
많은 것이 내 옷보다 세 배는 비싼 옷이었는데 어깨에 호랑이 패치까지 붙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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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울 어머니 패션 감각이나 사이즈가 우리 동네에서는 1빠 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군것질을 시키거나 푼돈을 쓰시는데 반해 어머니는 옷을 사도 비싼 옷을 사
입혔습니다. 울 할머니 장사(葬事)를 끝으로 행방이 묘연한 다리 건너 복순이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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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교 앞 문방구 지행이네, 신랑죽고 혼자 산다던 내 손곱 색시 연희, 가기 싫지만
가야만 되는 공중변소에서 아침나절 줄서기. 차표 한 장으로 갔다 온 서울 구경 덕에
어깨 으쓱이며 폼 잡아도 먹히던 그 때 그 시절. 이젠 그렇게 정겹던 이웃과 친구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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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뿔이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없습니다. 그래서 송편을 빚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따스한 온기도 이제는 벽에 걸린 채로 바래버린 사진마냥, 아련히 멀어진 그리움이
되어서 눈시려올 만큼이나 어린 날의 추억이 많이 그립습니다.
2016.10.13.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