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 반도의 성스러운 도시
브라가(Braga) - 포르투갈
시인의 여행 journey
월간 시2021년 2월
p89 ~ 94
브라가는포르투갈의 정신적 수도로 오렌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국경 너머에 있다. 오렌세에서 아침 버스를 타고 떠났다. 아침에 캐리어를 싸서 국경을 넘어가는 버스에 실었다.
이런 루트로 여행하는 사람은 아마 나 하나일 것이다. 스페인 국경을 넘어와 포르투갈에 브라가 여행을 마치고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는 자연스럽게 국경을 넘는 경우가 없다. 그어진 38선은 지워지지도 않고 동족상잔의 비극 6.25에도 엎치락뒤치락, 새로 그어진 이념의 깊은 골은 70년이 지나도 메워지지 않고, 남북은 철조망이 가로막아 갈 수가 없는 땅이 되고 보니 국경을 넘을 때 여권에 도장이라도 찍어야 할 것 같지만 덜컹거림도 없는 것이 왠지 낯설다.
브라가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포르투갈 북부 국경 근처에 위치한 브라가주의 주도로서 스페인 갈라시아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포르투갈 미뉴주에 속한 도시로 리스본, 포르투에 이어 포르투갈에서 세 번째 큰 도시다.
포르투갈 신앙의 고향 브라가는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종교적 수도로 70여개 성당이 있다고 한다. 6세기부터 대주교가 다스리면서 남유럼 카톨릭의 수도 역할을 했다. 내륙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카바두 강을 끼고 있는 브라가는 포르투갈 북부의 허브 도시이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들리는 중요한 경유지이다. 종교에 관심이 많은 여행자들이 들리는 곳이기도 했다.
역사가 매우 오래되어,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있다. 기원전 136년에는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기원전 20년에 이 지역에 브라카라 아우구스타라는 이름으로 도시가 세워졌고, 3세기경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먼저 카톨릭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 후 아랍 영향권에 속해 있다가 서기 1000년 즈음이 되어서야 다시 카톨릭 영향권 안에 속하게 된다.
도시를 들러보면서 아랍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흔적이 철저히 파괴된 모양이다. 이슬람세력으로 부터 기독교 신앙을 지켜내려는 현실성의 필요에 의해 대항해 시대를 개척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대항해 시대의 리더 포르투갈의 땅을 처음 밟은 곳이 리스본이 아닌 브라가였다. 포르투갈은 내륙이 스페인과 접하고 있어 거친 대서양과 맞서 이겨야 하는 운명도 있었다.
브라가에 도착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시청이었다. 그곳에서 브라가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브라가 시청 건물은 제3의 도시 청사치곤 아담했지만 포르투갈에서 가장 정교한 바로크 양식의 외관을 지니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벽에는 아줄레쥬로 된 벽장식이 있었고 그런 장식은 군데군데에서 볼 수 있었다.
아줄레쥬라 불리는 포르투갈의 푸른 타일은 타일에 푸른 바다색이 난다. 대다수 카톨릭 종교 관련 건물들의 정면과 내부를 장식하는 화려하게 채색된 아라비아 타일이다. 아줄레쥬는 반짝반짝 윤을 낸 돌멩이라는 뜻의 아랍어 알 잘리즈 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하는데 건축에 타일을 활용하는 것은 이슬람 예술 고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아줄레쥬는 성당, 궁전, 미술관, 박물관에서 개인 주택에 이르기까지 쓰임새가 다양했는데, 건물주는 건물의 미관이나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혹은 가문과 관련 있는 여러 공적들을 남기기 위해 아줄레쥬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브라가 대성당은 포르투갈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브라가에서 중요한 기념물 중 하나로 역사적 예술적으로 손꼽히는 건축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풍요로운 건축물로 3개의 아치는 15세기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고 타워와 첨탑은 17세기 초기 바로크 양식을 사용했다. 브라가 대성당은 산티아고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이 자리 잡기 전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성당이며 교황청에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성당이다.
성당 앞에 서 있으니 왠지 중세로 여행을 온 듯 한 느낌도 들었다.
산타바바라 정원은 대주교 궁으로 사용하던 건물 바로 옆의 정원으로 현대식 정원으로 바꿨으나 석상의 분수를 그대로 있다. 도시 중간 중간에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데 메리골드와 사루비아로 도시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나는 우리나라도 틈이 있는 곳곳에 정원 가꾸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까만 꽃씨를 보며
꽃으로 필 나를 봅니다
붓꽃도 심고
아주까리도 심었습니다
누가 눈을 떠서
세상과 만날까 궁금합니다
나도 우주의 씨앗으로 왔습니다
내 이름에 맞는 꽃으로 피어야겠습니다
여서완 [꽃씨를 심으며]
정원이 아름다운 도시 브라가, 에베니다 센트럴 정원이 길게 이어져 있다. 우리는 현대적인 건물과 중세풍의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도시를 걸어서 다녔다. 산타바바라 정원 쪽으로 걷다보면 기념비 하나가 있다. 프란시스코 살바도 젠하로 1906년에 창단한 리스본연고의 축구팀 기념비이다. 브라가에는 포르투갈 축구 명문팀인 SC브라가가 유명하다. 또한 1973년 이곳에 국립미뉴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브라가에서는 매년 6월과 9월에 대규모 소 박람회가 열린다. 헤푸블리카 광장도 브라가의 상징이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공간이다. 브라가의 다양한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린다. 소로두 거리의 끝은 아르코 다 포르타 노바 새로 건설한 입구 아치가 장식하고 있다. 18세기에 지은 아치지만 로마시대 때부터 브라가의 주요 관문이라고 했다.
나의 여정은 원래 오렌세에서 마드리드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그곳에서 리스본까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스페인에서 공식 일정이 끝나고 나는 포르투갈 모르코 스페인3국 여행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오는 여행팀과 포르투갈의 코스타리아 해변의 호텔에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브라가 여행 일정을 모르고 기차와 비행기 티켓을 준비해서 떠났는데 대회 일정에 포르투갈의 브라가 여행 일정이 있었다.
대략의 계산으로 브라가에서 리스본까지 기차를 타고 갈 것이라고, 어쩌면 무모한 결정을 하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 이베리아 반도를 머릿속에 그리고 우리나라 지도에서 서해안 열차가 있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차를 타고 떠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이미 지불된 1박이 남아있는 호텔 숙박도 포기하고 다시 포르투갈에 추가로 호텔을 예약하기까지 했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연극배우로 오늘 팀들을 위해 연극을 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 대한 호감도 있는 그녀의 공연을 보지 못하고 떠나야 되는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그녀의 사진을 찍었다. 몹시 아쉬웠다. 브라가의 와인공장인 듯 한 커다란 식당에서 화사한 점심을 들며 브라가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뚱뚱한 체구의 갈리시아 회장이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주었다. 일반석은 구할 수 없었고 1등석을 예약할 수 있었다. 브라가에서 포루트까지 대략 한 시간 포르투에서 리스본까지 3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같이 왔던 팀들과도 아쉬운 이별의 순간을 뒤로하고 브라가에서 리스본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브라가가 멀어지고 포르투갈의 동네들이 다가왔다 멀어지고 기차는 동네 하나하나를 받아들였다가 덤벙덤벙 건너 뛰어갔다. 중간 귀착지인 포르투에서 기차가 한번 정차를 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냥 패스하는 포르투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여행지중의 하나이다. 도시가 불을 켜기 시작한다. 방심할 수 없는 혼자만의 여행길이었다. 기차는 리스본에 도착할 것이고 그곳에서 포르투갈의 해안마을 까지 찾아가는 일정이 남았다. 긴 여행의 서막에 설렘으로 기차는 달린다.
브라가 (1843-1924) 포르투갈의 화폐 속에 등장하는 포르투갈의 시인·비평가·정치가. 브라가 집안은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군주주의의 가풍을 지녔으나 브라가 자신은 곧 코임브라대학교에서 비타협적 공화주의와 교권 반대주의로 유명해졌다. 1872년 이후 리스본대학교의 현대문학 교수를 지냈다. 그의 장시〈시대의 비전〉(1864)은 빅토르 위고의 〈여러 세기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브라가는 포르투갈 문학에 대해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포르투갈 낭만주의의 역사〉·〈포르투갈 문학사〉를 남겼다. 투철한 공화주의자로서 1910년 포르투갈 공화국이 수립한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기차는 떠나고, 그녀는 떠나고....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나는 기차에 탔다. 비어있는 의자가 대부분이었다. 좌석은 넓고 편안했고 1등석이라 그랬는지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보낼 수 있었다.
리스본에 도착했다. 카메라 가방을 짊어지고 캐리어를 끌며 택시를 탔다. 스페인보다는 영어가 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여서완
시인이며 소설가이다. 사진작가이며 여행작가이기도 하다.
시집으로는 [태양의 알], [영혼의 속살], [하늘 두레박], [사랑이 되라] 외 다수가 있으며 현재 ‘여행문화’ 기획위원이며 조인컴 대표 컨설턴트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