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한 잔/ 수필과비평 제230호 2020.12.

[남정언1]

수필과비평 제230호 2020.12.

막걸리 한 잔 / 남정언

국내 민속주 1호, 막걸리 분야 식품 명인이 만들었다는 막걸리 한 병이 내 손에 들어왔다. 해발 400ｍ 금정산 기슭의 청정한 기후와 맑은 물로 빚어낸 술이다. 산성 막걸리를 거꾸로 돌려 살짝 흔든 후 뚜껑을 열었다. 노르스름한 빛깔에 걸쭉해 보이는 오백 년 전통의 누룩으로 만든 금정산성 막걸리는 순도 8도이다. 평균 막걸리 6도에 비해 세다는 느낌이다. 신선하게 톡 쏘는 알싸한 맛이 확 입안에 퍼진다.

장마가 길다. 비가 내리면 기름진 무엇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꿉꿉한 날엔 기름을 잔뜩 두른 김치전과 파전, 정구지 지짐이 최고였다. 기압이 가라앉은 비 사이에 전 냄새와 유독 잘 어울리는 술은 막걸리가 아니었을까.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막걸리를 한 잔 마시면 갈증 해소는 되지만 금방 취기가 올라 땀이 나고 온몸에 기운이 쑥 빠져나간다. 막걸리는 언제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마주한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에 맞장구치면서 막걸리를 마시면 어느 대목에선 서글퍼지고 복잡 미묘한 감정이 녹여진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실내놀이가 대유행이다. 달고나 커피를 만들고, 달걀흰자를 수천 번 저어 거품을 내거나, 술을 담근다. 명화를 복사한 그림을 그리면서, 내려받은 영화를 보며, 오래된 악기를 꺼내 새롭게 연주한다.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놀이를 찾아 매체에 올리는 재미로 버틴다. TV에선 <미스트트롯>으로 성장한 가수들이 계속 출연하여 답답한 시간을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원곡 가수보다 <막걸리 한 잔>을 화통하게 부른 젊은 가수가 장마철 눅눅해진 마음을 더욱 사로잡는다. 막걸리 한잔이 입이 아니라 귀에 들어와 찰랑 넘친다.

반짝이는 피부를 가진 셋째 언니는 막걸리를 사랑한다. 정년퇴직한 형부와 자주 반주로 마시는데 알코올 도수가 낮아 부담 없이 즐긴다. 막걸리는 음료에 가까워 마시면 배가 부르고 몸을 훈훈하게 데워 면역력을 올려준다며 한없이 자랑한다. 사실 막걸리 누룩이 피부미용에 좋고 살아있는 효모 유산균이 심혈관질환을 예방한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알고 보면 언니가 마시는 막걸리는 형부와 함께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더욱 빛나는 매개물이리라.

막걸리는 한자음 막걸리莫乞里이다. 막은 마구, 걸이는 거른다는 뜻으로 ‘막 걸러내는 술’이란 의미다. 막걸리는 색이 탁해서 탁주, 농사철에 빼놓을 수 없는 술이라 농주, 집집이 담그는 술이라 가주, 우리나라 대표적인 술이므로 국주라고도 부른다. 발효 술은 후각과 미각을 지키는 힘이 있다. 술 냄새를 알지 못하는 순간 과거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고 감각을 공유한 사람과의 기억을 앗아가 버리지 않을까. 감각이 없어지면 삶을 회복해 나가는 방식마저 잊어버릴까 두렵다.

영화 <퍼팩트 센스>가 개봉된 지 십여 년 전이다. 풀리지 않는 이상한 현상을 연구하던 과학자 수잔은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에게 요리사 마이클이 나타난다. 수잔은 마이클이 해 주는 음식을 먹다가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슬픈 감정을 나누고 사랑에 빠진다. 때마침 세계 곳곳에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져 사람들은 24시간 이내 감각을 잃고 갑자기 난폭해진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차의 맛과 향을 느끼지 못하고 다음엔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상태로 변한다. 수잔과 마이클 역시 기억과 추억의 냄새에 이어진 끈을 모두 잃어버린다. 참을 수 없는 허기는 감각을 상실한 상태이고 감정의 허기를 느낀 사람들은 추억을 기록하려 하지만 전혀 느낄 수 없다. 비로소 전염병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바이러스를 역추적하면서 상대를 용서하고 아픔을 이겨내려 하는데 마지막 남은 촉각마저 사라진다. 평범한 연인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서로 몸을 밀착시키며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영화는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재난 상황을 말하면서 동시에 인류가 나아갈 바를 알리는 경고 메시지였다.

얼마 전, 일흔 넘은 문우님이 대학 입학을 했다. 인생을 즐겨도 좋을 나이인데 만학도의 꿈을 안고 양조발효학과에 다닌다. 술 담그는 법을 잘 배워서 수제 막걸리와 맥주를 만들고 싶단다. 어릴 적부터 술 익는 냄새가 참 좋았다는 그는 술과 어울리는 음식을 만들며 여유 있게 노년을 보내려 한다.

막걸리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요리법을 찾았다. 고두밥을 쪄서 식혔다. 누룩가루를 섞어 항아리에 넣고 물을 부어 치댄다. 바람이 잘 통하는 베란다 그늘에서 적정 온도를 유지하며 일주일 정도 발효 시간이 흘러 술덧이 완성되었다. 술덧을 체에 걸러 한 배 반 정도의 물을 섞어 다시 한번 걸러내 술을 완성했지만 내가 만든 막걸리는 발효 시간을 넘겨 식초가 될 뻔했다. 좋은 막걸리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아직 멀었다.

막걸리 명인은 물과 누룩이 익는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단다. “보글 폭 뽀르르” 누룩 숨소리만 들려도 맛있다는 감이 온단다. 손가락 하나로 휘휘 저어 찍어서 맛을 알아차리는 달인처럼 막걸리가 익어가는 감각을 얼른 잡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죽음은 모든 감각을 잃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느끼는 가장 완벽한 감각은 오감五感이 아니라 육감肉感이리라.

막걸리 한 병을 혼자 마시기는 아쉽다. 역병이 자리한 세상이라 불안하지만 시름을 위로하며 추임새를 불러일으키는 막걸리에 감정이입 된다. 때가 때인 만큼 서로 감싸는 마음이 필요한 때다. 한숨 자고 나면 건강한 세상이 되기를 태평세월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면서 우리 함께 ‘막걸리 한 잔’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