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 모집 인원이 꾸준히 증가하여 전체 모집 정원의 57%를 넘었다. 그러나 대구 학생들은 여전히 정시 모집만 대비하고 있다. 논술, 심층면접, 입학사정관제, 비교과자료 반영 등을 중시하는 수시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나? 대구시교육청과 학교가 수시 준비에는 소홀하고 점점 모집 정원이 줄어드는 (경쟁률은 그 반대로 점점 높아지는) 정시 모집에만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나? 잘못된 진학지도 정책을 고집하고 있는 대구시교육청과 교육청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입시산업 업자의 뇌물을 받아챙기는 쏠쏠한 재미를 누리려는 일부 학교의 잘못된 교육자들(그런데 그들이 학교의 실세이니 그게 문제) 탓에
아무 죄도 없는 우리 대구 아이들은 평생의 한을 안게 되는 것이다. (아래의 기사는 대구 수험생은 보수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대구 아이들이라고 어디 스스로 수시 모집을 외면하고 정시 모집에 매달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대구시교육청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
나는 2002년 이후 대학입시 제도가 본격적으로 바뀐다는 사실이 예고되었던 1999년 매일신문에 '바뀐 대학입시 제도,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발표한 이래 독서와 논술(글쓰기, 말하기), 그리고 전형자료 중 비교과 영역(리더십 등)의 중요성을 거듭 말해왔다.
매일신문 주최 학부모 초청 대학입시 설명회 강사, 영남일보 주최 학부모 초청 대학입시 설명회 강사 등으로 강연을 할 때마다, <2002 대학 제대로 가기>, <대학입시와 대구교육> 등의 교육평론집을 저술해가면서까지 그렇게 주장하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대구시교육청은 바뀐 입시제도의 성격과 반대가 되는 구태의연한 암기 중심 객관식 위주 수능 대비형 전체주의 입시정책만 되풀이했다. 수능 대비 입시 참고서와 문제집, 사설 모의고사를 판매하는 입시산업 업자는 리베이트를 제공하여 그들을 조종했고, 결국 우리 대구 학생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구 학생들은 논술, 심층면접, 입시사정관 제도에 대비되는 교육을 받지 못해 수시모집에 원서로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수능 준비를(정시모집 대비를) 철저히 하면 된다고 강조해온 대구시교육청의 입시정책에 순종했지만 수능 성적 자체도 형편없이 하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4년제 대학 진학률이 대구는 2009학년도에 65.1%에 불과하다. 부산은 78.6%, 광주와 울산은 74.0%, 대전은 68.2%이다. 대구 학생들은 부산이나 광주, 울산에 비해 1년에 3,500명 정도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실정인 것이다. (대구의 고교생은 1개 학년당 학생이 약 3만5천명)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논술, 심층면접, 비교과영역 전형자료 등이 중시되는 수시 모집을 외면하고 대구시교육청은 수능점수가 상대적으로 중시되는 정시 모집에 매달렸지만 수능 1-4 등급 비율이 지난 4년 동안 2배나 추락하였다. 언어는 16개 시도 중 8위가 되었고, 수리가는 9위, 수리나는 5위, 외국어는 6위로 내려앉았다. 전국에서 가장 열심히 0교시 수업을 하고, 밤늦게까지 심야 강제 자습을 하고, 전국에서 가장 자주 사설모의고사를 치느라 수업도 안하고 진도도 안 나가면서 난리를 치는데도 (전국에서 가장 사설모의고사 치는 일에 열심인데도 학부모들이 교육청에 몰려와 사설 모의고사를 치게 해달라고 시위를 하는 곳이 대구인데) 수능 성적은 점점 하락하고 있으니 문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결국 0교시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결국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붙잡아 놓아 심야에 학원에 간 아이들이 학교 본 수업 시간에는 잠이나 자도록 만드는 일을 이제는 그만두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침밥 굶고, 밤늦게까지 교실에서 자습한 아이들이 성적은 오히려 떨어진다는 게 정설인데
어째서 대구는 그토록 구태의연하고, 아이들 건강해치고, 학습 효율성 낮추는 낡은 주입식 암기식 전체주의적 입시정책을 고집하나.
수능시험 대비용 입시문제집, 참고서, 사설 모의고사를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대구 시내 입시 산업계의 큰손이 얼마 전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대구시교육청의 고위 간부에게 뇌물을 준 게 들통났던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오늘 나는 우연히 '정만진 공부법'이라는 착상을 하였다. 추석 차례를 지내고 책을 읽고 있던 중 문득 뇌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래서 지금 그 결과를 써서 올리려고 한다. 이 글이 대구 학생들의 앞날을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정독을 하라.
정독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읽기만 하고 그 내용을 모르면 무슨 소용이 있나. (배경지식의 문제) 내용은 대충 이해했지만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 없으면 그 역시 문제 아닌가. (독창적 사고) 논술고사나 심층면접을 받으러 가면 언제나 시험관은 묻는다. 세상이 이런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나? 이때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이야기하면 점수는 없다. '족집게' 입시학원에서 배운 대로 답변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시험관이 요구하는 것은 '독창적'인 답변이니 교과서에 나오거나, 대학(원)생들이 공부하는 전공 서적에 나오는 지식을 활용하여 답변해봐야 무효인 것이다.
나 나름대로의 답변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책을 읽을 때마다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밑줄을 그어가면서 저자의 주장(논설문)과 해설(설명문)에 의문을 표시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사고력이 늘고, 논리적 구성력이 는다. 그런 치밀한 정독 훈력을 거듭해야 나만의 독창적인 표현력이 는다.
정독을 하라. 옛날부터 다독(多讀)을 하라고 했지만, 무턱댄 다독은 별무의미. 정독을 해야 진정한 독서가 되고, 그래야 독해력이 는다. 독해력이 는다는 말은 사고력이 는다는 말이고, 곧 구성 능력이 신장된다는 뜻이니 어찌 정독을 하지 않겠는가. 특히 논술고사, 심층면접, 입시사정관 전형이 점점 위력을 발휘해가고 있는 이 마당에.
만이(많이) 쓰라.
우리나라 초등학교 아이들을 잡는 것 중 한 가지가 하루 종일 같은 문제를 반복하여 풀도록 하는 학습법이다. 1+2=3을 알면 충분히 4+5도 알 수 있고, 6+7=13을 알면 8+9도 알 수 있는데, 비슷한 문제 수백 개를 주면서 답을 달라고 한다. 원리와 개념을 알면 유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공부'는 그저 '(단순)노동'임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다르다. 개념을 알고 원리를 안다고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알면 물론 도움은 되지만, 곧장 현실적으로 글쓰기 능력이 신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계속 써보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만(많)이 써보아야 한다. 이론만 알았지 공을 직접 차 본 것은 몇 번 안 되는 사람이 어떻게 축구 선수가 될 수 있겠는가. 수영 이론만 공부했지 물에는 별로 안 들어가본 사람이 어떻게 포항에서 독도까지 헤엄을 칠 수 있겠는가.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초중고에서는 글을 별로 써보지 않은 교사들이 이론적으로 집필과 퇴고(속칭 첨삭지도)를 가르치지만 대학에 가면 글쓰기가 '실습'과목인 것을 생각해보라. 결국 잘 쓰려면 만(많)이 만(많)이 써보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만(많)이 써본 사람은 말도 잘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니 왜 그같은 일석이조를 실천하지 않겠나.
진심으로 말하라. 논술이든 심층면접이든, 입학사정관제이든 진심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다. 상대인 시험관은 적어도 박사에 교수인데 고등학생 정도의 수험생이 거짓으로 답변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진심이 아니면 당장 앞뒤가 맞지 않고,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말하면서 시험관의 눈치를 살피게 되며, 어제 한 말(이미 제출한 자기소개서 등의 자료)과 지금 논술 답안, 심층면접시, 입학사정관 앞에서 하는 말에 논리적 일관성도 없다.
언제나 진심으로 말하라. 그것이 비록 나의 단견을 드러낸다 할지라도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말하는 것을 습관화하면 그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은 내 생각인가? 주위 사람들이 함부로 하는 말을 듣고 부화뇌동하는 것은 아닌가? 듣는이(시험관 등)의 눈치를 보느라고 엉뚱한 말을 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누가 내 말 중 어느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한다면 나는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등등.
날마다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이런 질문들을 하는 데 습관이 붙으면 어찌 진심이 아닌 소리를 발설할 것이며, 횡설수설, 곡학아세의 허위의식을 드러낼 것인가. 비록 지식이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시험관은 당신의 진정성을 헤아려줄 것이며, 따라서 좋은 결과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상대를 속이려고 하지 말라. 그것도 나보다 한참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시험관)을.
정독을 하라.
만(많)이 쓰라.
진심으로 말하라.
이것이 바로 논술, 심층면접, 대학입시사정관 제도와 같은 새 시대의 입시전형 자료에 부응하는 공부법이다.
[참고]
1997년에 신문에 썼던 글을 새로 읽어보니 내용이 같았다.
성경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는데, 과연 나도 사람이라
10년 이상 세월이 흘러도 별로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나의 주장이 예나제나 '진리'이던가!
지난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본다.
‘글쓰기’의 철학
『생의 한 가운데』를 쓴 루이제 린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사람과 그 사람이 쓴 글은 같다.」
『동국이상국집』을 남긴 이규보는 이렇게 말했다.「글쓴이의 마음에서 우러난 것은 반드시 그 글 속에 있다.」
『열하일기』의 박지원은 또 이렇게 말했다.「글을 쓰는 데에는 오직 진실해야 하는 것뿐이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는 나에게 달렸고, 칭찬하거나 비방하는 일은 남에게 달렸다.」
그런가 하면, 세계속담사전을 뒤지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속담도 발견하게 된다. 「너를 가장 닮은 것은 네가 쓴 글이다.」
글은 본래 말보다 상류사회의 것이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물론 누구나 유창한 언변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제도교육을 받지 않고서도 과거 시험 등에 응시할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당연히 집권층은 상류사회 자제들에게만 제도교육의 혜택을 베풀었고, 그 결과 그들만이 글을 쓸 줄 알게 되었다. 지금도 이른바 일류대학권에 드는 학교들만이 논술고사를 치른다. 글은 여전히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가?
아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다만 글을 쓰려면 그 글 속에 자기 자신이 남김없이 투영된다는 사실만 각오하면 된다. 겉으로 육체를 노출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나 자신을 남 앞에 송두리째 내놓는 것이 바로 글쓰기라는 점만 인정하면 된다. 그러므로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솔직하고 정직해야 한다. 숨기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려는 자세부터 갖추어야 한다. 당연히, 논술고사에 응시하는 수험생도 그 기본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나의 문체로 가감없이 써야 옳다. 그것이 나에게 더 좋은 점수를 줄 것인가, 아니면 불리한 점수를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기 정체성이 불분명한 글로는 결코 남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솔직한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만, 넘쳐 흐르더라도 거짓으로 포장된 사람은 결코 남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치의 정신이다.)
이제 김시습의 충고를 한 번 되새겨보자.『금오신화』의 김시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많은 말로 헛되게 꾸미지 말라. 첫머리에서 끝까지 일관하여 한 구절 한 구절, 한 자 한 자가 정성과 간곡함으로 밖으로 퍼져 나오게 하라. 그것이 곧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지름길이다.」그렇다. 교언영색은 논술의 참 자세가 아니다. 투박하고 진솔한 어투로 꼭 필요한 말만 적으라. 왜냐하면, 논술은 ‘인간학’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논술시험은 바로 그런 청년을 키우기 위한 좋은 시험 제도라는 것이다. ●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