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이자야
젊어 한때 남편의 직장을 따라 잠시 지방 소도시에서 산 적이 있었다. 작은 항구 도시에서 내가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아이들을 키우며 아침마다 날아오는 그곳 지방신문을 읽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신문을 펼쳤더니, 이상한 광고 하나가 실려 있었다. 「그 여자는 보시오!」라는 제목 아래 제법 장황한 사연이 적힌 큼직한 광고였다.
광고 문안은 이러했다.
그 여자는 보시오!
어제 아침 7시 36분 동명동에서 출발한 163번 버스 앞머리에 탄 30대의 여인에게 이 글을 씁니다. 당신은 오늘 내가 모쪼록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정장에 넥타이까지 매고서 말끔하게 나선 나의 구두를 짓밟았습니다. 물론 북적대는 차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 충분히 이해는 하는 바이오. 그렇지만 남의 구두를 밟았으면 ‘죄송합니다.’라는 한 마디 인사말은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도 당신이란 여자는 아주 교만한 자세로 내 구두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 산 바라기를 하고 있었소. 나는 참으로 괘씸했소이다. 적어도 제법 교양 있게 생긴 여자가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나는 종일 생각한 끝에 그렇게 무례한 그 여자에게 이 나라 남성의 이름으로 경고를 해두고자 이 광고를 내기로 했소. 나에게 내일 아침, 이 지면을 통해 정식으로 사과 광고를 내시오! 그 여자는 하늘색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를 입은 키 155센티미터 가까운 여자였소. 손톱만큼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내일 조간신문에 사과문을 실어주길 강력히 요구하는 바이오. 만약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정체를 밝혀 소송을 제기할 것이오.
- 김광호 올림
살다 보니 별 희한한 광고가 다 나온다 싶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바로 어제 그 신문에 대한 대응 광고가 큼직하게 실려 있는 것이었다.
밴댕이 소갈머리 남자에게!
어제 아침 7시 30분쯤 163번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가 기우뚱하는 바람에 옆 남자의 구두를 밟았던 여인이 바로 납니다. 어제 댁의 광고를 읽고 하도 기가 막혀 이 광고를 냅니다. 비록 내가 번잡한 시내버스 안에서 실수로 구두를 한 번 밟았기로서니 그걸 가지고 신문광고까지 내는 소갈머리 없는 남자인 그대에게 반성의 글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당신은 남자로서의 신사도도 없고 그런 소견머리로는 출세도 못 할 것입니다. 진정 남자라면 신문에 광고까지 낸 자신의 좁은 소견머리를 반성하는 내용을 상세하게 내일 아침, 이 신문에 내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기다리겠습니다.
- 오정자 올림
아니, 이건 또 뭐야? 나는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발 한번 밟혔다고 광고 내는 남자나 그런 남자에게 분을 풀지 못해 반성문을 요구하는 여자에게 헛웃음이 나왔다. 아침 저자거리에 나갔더니, 벌써 여자들이 그 광고를 읽었는지 사방에서 그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찬거리를 들고 집으로 왔더니 남편도 그 광고를 들고 껄껄거리고 있었다.
덩달아 나도 다음 날 아침 신문이 궁금했다. 눈을 뜨자마자 문 앞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광고문이 큼직하게 실려 있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여자에게!
참 기막히게 오만한 여자구려. 예부터 이 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오. 남의 구두를 밟았으면 ‘죄송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사과는 못 할망정 되레 나더러 반성문을 실으라고 소리치는 그대. 오만하기 그지없는 여자는 도대체 누구시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여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소. 비겁하게 신문광고로 다툴 게 아니라 어디 우리 정식으로 만나서 한번 따져 봅시다. 내 요구에 응할 것인지, 여부를 내일 아침 신문에서 기다리겠소.
- 정의를 사랑하는 남자
점입가경이었다. 남자는 정식으로 여자와 만날 것을 제의했다. 집 앞 세탁소에 세탁물을 들고 갔더니 골목골목 사람들이 신문을 들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세탁소 주인이 나에게 물었다.
“사모님? 과연 그 여자가 이 남자 요구에 응할까요?”
“못할 게 뭐 있어요. 나라면 끝까지 한번 붙어 보겠네.”
그러자 세탁소 주인이 허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여잔데. 두고 보시오. 내일 아침 신문엔 그 여자 광고는 안 나올 테니까.”
“나와요. 내기할래요?”
“정말 할까요? 나오면 내가 자장면 살게요. 안 나오면 어쩔래요?”
“그럼 내가 우동 한 그릇 살게요.”
우리는 내기까지 걸었다. 나는 밤에도 두어 번 잠이 깨었다. 자꾸 내일 아침 조간신문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이튿날 대문 안에 신문 떨어지는 소릴 듣고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집어보니 여인의 광고가 큼직하게 실려 있었다.
세상의 여자들을 대신하여!
그대 소견머리 좁은 남성이여! 만나자면 내가 못 만날 것 같아요? 난 그대 남자 씨에게 잘못한 게 손톱만큼도 없어요. 오히려 신문에 광고를 내어 망신을 준 건 당신 아니에요? 말하세요. 어디서 만날까요? 장소와 시간을 내일 아침 신문에 알려 주세요!
- 여성의 명예를 짊어진 여자
물론 그날 점심은 세탁소 주인이 산 자장면으로 때웠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신문이었다. 밤새 가슴을 졸였다. 남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밤중에 남편은 유난히 들락날락 화장실을 드나들었다. 이튿날 조간신문이 오자 남편이 먼저 뛰어나가 신문을 들고 들어왔다.
“이거 보라고! 그 남자 광고가 또 나왔는데?”
“뭐라고 났어요?”
“뻔뻔한 여자에게!”
나는 남편의 손에서 신문을 가로채서 읽기 시작했다.
뻔뻔한 여자에게!
참으로 가증스럽소. 사과는커녕 큰소리를 치는 그대 여자의 콧대를 눌러 놓아야겠소. 내일모레 4월 11일 오후 2시 동명동 ‘마로니에 레스토랑’에서 만납시다. 나는 빨간 넥타이에 검은색 양복, 그리고 갈색 안경을 쓰고 나가겠소. 비겁하게 꼬리 빼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 줄 것을 바라오. 내일 조간신문을 기다리겠소.
- 정의에 살고 정의에 죽는 남자
그날 아침 나는 창문을 열고 거리를 내다보았다. 골목마다 시민들이 그 신문을 들고 쑤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음이 동해서 집안에 박혀 있을 수가 없었다. 또 세탁소 아저씨를 찾아갔다.
“아저씨 내기해요. 내일 그 여자가 응할까요?”
“그 여자가 미쳤냐? 그런 미친놈 광고에 대면까지 하게?”
“안 그럴걸요. 나라면 끝까지 붙어보겠어요.”
“붙어보면 승산이 있고?”
그 말에 옆에 있던 세탁소 안주인이 달려들었다.
“승산 없을 게 뭐야. 그 여자가 죄지었나?”
“죄짓지 않고? 아침부터 남의 구두는 왜 밟아?”
“그 여자가 밟고 싶어 밟았나? 버스가 기우뚱하니까 밟았지.”
“그럼 정중하게 사과라도 해야지.”
“흥, 그까짓 일로 사과는 뭔 사과야.”
세탁소 안주인이 한 마디로 남편을 몰아붙였다. 주인 남자가 버럭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까짓 일이라니? 여자가 그렇게 싸가지가 없으면 안 되지!”
“싸가지? 진짜 싸가진 그 남자가 없네. 그까짓 일로 신문광고는 왜 내?”
“아니 이놈의 여편네가? 엇다대고 눈알을 부라려?”
보아하니 세탁소 주인 부부가 대판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밤마다 술타령에 자정이 훨씬 지나야 귀가하던 남편이 그날 밤은 일찍 들어왔다.
“회사 직원들이 일은 안 하고 그 광고 얘기에 정신이 없어.”
정신없는 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조간신문이 왔다. 나는 허둥지둥 신문부터 펴들었다.
싸가지 없는 남자에게!
그래, 만나요. 동명동 ‘마로니에 레스토랑’이라고 했죠? 물론 나가요. 나는 노란 원피스에 빨간 하이힐, 그리고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갈 거예요. 내일 오후 2시, 동명동 ‘마로니에 레스토랑’에서 만나요.
- 여권신장을 위해 애쓰는 여자
그날 나는 끝내 동명동 ‘마로니에 레스토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정오쯤 버스에 올랐는데 이건 차가 비좁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차가 그 레스토랑 근처에 가까워지면서 교통체증으로 옴짝달싹을 못 하는 것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했다. 벌써 어디서 그런 인파가 몰려들었는지 인산인해가 따로 없었다. 저마다 그 ‘마로니에 레스토랑’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에 휩쓸려 그들의 약속 시각 10여 분 전에 겨우 그 건물 앞에 갈 수 있었다. 3층짜리 건물이었다. 새로 지은 건물은 깔끔했다. 건물 앞에는 넓은 주차장도 있었고 주변에는 나무와 화초들이 어울려 첫눈에도 고급 레스토랑으로 보였다.
그 넓은 주차장에는 오늘의 두 주인공을 보러온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군중은 주차장을 지나 주택가까지 몰려들었다. 이들을 제지하는 경찰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 번쩍하였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다가왔다. 잠시 후 3층 옥상으로 잘생긴 남자 둘이 뛰어 올라갔다. 그들은 둘둘 말아 붙인 플래카드를 운반하고 있었다. 그들이 옥상 위에서 뭐라고 소리를 쳤다. 호루라기 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두 남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남자는 옥상에서 들고 있던 플래카드를 아래로 펼쳐 내렸다. 플래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 축 -
신장개업! 마로니에 레스토랑!
신문광고를 보고 우리 레스토랑을 찾아주신
시민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자야
• 월간 『수필문학』, 『문화마당』(1989) 시, 『문학세계』 평론 등단
• 한국문인협회 편집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심의위원, 칼럼리스트,
• 월간 『수필문학』 편집국장, 『수필뜨락』 편집주간, 도서출판 미담길 대표
• 경기신문 오피니언 필진, 문학신문 연재, 대야신문 칼럼 연재 중
• 수필집 : 『세상을 찍는 사진사』, 『호박꽃』. 소설집 : 『꽃다운 내 청춘』 외 8종
• 수상 : 원종린 문학상, 수필문학상, 환경부장관상, 구름카페문학상 외 다수
첫댓글 안녕하세요. 강남구(종홍) 선생님 작품과 이자야 두 편 올렸습니다.
지난 호에 작품을 올렸으나 수록하지 않았더군요. 꼭 확인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참 재미있는 꽁트군요. 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