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의 갈등문제로 시작합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듣고, 자기 제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시켜서,
3 예수께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예수님이 구약성서에 예언된 그 메시아냐고 물어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병자가 낫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전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떠나는 그들에게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노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는 최후통첩일 것이라고 현대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서로 경쟁하던 관계는 여기서 끝내고 이제 예수님이 주도적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경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저자는 세례 요한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습니다. 11~13절을 보겠습니다.
1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13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 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세례 요한을 예수 이전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다가오는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아무리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고 말함으로써 옛 시대는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끝이 났고 이제는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하나님나라 운동이 펼쳐지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들을 꾸짖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21~24절을 보겠습니다.
21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에게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모두 갈릴리와 그 주변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초기의 예수 사역이 예수님이 나고 자라신 고향 지역에서 만만치 않은 저항에 부딪쳤음을 나타내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본문은 다시 복음에 대한 자신감으로 이어집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의 주재자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사람들, 그러니까 복음이 옛 질서의 기득권자들에게는 감추어졌고, 어린 아이 같이 순순한 사람에게는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바로 그들, 그러니까 옛 질서에 물들지 않은,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초청하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28~30절을 보겠습니다.
28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멍에는 말이나 소가 밭을 갈 때 쓰는 농기구인데, 땅을 파는 쇠갈고리를 나무 막대와 연결해서 소나 말의 어깨에 걸치는 기구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멍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와 짐도 있기는 있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멍에와 짐은 가볍고 편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런 복음의 정신에 충실한 교회들도 많지만 우리 한국에는 그렇지 못한 교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전해주신 사랑과 포용의 복음을 배타적인 교리로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의 기독교 이대로 좋은지, 오늘의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지,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