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화(茶花)
어느 다인이 차(茶) 잡지에 기고한 '다도 준비'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찻자리에서 가장 신경 써야할 것은 다화(茶花)라고 한다. 아무리 찻자리를 잘 준비해도 다화를 소홀히 하면 그 격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전통 다도는 꽃을 꺾어 찻자리를 꾸미는 것보다 경관이 좋은 곳에 정자를 만들고 자연 그대로를 즐기며 차를 음미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다도의 자리 에 다화를 놓는 것은 일본식 차 문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내가 간간이 다화를 준비하는 것은 새로운 찻자리를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에서다. 차인이라면 있는 그대로 차를 대하는 게 옳은 자세일 것이나 어떤 행다법에 앞서 우리 차실을 찾아오는 분들에게 작은 정성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부쩍 늘고 있는 우리나라 다인들의 차모임에도 다화를 준비하는 게 유행이나 자칫 소홀히 하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다화는 제 철에 나는 야생화나 화려하지 않는 꽃으로 자연스럽게 꽂아 두는 게 좋다. 이른 봄엔 매화, 초여름엔 도라지꽃이나 달맞이가 어울린다. 꼭 밤에만 피는 달맞이는 차실에서도 꽃을 피워 차향이 새롭다. 가을엔 코스모스 몇 송이에 억새를 섞어 꽂아 두면 차실에 오는 누구든지 시인이 되고 만다.
어느 해 초겨울 한국 우리 집 차실로 먼 곳에 살고 계신 노부부를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고픈 마음으로 야생화를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12월 초저녁 무렵이었다. 근처 산을 몇 시간이고 헤맸지만 찾지 못하고 낙심하여 돌아오는 길에 비탈진 계곡에 있는 감국을 발견하곤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 날 작은 옹기화병에 싸리 몇 가지와 함께 감국을 그냥 꽂아 두었음에도 찾아오는 이들은 탄성을 지르며 감탄하던 그 찻자리는 고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매주 금요일의 우리 집은 아침부터 늘 분주해진다. 여러 지인들이 찾아와 차와 함께 밤늦도록 담소를 나누기 때문이다. 한 시간 정도 걸리는 북쪽 산 입구에 있는 작은 바위틈 샘터에서 물을 길러 오고 다구들을 씻는 게 고작이지만 우리 차실은 늘 부산하다. 딱히 할 일도 없음에도 누군가를 맞이한다는 그 설렘 때문이리라. 차실에 오는 분들은 대부분 우리 교민들이지만 가끔씩 유럽계 백인들과 아시안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유난히 화려한 꽃을 좋아하고 겉모습의 형식을 따르는 서양인들은 간결하고 담백한 그러면서 개성 있는 우리의 찻잔들을 보고 감탄한다. 또한 우리 다구들과 조화를 이뤄 원목 송판 위에 다소 곳 놓여 있는 다화에 눈길이 미치면 차 향기에 앞서 그만 매료되고 만다. 우리 도자기의 참 멋은 간결함과 단순함에 있다. 그들이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그 맑음과 고요함이 주는 충만함 때문이다.
근자, 웰빙 바람에 편승해 부쩍 차를 좋아하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 차 문화도 새롭게 바뀌고 있다. 찻자리에 많은 음식을 준비하였는가 하면 비싼 차를 자랑삼아 내 놓고 요란스럽게 와인파티처럼 어울리는 모임들을 엿 볼 수 있었다. 차는 영양학적으로 더없이 좋은 기호식품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을 대하는 과정이 더 소중하다. 찻물을 끓이고 식기까지의 여유와 차가 우려지는 그 과정을 기다리는 고요함도 하나의 명상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영양학적인 것을 섭취할 목적이라면 굳이 비싼 차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그 어떤 것을 우리가 섭취할 때, 그것을 가꾸고 준비한 분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 그것을 대하는 정성과 함께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웰빙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좋은 수돗물을 정화하여 공급한다 하여도 수도관이 녹슬어 있고 저수조가 깨끗하지 않다면 소용없는 이치와 같다.
내가 한 번씩 다화를 준비하는 까닭은 손님들을 위한 마음 씀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준비하고 기다림의 설렘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다. 다화 준비가 끝나면 내가 첫 번째 손님이 되어 차실에 들어가 본다. 절기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 꽃들을 볼 때마다 내 안의 작은 우주를 만난다. 더러는 다화 없는 찻자리를 가질 때도 있다. 다화가 없다면 또 어떤가. 좋은 물을 길어와 옹기에 앉혀 두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그 두군거림의 미학, 물은 침잔 되고 물과 함께 순화된 마음은 더 맑아져 그 웃음으로 오는 이 맞이한다면 이 또한 좋은 다화가 아닐지.
글: 자명
첫댓글 좋은 시 한편 단정히 읽는 기분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다도에 대한 예를 많이도 갖추어 음미하곤 하였는데 여기 와서는 머그잔의 크다란 잔에 놀라는 다문화를 잊어가던 중이었습니다. 이젠 모닝커피로 하루를 열어가는 서양인이 어슬프게 되어가는 중이고 보니,
오늘 새삼 자명선생님의 철 따른 꽃을 꽂아 손님을 맞을 준비에 설렘을 함께 나눕니다. 다화의 분위기에 함께 설렙니다.
반갑습니다.
서울 이른 아침 3월의 3시22분 입니다.
차를 우리며 오랜만에 들어 오니 선생님의 글이 있어 감동입니다.
어딜가나 여행시 옷은 그닥 챙기지 않아도 꼭 차는 챙겨 다니기에 이른 새벽
눈을 떠도 심심하지 않습니다.
차는 혼자 놀기에 가장 좋은 벗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부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