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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회 이현래 목사의 즉시복음
생명의 흐름
2022. 12. 8
우리 교회는 원래부터 생명의 흐름을 따라왔다. 시작할 때 교회의 그림을 그려놓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씨를 뿌려놓고 ‘싹이 나는 것을 보자.’고 했다. 그러려면 미리 그림이 있으면 안된다.
기독교라는 것이 교회라는 그림이 먼저 있고 거기서 출발했다. 신학교에서 배우고 전통에서 배운 것이 있어서 교회라는 그림이 있다. 하려면 아예 천주교처럼 하면 나을 텐데 개신교는 그런 것이 없이 배운 것과 전통에 맞추려고 하다 보니 세상과 합류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사람을 앞에 내 세우려니 도저히 간판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 위대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사람, 십자가에 못박혀 못내려오고 죽은 사람을 간판으로 하면 어디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시니 두려워 숨었다고 했다. 나무 뒤에 숨은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가 지나고 사도시대가 지나고 나니까, 예수라는 간판은 세상에 내놓을 만한 간판이 되지 못했다. 세상에서는 위대한 사람, 유명한 사람을 신의 아들이라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시이저도 신의 아들이고 유명한 시인, 철인도 신의 아들이라 했다. 중국에서도 그런 사상이 있어서 황제를 천자라 했다.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성계가 등극한 이후로 다 허물어져가는 집에 들어가서 석가래 세개를 짊어지고 나온 꿈을 꾸었다는 말을 만들어냈고 용비어천가라는 노래를 만들어냈다. 그와 같은 이름이 있어야하는데 예수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무언가 사람들이 볼 때 다르고 특별해야 내세울 수 있지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은 사람을 내놓고 어디에 선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시작된 것이 예수 신격화 운동이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 내놓을 만한 간판이 있겠는가 하고 신격화 운동이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나가려 해도 명함이 있어야 되지 명함이 없으면 못나가는 것과 같다. 예수라고 특별히 생긴 것도 아닌데 무엇으로 신격화하겠는가. 이적을 일으킨 사람이 한두 사람인가. 현실적으로 그런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는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대교단으로 성장한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단일교회로는 세계 최대라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신자가 50만이 넘는다고 한다. 조 목사가 인도에 가서 집회를 하는데 힌두교인 수만 명이 체육관에 가득 차 있었다. 필요도 하고 놀랍기도 하니까 기사와 이적만 있으면 세계 어디 가도 통일이다. 나도 젊은 날 거기 위압되어서 ‘목회를 하려면 저런 것이 있어야겠다.’라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방언이라도 해 보려고 좇아다녔지만 아무리 해도 안되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말았다. 마음으로는 포기했지만 항상 미련이 있었다. 그런 것을 하는 사람을 보면 열심이 있다.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바라는 것이 그것 아닌가. 교회에 열심이고 충성하는 사람이다. 우리 교회는 냉랭한데 그 교회에 가 보면 뜨끈뜨끈했다. 후끈후끈한 찐빵집이었다.
그것을 보니 우리 교회 교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몽땅 그곳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때 서대문 로타리에 있을 때는 교인이 수천 명이었을 것이다. 여의도에 가서는 확 커져서 세계사적으로 특별한 교회가 되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조 목사가 집회를 한다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교파도 상관없다. 우리 나라도 그때 이후로 교회의 저변에 전부 순복음교회가 깔려 있다. 장로교고 감리교고 할 것 없이 천하 통일을 한 셈이다. 그런 분위기를 바로 옆에 두고 보니 동요가 안될 수 없었다. 그런 것과 전혀 무관한 교단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되었다. 흘러가는 것은 막을 길이 없다. 그때는 그 흐름이 주도했기 때문에 막을 수 없었고,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흐름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번에 유동식 박사라고 처음 알았는데 풍류 신학자라고 한다. 백 살인데 근래에 돌아가셨다. 그분이 강의하는데 들어 보니 화랑도도 원래는 풍류도였다고 한다. 산천을 다니면서 경관을 즐기고 풍류를 즐기는 것이 그들의 수양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커서 결국 삼국을 통일했다고 하면서 우리 민족성의 바탕에는 풍류가 깔려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북치고 장구치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엄숙한 백성이 아니라 풍류적인 백성이라고 했다. 거기 온 사람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인데 풍류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침울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묘하게 기독교에 접을 붙여서 말하니까 그때야 청중들이 얼굴이 밝아졌다. 처음에는 기독교와 무관한 이야기 같았는데 뒤에 가서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을 풍류 신학자라고 한다. 우리 민족은 풍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자님도 예학에 능한 분이다. 요즘 같으면 음악에 능한 분이다. 그분도 풍류인이라고 할 수 있다.
흐름, Living Stream, 이것이 지방교회 북센타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복음 서원이고 미국에서는 Living Stream이다. 과연 생명의 흐름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다.
나는 처음부터 아예 교회라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시작했다. 교회라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자고 했는데 그때 그때 씨를 뿌리면 소복 소복 자라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모임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들끼리 모여서 수근수근하면서 모임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씨를 뿌리면 잎이 나듯이 소복소복 나는구나.’ 하고 그런 것이 재미있었다. 교회가 자라는 것이 나는 항상 재미있었다.
그래서 특별한 것이 아니면 제재를 하지 않았다. 이래야 된다거나 저래야 된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 바깥에서 사람들이 와서 보고는 “도떼기 시장도 아니고 이런 데가 어디 있나.” 하고 가버렸고 어떤 사람들은 “젊은이들을 저렇게 방치해 놓으면 사람 버리겠다.” 하고 돌아갔다.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때 나를 따라왔던 사람들이 전부 내가 좋아서 온 사람들이다. 다른 것이 좋아서 온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좋아서 왔으니까 ‘지금은 저래도 내가 이렇게 있는 한 결국 나 같이 안되겠는가.’ 하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제재를 하지 않았다. 슬리퍼를 신고 반바지 차림으로 온 사람, 말씀 중에 껌을 씹는 사람, 뒷자리에서 누워있는 사람, 별 사람이 다 있었다. 하도 앞에 앉으려고 밀쳐서 얇은 베니아 합판으로 만든 강대상 앞이 뚫어지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주 좋게 생각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요즘 우리 교회에 나도 생각지 못한 흐름이 흐르고 있다. 삼십 대의 젊은이들이다. 권세희라고 맨 처음 터진 자매가 있다. 며칠 전에 나에게 찾아왔다. 부산으로 시집을 갔는데 시집살이가 어려웠던 것 같다. 남편이 폭력을 쓴다고 하고 시집 식구들끼리 똘똘 뭉쳐있다고 하기에 나는 일반적인 얘기를 해 주었다. 대부분 시집가서 부딪치는 문제, 남편이 아내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경우에는 공통점이 있기에 그것을 얘기해 주었더니 시큰둥해서 나가버렸다. 나는 도와주려고 한 말인데 답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며칠 후에 구자길 형제에게 가서 상담을 했던 모양이다. 구자길 형제는 말을 몇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서 툭 터져서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서 내가 한 번도 못본 사람이 되었다. 엊그제 서울에서 수요집회 때 초대해서 말씀을 했는데 들어보니 토씨 하나도 뺄 것이 없었다. 감탄했다. 그래서 한성 형제에게도 교회가 뒤숭숭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거든 이런 젊은이들을 세워보라고 했다. 그러면 교회가 확 바뀔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긴가민가 하다가 좀전에 전화가 와서 그렇게 해 보겠다고 했다.
조순호 형제라고 법원에 근무하다 집달리를 하는 형제는 긴가민가하고 탐색을 많이 했던 형제다. 서울에서도 뭔가를 알았다는 사람들은 거칠다. 그러니까 다들 못받아 주었는데, 그 속에서 그 형제가 확 뒤집어져서 교회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놔 두면 이 생명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다 큰 사람들인데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하겠는가.
엊저녁에는 우리 큰 딸이 간증했다. 그때 못듣고 좀전에 들었는데 말하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좀처럼 말을 안해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아이다. 그런데 말을 들어보니 놀라운 말을 하는데 내 딸인가 싶었다. 옛날 아버지와 자기의 관계는 없고 내가 구속의 복음의 문을 열어준 사람이라고 했다. 이 구속의 복음의 문을 열어준 사람이라는 것이다. 완전히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사회, 그리스도 중심의 사회가 아닌가. 왜 문을 열어 줄 수 있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문을 연 것이 아니겠느냐고까지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줘서 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알아진다.
지금 우리 대구교회는 이 젊은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물결이 흘러넘치고 있다. 누구도 예상 못했던 일이다. 그들 스스로 MZ 세대라고 한다. 알고 보니 Millenium Zero라고 한다. 세대고 뭐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그렇다. 그들은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이것도 저것도 걸릴 것도 없다. 나이 든 세대는 이것도 걸리고 저것도 걸리고, 동서남북을 다 돌아보고 말을 한다. 그것도 저것도 안돌아보고 말을 하는 사람은 너무 거칠다. 그래서 비난을 받으니까 말할 때 조심해야 하는데 MZ세대는 조심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말만 한다. 헛소리를 안한다. 왜 그런가 하면 절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냥 된 것도 아니고 이론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박한 환경에서 해방이 필요하고 자유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못말린다. 물꼬가 트이니까 아무도 못말린다.
나는 한때 폐렴 때문에 각북에 나가 있었다. 그 후로 십 년을 제주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또 하나의 흐름이 생겼다. 형제들이 군데 군데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어디 어디에서 모이는지도 몰랐다. 나에게 말하고 모인 것도 아니고 서로 의논을 해서 모인 것도 아니다. 저절로 떼몰려 다녔다.
속으로는 ‘형제들마다 색깔이 다른데 그렇게 다른 색깔이 드러나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는데 마침 교회에서 사건이 있어서 현재의 순모임이 이루어졌다. 사실은 오랜동안 건축허가를 받지 못하다가 현재 있는 순모임관을 반쯤 헐고 그 자리에 ㄱ 자로 신축허가를 받았다. 그 이상 허가가 안나니까 8월 여름집회를 지나고 나면 바로 건축을 하려고 준비하던 때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 그래서 두말 없이 순모임이 생겼고 그 동안 잘했다. 그런데 때가 되니 문제가 많이 생겼다. 어찌될지 모르지만 그러면 정리되어야 한다.
그러던 중에 이런 새로운 물결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하던 순모임과 전혀 관계가 없다. 밤에 50여명씩 모이니까 자리가 없어서 교회당 안으로 들어와서 작은 집회실에서 모이도록 했다. 거기서 한 50명이 모이는데 유튜브로 듣는 사람도 많다. 백명이 넘는 숫자가 한 물결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서울교회로 흘러들어갔다. 그래서 오늘 한성 형제에게도 “이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맡겨놓고 보자. 우리가 교회에 미련을 가지면 안된다. 미련을 갖지 말고 생명의 흐름에 맡기자.”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어 가실 것 아닌가.
세상 다른 교회처럼 사람이 ‘이러면 되고 저러면 안되겠다.’는 계획을 미리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 그러면 세상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이 싫어해. 그러니 이렇게 해야 돼. 저것은 세상이 싫어해. 그러니 저렇게 해야 돼.” 하다 보면 뭐가 되겠는가. 세상과 같아지지 안겠는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예수도 새로 만들어졌고 하나님도 새로 만들어졌다. 예수가 언제 삼위일체 예수였던가. 살아있을 때는 분명히 신과 다름없는 분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나는 그분을 좋아하면서도 그분 자신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런데도 나와 다른 분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좋아했는가. 거기서 나오는 부산물이 너무나 좋았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는데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가 나왔다니 이것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것은 신화다.” 하고 넘겼지만 나는 신화라고 할 필요가 없었고 내가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부스러기, 그것이 좋았다. 그것이라도 먹고 생명의 양식이 되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데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되겠는가. 나는 그것을 신화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모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가 내 인생에 오시면 썰렁하던 잔치집 같은 내 인생도 풍성해진다.’라고 해석했다. 어느 정도 내 경험이니까 그렇게 알고 이것을 교회에 공급했다.
그러니까 교회도 거침없이 받아들였고 먹고 좋아했다. 우리 대구교회만큼 자유롭고 살기 좋은 교회가 없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전도를 하면서 “교회 와 보라. 우리 교회가 좋다.” 이것이 전도였다. “그리스도가 이렇다.”라는 말은 하지 못해도 “교회가 좋다.”라는 말만 했다. 그때도 만족했다. 결국은 교회니까 교회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쪽에서 신화니 어쩌니 하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예수가 신화면 나는 무엇을 붙잡고 있었던가?’ 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불트만에 대해서 대강 소문은 들었지만 관심이 없었다. 나와 상대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 사람을 일부러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불트만도 알아보았더니 예수는 신화라는 전제하에 “그러면 안된다. 이 신화를 벗겨봐야 되지 신화라고 하면 안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비신화화다. 그 사람은 예수를 찾으려고 껍데기를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옥수수 같으면 껍데기를 벗겨야 알맹이가 나오지만 예수는 옥수수가 아니다. 그러니 벗겨봐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다. “한 가지만은 변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은 사건만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거기서 힌트를 잡았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만나려고 보니까 다 빛 좋은 개살구였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예수가 없었다. 부활했다고 하는데 나는 부활을 모른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도 참 좋지만 내가 만질 수 없었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것도 내가 만질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니까 다 만질 수 없는 예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다시 십자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와 보니 십자가가 ‘우리 죄를 위해 죽은 십자가’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는가?”라고 질문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해야 한다.
문제는 '그가 하나님 아들인가 아닌가?', 이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하나님이 누군가. 이름자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던 분 아닌가.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와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으니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마지막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불러서 물었다.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이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가야바도 진실한 질문을 했고 예수도 진실한 대답을 했다. 베드로도 그것을 보고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이다. 베드로도 진실하고 가야바도 진실하다. 다 진실하다. 꾸며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가야바는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다.”며 사형에 처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넘긴 것이다.
예수가 죽은 직접적인 이유는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그를 살려 두면 자기들이 죄인이 되니까 안죽이면 안되는 일이었다. 율법에 살인자사(殺人者死)라 했는데 사람을 십자가에 처형하는데 이유없이 처형하겠는가. 유대인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이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시고 마지막에 오히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운명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뭔가 응답을 들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항상 기회만 되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말을 듣지 않았던가.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도 그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것을 순전히 자의식이었다고 하더라도 변화산에 갔을 때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시니 모세도 엘리야도 간 곳이 없고 예수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의식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여졌던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예수는 거기서 살아나기를, 뛰어내리기를 바랐다기 보다는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운명하셨다. 운명했다는 말,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영어로 finish다. 끝이라는 것이다. “다 이루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것은 후대의 해석이다.
다 버리고 가 버렸다. 그 이후의 십자가 사건은 없다.
기독교는 십자가가 푯대다. 교회마다 십자가가 없는 데가 없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거기서 끝이다. 다 알고 계시지만 그 이상 십자가 사건은 의미가 없다.
나는 거기 걸려서 ‘야, 어쩐지 만날만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도 죽으니까 공감이 되었고 ‘여기는 내가 만날 수 있는 분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너무 좋아서 “나는 예수를 만났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도 다 좋아할 줄 알았다. 여태까지 예수 얘기만 해 왔으니까 예수를 만났다고 하면 다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문제가 많이 생겼다.
그런데 오히려 문제가 생긴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안그랬으면 거기서, “내가 만날 만한 예수를 만났다. 내가 만날만한 예수는 사람이다.” 하고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저것이 아닌데, 저것은 아닐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까이, 더 가까이 접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도 답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 보니까 내가 생각지 못한 예수가 다시 발견되었다. 완전히 밑바닥에 있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다. 유대인에게, 제자들에게 쓸모없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다 싫어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재승형제에게서 듣고 안 것이다. ‘아, 이것은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구나. 싫어서 안오는구나.’라고 알았다.
나는 싫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좋은데 왜 안올까?’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에게 큰 축복인 것 같다. 나는 그런 경험이 있었다. 완전히 아무것도 없게 되었을 때 나는 평안했다. 절망할 수도 없는 그때 나는 평안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 막장을 보니까 내 인생이 평안해진 것이다. ‘아, 더 이상이 없구나. 더 이상 갈 데도, 올라갈 데도 내려갈 데도 없구나.’라고 보여서 끝까지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보니 ‘우리 인생이 기초가 잘못되어 있었구나. 반석이 아닌 데 집을 지었구나. 모래 위에 집을 세웠구나.’라고 보였다. 그래서 종교가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해도 성과가 없는 것이다. 결론은 막연하고 흐지부지해서 갈 곳이 없고, 지금 기독교는 세상 앞에 제시할 답이 없다.
“기독교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라고 물을 때 답이 없다. 거창해지기는 했는데 답이 없다. 뭔가 답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교회가 답을 해야 될 때가 왔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앞으로 천 년이 더 지나도 답이 안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기초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는 삼위일체 예수로, 하나님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고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단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뿐이다.”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가 신이 아니라면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이 아니라면 우러러볼 필요도 없고 경배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보통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냥 인간이라고 해도 안되고 삼위일체라고 해도 안되고 아주 난처하게 되었다. 중간에서 어물거리다 보면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 칼빈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발끝까지 다 타락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보수주의는 알든지 모르든지 계시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말은 하나도 틀림없다. 단지 우리가 모른다는 것 뿐이다. 그래서 “모르지만 믿어야 한다.”고 하다 보니 어거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강퍅해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생긴다. 합리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사람이 강퍅해진다.
중요한 말이 그것이다. “우리 구원의 정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연합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될 것 같으면 다 성령이 도와주시면 되지 않겠는가. 어느 세월에 되겠는가. 그러니 하나님 나라가, 구원이 막막한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쉬운 것 같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진 화해를 우리가 무슨 수로 누리겠는가.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일 때만 가능하지 하나가 아닌데 어떻게 그것을 누리겠는가. 듣기는 좋은데 오히려 문제 자체가 흩어졌다. 문제가 사라졌다. 문제를 없애버린 셈이다. 시험 문제를 뒤바꿔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교회 초창기에 나오던 형제가 있었는데 실업고를 나와서 자동차 정비사 공부를 했다. 시험을 보고 나와서 하는 말이 시험 문제를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시험관을 탓하지 말고 헌 엔진을 사서 분해조립을 계속 해 보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는지 모르고 계속 시험관이 시험을 잘못 냈다고 했다. 그러니 시험에 적응이 안되었다. 시험관을 고칠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고쳐야 할 것 아닌가. 그 형제는 일찍 죽었다. 교회를 너무 좋아했는데 친구에게 전도하러 갔다가 그날 밤에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던 것이다. 전도하러 갔는데 왜 죽었는지 의문이다. 그 형제는 4대독자로 보통 아들이 아닌데 그런 할 말 없는 사건이 있었다.
문제를 잘못 냈다고 생각하면 해답을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는 화해가 완전히 이루어졌다. 우리는 단지 누리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문제가 없어진 것이다. 문제가 없어지면 대단히 쉬울 것 같다. 그렇지만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실정이 되었다. 그것은 생명의 흐름이 아니라 지식의 기교다. 말장난인 것이다. 무식한 사람은 들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생명은 지식도 아니고 역사도 아니고 흐름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흐름이다. 이것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생명의 흐름을 막게 된다. 저러면 되느냐, 이러면 되느냐 하면서 교리적으로, 지식적으로, 통념적으로 비판해도 소용없다.
그래서 MZ세대라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MZ세대 입니다.”라고 한다. 비판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좋은 것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대단히 이기적인 것 같고 ‘저런 것들이 뭐하겠나.’ 싶은데 진실하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
다말이 그러했고 라합이 그러했으며 룻이 그러했고 우리아의 아내가 그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쓰셨다. 그들이 옳으냐 그르냐를 보고 쓰신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살 사람들, 이 사람들을 하나님은 다윗의 조상으로 쓰셨다.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다윗이 나올 수 없었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다. 구약시대는 알겠는데 예수에게 오면 모른다. 그래서 나는 모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모르지 어떻게 다 아는가.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면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했는데 신화라는 문제가 나오니까 ‘그러면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있는데 모르고 있었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알던 것은 허깨비가 아닌가!
나는 심각했다. 그래서 찾아 나선 것이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람이다. ‘이론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라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구나.’라고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더 내려가고 더 내려가다 보니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버려진 사람이 나왔다.
우리가 그러지 않았던가. 자기를 버린다고 했고 나를 버려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를 어떻게 버리겠는가. 버린다고 해도 안버려진다. 항상 밑반죽이 남아 있다.
워치만 니는 50세에 감옥에 갇혔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쓴 책이 ‘자아가 죽을 때’, ‘자아의 파쇄’다. 지금 기독교 안에는 워치만 니의 흔적이 없어지고 이것만 남았다. 워치만 니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은 ‘자아가 죽어야지’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기를 문제 삼으니까 다른 사람보다는 낫다. 그렇지만 해결은 안된다. 자아를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밑반죽이 남아 있다. 이것은 막을 길이 없다. 밑반죽이 남아 있으면 또 생기고 또 생긴다.
그런데 완전히 끝난 사람, 밑반죽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을 발견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절망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거기서 보니까 ‘야, 반석이 여기 있구나. 새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여기 있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사탄도 쓸모없다고 버리고 갔겠는가.
사람들은 사탄을 물리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소리 지른다고 사탄이 나가겠는가. 합리주의가 된다고 사탄이 나가겠는가. 어떤 방법으로도 안된다. 그런데 어디서 나갔는가. 마지막 예수를 보고 더 이상 건드려봤자 소용없으니 나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이기려고, 세상에서 떠나려고 아무리 해도 안된다. 그런데 세상이 나를 버리면 된다. 세상이 나를 버리면 그때는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어진다. 나도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나서 미련이 없어졌다. 한 번도 뒤돌아본 적이 없었다. 거기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가면 도로 똑같아진다. 새로운 판에 옮겨져서 원인무효가 되었지만 그 판으로 돌아가면 도로 마찬가지가 된다. 나에게 돈을 맡겨 주고 해 보라고 하면 나는 또 해 보려고 할 것이다.
교회에 와서도 몇번을 그렇게 했다. “헌금 헌금” 하기 어려워서 내가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고 고추장사, 귤장사를 했다. 그러나 하는 것마다 다 망했다. 재승 형제가 나보고 제발 그만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한번은 미싱 공장을 했다. 누비 이불을 큰 공장에서 만들어 오면 테두리를 박으면 되는 일이었다. 일이 어렵지는 않았는데 내가 한번도 안해 본 일이라서 기술자들이 얼핏하면 미싱이 고장났다며 일을 하지 않았다. 서문시장에 가서 미싱 기술자를 데려오려면 하루 이틀이 걸렸다. 기술자들이 그동안 놀고 있었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내가 미싱을 해 보았다. 해 보니 하게 되었고 미싱이 고장나도 내가 고쳤다. 미싱처럼 간단한 기계가 없다. 북실을 조절할 줄만 알면 되는데 그것을 못해서 일을 안하고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직접 고치기 시작하니까 고장이 안났다. 내가 미싱을 하니까 기계가 고장났다고 노는 종업원이 없었다.
그러나 일이 밀리니까 밤낮이 없게 되었다. 빨리 맞춰줘야 하니까 밤 1시까지 일해야 했다. 형제들이 나를 만나러 와도 일 시킬 것부터 생각하지 형제들을 만날 생각을 못했다. 나는 교회를 돕기 위해서 시작한 것인데 주객이 전도되어 형제들에게 “와서 이것좀 해라.” 하게 되었다. 하다 보니 본질에서 빗나가니까 반값에 팔아넘겼다. 역시 또 손해가 났다. 그 다음부터 장사할 생각을 접었다. 나는 말씀을 전할 일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시행착오가 많았다.
생명의 흐름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 더 잘되게 하려고 해봤자 잘되는 것도 아니고, 방해하려고 해도 방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흘러가는 것이니까 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이 흘러가는 물결을 보고 있다. 어떻게 흘러가는가? 과연 어떤 사람들이 염려하는 대로 잘못될지, 아니면 교회를 주도할 것인지, 보고 있다. 저런 물결이 흘러가 버리면 내가 할 말이 없다. 말할 필요도 없다. 자기들이 깨달아서 하는데 내가 어쩌겠는가. 놀랍다.
우리 막내딸도 B형이라서 대충 넘어가는 성격인데 말씀을 시켜 놓으니까 얼마나 꼼꼼한지 아주 세밀한 부분을 타치하는 것을 보았다. 다음 주에는 서울 교회에 세우겠다고 한다. 지난 수요일에 세희를 세웠는데 세워놓고 보니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다음에는 주일 날 세우기로 했다. 꼭 목사를 세울 이유가 없다.
지난 주에 대구에는 배영민이라는 노름쟁이를 세웠다. 노름으로 망했는데 빙빙 돌아서 제주까지 갔다가 지금은 목포에 있다고 한다. 돈만 생기면 노름을 하는데 요번에는 달라진 것 같았다. 이 복음이 좋아서 잠이 오지 않는다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세웠다. 나는 소개만 해주고 영민이 보고 다 하라고 했다. 밥은 뜨끈뜨끈할 때 먹어야 되지 식으면 맛이 없다. 또 노름을 할지라도 저렇게 충만하게 폭발할 때 내놓아야 되지 않겠는가. 내 생각에는 이제는 노름을 안하지 싶은데 어찌될지 모른다.
생명은 폭발하고, 일어나고, 흐르고……, 이런 것이니까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주의깊게 봐야 한다. 주의 깊게 보고 관찰해야 되지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것이 앞을 가리기 시작하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형편이 이렇게 복잡하다. 양편으로 갈라져서 무슨 말을 해도 두 편이다. 내가 집회하면 안나오는 사람이 한 30명이 된다고 한다. 집에서 듣는지 모르지만 교회를 아예 나오지 않는다. 알지만 내가 어쩌겠는가. 우리 교회는 교적부도 없는데 왜 안나오느냐고 하겠는가 뭐라고 하겠는가. 오면 좋지만 안와도 할 수 없다.
교회 문제는 내 손을 벗어났다. 내가 알 문제가 아니다. 내가 잘못 저질러놓았지만 ‘나로서는 수습을 못하니까 하나님이 일아서 하시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원래 시작할 때는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다. 대구에 형제들이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의논을 안했다. 그렇게 대해 보면서 정말로 이것은 그렇게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안된다. 이것도 무슨 뜻이 있지 않겠는가.
이런 일이 없었으면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내가 만질 수 있는 예수, 내 밑창을 보여 준 예수를 알겠는가.
그 전까지 나는 아주 만족했다. 사람들이 묻기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우리 교회에 오기 잘했습니다. 말씀을 열심히 들으세요. 붙어있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다락방에서 열심히 전도하던 자매가 왔는데 처음에는 편하고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편하니까 허탈해져서 ‘나는 뭐하는 것인가?’ 그것이 고민이 되었다. 일을 시켜서가 아니라 아무 할 일도 없으니까 고민이 되었다고 왔기에 “참 잘 왔다. 정말 잘 왔다. 붙어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말씀을 깊이 들어라.” 하고 보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신뢰가 있으니까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라고 했겠지만 내 말이 온전한 대답이 못되었을 것이다.
우리 교회에 교사들이 많으니까 교사들에게 항상 안타까운 것이 있었다. 최소한 4년에서 8년을 한 교무실에서 같이 근무하면서도 사람을 하나도 데리고 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입을 다물고 살까 하는 생각에 몇번을 전도를 해 보라고 얘기해 보았지만 안되었다. 교사 순을 만들어 보라고 했지만 그것도 안되었다. 그래서 대구 사람이라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나보고 하라고 해도 그러했을 것이다. 막연하니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들은 것은 많지만 체계적으로 말하려면 어렵다. 단숨에 할 수 있는 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말이 없어서 여태까지 못한 것이다.
기소선 사람들은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간단한 것을 가지고 전 세계를 휩쓸고 다닌다. “죄를 짓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앞으로 지을 죄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이 말에 너무 좋아서 6개월 동안 발이 땅에 닿는지 모르고 다녔다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을 듣고 죄 문제가 그렇게 심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죄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몰랐을 죄, 없을 죄다. 교회에 가서 새로운 병을 얻은 셈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 죽어야 할 죄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지, 부흥회에 가면 첫날은 회개하는 날이다. 옆에서는 가슴을 치며 우는데 민망했다. 그래서 나도 공감하고 싶어서 애를 썼는데 안되었다. 그래서 나를 위해 대신 죽었다는 말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십자가를 그런 것으로 포장해서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이라고 하니 얼마나 그럴듯한가. 죄없는 사람이 없으니까 얼마나 실감이 나겠는가.
이번 기회가 아니었으면 이것을 다시 검토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다 그렇게 믿고 있는데 나 혼자 믿지 못한 것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서 나는 이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십자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더구나 인생 문제가 결부되지 않았는가!
여기서 거슬러 올라가서 ‘인간은 위치를 이탈했구나.’ 이것만 알면 간단하다. 모든 문제는 위치를 이탈한 데서 생겼다. 그러므로 위치만 맞으면 다 해결된다. 이 한 가지가 해결 안되면 영원히 해결이 안된다.
나는 누구를 만나도 급한 사람은 급한대로, 아는 사람은 아는대로, 기독교인이면 기독교인대로, 아닌 사람은 아닌대로 이 복음을 간단하게 말한다. 아주 급하면 현장만 얘기하고 끝낼 수도 있고 조금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창세기부터 얘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창세기를 읽어 보지 않아도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될 자리는 이 자리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다. 이 판이 안보여서 몰랐지 이 판만 보이면 이미 다 정해져 있는 일이라고 알게 된다.
성경 지식이 없어도 상관없다. 사람의 길이 이것이니까 성경을 안다고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른다고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단순하다. 원인이 단순하니까 답도 단순한 것이다.
원인은 한 가지인데 병은 수없이 많다. 병이 그렇다. 세균은 한 마리인데 수없는 증상이 나온다. 약만 발견되면 치료는 간단하다. 문둥병이 그런 병이다. 백년 전만 해도 세균을 몰랐다. 문둥병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문둥병 약이 얼마나 많았는지 심지어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까지 돌았다. 대구 근교 신동에는 문둥이 촌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무서워서 신동재를 마음대로 넘지 못했다.
그런데 문둥병 약이 개발되고 나니까 어떤 병보다 고치기 쉬운 병이 되었다. 결핵보다 쉽다. 결핵은 지금도 일년을 먹어야 되는데 그 약만 먹으면 금방 낫는다. 원인을 알면 해답이 쉬운데 원인을 모르면 해답이 나올 수 없다.
생명! 하나님이 지은 것은 생명이다. 그것밖에 없다. 하나님은 생명밖에 만드신 것이 없다.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소유일뿐이다. 자기 존재가 아니니까 결국 없어질 것들이다.
존재만 남는 자리, 이것이 하나님과 내가 대면하는 자리다. 아담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지만 이제는 두려워서 숨을 일이 없다. 우리 정체가 폭로되었는데 숨는다고 어디 가겠는가. 폭로되어 버렸으니 숨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거기는 너무나 넓은 세계다. 끝이 없는 넓은 세계, 자유로운 세계, 해방된 세계다. 구속은 다른 말로 해방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흘러갈 것이다. 흐름이다. 내가 못해도 흘러간다. 그리고 내가 없어도 흘러간다. 다른 것은 내가 없으면 안되지만 이것은 내가 없어도 흘러간다. 지금 나는 인수인계를 하는 판이다. 나 빼고 될 수 있도록, 나 없어도 될 수 있도록 인수인계를 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중매함이라.” 하였다. 누가 정결한 처녀인가. 여기서 나온 사람은 정결하다. 과거가 더 없어지니까 정결하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이것이 정결한 처녀다.
MZ세대는 세대가 없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현재밖에 없다. 여기 너무 단순하고 확실하고 넓고 자유로운 세계가 있다.
이 세계가 전파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뜻이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 이것 때문에 죽으셨다. 모든 것이 이 세계 때문이다.
이것이 둔갑해서 다른 것이 되어 버렸으니까 우리가 이 흐름을 그냥 놔두고 봐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흘러갈지 나는 아주 주의깊게 보고 있다. 흐르다 막히면 돌아갈 것이고, 돌아가다가 다른 길이 생기면 빨리 가기도 하고 늦게 가기도 하지 않겠는가. 강물을 보면 그 많던 물이 없어져 버릴 때가 있다. 머리만 남아 있다가 어디 가면 도로 나온다. 왜냐하면 강물 바닥은 암반이기 때문에 암반이 있는 데까지 내려갔다가 넘치면 솟아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물이 말라버릴 때가 있고, 그러다가 갑자기 많아지기도 한다.
생명은 그렇게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계속 흐르는. Living Stream이다. 우리가 진실로 Living Stream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