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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이야기
<11> 영산포에 홍어자료관을 세우자
지난 주 금요일 홍어축제를 시작하는 첫날, 영산포에 갔다. 전야제가 축제의 서막이어서 행사장 준비가 한창이었다. 강변 둔치에는 하얀 색 천막들이 줄지어 처졌다. 유채꽃도 1주일 사이에 색깔이 완연했다. 봄이라고 하기엔 시간이 빨리 흐른 듯 했다. 더웠다. 영산포를 밝혔던 선창가 등대가 서 있었다. 그 앞 물결 위에는 황포 돛배 두 척이 옛 모습을 추억하는 것 같았다.
▶왼쪽이 등대. 영산포의 영화(榮華)를 밝혔다. 황포로 만든 돛을 단 배를 띄워놓았다. 왼쪽 배경으로 서 있는 산이 가야산. 일본 후지산을 닮았다 해서 일본인들이 '내고향 후지산'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일제가 남긴 유산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진=권경안
“저 산이 어디서 본 듯 한 산 아니오? 무슨 산을 닮았을 텐디”
나주 윤여정씨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형세였다.
“일본사람들이 ‘내고향 후지산’이라고 불렀던 산이요.”
이제 ‘내고향 후지산’이라 불렀던 사람들은 이제 이곳 영산포에 없다. 일본 제국주의 세력 아래 일본 이주민들이 식민거점으로 삼았던 곳 중의 하나가 영산포였다. 낮이어서 ‘식후경’하기로 했다.
이날만은 영산포에서 40년 넘게 복탕을 끓여온 곳에서 점심을 했다. 영산포가 물산유통처로 기세가 있었을 때를 회상케 하는 집이었다. 밥을 먹고는 영산포거리를 걸었다.
▶100년 전 무렵 일본인들이 갯가에 만들었던 원정통 시가지. 시가지 구획과 일부 건물들이 그 때를 말하고 있다. 사진=권경안
“저곳이 원정(元町)통이요.”
영산포 시가지의 기본이 1910년대에 마련되었다.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일본은 목포에 먼저 주목했다. 영산강 江口가 그곳. 영산강이 기선(배)으로 화물 운송이 가능해 나주, 능주(화순), 광주 등 큰 시장을 낀 화물집산장으로 적합하고, 전라도 쌀을 일본으로 운반하기에 가장 편리한 항구였기 때문. 일본인은 이에 목포에서 배를 통해 조선인들에 의해 이미 연결되고 있었던, 140리쯤에 있는 영산포를 내륙거점으로 집중 개발했다.
▶영산포의 대지주 黑住猪太郞의 저택. 후쿠야마 현 출신이다. 봄꽃이 활짝 터트렸다. 옛 주인은 역사와 함께 사라졌다. 꽃은 다시 피고 지고 있었다. 1909년 그는 농공은행으로부터 대부를 받아 집을 지었다.원정 맞은 편이다. 사진=권경안
원정통을 앞에 두고 돌아서 길 안쪽 주택가를 들어섰다. 일본식 저택이었다. 몇년전까지도 할머니가 살았으나, 지금은 비워져 있었다. 돌기둥과 복도, 삼각모양의 지붕 등이 낯설었다. 일제시대 영산포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졌던 黑住猪太郞의 집.
그는 영산포에 들어와 처음 손수레를 끌고 장사를 했다. 영산강개발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대표로 서울에 가서 당국과 교섭중 영산강개발사업의 하나로 제방을 구축한다는 정보를 접했다. 그 당시 잡초만 무성했던 수만평을 사들여 개간하고 제방이 구축되자 농장을 설립했다. 목영운수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고 '나주군지'(1980)가 전하고 있다. '木榮'은 목포와 영산포를 뜻하는 것으로 상업활동의 무대를 짐작케 한다.
영산포에 들어왔던 이들은 한국과 가까운 나가사키, 구마모토, 야마구치, 후쿠오카 등지 사람들이었다. 1900년대부터 들어왔다. 원래 영산현의 촌락은 내영산(냉산이라고도 줄여서 말함). 이 마을 어귀에 어장촌이 있었다.
▶오른 쪽 빨간 원안의 별표가 최초의 일본인 정착지라고 한다. 1900년대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새롭게 촌을 형성하고 시가지로 발전했다. 왼쪽 빨간 원 일대가 옛날의 영산현 중심지다. 오른쪽 원안의 네모로 표시된 선창 부근의 도로 일대가 오늘날 '홍어의 거리'이다. 이 자료 출처는 고교선배인 김경수 향토지리연구소장의 박사 논문 '영산강유역의 경관변화연구'(2001). 김 소장은 나주 출신으로 '영산강 수운연구'로 석사논문을 쓴 이래, 자타가 공인하는 영산강 연구자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 글에서 쓰고 있는 영산포의 형성과 일본인의 진출 등에 관한 내용은 이 김 소장의 박사논문에 근거하고 있다.
흑산도 사람들(대흑산도에서 1200거리에 영산도가 있다. 고려말 당시에는 영산도의 영산을 따서 영산현이라 했다)이 고려말 왜구 침탈로 국가가 강제로 실시한 공도정책(空島, 섬에서 육지로 사람들을 강제 이주케 하여 섬을 비워두게 한 정책)에 따라 나주로 옮겨왔다. 새로운 거주지를 옛 고향 이름을 따서 영산현 이라 하고 살았다.
일본 사람들에 의해 개발된 곳은 내영산과는 강을 대각선 방향으로 마주하고 있는 하류쪽 영산포구다. 지금의 포구일대가 일인들에 의해 강변 습지를 중심으로 시가지로 개발되고, 그 주변은 일본인 주거지로 발전하였다.
저습지쪽에 장터가 생기고, 그곳에 원정이란 시가지가 생겼다. 다시 시가지가 확대하면서 銀座거리가 생겼다. 은좌 거리 등지에 1904년 우편소, 1906년 일본인 소학교, 1907년 헌병분대, 1908년 광주농공은행 영산포지점, 1910년 일본 동본원사 포교소 등이 들어섰다. 동양척식주식회사도 들어섰다. 침탈의 근거지였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기점으로 제국세력을 등에 업고, 토지를 대대적으로 매수하여 ‘합병’ 이전에 이미 대지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목포와 영산포는 범선이 오갔다. 1904년 조선의 범선은 18시간이 걸렸다. 이 해말 일본인에 의해 10톤급 발동기선이 도입돼, 5~6시간이 걸렸다. 최초의 동력선이었다. 운항시간이 단축되어 영산포의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5일 시장도 생기고 물산유통이 활발하였다.
영산포는 1910년대 일본에 의해 건설된 근대 식민 상업도시였다.
일제시대 목포와 영산포 사이에는 발동기선이 월 15회 회항했고, 50여척이 넘는 돛단배들이 오르내렸다. 목포에서 생선, 소금, 건어물, 식료품, 잡화, 건축재료를 실어날았다. 영산포에서는 나주지방에서 생산하는 쌀과 잡곡, 면화, 가마니, 새끼 등을 목포로 날랐다. 영산포가 활기를 띠자 술집과 여관이 들어서고 정미소가 열댓 군데나 있었다.
▶1910년대 영산포에 정박하고 있는 증기선(원자료 '보고의 전남'(1913), 재인용 김 소장의 박사논문)
▶1920년대 영산포 등대와 木橋(원자료 '조선하천조사서'(1929), 재인용 김 소장의 박사논문)
▶1932년 세운 영산교(舊橋), 오른쪽에 등대가 있다. 출처='나주군지'(1980) 487쪽.
▶1950년대초 영산포구. 선창이다. 왼쪽에 등대가 있다. 출처='나주군지'(1980) 411쪽. 이 글의 맨 위쪽 사진, 바로 아래 사진과 함께 비교하기 바란다.
추자도의 멸치젓, 흑산도의 홍어, 영광의 굴비, 임자도의 새우젓과 멸치젓, 낙월도의 새우젓과 밴댕이젓 등 갖가지 생선과 젓갈들이 철 따라 영산포 선창으로 배를 타고 들어왔다.
영산강의 뱃길이 끊긴 때는 1977년 10월. 영산강유역 종합개발사업의 영향이었다. 1978년부터 전남 영암군 삼호면 산호리에서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 복흥산 기슭에 이르는 4315의 하구둑 공사를 시작했다. 1981년 2월 물막이 공사가 끝나 가뭄과 홍수를 조절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 영산강 물길을 따라 운송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영산포의 영화(榮華)가 물길의 성쇠와 함께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영산포에는 옛 영화의 그림자가 크게 남아 있다. 식민도시의 자취는 물론 물산 유통의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다.
▶바로 영산포구 선창이었던 곳. 배를 이곳에 대고 물산을 싣고 부리고 했다. 이곳으로부터 영산강 물길이 흐르는 방향으로 '홍어의 거리'가 생겼다. 사진=권경안
“우리 학교 다닐 때 영산포 애기들은 젓갈 냄새 난다고 했는디, 그 젓갈집들이 지금은 홍어집들을 하고 있어.”
지금 홍어거리에는 추자젓갈집이 있었다. 그 옆집은 예전 객주(客主)였다고 했다. 배가 들고 날 때의 선창이었다. 등대는 바로 선창 부근에 지금도 남아 있다. 하지만 선창의 자취는 사라지고 둑길로 지대가 높아졌다. 선창부근과 하류쪽 둑길 언저리가 ‘홍어의 거리’이다.
목포에서 배가 올라와 자은도, 추자도 등 서남해안의 각종 어물이 거래되던 곳에는 이젠 홍어를 거래하고 있다. 그 홍어는 흑산도 홍어가 주류가 아니다. 칠레산이 주류다. 내륙 물산유통처로서의 기능을 살려, 홍어가 오가고 있는 것이다. 배가 끊기면서 젓갈이 쇠하고, 새롭게 부산 등지에서 대량으로 외국산 홍어를 가져와 ‘삭히는’ 재가공 처리를 해서 전국에 공급하고 있다.
▶바로 '홍어의 거리'. 광주방향에서 건너오는 다리와 삼거리가 만나는 지점이다. 홍어 삭힌 냄새가 '확' 들어온다. 사진=권경안
홍어는 이제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홍어는 이제 문화가 되었다. 영산포 홍어는 홍어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한 집산지이다. 내륙 유통물량의 대부분이 여기서 재가공되고 있다. 부산에서 수입 홍어를 가져오지만, 재가공한 ‘삭힌’ 홍어는 부산으로 다시 나간다. 물론 호남을 비롯한 내륙의 홍어는 여기서 나가는 것이다. 홍어 대중화의 기지는 바로 영산포이다.
영산포는 이제 중흥의 시대를 서서히 맞고 있다. 뱃길이 끊기었지만, 면면하던 홍어거래가 오히려 수입홍어의 재가공을 통해 영산포의 상권을 일으켜왔다. 홍어축제는 바로 그런 자신감의 표현이다. 아무리 삭히지 않는 찰진 홍어가 맛있다고 해도, 숙성 홍어의 본향은 영산포라는 자존심을 바탕으로 ‘삭힌 홍어’의 시장을 손 안에 쥐고 있다.
그 영산포 ‘홍어의 거리’에 ‘홍어 자료관’을 만들어야 하겠다. 일본인에 의해 개발된 식민상업도시지만, 도시 역사의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역사 위에 오늘의 영산포가 있기 때문이다. 영산포의 근대도시사와 영산포 홍어의 모든 것을 자료관에 담아보자.
▶'홍어의 거리' 끝자락에 있는 건물. 비어 있다. 1980년대 의료보험조합으로 쓰이다가 농협으로도 쓰였다. 그러다 현재는 개인소유. 2층 건물이다. 한 층을 영산포 역사관으로, 또 다른 한층을 홍어
자료관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적지의 공간이다. 이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일제 금융조합 건물도 있다. 사진=권경안
그렇다면 영산포 사람들은 역사와 문화를 거래하는 셈이다. 홍어는 이제 수많은 음식중의 하나가 아니다. 문화이고 역사이다. 영산포 사람들의 문화요 역사이다. 뿐 아니라 남도인들의 문화요 역사이다.
다음 <12>편(마지막)은
‘어떻게 영산포홍어가 광주홍어를 껐었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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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옛날 등대와 지금의 등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구만...흐르는 영산강의 물줄기도 여전하고..다름이 있담 흑산도홍어가 아닌 칠레산홍어가 주를 이룬다는거..글고 난 아랫글에 얼굴 선뵈인 윤여정씨 하면 탈렌트 윤여정씨가 생각난다..맨처음 글 읽으면서 순간 그 분~?이란 생각을 했었거든 ㅎㅎㅎ~짧은지식이라 생각하는 범위도 그러네 쑥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