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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 보충자료 III
(2000-2001, 기독신문에 매월 연재한 선교칼럼의 글들 중에서)
1. 사회진화론이 선교에 끼친 폐해
성경적 인간관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대명제에서 출발한다. 비록 타락으로 죄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드님의 피값을 지불하시면서까지 다시 구속하실만큼 죄인을 귀하게 여기셨다. 바로 이러한 인간 이해가 하나님의 인간 이해이며, 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 선교의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인 인간 이해에 정면으로 도전한 서구의 사조가 있었다. 이 사조는 은연중에 서구의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로 선교의 방법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을 서구선교 역사 속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19세기에 등장한 다아윈 (Charles Darwin)과 월리스 (Alfred Wallace)의 진화론과 이를 사회학에 접목시킨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사회진화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회진화론은 19세기 및 20세기 중반까지, 식민지를 중심한 비서구 사회에 대한 서구인들의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론” 혹은 “강자우월론”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사상은 비서구 사회들을 결국 서구사회와 같은 “문명(civilized)”사회로 진화할 필요가 있는 미개한 사회로 정의하여 버렸다. 따라서 사회진화론은 세속정부의 식민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당화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의 선교에도 은연중에 영향을 끼쳐, 비서구 사회의 사회적 진화의 필요성이라는 새로운 선교의 명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잘 알려진 것이 리빙스톤(Livingstone) 선교사의 아프리카 3C 정책이다. 즉, 선교는 기독교화(Christianization) 뿐만 아니라, 상업화(Commercialization)를 통한 경제발전, 그리고 문명화(Civilization)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화와 문명화가 동일시 내지는 동급으로 취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서구 문명이 곧 기독교 문화라고 하는 믿음이 서구 교회 안에 팽배하여 있었음을 잘 반영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19세기 선교의 프로모션에도 “아프리카의 야만인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있겠는가” 식의 표현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사용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모두 식민시대의 서구 교회들이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실례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지 못하고 선교사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세계관을 기준으로 해석함으로써, 피선교지인들을 선교사와 같은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하게 보기보다는 항상 사역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문화적 우월주의(Paternalism)의 모습들을 우리는 선교 역사 및 현장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선교의 동기가 영적인 이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였었다는 것을 오늘날 많은 서구의 선교사들과 선교학자들이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 피선교지의 사람들을 “야만인”들로 보았고 그들의 문화는 모두가 악마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서구 선교의 극단적인 이원론과 우월주의를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반성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없는 것이 가장 크고 유일한 이유가 되어야 할 선교의 동기에 너무 많은 인간적인 우월감과 연민들이 섞여버린 것이다. 서구적인 기독교만이 성경적이라고 은연중에 믿어버린 결과 피선교지인들의 내면의 문제 조차도 서구적인 감성과 논리를 기준으로 하여 해결해 주고자 함으로써 많은 영적, 사회적, 인간관계적 부작용들을 야기시킨 것을 우리는 지난 두 세기의 선교 역사 속에서 종종 보게 된다.
이러한 서구 교회 선교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우리에게 은연중에 스며든 한국식 사회진화론적 망령은 없는가? 반만년 역사 속에서 숱한 침략을 받아오면서 생존한 우리 민족의 내면 가운데 은연중에 자리잡고 있는 열등감과 우월감의 아이러니가, 혹시 우리가 볼 때에 “미개하거나” 영적으로 “무식하다고” 생각되는 피선교지의 사람들에게 망령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국식이 항상 성경적이라고 은연중에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날 여러 서구 선교사들과 선교학자들의 자성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2. 내면으로의 선교 (Inward Mission)
선교는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을 바꾸시는 역사이다. 필자가 이미 앞의 글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은 복음으로 인간의 “세계관,” 곧 인간의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변화시키신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간증한 내용을 보면, 주님께로 돌아서는 회심의 의미는 다섯가지를 내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행 26:18). 1) 이방인의 눈이 열리는 것이요, 2) 어두움에서 빛으로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이며, 3) 사단의 권세를 뿌리치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며, 4) 결국 하나님의 죄사함을 받음으로써, 5) 궁극적으로 예수를 믿는자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기업에 소속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회심의 속도나 현상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의 방향 전환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선교는 가장 중요한 목표로 여겨야 하며, 선교지에서 개척된 교회들은 이 변화를 가장 중요한 교회의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한다. 필자가 이 당연한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강조하는 이유는 실제로 선교 수행에 있어서 많은 경우에 이러한 내면의 변화가 간과되는 것을 많이 보기 때문이다. 또 비록 이러한 변화(성경적인 회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사역한다 하여도, 이를 확인하고 회심의 기준을 설정하는 일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회심의 외적 현상은 문화권마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내면의 변화는 분명히 확인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내면의 변화가 진실로 일어났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서는, 선교사는 선교지의 사람들의 내면의 깊은 곳으로 찾아가야만 한다. 그들의 정신 세계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주님처럼 긍휼함과 애정을 갖고 그들의 내면을 체감하면서 그들의 내면 깊은 곳의 필요들을 다루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교사는 외면적인 필요들은 채워주나 (현대 교육이나 의료 혜택 등) 그들의 영적인 필요들은 (전통적인 세계관으로 인한 영적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하나님에 대한 오해 등) 해결하여 주지 못함으로써, 선교지의 사람들이 주변에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전통 무당이나 복술가들을 계속 찾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지난 약 2세기의 선교 역사를 들여다 보면, 선교사들이 소개하여 준 복음은 영적인 복음이기 보다는 때로는 물질적인 복음으로 추락한 경우가 꽤 있었다. 선교사들은(서구 선교사들의 경우) 선교지의 사람들에게 서구 문명의 많은 혜택을 주기는 하였지만, 정작 선교지의 사람들의 내면의 문제들은 잘 알지도 못하였고, 그 결과 영적인 문제들은 피상적으로만 다루어 주었다는 보고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다. 결국 선교지의 많은 교인들은 아직도 자신들의 전통 무당들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선교지 사람들에게 비친 선교사는 현대 기술 문명 차원에서는 우월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것이다.
필자가 그동안 선교지에서 살펴본 바, 현지 사람들이 선교사들에게 많이 부탁하는 것은 영적인 능력이기보다는 많은 경우에 경제적인 지원 요청이거나 문화적인 혜택들임을 발견하였다. 물론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랑의 봉사가 그들을 감동시키고 그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선교사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내면 깊은 곳으로 찾아 가야 한다. 그들의 영적 세계를 깊이 파악하고 그들의 내면의 필요들을 해결하여 줄 수 있을 때에 비로서 주님이 명하신 “제자삼기”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어떻게 선교지 사람들의 내면에 비쳐지고 전달되는지 항상 확인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선교사는 복음의 의미와 그 능력을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해서도 희석되지 않도록 순전하게 보존하고 전하되, 복음을 받는 이들의 내면에 진실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내면으로의 선교”를 더욱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3. 문화의 황금률
필자는 앞의 글에서 “내면으로의” 혹은 “안으로의 선교”의 중요성을 논하였다. 안으로의 선교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께 죄를 범한 뒤에 인간은 육신적으로만 죽게된 것이라 영혼이 하나님과의 분리됨을 인하여 정신적으로도 실제로는 죽어버린 것이다. 허무하고 무의미한 가시적인 것들을 좇아 울고 웃는 인간들을 찾아가는 복음 선교는 그야말로 인간의 내면의 깊은 곳으로 찾아가는 선교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선교지의 문화 이해를 매우 강조하여 왔다. 선교훈련원과 선교사 연장 교육원에서, 그리고 아프리카의 다른 문화권으로 들어가는 아프리카 현지 사역자들에게 강의할 때마다, 인간 이해의 중요성을 항상 강조하여 왔다. 우리가 아무리 옳고 확실한 인생의 해답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전달이 되지 않는 것을 필자는 많이 경험하였고 목격하였다. 많은 선교사님들과 강의 시간에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눌 때에, 필자는 본인의 경험과 유사한 경험들을 하면서 고민하는 선교사님들을 많이 만난다. 그 고민들은 많은 경우에 신학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인 요소들에 관련된 것들이 많다.
사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의 도구를 사용하여 들여다보면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한 정신 세계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들의 믿음과 가치들을 쉽게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문화의 힘이다. 그러한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문화 속에 찾아 오셔서 그들의 문화의 요소들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메시지를 설득력있게 전하셨다. 성육신이야말로 이러한 하나님의 문화 혹은 인간 이해의 절정인 것이다. 즉, 사랑의 최고봉인 것이다. 그분은 단순히 히브리 문화를 흉내내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히브리 문화를 성육하신 당신의 몸과 마음의 자기 표현으로 삼으셨다. 히브리 문화가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히브리 문화의 요소들을 사랑하셨고 누리셨다. 히브리인들의 옷과 음식과 음악과 모든 삶의 표현 양식들을 사용하셔서 주님은 그보다 높은 하늘의 이야기를 전하셨다.
선교지에서 아프리카의 음악을 아주 싫어하는 한 서구 선교사님과 친하게 지낸 적이 있다. 필자는 어느날 약간은 도전섞인 어조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이토록 좋아하는 음악을 그렇게 혐오하면 어떻게 저들의 속을 이해하겠소?” 그 음악을 생리적으로 사랑할 수야 없겠지만, 그들이 왜 좋아하는지 알아보려고 노력하다보면 그들의 삶의 부분에 깊이 들어가서 그들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항상 피상적으로 그들의 삶의 밖에서만 만나던 “선교사”의 사역이 좀더 구체적인 그들의 문화의 장 속으로 들어가 이루어질 때에, 우리의 선교 사역도 단순히 일만이 아니라 삶인 것이 입증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기억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 우리는 이 말씀을 기독교의 윤리적 황금률이라고 명칭한다. 필자는 이것을 좀더 확대해서 문화에 적용하여 보고 싶다. “남에게 존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의 문화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문화의 황금률이 선교에는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교사가 선교지의 문화를 사랑한다는 것이 소위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것은 물론이다. 이것은 그들의 문화와 타협을 한다는지 혹은 모든 문화를 절대적으로 상대화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들을 존중하며 인내를 통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겸허함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더욱 이해하고 알고자 할 때에, 이 겸손은 힘이 되어 우리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이들의 마음의 문을 더욱 활짝 열 것이라고 믿는다.
4. 이방인의 회심과 회심의 자리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와 그 목적이 선교라고 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고난 가운데 있었던 노사도인 요한에게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의 내용은 열방의 모든 민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흰 옷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 보좌 앞과 어린양 예수 앞에서 경배하는 놀라운 영광스런 일이었다 (계 7:9-17). 교회가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져야 할 꿈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들의 계시였다. 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계시는 오늘도 유효하며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꿈이요 환상은 모든 열방의 족속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의미와 그 목적이 선교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진리이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회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면 진정한 회심의 자리는 어디이며 선교사들과 선교하는 모든 교회들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관심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를 위하여 선교 문화인류학의 중요한 개념인 “세계관(worldview)”을 언급할까 한다. 선교사들의 현장 경험과 시행착오들을 토대로 하여 오늘날 대부분 선교 문화인류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은 회심의 자리는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교 문화인류학에서 말하는 세계관이란, 철학적 세계관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어떤 문화권이든지 그 문화권에 살고 있는 보통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당연히 옳다고 믿고 있는 믿음들(assumptions)과 가치들(values), 그리고 그 가치들에 대한 헌신(allegiances)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민족들 혹은 나라들마다 문화적인 지식들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므로 충성의 대상들도 다르게 된다. 진정한 회심이란 바로 이 세계관의 내용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계시로써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는, 비록 민족과 문화가 다름으로써 세계관의 내용들이 다르지만, 동일한 복음으로 인하여 분명히 공통적으로 일어나야 할 세계관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교회와 선교는 목표하며 이를 위하여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민족들이 경험해야 하는 세계관의 변화는 바로 위에서 말한 세계관의 깊은 부분의 변화를 의미한다. 즉, 지금까지 당연히 믿어왔던 우주관과 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이 바뀌어야 하며 (문화적 믿음의 변화), 가치의 핵심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가야 하며 (가치의 변화), 충성과 헌신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이다. 주변의 다른 변화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가장 깊은 부분인 세계관의 변화를 유도하지 못하였을 때, 선교는 혼합주의라는 선교의 부작용을 낳고 마는 것을 우리는 서구 선교의 현장과 역사 속에서 많이 보아 왔다. (혼합주의는 복음이 들어가기 전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채 외부에서 온 기독교의 모양들을 갖는 현상을 말함.)
그렇다면, 그동안의 우리의 선교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도 한번 짚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우리도 과연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 즉, 피선교지인들의 내면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일어나야 하는 혁명적인 의식의 변화를 목표하고 이를 확인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고 헌신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외적인 변화에 주로 만족하며 외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일들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지는 않았는가? 저들의 세계관이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와 영광의 왕으로 섬기며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영광 앞에서 영원토록 예배할 그 환상으로 저들에게 다가가고 있는가? 피상적인 변화가 아닌 세계관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회심을 교회의 모든 선교는 가장 으뜸 과제로 삼아야 하며 이를 위한 피땀나는 헌신과 깊은 연구들이 더욱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5. 전쟁 용어들보다는 사랑의 열정이 담긴 말을
미국 빌리그래함 센터의 전도와 선교 정보원 (Evangelism and Missions Information Service)에서 발행되는 세계선교 정보지(World Pulse)의 작년 12월 15일 판과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선교잡지인 EMQ의 금년 1월호에는 필자가 이슬람권 선교사로서 그동안 늘 마음에 두고 있었던 내용들이 실렸다. 이 내용들은 이슬람권 선교를 다루는 기독교인들의 표현들이 너무 전투적이기 때문에 선교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영어로 쓰여져 있어서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춘 무슬림들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심지어 인터넷 상에도 전투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는 선교단체들의 홍보 내용들이 무슬림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방비로 뜨고 있는 것을 이슬람권 선교 전문가들은 지적한 것이다.
영어나 유럽 말들로 표현되는 “영적 전투”라든가, “타겟 대상”이라든가, 혹은 “전략,” “크루세이드(Crusade, 직역하면 ‘십자군 전쟁’) 등의 표현들은 무슬림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분명히 전쟁 용어들이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영적인 의미를 갖는 말이지만, 복음의 세계와 영적 세계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용어들은 이슬람의 세계에 도전하는 전투적인 의미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자신들의 "지하드” 세계관에 입각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그들을 기독교인들은 깊이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는 비단 국제적으로 읽혀지는 영어로의 표현만을 가리킬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자세히 관찰해 보자. 우리는 당사자가 당장 코앞에 있지 않으면 반말 혹은 무시하는 투로 말하는 오랜 습관을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언어 생활은 우리의 말들 저변에 내재되어 있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은연중에 드러내 주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도 이 점을 잘 지적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즉, 사람들은 속에 있는 것들을 말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말 속에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존중하는 말들이 많이 결여되어 있음을 본다. 아마 외세에 지긋지긋하게 당한 우리의 한을 입술로 풀고자 하는 오래된 집단적 잠재심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과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다. 언어생활도 아버지 하나님처럼 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권 선교와 이슬람학의 대가인 영국인 학자 크래그(Kenneth Cragg) 교수가 수십년 전에 미국 동부 코네티것 주의 하트포드(Hartford) 대학원에서 이슬람학을 강의하면서, “무슬림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마치 그들이 이곳에 우리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라”고 학생들에게 권면하였다고 한다. 이 오래된 권면을 필자는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하여 보고 싶다. 그들이 없을 때에도 마치 그들이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랑의 진실함과 배려함이 습관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사역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사역하는 대상인 사람들의 흠이 너무 많이 보여 사역자들끼리 모이면 그들을 흉보고 싶은 우리의 연약함일 것이다. 사람의 귀함은 주님의 시각이다. 특별히 이슬람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선교를 구상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선교가 영적인 전쟁인 것은 절대적인 사실이지만, 이 전쟁은 이슬람의 지하드(jihad)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우리에게 전쟁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희생을 식량으로 하는 헌신일 뿐이다. 엄격히 말하면 영적 전쟁은 나 자신의 죄와 약함과의 전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교적인 은유나 용어들을 사용할 때에는 좀더 복음의 메시지가 반영되는 용어들을 개발하고 사용하였으면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이것을 전달하고 알려주는 모든 방법도 사랑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6. 후세인의 회심과 나의 의식의 변화
필자가 “내면으로의” 혹은 “안으로의 선교”를 계속 주창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개인적인 이유가 크다.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나오기까지는 개인의 뼈아픈 체험이 있으리라. 약 10년전 케냐의 무슬림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였다. 한 젊은 무슬림 성직자가 필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주님을 알게 된, 일종의 큰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필자도 그와의 만남을 통하여 이슬람 세계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즉, 그동안 약간의 책이나 강의들을 통하여 알았던 이슬람이 아니라, 아주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무슬림들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이슬람”은 종교의 이름이며 “무슬림”은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킴.)
그의 이름은 후세인이었다. 후세인은 필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주님을 자신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일단 그의 회심은 비밀리로 붙여졌고, 그는 당분간 다른 무슬림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그가 일하던 회교 사원에 출근하여 무슬림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거지나 말투가 아무래도 달랐든지, 또는 한국인 선교사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았든지, 그는 며칠후 소말리아의 회교 본부로 소환될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 정보는 우리 형제들 가운데 누군가가 입수하게 되었고, 필자는 서둘러 그를 수도 나이로비로 비밀리에 후송하였다. 마치 야간 첩보 작전을 수행하는 기분이었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후세인은 무슬림 옛동지들이나 가족들로부터 온갖 회유와 협박을 다 받았지만, 끝까지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나타냈고 신앙을 지켰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외부적인 핍박과 위협보다도 그를 더욱 괴롭혔던 고통은 사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그 당시 가졌던 내면의 고통은 “진”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후세인은 기독교로 회심한 이후에 이슬람의 영들인 “진”들을 매일밤 경험하여야만 하였다. 밤은 그에게 항상 악몽이 되었다. 이러한 아프리카 무슬림들의 내면의 세계를 알지 못하였던 필자는 낮에 만나서 성경 공부를 할 때에 기도만 해줄 뿐 그 “진”이라고 하는 실체들에 대하여 이렇다 할 답변을 주지 못하였다. 필자가 안식년으로 떠나 올 때까지도 후세인은 그 문제만큼은 해결하지 못하였다.
매우 미안한 마음을 안고 첫 번 안식년을 맞이하여, 필자는 이 부분을 깊이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알게 된 것이었지만, 아프리카의 많은 무슬림들은 표면적으로는 공식적인 이슬람의 의무를 준행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이슬람의 영인 진들과 씨름하며 수많은 공포를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문헌들과 다른 지역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후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이슬람권의 평범한 무슬림들은 아프리카 무슬림들과 다를바 없이 이슬람의 진들과 씨름하며 어두운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안식년 기간 동안에 이슬람의 내면의 세계에 대하여 깊이 알게 된 필자는 두 번째 임기 때에는 이 부분을 많이 다루어줄 수 있었고, 첫 번 임기 때보다도 훨씬 보람있는 사역과 현장조사(리서치)를 할 수 있었다.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을 때에는 사역지도 바뀌었고 또 다른 이유 등으로 인하여 후세인을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필자에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선교의 경험이었다. 그가 아니었던들 필자는 이슬람을 학적으로만 이해했을 것이다. 실제로 무슬림들이 갖고 있는 내면의 고통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세인은 필자에게는 선교의 은인 중 한 사람이다. 그로 인하여 필자는 이슬람 세계에 대한 소위 파라다임의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필자는 진실로 무슬림들에게 예수의 복음이 그들의 내면 깊은 곳까지 찾아가 줄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이요 사랑이라는 것을 전하여 주고 싶다. 특히 후세인에게 늦었지만 그의 고민의 깊은 부분들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싶다. 이제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게 되면 필자의 소원은 어두움에 묶여 진리를 보지 못하는 무슬림들의 내면에, 그들의 아픔과 혼돈을 이해하는 자로 찾아가고 싶다. 바울의 빚진 자의 심정으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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