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인격의 나
내면과 다른 나
난 지킬인가? 하이드인가?
하이드이고 싶은 지킬인가?
지킬이고 싶은 하이드인가?
절망하지 마라. 설사 그대가 절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더라도 절망하지 마라. 이미 끝장이 난 듯싶어도 결국은 새로운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정말로 끝장이 났을 때에는 절망할 수조차도 없지 않은가?
프란츠 카프카
Ich habe kein literarisches Interesse, sondern bestehe aus Literatur, ich bin nichts anderes und kann nichts anderes sein.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카프카" 1913년 8월, 연인 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시 태어나면 이과 남자가 아닌 하늘이 내린 문과형 작가의 연인이고 싶다.)
Kafka, 독일계 성씨로 서슬라브어군 언어로서의 뜻은 갈까마귀이다. 이름조차도 내가 좋아하는 에드가 엘런 포의 레이븐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눈빛은 세상에서 가장 검은색인 반타블랙만이 내뿜을 것 같은 그런 이글거림을 발산한다. 눈과 눈이 만난다면 빛을 쭉 빨아들일 것 같다. 내 영혼을 빨아먹는 위대한 알코올의 힘과 정신과 약의 조력을 받아 오늘도 쓰디쓴 인생을 쓰고 또 쓴다. 하루를 공포 속에 쫓기고 견디다 0시가 되면 술과 약에 써 내려가는 고백서이다.
위대한 체코인 프란츠 카프카(1883년~1924)는 프라하에서 성공한 유대인 상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7월 3일생이다. (미국 독립 기념일 전날 태어났다. 이런 얘기를 모임에서 떠벌리는 순간, 난 편집증 환자 취급을 당한다. ) 여리고 애처로운 지성의 남자에게 연인이 있었던가?
그는 하룻밤 사이에 유명한 단편 "판결"을 써서 펠리체 바우어에게 바치게 된다. 자수성가형의 아버지는 소심하고 병약한 아들을 무시하고 폭언을 일삼았다.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부유한 여인을 만난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고급 양품점을 열고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독일어를 사용하는 학교에 갔고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독일어와 체코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바이링구얼에다 꽃미남으로 추앙받을지도 모른다. 근육과 남성성을 중요시하던 시대를 견딘 그에게 상남자인 아버지는 오로지 수모와 모욕을 주는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물론 그 시대의 아버지의 입장에선 그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장한 아버지상을 받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행히 나의 아버지는 언제나 침묵의 존재였다. 평생 동안 아버지랑 대화를 나눈 시간을 덧셈해도 한 시간이 안 된다고 남동생이 가족 모임에서 고백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준엄함과 그냥 그 자리를 지킴으로 위로가 되는 존재감의 상징이었다. 대문 밖에서 기침 소리만 나도 웃음을 멈추고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카드놀이를 즐기고 거침없이 막말을 던졌다. 하인들에게 소리치고 가족보다는 오로지 사업뿐이었다.
카프카의 일생 동안, 삶의 목표는 오로지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주어진 일에 또한 정성을 들였다. 무엇이든 진심을 담았다. 보험회사 직원으로서도 여러 번 승진을 했다. 1917년 결핵 진단을 받고 1922년 보험회사에서 퇴직, 1924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결핵요양소 키얼링(Kierling)에서 사망했다. 미소년처럼 사랑스러웠으며 수줍음이 많았으며 보기 드문 조용하면서도 상냥하고 재치가 넘치는 남자였다. 이 남자를 난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는 뜨거운 지성과 천재성을 감추고 숨죽이고 글만 써야 했다.
허난설헌이 그러했듯이, 사후 그는 모든 작품을 소각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Max Brod)가 카프카의 유작, 일기, 편지 등을 출판했다. 사람은 역시 살아도 죽어도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특히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 내 아이의 친구가 잘 돼야 내 아이도 잘 된다. 친구 욕은 이제 그만하고 칭찬하는 밝은 사회가 빨리 오기를 소망해 본다.
그는 펠리체 바우어(1887–1960)란 여성과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다가 결국 완전히 헤어지고 말았다. 이후 여러 여자들을 만났지만 결혼을 하진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적어도 게이가 아니고 여자를 사랑한 성 정체성이 확실한 남자였다는 것이다. 평생 수십 번 그의 글을 읽고 또 읽었지만 쉰이 넘은 나이에 이제야 마지막 비둘기호 완행열차처럼 다가왔다. 난 언제나 궁금했다. 왜 독수리호는 없는지가? 그 어느 누구도 이 엄중한 문제에 답을 하지 않았다. 아! 추억의 비둘기호!!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 박사를 카프카는 유대인 문화 예술 모임에서 만난 적도 있다. 편두통, 우울증, 변비, 불안정증을 앓았다. 유대인이라는 신분이 평생을 인도의 불가촉천민 계급보다 더 혹독한 삶을 살게 만들어 주었다. 인도에 가서 머무르는 동안 많은 인도인들을 보았고 그들은 생각보다 자신의 힘든 삶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역시 인디언답다. 길에서 구걸하는 여인도 신께서 그러하시다면 다 받아들이고 감사하노라! 였다. " 인생 뭐 있냐!" 배움이 짧아도 지혜의 폭은 넓었다. 그녀의 긴 속눈썹과 Yes에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대중은 카프카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죽음은 질주하듯 달려오고 여린 그는 독자들의 몰이해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내면의 독창적인 상상력은 뛰어났으나 대중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고 갔다.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하지만 그건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원래 그런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모두가 잠든 밤에 창백하고 병약한 카프카는 순식간에 "변신"이라는 명작을 완성했다. 하룻밤이라고 말하기에 사실 위대한 작가는 사실은 성실했다. 매일매일 혼자만의 밤에 쓰고 또 썼다. 본인도 작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게 "책이란 드라이아이스처럼 나를 얼어붙게 만들고 급기야 산산이 뇌를 부숴 버리는 파괴력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 변신이 그러했다.
그는 온몸을 오체분시 시킬 만큼 강한 필력의 남자였다. 엽기력도 최강도였다. "변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품을 레오나드 다빈치처럼 미완성으로 남겼다. 세 명의 여동생들은 수용소에서 비참한 삶을 마감했다. 작가의 삶은 왜 이다지도 비극적이어야만 하는가? 처참하게 일그러진 삶만이 인생의 잔혹한 맛을 제대로 음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생이 비극일수록 삶을 뜨겁게 돌아보게 만들고 왜 무엇 때문에? 왜 나인가?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적이 보이지 않는 밤에도 살기 위해 날리던 화살처럼 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한 완벽한 하루에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하여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인생을 다 안다고 떠들지 말자! 다짐해 본다. 내가 언제 그렇게 겸손했던가! 고통이 구더기처럼 다닥다닥 보이지 않지만 빛의 속도로 나를 파먹는 밤이다. 극강의 쾌활함과 명랑함과 성인 ADHD 특유의 심란함이 신산함으로 하루 만에 바뀌었다. 난 어쩌면 원래 그러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외로움이 골수를 파먹는 밤, 난 피를 토해 울었다. 무슨 말을 그에게 했던가? 어떤 모습을 지었던가? 그도 울고 나도 울었지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난 왜 나와 당신과 세상과 시간과 삶과 죽음과 죽도록 싸우다 세월만 낭비해 버렸을까? 아직도 안 늦었다고 말하지 말라! 늦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불가능한 순간이 왔을 때이다.
지독하게 아프고 지독하게 후회되고 지독하게 경멸스러운 삶을 살아야 해서 지독하게 읽고 쓴다. 인생은 고통의 서사시이다. 언젠가 낯 뜨거운 고백들을 서슴없이 던지겠지! 곱게 늙지 왜 저 모양이냐고 욕했던 그들이 나이고 내가 그들이다. 아픔을 혈서로 써 내려가는 글들! 이젠 인간이 아닌 신을 저주하고 싶다. 이런 삶은 능멸이다. 절명하고 싶은 밤이다.
비평을 공부하는 요즘, 역사 전기적 비평이 몹시 와닿는다.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 1804년 12월 23일 ~ 1869년 10월 13일)는 19세기 프랑스의 비평가이다. 인종, 환경, 시대를 알아야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과학적인 비평의 정립을 세웠다.
나를 알지 못하면서 비평을 넘어 비판했던 모든 이들에게 이제 제발 독자 중심 비평에서 깨어나길, 진심으로 국민 신문고는 왜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난 벌초를 한 적이 없으며 사실 확인도 안 된 기사를 전국에 올린 기자들이 반성하기를 기대해 본다. 자신들의 거짓 기사와 댓글이 살인 행위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런 벌 처받을 것들! (출처 기사 댓글 중)
전 세계 이방 저 방을 다니며 유튜브에 댓글을 영어로 달면 하트와 아름다운 답글이 온다. 그 어디에도 한국처럼 칭찬의 글을 달아도 비난이나 조롱 또는 욕설을 답으로 받는 곳은 없다. 돈 내고 읽는 글도 아니고 문해력이 떨어지면 그냥 침묵하시라! 내 돈 내산 책이어도 함부로 욕하지 마시라!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댓글 달기 모임 회장님이 연락 주신다면 후원금도 내고 행동 대원으로 활약할 자신이 있다. 몸 바쳐 이렇게라도 세상을 바꾸고 싶다.
경쟁하듯 댓글로 욕을 하고 싸우는 경우도 여러 번 봤다. 우린 쌈닭이 아니다. 전문 지식인만이 글을 쓰는 세상이 이제 아니다. 지식의 경연장도 아니다. 상대방이 틀린 경우엔 예의 바르게 수정을 부탁하면 작가에겐, 최고의 존경이 된다. 한국은 디지털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새로운 세상의 예의를 배울 시간이 짧았던 것 같다. 옳다 그르다를 평가하지 않는 것이 야말로 배운 자의 경지이다. 타인을 폄하 내지 폄훼하지 않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워야만 깨닫는 것도 존재한다. K 문화를 사랑하지만 K 방역은 ㅈ(K를 90도 뒤집은ㅈ) 방역이었다. 욕쟁이 할머니의 찰진 욕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고통의 끝은 없고 피를 토하는 고백록이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프다!
일단 무조건 쓰고 본다. 퇴고는 언제 할지 나도 모르겠다. 접신하는 순간을 놓치면 영원히 끝이다. 오타하나 없이 철저하게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언제나 나의 스승이다. 제정신으로 쓰는 글이 아니라 부끄럽고 초라하고 허접하다. 누군가를 위한 스스로의 치유의 글이라 생각하고 관용과 용서를!
퇴고는 어쩌면 영원히 안녕!
1번 여대생으로 기말고사 준비 철저하게 (치매 초기라 암기가 안된다)
2번 오전 시간 잘 활용하기
3번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기
4번 오늘 하루 잘 살기
5번 정직하기!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