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씨의 관향(貫鄕)은 이백여 곳이 되지만 초계(草溪), 경주(慶州), 동래(東萊), 연일(延日), 진주(晋州), 하동(河東), 해주(海州), 온양(溫陽), 청주(淸州), 광주(光州)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초계정씨(草溪鄭氏)로 초계(草溪)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과 쌍책면 일원이다.
시조(始祖) 광유후(光儒侯)께서는 지금의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에 거주하셨다고 한다. 墓所는 성산리(城山里) 옥전(玉田)에 있으며 성산리 474번지이다.
성산리에는 옥전서원(玉田書院), 광덕사(光德祠), 신도비각(神道碑閣) 등이 남아 있다. 옥전(玉田)에서 남쪽으로 언덕너머에는 작은 마을이 있으니 성산리(城山里)인데 지금도 시조(始祖)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구전(口傳)들이 전해지고 있다.
초계(草溪)는 신라(新羅)때는 초팔혜(草八兮), 팔계(八溪), 청계(淸溪)라 하고 고려(高麗)때는 초계(草溪)로 개칭하였다. 高麗 현종(顯宗)때에 합주(陜州;합천)에 속하게 하고
명종(明宗)때에는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숙왕(忠肅王)때 7世孫 수기(守琪)공이 공(功)을 세워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시에 행정구역 통폐합의 일원으로 합천군에 속한 면으로 남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에서의 정씨(鄭氏)는 고대 중국의 형양(滎陽)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형양(滎陽)은 하동성(河東省) 개봉도(開封道)에 속한 하나의 현(縣)으로 주(周)나라때의 동괵국(東虢國)이다.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아우 우(友)를 정(鄭)나라에 봉(封)하였다고 하며,
일설에는 주(周)나라 려왕(厲王)이 아들 우(友)를 정(鄭)나라에 봉(封)하니 곧 환공(桓公)이라 하였고 그 후손들이 정씨(鄭氏)가 되었다고 하며 중국의 정씨와 우리나라의 정씨와의 연관성은 밝혀진 바가 없다.
우리 초계정씨(草溪鄭氏)는 광유후(光儒侯) 휘(諱) 배걸(倍傑)을 시조(始祖)로 한다. 광유후(光儒侯)는 고려 (高麗) 현종(顯宗)때 과거에 급제하시고 문종(文宗)때 예부상서(禮部尙書)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지내시고 문하시중(門下侍中) 광유후(光儒侯)에 추증되셨으며 시호는 홍문(弘文)이다. 광유후(光儒侯)는 11세기 초중반의 인물로 광유휴(光儒侯) 이전의 선세(先世)에 관해서는 그 유래를 고증할 수 없다.
우리 초계정씨(草溪鄭氏)의 기원에 대해서는 세간에서 많은 설들이 있다. 즉 지백호(智伯虎)의 후손으로 경주정씨(慶州鄭氏) 제36세손에서 갈려 나갔다는 설이 있고, 당(唐)나라 시대의 오계지란(五季之亂) 에 정씨(鄭氏), 주씨(周氏), 변씨(卞氏)의 삼학사(三學士)가 우리나라로 피난하여 초계에 정착하여 초계정씨(草溪鄭氏), 초계주씨(草溪周氏), 초계변씨(草溪卞氏)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으며 심지어 후손들 중에서도 이러한 근거없는 주장에 현혹되어 경거망동(輕擧妄動)하는 등의 사례가 있어서는 안된다.
약 삼백년전 백운보(白雲譜) 이래 계미보(癸未譜), 경자보(庚子譜), 갑신보(甲申譜), 임신보(壬申譜), 계묘보(癸卯譜) 등 역대 보첩(譜牒)에 始祖 光儒侯 이전의 선세지사(先世之事)에 언급이 없는 것은 고증할 수 있는 역사적인 근거가 전무함으로 족보 제작시 선현(先賢)들께서도 기록하지 못한 것으로 지금에 와서 역사적인 기록과 입증할 증거가 없이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초계정씨(草溪鄭氏)는 광유후(光儒侯)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 선세지사(先世之事)에 대하여는 역사적인 고증이 불가능 함으로 거론치 않기로 함을 재확인하는 바이다
첫댓글 초계정씨 홈페이지에는 한문체로 초계정씨 성관연혁이 등록되어 있는데 위의 자료로 수정해 달라고 변경 신청한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