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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인도 불교사
2. 싯다르타의 고민
1) 인간 싯다르타
종교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매우 설화적이고 신화적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는 역사 속에 분명히 존재한 실존 인물이다. 실론(스리랑카)에서 전해진 빠알리어 경전 등 초기경전에는, 그를 대단히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격화 되지 않은 인간의 모습으로.
고타마란「가장 좋은 소」란 의미이며, 고래로 인도에서 훌륭한 성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싯달타란 팔리어로「목적을 달성한 자」라는 의미이다. 그의 가계는 고래로 「태양의 말예末裔」라고 칭하여졌다. 그는 네팔의 석가족의 중심지인 가비라 성에서 국왕인 숫도오다나[정반왕 : 淨飯王]의 장자로 태어났다. 보통「석가님」이라 불리우는데「석가」라는 것은 그가 속해있던 종족의 이름이다. (中村元 著 楊貞奎 譯,『佛敎의 本質』 p. 38.)
싯다르타는 무사계급으로 교육받았지만, 현실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경작하는 밭에서 나온 벌레를 새가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든지, 사촌 데바닷타가 쏜 화살에 맞은 백조를 치료해서 살려 주는 등 세속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 슈도다나Suddhodana왕과 양모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는 싯다르타가 훌륭하게 자라 왕위를 잇고, 카필라를 강성한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을 기대했지만, 싯다르타는 그런 세속의 일 보다는 항상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보다 더 깊은 관심을 보인다.
슈도다나왕은 이런 왕자를 보며 혹시 출가出家하여 수행자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억지로 결혼을 시키려고 태자비를 간택한다. 싯다르타는 3개의 궁에 모인 4,000여명의 신부들을 마다하고, 뒤늦게 도착한 신성한 소를 돌보는 목동이었던 야소다라Yasodhar에게 반해 청혼을 한다. 그러나 야소다라의 아버지 단다파니 왕은, 처음 그가 용감하지 못하고 무술도 뛰어나지 못하다고 결혼에 반대한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용맹성과 무술 실력을 입증하기위해 무술 대회를 열어 모든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야소다라와 결혼하게 된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면 아버지의 강권으로 결혼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선택으로 결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야소다라는 불교 교단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데바닷타의 누이였다. 데바닷타는 동생 아난다와 같이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다가 뒤에 이반離反하여 분파를 형성, 석가모니의 최대의 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불교에서 갈라져 나간 금욕주의적 종교 운동가였다.
시합에서 싯다르타의 경쟁상대로 데바닷타와 난다의 이름이 항상 등장하는데, 데바닷타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싯다르타 태자의 배다른 아우인 난다는 태자가 성도한 후에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보아 왕자와는 열 살 이상이나 연령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이 가리키는 어느 특정 인물과 기예를 겨루었다고 보기보다는 설화에 의례히 등장하는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라는 유형類型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 / 法頂 올김,『불타 석가모니』 p. 50.)
야소다라와의 결혼 13년 만에 아들 라훌라Rāhula를 낳는데, “라훌라(일식)에게는 달빛과 햇빛을 가리는 힘이 있어 나를 영원히 궁에 가두고 놔두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서, 마부 찬타카와 함께 애마 칸타카를 타고 궁을 나선다. 라훌라는 장애라는 뜻 보다는 일식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당시 인도에서는 자손을 남기지 않고 출가 수행하는 것을 나쁘게 보았기 때문에, 아들의 출생과 더불어 출가하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2)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의문
싯다르타의 출가 동기는 보통 ‘사문유관四門遊觀’1 으로 상징화 된다. 그는 이 체험이후 노병사老病死, 즉,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젊은 날 싯다르타는 육신의 한계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는 길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가를 막는 아버지에게 싯다르타는 말한다. “나에게 생로병사가 없게 해줄 수 있는가?” 라고.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더러움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열반)을 얻기 위해서이다. (『증아함경』권56, 라마경.)
이 세상에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여래(如來, 붓다)는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잡아함경』권14, 346경.)
일설에 슈도다나왕은 태자가 출가하지 못하도록 성벽을 높이 쌓아, 29살이 될 때까지 성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설화에 불과하다. 학자들은 당시 (지금도 남아 있는) 산 재물을 바치는 제식, 재물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과 약탈, 그리고 카스트 제도 등등 정치, 경제, 사회제도에 환멸을 느껴 구도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람이라면 한번쯤 복잡하고 번거로운, 그리고 마냥 견뎌야 하는 이 세계를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이 잔인한 적자생존의 세계,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이 숨 막히는 세상에서 멀리 떠나고 싶었으리라. 지금을 사는 현대인들과 같은 아주 평범하고 대수로운 인간적인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제자 아난다는 말한다.
‘이 재가의 생활은 옹색하고, 번거로우며, 티끌이 쌓이는 곳이다. 그러나 출가는 널찍한 들판이며 번거로움이 없다’고 보고, 출가하신 것이다. (『숫타니파타』제406게송.)
어쨌든 그는 갠지스 강을 따라 여행하며 생로병사를 벗어나는 길을 찾아 떠난다.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인간 육신의 무상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안고 그는 온갖 정성을 다해 수행에 임한다.
3) 싯다르타의 사색
인류는 자연재해나 질병 등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진 절대자를 상정하고 그를 떠받드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원인을 '절대자의 노여움'이라고 간주하고, 그 노여움을 풀기 위해 거나한 종교행사나 제사, 혹은 미신적인 것에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절대자 '신神'의 존재는 무엇이며, 천지자연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운영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따지고 보면 인간보다 능력 있는 신이라는 존재를 상정한 것도 인간이고, 천지자연이 어떻게 하여 만들어졌는가를 생각하는 본체本體는 결국 인간의 마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연유로 이른바 신과 같은 절대자가 이 천지자연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보고, 삼라만상이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를 집중적으로 참구한 사람이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다. 인간이 겪는 불확실성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신에 의지하기 보다는, 그 고뇌가 어떻게 발생했는가라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비구들이여, 내가 아직 정각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일편단심 이렇게 생각했다. ‘진실로 이 세상은 고통 속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늙고 죽은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없다. 도대체 언제라야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고, 늙고 죽는 일에서 벗어나는 길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남전『상응부경전(12.10)』「대석가모니구담大釋迦牟尼瞿曇」, 한역『잡아함경(12.3)』「불전佛縳」. 增谷文雄 지음, 홍사성 옮김,『근본불교 이해』 pp. 31~32.)
그런 선지자들의 노력들이 모여 현재 우리들은 보다 더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그 원인에 집중하는 과학의 시대에 살게 되었다고 봐야 하겠다. 어쨌든 그런 의문들이 생겨날 즈음 그때도 지금처럼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준다는 수행법들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선지자들을 찾아다니며 혹독하게 수행에 임했지만, 어디에도 그가 가진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한 그는 홀로 라쟈가하[왕사성王舍城]인근 네란자라[니련선尼連禪] 강가 핍파라pippala 나무 밑에 자리를 펴고 앉아 사색에 들어간다. 이를테면 싯다르타는 생로병사를 화두 삼아 오늘날과 같은 참선에 들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처음 바라문계층의 수정주의자인 아라라 선인과 웃다카 선인에게 가서 공부하여 그들이 체험한 궁극을 증득했으나 실지의 해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전변설을 주장하는 수정주의를 버리고 다음에 적취설을 주장하는 고행주의자로 가서 고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육년 동안 갖은 고행을 다했으나 아무 소득이 없어서 고행을 버리고 보리수 아래에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공부하여 새벽별을 보고 정각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인도 수행방법의 양대 조류인 전변설의 수정주의나 적취설의 고행주의를 다 버리고 중도에 입각한 연기설이라는 자기의 독특한 새 입장을 개척한 것입니다. (退翁 性撤, 성철스님 법어집 1집1권『百日法門 上』 pp. 72~74.)
그리고 마침내 사색을 통해 해답을 얻는다. 싯다르타가 당시 인도 수행방법의 양대 산맥인 ‘전변설轉變說’의 수정주의나 ‘적취설積聚說’의 고행주의를 버리고,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진리가 중도에 입각한 연기설이라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단순히 고행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지 뒤에 출현하는 철학이나 논리학에서 말하는 중도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2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은 뒤 장장 250 km를 걸어 바라나시 근교 녹야원鹿野苑으로 간다. 자신과 같이 수행했던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행한 설법에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인 연기법을 말하지는 않는다. 싯다르타의 '초전법륜初轉法輪'은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것이었다. 중도를 먼저 설한 것은 자신과 함께 고행 수행을 하고, 지금도 고행 수행 중인 옛 도반에게, 고행의 무용함을 말하기 위함이다.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 의하면 다섯 비구들이 다가오는 싯다르타를 보고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다고 한다.
“벗들이여, 제멋대로 정진을 포기하고 호화로운 생활로 되돌아간 사문 고따마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우리들은 그에게 경배하지도 말고, 가서 인사를 하고 발우와 가사를 받아주지도 말자. 하지만 고따마는 고귀한 가문 태생이므로 원한다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는 마련해 주자.”
그러나 싯다르타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은 그를 에워싼 빛나는 휘광으로 인해 자신들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다만 싯다르타가 깨달았다는 것에는 회의적이어서 이렇게 반박한다.
“그런 품행과 그런 실천과 그런 엄격한 고행으로도 인간의 조건을 넘어선 성자가 갖추어야할 특별한 지혜와 통찰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는 이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그대는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호화로운 생활로 되돌아간 사람입니다. 그런 그대가 어떻게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가 갖추어야할 특별한 지혜와 통찰을 증득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꼬레 영어 번역 / 김한상 우리말 번역, 마하시 사야도의『초전법륜경 (상) The Dhammacakkappavattana Sutta), The Great Discourse On The Wheel Od Dhamma』.)
싯다르타는 의심하는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였고, 오랜 설득 끝에 ‘비로소 받아들이려는 마음상태가 되었고, 부처님께서 펴실 법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들을 준비를 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싯다르타는 첫 번째 설법으로 먼저 중도를 설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머무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오비구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다.” (각묵 스님 옮김, 상윳따 니까야 6권, 진리 상윳따, 초전법륜 경.)
싯다르타는 중도를 먼저 설명하고 나서, 중도를 성취하기 위한 실천 방법인 팔정도八正道를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다. 팔정도는 중도의 실천법인 것이다. 근본교리 가운데 하나인 사성제 중 도성제道聖諦의 실천 방법이기도 한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중中’은 곧 ‘정正’이라는 것이다. 즉, 중도가 곧 팔정도이며, 팔정도를 통해 열반이 성취된다고 설하고 있다.
열반은 중도에 대한 이해로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후에 선종선사 마조도일(馬祖導一, 709~788)은 이를 한 마디로 압축하여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고 설파하고 있다.
확실히 바라문 교도들은 죽음이라는 문제와 씨름하느라고 극단적인 고행을 감행하고 있었다. 특히 자이나 교도는 아힘사(살생하지 않는 것)의 정신을 무척 강조해서, 먹으면 작은 벌레마저 죽이게 된다는 생각으로 굶어 죽는 사람까지 나타나기에 이르렀건만, 그런 죽음일수록 오히려 최고의 희생 행위라 하여 아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시카미 요시오 지음/이원섭 옮김, 알기쉬운 불교5『미란타 왕문경』 p. 43.)
그렇다면 그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법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1. 사문유관四門遊觀은 석가가 태자로 있을 때 가비라성迦毗羅城의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동문 밖에서는 노인을, 남문 밖에서는 병든 사람을, 서문 밖에서는 죽은 사람을, 북문 밖에서는 승려를 만나, 인생의 네 가지 괴로움인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일을 말한다.
2. 성철스님은 부처님이 깨치신 진리가 ‘중도’ 이며, 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방법론이 아닌 목적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대승불교적 시각인데, 자칫 잘못하면 초기불교의 실천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견해라고 오해받을 소지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마성스님,「<百日法門> 에 나타난 中道思想」). 율장의 초전법륜편에서 싯다르타가 다섯 비구에게 ‘출가자는 이변二邊에 친근치 말지니 고苦와 낙樂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正等覺이라 하였다.’ 라고 한 말을 가지고 중도에 입각한 연기설이라고 단정한 것은 논란이 있다. 싯다르타가 말한 중도는 고와 락이 아닌 팔정도의 중도와 탐진치 갈애 욕탐欲貪을 떠나는 것을 말하는 중도를 말하는 것이지, 후에 나온 용수의 팔부중도의 공사상 등 철학이나 논리학으로서의 중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을 깨달으면 곧 무상정등각을 얻는다는 반야심경의 중도와 초전법륜의 중도와도 너무도 다르다. 성철 스님이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까지 모두 중도이고 새로운 연기설이라고 주장한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