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諱)는 용(涌)이고 자(字)는 도원(道源)이니, 증조(曾祖)는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된 김예범(金禮范)이고, 조부는 성균 생원(成均生員)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김진(金璡)이며, 아버지는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 김수일(金守一)이고 어머니는 한양 조씨(漢陽趙氏)로 사과(司果) 조효분(趙孝芬)의 따님이다.
학봉 김성일 선생과는 사촌간이다. 아버지 수일이는 의성김씨 五父子中 한명이다.
공은 본래 낙동강(洛東江) 좌편 문소(聞韶, 의성(義城)의 구호(舊號)) 사람으로, 성은 김씨(金氏)이다. 고려 때 태자 첨사(太子詹事) 벼슬을 지낸 김용비(金龍庇)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서 공에게 12대가 된다. 명(明)나라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36년인 (정사년(丁巳年, 1557년 명종 12년)) 11월 4일에 공은 안동부(安東府) 일직현(一直縣) 구미리(龜尾里)에서 태어났다.
공은 고향으로 돌아간 지 4년을 지나서 경신년(庚申年, 1620년 광해군 12년) 10월 19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였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 20년째인 기묘년(己卯年, 1공은 소년 시절에 글을 읽고 행실을 닦아서 재학(才學)으로써 명성을 드러냈는데, 27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34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이윽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옮겨졌는데, 겨울에 입직(入直)하다가 두질(痘疾)이 생겨 매우 위중하여 생기(生氣)가 없자, 임금이 중관(中官, 내시)을 시켜 계속 연이어 문병하게 하면서 또 이르기를, “비록 병이 생겼다고 하지만 두터운 품성을 타고난 자는 요사(殀死)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병이 과연 나아서 집에 돌아가 있다가 도성(都城)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때 왜구(倭寇)의 상황이 위급하여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으니, 이때에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25년(1592년)이었고 공의 나이가 36세였다. 왜적이 연달아 3경(三京, 서울ㆍ개성ㆍ평양)을 함락시켰으므로 도로에 왕래를 못하였는데, 공이 향리(鄕里)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여러 의병(義兵)들과 집회하여 방어해 지키다가 이듬해 가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임금이 계신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공은 다시 한원(翰苑,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훌륭한 사관(史官)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639년 인조 17년)에 장손(長孫) 김희(金熙)가 묘소를 옮기려고 새로 터잡아서 임하(臨河)의 지동(枝洞)에 합장하였다. 또 그 뒤 13년째인 신묘년(辛卯年, 1651년 효종 2년)에 효종(孝宗)이 처음 정사를 할 때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항거해 지켰다’는 일을 임금께 아뢴 자가 있어, 공에게 특별히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추증하고 부인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의 봉작을 내렸다. 지금 나에게 찾아와서 묘명(墓銘)을 부탁한 자는 김 좌랑(金佐郞, 김시주)의 손자로, 현재 효릉 참봉(孝陵參奉)이 된 김태기(金泰基)이다. 그 무덤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군자(君子)의 나라에 태어나서 군자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군자의 사람이 되었도다. 노(魯)나라에 군자가 없다면 이 사람이 어찌 이 덕(德)을 가졌겠는가? 참으로 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네. 선조임금의 피난 때 모시고 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