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수집한 동괘(창날), (괘법동) 주변 옛사진
괘법리,김전리 항공사진 1947
동괘(창날)마을 전경, 서괘쪽 '60년대 (1)
동괘(창날)마을 전경 '60년대 (2)
동괘(창날)마을 전경 감전리쪽 '60년대 (3)
동괘 신흥상공사 앞 들판 '60년대 (2)번과 (3)번 사이
*** 아래글은 사상초등학교50회 권금산님의 글로 사상구청 문화지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
권금산님은 사상구 괘법동 "벼락부자집 앞이 고향"이며 학장초등학교로 치면 18회에 해당됩니다.
아 내 고향 부산沙上!<18>동괘(창날)편
또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의 沙上을 스케치 해보기로 하자!
筆者가 사상초등학교 앞을 고집하는 것은 당시에 여기가 [사상의 중심지]였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길을 통하여 동괘(東掛)와 감전동. 주례. 학장. 엄궁 방면으로 가는 길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당시에는 사상 국민학교로 통하는 길이 다른 곳도 있었겠지만, 제일 많이 다녔던 길이 여기로 통하는 길이었다.
사상 국민학교 앞 사거리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조금 내려가다 보면...
왼편에는 당시 ‘사상 여관(현 킹 마트)’이 있었고, 좀 더 내려가면 당시 사상국민학교 단골 사진관이었던 ‘미림 사진관’이 길 왼편 안으로 있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벼락 부자집’이 있었고, 벼락 부자집 정문 바로 옆에 筆者의 집과 筆者의 외삼촌집이 있었다.
筆者의 아버지는 당시 사상의 “신라고무” 공장 ‘권검사’라면... 사상 사람들은 다 알았었다고 한다.
어릴 때... 筆者의 기억으로는 “신라고무” 공장의 급료는 월급(月給)제가 아니고, 봉급(보름마다 급료를 지불)제로서 급료 때가 되면 筆者의 집으로 급료를 받기위해 사람들이 줄을 섰고, 나무 도장(급료를 받는 사람들의 도장)이 200여개나 되어 마치 탄환 꼽는 벨트처럼 미싱으로 만들어서 아버지가 도장을 집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외삼촌은 筆者의 집 바로 옆에서 신발가게를 하다가, 70년 중반부터는 당시 사상 지역에 [우등생의 길]이라는 시험지를 경영하였었다.
筆者의 집 앞에서 남쪽으로 좀 더 내려가면 산모퉁이에 당시 ‘다이야 빵꾸 떼우는’ 집이 있었고, 그 산 밑에는 공동우물이 있었다.
당시 라디오도 귀했었던 시절!...
사상지역 내의 유선으로 방송을 보내는 유선방송사(작은 나무상자 안에 스피커 하나만 설치되어있는)가 이 산 옆에 있었다.
여기가, 당시 동괘(東掛)와 서괘(西掛)의 경계선이었다.
그리고 산모퉁이를 돌아서 가면 지금의 “사상 터미널” 건너편 동괘(東掛)마을!
일명 “창날!”...
사상 古 문서에 보면... “창진(倉津)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 창진을 ”창날포“ 또는 ”창날“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낙동강물이 이곳 마을까지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수 있다.
창진(倉津)이라고 이름 한 것은 이곳에 면민들에게 대여하는 사창(社倉)이 있어서 사창은 흉년이 들면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조선시대의 제도인데, 그 창고가 창법리에 있어 이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당시 동괘(東掛)마을의 형성은 현재의 ‘사상路’를 중심으로(당시는 신작로, 국도 왕복 2차선) 현재의 ‘괘법동 사무소’와 ‘괘법 파출소’ 부근으로 산 아래의 조금만 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사상역 앞의 광장 대로(大路)는 당시에 전부 야산이었으며, “사상 역 앞에 ‘터미널’이 들어서게 된다”는... ‘개발’이라는 물결에 밀려서 70~80년대부터 땅 팔고, 집 팔고 몇 푼 되지 않았던 보상 받아서 ‘본토 사람들’이 거의가 떠나갔던 동네가 여기였다.
60년 당시...
동괘(東掛) 마을 앞의 길 신작로 (지금의 사상 路) 건너편으로는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논과 밭과 들판과 뻘밭. 갈대밭들뿐이었었다.
그러니까, 당시는 현 사상 파출소(사상초등학교 옆)에서 개울(덕계천)을 따라서 신라고무 공장이 있었고 그 옆으로 신라고무 공장 부근의 서괘(西掛) 마을(현 괘법 한신2차아파트)이 있었고, 괘법 한신2차아파트 옆의 길 남쪽 방향으로는... 그러니까 현재의 사상 강변동원아파트, 왕산 아파트, 창진 초등학교, 르네시떼, 서부 터미널, 부산 산업유통 상가, ‘서감 초등학교’ ‘감전1동 새벽시장’까지 그리고, 서감(西甘:현 감전동 서쪽 )본동 마을 외에는, 멀리 학장과 엄궁동의 산 밑에 까지는 전부 논과들과 늪지대와 갈대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현 사상 파출소앞의 사상로를 기준으로 ‘사상로’ 서쪽편으로도 멀리 모라동까지 논과들과 늪지대와 갈대밭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0년 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상은 정말! 급속도로 변하였던 것이다.
1970년대 초... 정부의 공업 진흥책에 따라서 사상이 공단지역으로 조성되면서, 당시의 논과 밭과 뻘밭 뿐이던 땅들이 차츰차츰 이사(?)를 가버리고... 대신에, 대규모 신발공장들과 섬유, 화학 공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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