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념물 제 219호 둔촌 이집 선생 묘역.
둔촌 이집은 고려 말기의 정치가이며 학자,충과 효행을 일평생 실천한 은둔문인,첫 이름은 원령,자는 성로,아호는 묵암자 혹은 남천, 본관은 광주로 아버지 이당과 어머니 인화 이씨 사이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고려 충숙왕 14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다음은 둔촌 이집 선생의 일화로써 선생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원령(둔촌;이집)은 스승댁에서 공부에 전념하다가 아버지가 병환을 앓게 되자 스승께 고하고 집으로 향하니 친구들이 말렸다.원령은 천연덕스럽게 말하기를
“친구들 말은 고마우나 그래도 내가 책을 읽은 선비인데 배움을 실천하지 않으면 어떻게 선비라 하겠는가? 효는 백행의 근원인데 부모님이 아프실 때 병간호를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과거에 급제한들 무엇하리.나는 배움을 실천할 뿐이요.”
담담히 말하고 고향 광능 땅으로 향하는 원령을 바라보는 친구와 스승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집에 돌아온 원령은 부친을 뵈오니 부친 등에 커다란 종기가 나서 더운 날씨에 여간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효성이 지극한 원령은 아버지의 병 구환을 위하여 여러 가지의 약을 구해다 드리며 정성으로 간호했다.어느 날 원령은 주르막을 짊어지고 남한산성이 있는 한산으로 올라가 국청사 조실스님이 얘기한 약초를 캐어 가져와 아버지 환부에 붙여 드렸다.그날 저녁 아버지 이당은 갈증이 몹시 나서 잠을 깼다.어둠 속에서 아들이 자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워 깨울 수가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아픔을 참고 자배기 쪽으로 기어 가서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물을 먹고 다시 잠을 청하려니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것처럼 시워했다.
움직인 수도 없었던 몸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신기해서 곤히 자고 있는 원령을 깨워 자초지종을 아야기 하였다.
이때 등이 축축해짐을 느낀 이당은 웃옷을 벗어 아들에게 종기를 보이니 등에서는 종기가 터져 피고름이 흘렀다.원령은 피고름을 닦으니 종기의 근까지 몽땅 빠져 구멍이 휑하니 뚫리었다.그렇게도 몸과 마음을 고생시킨 종기가 밤사이 터져 종기의 근까지 빠져나간 것이다.
원령은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고요하게 떠있는 달을 쳐다 보며 그동안 잊고 있던 개성의 스승과 동문수학 하였던 벗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보았다.효는 백행의 근원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시는 은사님의 모습,과거를 준비하지 못하고 아버지 병 구환을 위해 내려가는 것을 말리던 친구들,모두가 보고 싶은 얼굴들이었다.
“그래,아버님 병환은 어떠신가?”
“이제 병환이 완쾌되셨습니다.”
하고 지난 일을 말씀드리니.
“자네야 말로 이 어지러운 세상에 진정한 효자일세.이제 자네 학문이 경지에 도달하여 세상을 능히 이끌어 나갈 사람일세.”
라며 스승은 칭찬했다. 원령은 21세에 문과로 급제하고도 등용되지 않아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또 급제한 수 여러 관직을 거치던 그 당시, 최고 권력을 휘두르던 요승 신돈의 정치를보다 못하여 천성이 강직했던 둔촌은 그를 배척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도피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슬하에 3남을 둔 그는 노부와 처자와 함께 서울 둔촌동 산자락 땅굴 안에서 1년 남짓 은신하다가 경상도 영천에 사는 친구인 천곡 최원도의 집을 향하여 떠났다.큰 아들 지직은 해인사로,부인과 두 아들은 영주로 보낸 후에 둔촌 이집은 아버지를 모시고 천곡 최원도의 집에 왔다.마침 천곡의 집에서는 그의 생일날이라 많은 인근 주민들이 모여 주연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사랑마루에 걸터앉아 천곡을 찾으니 안채에서 천곡이 나왔다.
그토록 믿고 찾아온 친구였다.그러나 결과는 너무도 의외였다.반기기는커녕 크게 노하여
“망하려거든 혼자나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나까지 망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복을 안아다 주지는 못할망정 화는 싣고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면서 내모는 것이다.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둔촌이 말하기를
“나는 한모금의 물을 청할 뿐이지 의탁코자 온 것은 아니라네”
라고 말하자 그도 거절하며 마구 내모는 것이었다.이렇게 되자 둔촌은 다시 늙은 아버지를 업고 정처 없이 떠났다.
둔촌이 떠나자 천곡은 둔촌일행이 앉았다가 떠난 바깥 행랑채에다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하객들이 그 연유를 묻자 역적이 앉았다 간 자리는 태워야 된다는 대답이었다.
한편 둔촌은 천곡의 집에서 쫓겨나 산길을 택해 걸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천곡이 자신을 진심으로 자신을 내쫓은 것이 아니라 체포령이 내린 자신을 여러사람이 보는 앞이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그렇다면 천곡은 생일 하객이 돌아가면 반드시 자신을 찾아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둔촌은 멀리 가지 않고 길옆 덤불 밑에서 밤을 맞고 있었다.또한 천곡은 천곡대로 생각하기를 둔촌은 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었으니 분명코 멀리 가지는 모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등불을 들고 산길을 더듬어 둔촌을 부르며 찾아 나섰다.
진정한 심우요 지기였다.둔촌이 생각한 그대로였다.둔촌과 천곡 두 분은 끌어안고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밤이 깊은 후에 아무도 모르게 천곡의 집 다락방에 숨게 되었다. 하늘과 땅과 세 사람이 알뿐 가족도 일체 모르게 하였다.이렇게 하여 4년간에 걸친 다락방 피화생활이 시작된것이다.
두 친구 사이의 우정은 참으로 미담이었다.그리하여 두 집안 후손끼리의 돈독함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은거생활 이듬해에 노부는 세상을 떠났고 천곡의 배려로 그 곳 나현에 장례하였는데 지금도 둔촌 부친의 묘소는 그 자리에 있다.그 후 악행을 일삼았던 신돈의 죄가 밝혀져 처형됨으로써 둔촌을 옛 집으로 돌아왔으며,봉순대부 판전교시사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사양하고 여주 이포강변과 성남시 하대원 산촌에서 은일자적하며
목은 이색,포은 정몽주,도은 이승인 등 대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하며 일생을 마쳤다.
둔촌이 세상을 떠난 후 의정부좌찬성 벼슬이 추증되었고,한강변에 구암서원을 세워 추앙하는 예를 조정에서 행하였다.당대 문인 학자였던 목은은 둔촌을 일컬어
“성인의 도를 얻은 사람”이라 하였고,삼봉도 “의사로서 흠 잡을 데가 없는 이”라 하였으며. “둔촌의 용모는 장중하고 강인해 보였으며,꽉 짜이고 준수한 기품이 있는 중에 음성은 옥이 구르는 듯 하면서도 명확하고 유창했다”라는 기록이 전한다.훗날 의해 오촌,팔청,구일에 속할 수 있는 인물로 손꼽혀지는 둔촌의 사상과 학문적 인격을 역사 속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후 506년이던 1993년도에 성남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으며,다시 2008년5월26일에는 성남문화원의 청원에 의해 겅기도 기념물 제219호로 승격지정되었다. 묘역 정화사업 및 ‘추모제’사당건립 및 ‘둔촌 청소년 문학상’까지 제정되어 연례적 문화행사로 추진 중이다.
아울러 1998년도 향토인물 학술회의 개최 결과,민병하 교수의 논문에서 “둔촌의 외모가 충만하고 언어가 경책하며 기성이 강개하고 효행이 지극하며 고난을 의의 용기로써 극복하고 그것이 더할수록 뜻은 더욱 굳어지며 학문을 사랑하고 벗을 중히 여기며,호연의 기를 체득하고 자연에 자적이며,문장과 지절이 뛰어나 참으로 성인의 역에 도달하였다 할 수 있는”이라고 결론을 짓고 있다.
둔촌의 인물됨을 지적한 옛 사람들의 핵심어를 찾아보면,목은은 “맹자의 도에 거의 접근하였다.”했으며,포은도 “세속을 초월하여 고결한 경지에 있다.”하였고,도은 역시, “호연의 기를 체득한 사람”이라했다.
그의 행적 기록에 의하면, “둔촌 선생께서 학문,절의,문장,고행으로 이름은 사림 사이에 두드러지고,덕은 일세에 으뜸이어서 사람들이 이마에 손을 대고 탄상하였다.”라는 글로도 그의 효행과 충의는 자못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삶’을 영위했다고 말하게 된다.
그의 한시 적품 중에 ‘세 자식에게 보여 이름’이라 글과 ‘큰아이가 불국사로 공부하러 가게 되어 시로써 이르기 위함’즉 ,
‘정훈(庭訓)’시를 소개한다.
자손에게 금을 광주리로 누다하여도
경서 한권 가르침만 못하느니라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인 지라도
너희를 이해 간곡히 일러두노라
독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
시간을 아껴 부지런히 공부에 힘써라
늙어서 무능하면 공연히 후회만 하게 되느니
머리 밑의 세월은 멈추지 않고 빠르기만 하도다.
지금까지 여러 문헌상 기록과 작품 내용을 연구한 향토사학자 한춘섭의 강연 원고에는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둔촌선생은 그 당시 높은 인격과 학덕을 지닌 목은,포은,도은과 서로 나랏일이 잘 되기만 충고하고 의론하면서 가정에서는 인자하고도 엄격한 어버지로서 자식 교육에 철저했으며,늙으신 부모님 앞에서는 밤낮없이 효성으로 걱정스러운 얼굴 빛을 보여 드리지 않으신 효자로도 소문이 나 있다.저 남한산성 안의 효자우물 전설이 바로 둔촌 선생님의 착하셨던 일이 후대에 이야기로 만들어져 저해 오고 있는 것이다.
결국,
-둔촌은 언제나 올바르고 나라만을 걱정하셨고
-둔촌은 행실이 밝기가 해와 별빛 같았서 누구라도 추앙하였으며
-문장 속의 도덕이 우뚝하고 그 필치가 두루 뛰어 나신 이었다.
둔촌 이집 선생은 맹자의 숨결을 느낄만한 학덕을 지닌 청렴결백한 학자로서 대부분의 삶을 우둔하며 오직 충효 사상의 덕목을 남들 앞에 몸소 실천한 성리학자 이었다.해박한 식견과 문장력을 발휘하며 끗끗한 지조를 지닌 은일거사의 대면사로 불리어진 이 말 중에 선생은 손꼽혀져 오고 있다.
청소년 및 전체 시민의 사표로서 추앙받아 마땅하리라고 생각하며,더 깊은 연구 및 향토문화의 큰 인물로서 그의 거룩한 정신을 계승하는 성남의 시민정신을 계도해 나가야만 한다.
둔촌의 11대손 이휴징이 쓴 묘갈문의 한 구절을 보면.
“선생의 일은 밝기가 해와 별 같아서 백대에 두고 영원할 게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