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맥퀸 [Steve McQueen]
생년월일 : 1930. 3.24 ~ 1980. 11. 7
출생지 : 미국 인디애나 비치 그로브
신 장 : 178cm
1930년 3월 24일 출생. 본명은 테렌스 스티븐 맥퀸(Terence Steven McQueen). 어려서 집안이 가난하여 15살 때 가출을 해서, 유전 인부, 선원 등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해병을 지원하였다. 그는 해병대에서 하사까지 진급했는데, 이런 그의 해병대 경력은 그의 영화에 크게 영향을 주고 있다.
1956년 <상처뿐인 영광>으로 영화에 데뷔하여 <황야의 7인>, <대탈주>, <블리트> 등의 히트작에 출연했으며, 과묵한 이미지의 액션 스타로 굳혀갔다. 대표작은 더스틴 호프만과 공연한 <빠삐용>.
1980년, 암 치료를 위해 레이어트릴(Laetrile)과 다른 비정통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멕시코로 갔으나, 4개월 뒤 수술 중 사망했다. 당시 뉴스에선 Laetrile이 듣지 않는다고 전했고, 암은 치료되었으나 복부에 남아 있는 암이 아닌 종양을 제거하다 사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5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두 자녀 채드, 딸 테리가 있다.
스티브 맥퀸은 헐리웃 영화계에서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액션물'의 첫번째 스타라고
생각됩니다. 30-50년대의 고전적인 스튜디오풍 헐리웃 영화시대가 끝나가면서 60년대에
빌딩, 도시, 오토바이, 자동차, 형사 등이 등장하는 현대 도시적 스타의 이미지에
그는 썩 잘 어울렸습니다. 말을 타고 권총을 타는 서부극이 아닌 오토바이나 스포츠카를
사정없는 모는 터프한 남자들, 멋진 연미복을 입고 귀부인과 춤을 추고 파티를 하는
신사가 아니라 점퍼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도시를 배회하는 터프가이들,
그렇게 영화의 주인공이 변해가고 빌딩숲의 도시가 본격적인 영화의 배경이 될 때
스티브 맥퀸은 그 중심에 서 있었죠
1956년 폴 뉴만이 주연한 상처뿐인 영광에서 메인 타이틀에도 올라가지 못하는
단역으로 출발한 스티브 맥퀸은 불과 2년뒤에 주연급 배우로 올라섰습니다.
하지만 이 때가지 그는 주목받는 스타는 아니었죠. 그가 스타덤에 오르고 6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인기배우가 된 것은 '존 스타제스 감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존 스타제스 감독은 3편의 영화에서 스티브 맥퀸을 출연시켰습니다.
1959년 프랭크 시나트라와 지나 롤로브리지다 주연의 '전쟁과 애욕(Never So Few)'에
조연으로 출연했고, 여기에 함께 출연했던 찰스 브론슨과 함께 율 브리너가 주연한
걸작 서부극인 '황야의 7인'에 비중있는 역할로 역시 찰스 브론슨과 함께 출연합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963년 드디어 같은 존 스타제스의 영화에서 제 1 주연으로 등장하게
되죠. 탈주영화의 대명사가 된 '대탈주'가 그 영화였죠. 대탈주에는 황야의 7인에
함께 등장하였던 찰스 브론슨과 제임스 코반도 함께 출연하였습니다.
대탈주 이후의 스티브 맥퀸은 순탄대로였습니다. 계속 주인공역할만 맡았으며
터프하고 고독한 현대 도시의 남자역할이었죠. 캐리 그랜트나 존 웨인, 게리 쿠퍼 시절의
헐리웃 주연배우는 '예의바르고 정의로운 남장'였지만 스티브 맥퀸, 마론 브란도,
폴 뉴만의 시대가 되었던 60년대는 삐딱하고 거칠고 터프하고 아웃사이더 적인 스타들이
등장했죠. 스티브 맥퀸은 40-50년대 헐리웃 배우들처럼 예의바르고 건전한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자유분방하고 자기 세계가 강한 멋대로 사는 주인공이었죠.
65년 신시내티 키드에서는 뒷골목 도박사로 나와서 에드워드 G 로빈슨과 멋진 한판대결을
벌였고, 66년 네바다 스미스라는 서부극에서는 부모를 살해한 원수인 칼 말데을 찾아서
복수를 불태우는 청년으로 등장합니다. 같은해에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감독 로버트 와이즈의
전쟁 로망스 대작인 산파블로에서 주인공역을 맡기도 하죠.
1968년에는 '카 체이스'의 전설이 된 영화인 '불리트'에서 주인공 형사 불리트 역을 맡아서
스피디한 '원조 카체이스장면'을 멋지게 선보이게 되었고, 이후 프렌치 코넥션, 007영화를
비롯한 현대 액션영화에서는 카 체이스는 단골 소재가 되었죠.
스티브 맥퀸의 강렬함이 돋보인 영화는 1972년 작품인 '겟어웨이'였습니다. 폭력의 미학으로
유명한 샘 페킨파 감독의 범죄 액션물인 겟어웨이에서 스티브 맥퀸은 러브 스토리의
알리 맥그로우와 짝을 이루어서 은행털이 역할을 맡아서 엄청난 액션과 터프함을 보여주죠.
이 겟어웨이는 나중에 알렉 볼드윈과 킴 베이신저 주연으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죠.
70년대에서 '영광의 르망' '주니어 보너' '겟어웨이' '빠삐용' '타워링'등에 출연하면서 건재함을
보여주었고, '빠삐용'은 그의 영화이력에서 큰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죠.
'빠삐용'='스티브 맥퀸'이 될 정도로 이 영화는 세계적인 히트를 하였고, 국내 개봉시에도
재개봉관에서 조차 빈 좌석이 없을 정도로 인파를 이루었습니다. 빠삐용의 한 장면은
국내의 어느 바퀴벌레약 광고로도 쓰였을 만큼 인기영화였죠. 빠삐용에서 바퀴벌레를 잡아먹던
장면은 정말 유명합니다.
빠삐용 이후 출연한 존 길러민 감독의 '대작 패닉물'인 타워링에서 그는 역시 대단한 톱 스타인
폴 뉴만과 공연하게 되는데, 두 사람간의 묘한 '신경전'이 느껴질 정도로 팽팽한 두 스타의
공동출연이었습니다. 사실 무조건 주인공만 맡은 두 스타가 함께 출연한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특이한 사건이었죠. 알다시피 헐리웃에는 '제 1 주연'만 맡는 스타들이 존재합니다.
존 웨인과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로버트 테일러가 같은 영화에 출연하기란 불가능하죠.
누군가는 먼저 메인 타이틀로 등장하여야 하는데 그걸 양보할 스타들이 아닐테니까요.
타워링에서 출연비중은 폴 뉴만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화재를 다룬 영화에서 '소방관'역할을
스티브 맥퀸이 맡았기 때문에 그만큼 상징성이 높았죠. 두 사람은 누가 타이틀에 먼저
등장하였을까요? 두 이름이 같이 등장하였는데 왼쪽에 스티브 맥퀸이 등장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스티브 맥퀸의 이름이 더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른쪽에 등장한 폴 뉴만의
이름이 더 위쪽에 배치되었습니다. 즉 위, 아래로 보면 폴 뉴만이 더 앞서 등장한 것이죠.
그만큼 메인 타이틀에서 조차 두 사람은 팽팽했죠. 타워링은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고, 아카데미
3개 부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스티브 맥퀸은 선글라스가 무척 어울리는 분위기의 배우였죠.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에서 선보인
멋진 선글라스 패션은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죠. 그리고 깔끔한 양복보다는 대충 맨 넥타이나
점퍼가 어울리는 배우였습니다. 불리트나 겟어웨이 같은 영화가 그의 이미지에 잘 맞는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1963년 대탈주부터, 1974년 타워링까지 11년간은 스티브 맥퀸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런데 타워링 이후 무슨 이유인지 그는 굉장히 영화가 뜸하게 됩니다.
4년의 공백끝에 1978년 An Enemy of the People라는 영화에 출연하였고,소리 없이 묻힌
이 영화는 국내에 개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망한 1980년에야 비로소 두편의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되었고, 이중 그의 유작이 된
'헌터'가 우리나라에 개봉되었죠. 스티브 맥퀸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영화였고, 같은해
서부극 '톰 혼'이라는 영화에서는 마치 그의 죽음을 예언이라도 하듯,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는 역할이었습니다.
타워링이후 그는 단 3편의 영화에만 출연하였고, 그중 한편만 국내에 개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3편 모두 썩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배우 스티브 맥퀸은
1974년까지였죠. 물론 그가 1980년 사망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긴 삶을 누렸다면 1980년대에도
우리는 계속 그의 터프한 모습을 여러 영화에서 구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980년대에 많은 경찰영화 버디무비등이 쏟아져 나왔고, 그런 류의 영화에서 그는 분명
스크린에 등장하였겠죠. 하지만 아쉽게도 50세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우린
그의 전성기인 11년간의 이미지를 영원히 기억하고 있고, 늙은 원로배우로서 그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스티브 맥퀸은 타이론 파워, 제임스 딘, 마릴린 먼로, 나탈리 우드, 몽고메리 클리프트
등과 함께 제명에 살지 못하고 배우로서의 모습을 간직할 채 사라져간 스타였습니다.
전쟁과 애욕, 황야의 7인, 대탈주, 돌격대, 산파블로,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겟어웨이, 불리트, 빠삐용,
타워링, 헌터 등 국내에도 많은 영화들이 개봉되었고,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배우입니다.
다작배우가 아니었던 그였기에 그가 주연한 영화는 약 20여편입니다.
그는 언제나 빠삐용의 마지막 장면처럼 '나비처럼 날아서 자유롭게 살아갔던 스타'였습니다
스티브 맥퀸을 로렌스 올리비에 경이나 존 길거드 경과 같은 배우들에 비기는 것은 어쩌면 서로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로렌스 올리비에 같은 이들은 분명히 연기파 배우이고, 스티브 맥퀸은 액션 연기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티브 맥퀸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유형의 액션 스타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앞서 말한 영화들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스티브 맥퀸의 연기 진폭은 상당히 넓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연기를 잘 하는 액션 배우였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위대한 배우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야 한다
그는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한명이었다. 그는 멋있다는 말에 대한 정의를 내렸었고, 오늘날까지 헐리웃의 수많은 대스타들이 그를 흉내내었지만, 아무도 근접할수 없었다. 스티브 맥퀸은 오직 한명뿐이었던 것이다. 스티브 맥퀸의 경력을 보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전형임을 알수 있다. 깨어진 가정에서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던 시골마을 소년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기있는 슈퍼스타가 됐으니 말이다. 그는 어린시절 사랑을 모르고 자랐지만, 그의 그을리고 주름살진 잘생긴 모습을 볼수 있는 모든 액션물들로 그를 선망하는 수백만의 팬들로부터 마침내 사랑을 알았다. 맥퀸은 매일 마치 그날이 생애 마지막날인것처럼 살았는데, 그는 스크린 안팎에서 특별한 삶을 살았다.
스티브 맥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수퍼스타였다. 그는 아마도 가장 많이 모방되는 영화배우일 것이다. 그가 모터싸이클 경주와 카레이스에 뛰어들자 헐리웃에서 나중에 이것이 유행이 되었고, 그는 모터싸이클과 자동차 모두 프로시합에 출전하여, 한때 그는 전업으로 경주에 참가할것을 고려했을 정도여서, 그의 경주에 대한 열정은 팬들에 대한 이목끌기 차원을 벗어난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가리켜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배우 중 한명이라 부르고 있는데, <The Great Escape>, <The Sand Pebbles>, <Nevada Smith>, <Bullitt>, <The Gataway>, <Papillon> 등은 맥퀸의 작품들은 클래식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Mesothelioma라는 폐암 중 드물고 고통스러운 형태의 병으로 고생하다 1980년 11월 7일 50살의 이른 나이로 팬들의 충격 속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불우했던 성장환경
스티브 맥퀸은 그의 아버지를 몰랐다. 그의 아버지는 맥퀸이 Indiana주의 Beech Grove라는 곳에서 태어난지 6개월만에 그를 버렸고, 그의 어머니 역시 맥퀸이 아주 어렸을때 Missouri주의 Slater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그의 삼촌과 함께 그를 떠나고, 맥퀸은 열두살이 될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어렸을때 난 스스로 나자신을 돌보는법을 배워야 했다. 대화할 상대가 아무도 없었고, 난 늘 혼자였다. 그것이 내가 자립을 할수 있도록 가르쳐 준것이다."라고 맥퀸은 말하였었다. 그는 가정생활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해 L.A.에서도 어머니와는 관계를 끊고 갱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는데, 맥퀸의 행동은 언제나 그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Chino에 있는 비행청소년 수용시설인 the California Junior Boys Republic에 보냈다. 그곳에서 맥퀸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잡혀 다시 돌려 보내졌다. 맥퀸은 후일 the Boys Republic이 그를 올바른 길에 올려 놓았다고 공을 돌리고, 스타가 된 이후에도 자주 그곳을 방문하였는데, 맥퀸은 1962년에 The Steve McQueen Fund를 그곳에 세워 최우수 학생에게 4년 장학금을 주었고, 또한 그는 유언으로 그곳에 20만 달러를 남겼으며, 1983년에 그를 기려 the Steve McQueen Recreation Center라고 명명된 빌딩이 세워졌다. 건물안 동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여 있다.
"스티브 맥퀸은 문제아로 여기 왔지만, 사나이가 되어 떠났다. 그는 떠나 영화계에서 스타덤에 올랐지만, 이 캠퍼스로 돌아와 자주 그 자신과 그의 재산을 나누었다. 그의 유산은 이곳 학생들과 앞으로 올 학생들에게 희망과 격려가 되고있다."
18개월간의 the Boys Republic 생활을 마치고 1946년 4월 그곳을 떠날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보내줘 맥퀸은 그녀의 어머니가 당시 살고있던 뉴욕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 당시 어머니는 재혼할 예정이어서, 나에게 돈을 보내줘 나는 대륙을 건넜던 것인데, 버스에서 내릴때 나는 마치 Lil' Abner가 된것처럼 느꼈다. 난 크고 높은 신발을 신고, 리바이스 바지와 자켓을 입었으며, 캘리포니아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스포츠 머리를 하고 있었다. 34번가에서 서있었던 일이 기억나는데, 정말 지독히 많은 군중들을 보았었다."라고 맥퀸은 말하였다.
맥퀸은 어머니와 함께 지내려 시도했지만, 얼마가지 않았다. 16살이 되자 그는 the SS Alpha라는 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데뷔초기의 인터뷰에서 맥퀸은 어떻게 그직업을 얻었는지 설명하였다.
" 당시 난 뉴욕에 있었는데 여름이 되어 아무 할일이 없어, 나중에 the Staten Island 페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게되는 Ed Ford라는 남자를 만났다. 나는 유조선의 갑판장의 조수였고, 그와 Tinker는 모두 한배에서 일했었고, 나는 그들과 어울리게 됬다. 그래서 이친구들이 나에게 숙련선원 자격증을 구해다줘 난 초창기 유조선이었던 그들의 배(the SS Alpha)에 승선하게 된것이다; Yonkers에서 그 망할놈의 배에서 불이나 거의 침몰할뻔 했었다."
그러나 유조선에서 일하는 것에 흥미를 못느낀 맥퀸은 배가 쿠바에 정박하자 하선해, 도미니카를 거쳐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여러가지 다양하고 특이한 일을 했다. "17살에 난 이미 노인이 되었다"라고 맥퀸은 말했었다. South Carolina의 Myrtle Beach에 있었을때, 맥퀸은 해병대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태양아래 누워 지나가는 아가씨들을 바라보는것은 항상 매우 즐거웠지만, 어느날 문득 어슬렁거리며 쏘다니는 일에 싫증을 느껴, 바로 해병대에 입대했다."
1947년 4월 그는 17살 생일이 지난지 한달후 입대했다. 맥퀸은 처음에는 모범적인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주말 외출허가증을 2주로 연장하고, 해안경비대가 그를 데리러 갔을때 그들과 싸워 함내 영창에서 41일형을 선고받았다(첫 21일은 독방에서 빵과 물만 가지고). 북극에서 군사훈련중, 운송선 한척이 모래톱에 부딪치면서 탱크 몇 대와 그 속의 승무원들을 얼음물 속으로 내팽겨쳤다. 많은 해병대원들이 바로 물에 빠졌으나, 탱크로부터 나올수가 없었다. 맥퀸은 차가운 북극의 바닷물속으로 뛰어들어가 거의 동사일보 직전의 병사 다섯명의 목숨을 혼자 구해냈다. 맥퀸은 이 영웅적인 행동으로 대통령으로부터의 무공훈장 수여와 함께, 당시 대통령이었던 Harry S. Truman의 요트를 경비하는 the Honor Guard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1950년 4월 명예제대 했다.
영화배우가 되기 까지
" 해병대에서 제대한후 난 텍사스에 가 유전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캐나다로 올라가 벌목꾼으로 일했다. 그후 뉴욕으로 가 한달에 19달러를 주고 급탕시설이 없는 아파트를 구하고 TV가게에서 배달일이나 신발가게에서의 일같은 것들을 했다. 가난하면 먹고살기위해 일해야 한다. 원하는 일만 할수는 없다."라고 맥퀸은 말했다.
맥퀸과 데이트하던 여배우가 그에게 연기를 해볼것을 제안했고, 뉴욕의 유명한 연기학교인 the Neighborhood Playhouse의 Sanford Meisner는 맥퀸을 받아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3년을 공부했다.
"난 열심히 했으며, 다른 농땡이꾼들과는 달랐다. 난 할수있는 모든 것을 배우길 원했으며, 내가 하는 일에는 뛰어나야 했다. 나에겐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맥퀸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영화배우로 성공하기로 결심했다.
"the Neighborhood Playhouse의 학비는 매우 비싸, 난 학비를 대기위해 야간에 우체국 트럭을 모는 직업을 가졌다. 초저녁부터 새벽 2시 반까지 운전하고, 아침에는 학교에 가는 생활을 1년을 했는데, 거의 죽을지경이었다."
여름이 되어, 맥퀸은 2번가에 있는 한 유태인 전속극단에 들어간후 트럭일을 그만두었다. 그는 모터싸이클 시합에도 참가해 매주 몇시합에서 우승하였고, 또 포커를 하여 돈을 벌었다. 맥퀸은 또 저명한 Herbert-Bergoff Drama School로부터 장학금을 획득하였으며, 나중에 그는 2,000명의 신청자중 두명을 선발하는 인원중 한명으로 뽑혀 뉴욕의 유명한 Actors Studio에 들어가게 되었다. 연극 <A Hatful of Rain>에서 Ben Gazzara대신 주역을 맡음으로써 스티브 맥퀸의 이름은 곧 브로드웨이에 알려졌다. 이시기에 맥퀸은 첫번째 부인인 Neil Adams를 만났는데, 그녀 역시 매우 유명한 브로드웨이 배우였다. 그들은 1956년 캘리포니아의 San Clemente에서 결혼했으며, 그들의 결혼생활은 15년간 지속되었다. L.A.로 옮겨간 후, 스티브 맥퀸은 몇몇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영화는 <The Blob>이었다. 그러나 맥퀸의 이름을 처음으로 전국민에게 알린것은 T.V였다.
그는 클래식 시리즈물 <Wanted: Dead or Alive>에서 Josh Randal역을 맡았는데, 이 역할이 그를 더 큰 영화배역으로 이끌었다. 그에 있어 이정표격이 된 <The Magnificent Seven>, <The Great Escape>등의 영화에 출연한 이후, 스티브 맥퀸은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최고의 출연료를 받고 가장 인기있는 영화배우가 되었다
---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