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론 브란도 [Marlon Brando]
다른이름 : 마론 브란도, Marlon Brando Jr.
생년월일 : 1924. 4. 3 ~ 2004. 7. 1
출생지 : 미국 네브래스카 오마하
타고난 반항아로 헐리우드에서 이단자 취급을 받으면서도 독특한 개성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자신만의 아성을 개척한
명배우이다.
사관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서 뉴욕으로 흘러들어가, 그곳에서 연극학교에 다니던 누나들의 영향으로 배우를 지망했다.
19살때 연극무대에 데뷔했고, 4년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거칠고 난폭한 스탠리 코왈스키
역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를 무대에 기용했던 엘리아 카잔은 영화화하면서 비비안 리, 칼 말든, 킴 헌터 등
기라성같은 명우들과 함께 그를 재기용하였다.
54년에 공개된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에서 그는 이 작품으로 두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비비안 리 못지않은 명연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헐렁한 옷에 거치른
매너는 바로 작가 테네시 윌리암스가 그리려던 남부의 건달 코왈스키 그대로였다. 52년에는 <혁명아 사파타
(Viva Zapata!)>(칸느-남우주연상 수상), 53년에는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로 연속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다가, 마침내 54년에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에서 건달이었다가 사랑과 진실을
깨닫는 부두노동자 역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그후로도 그는 영화와 사생활 모두에서 기존의 헐리우드 스타들과는 전혀 다른 반항적이고 이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57년에 <사요나라(Sayonara)>로 다시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고, <애꾸눈 잭(One-Eyed Jacks)>에서는 감독도
맡아서, 종래의 서부극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감독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주로 멕시코나 남태평양, 아시아 같은 소수민족 출신의 여인들과 결혼없이 동거생활을 계속했고,
<바운티호의 반란> 촬영시에 알게 된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영화 출연시에만 헐리우드로 왔다.
그에게는 헐리우드식의 질서나 관념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고, 상업성 같은 것하고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72년 <대부>에 코폴라 감독의 고집으로 캐스팅되어, 일생일대의 명연으로 아카데미상에 수상자가 되었으나
이를 거부하여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다. 73년에도 논란의 대상이 된 화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 다시
후보에 올랐다. 그는 이 영화의 앞부분 15분 정도에 출연하면서, 단 15일간 촬영을 하고도 출연료 370만달러에
흥행수입의 11.3퍼센트 배당이라는 사상 최대의 개런티를 받았다. 그 후
그는 가족문제와 재정문제로 순탄치 않은 삶을 보냈고, 남과 만나지 않는 은둔생활도 해야했다. 특히 자유로움을
지나쳐 방종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1966년 매입한 테티오로라섬에 거액을 투자해 섬 전체를 개인 별장으로 삼기도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또 아들이 살인자로 구숙되고, 딸이 자살하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첫 부인인 웨일즈출신
여배우 앤나 캐쉬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크리스천은 지난 1990년 배다른 여동생 치옌의 남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딸 치옌마저 1995년 25살의 나이에 자살하였다.
그는 모두 3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부인은 멕시코 출신 여배우 모비타 카스테나, 세 번째 부인은 타히티 출신
타리타 테리피아 이다.
2004년 7월 1일, 캘리포니아주 UCLA 의료센터에서 폐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80세.
말론 브란도. 80년 전 세일즈맨인 아버지와 배우였던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나 ‘난 어머니 닮았어요’라고 보여주기라고
하듯 연극 아카데미에 진학한다. 아카데미를 때려치우고 뉴욕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연기를 시작한 그는 배우로서
빛을 보기 전 경제적 어려움에 흔히 말하는 아르바이트 삼아 한 로데오 경기에서 코가 부러져 결국 지금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매부리코를 얻었다고 한다. 50년 <더 멘>을 시작으로 이듬해 배우로서의 말론 브란도라는
이름을 알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반항의 상징처럼 신화가 되어버린 제임스 딘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며
제임스 딘과는 다른 매력을 맘껏 발산한다. 그 후 50년대는 그를 배우로서 기꺼이 맞이한다. 멕시코 혁명을 다룬
<혁명가 자파타>를 통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판 마녀사냥 ‘메카시즘’이 몰아치던 50년대
초반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실토(?)하고 미국사회로 전향한 엘리아 카잔 감독의 54년작 <워터 프론트>에서
주인공 테리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욕망>, <와일드 원>등 수많은 영화들로
50년대 자신의 필모그라피를 꾹꾹 눌러 채우며 자신이 맡은 배역에 집중하고 몰입했다.
60년대 잠시 주춤하다 72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 중년에 접어든 말론 브란도가 조심스레 50년대의 영광을
재현하는가 하더니, 감독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제작사의 반대로 출연이 확정되지 않자, 분장을 한 테스트 화면을
제작자에 보여주자 극찬하는 제작자가 누군지 묻자 그가 바로 말론 브란도라 말하며 결국 출연하게 된 일화가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를 통해 또다시 연기자로서 인정받게 된다. 아내를 잃고 무의미한
사랑에 탐닉하는 중년의 사내를 연기한지 얼마가 되지 않아, 60대를 넘어서 뚱뚱하고 두 볼은 개구리 왕눈이 투투
마냥 부풀어 오른 대부 ‘돈 꼴레오네’로 다시 돌아 온 것이다. 누가 봐도, 실제 돈 꼴레오네의 모습이라 믿을만한
모습으로 말이다.
대부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이 확정되자 그는 헐리우드 내 인디언에 대한 차별을 이유로 대신 한 여인을 시상식장에
보내 그러한 내용의 성명성을 읽게 했다. 꾸준히 미국 내에서 차별받는 아메리칸 인디언을 지원해온 그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렇게 70년대 화려하게 컴백한 그는 79년 <지옥의 묵시록>을 제외하고는 배우로서 자신이 보여준
모습의 기대치를 채워나가지 못한다. 결국 그는 영화가 아닌 전 부인 세 명과 가정부 사이에서의 15명의 자식이
말해주듯 복잡한 여자관계와, 그의 초기작에서의 호리호리한 몸매가 갑자기 불어난 것에서 느낄 수 있듯이
식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근근이 그의 이름으로는 부족한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중년에서 노년으로
이어지는 그의 인생은 불행했다. 재산 탕진은 물론이요 -탕진한 재산만큼이나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아들이 배다른 이복 여동생의 남자친구를 살해하고, 그 충격으로 딸도 자살을 하는 등의 비극을 겪기도 한다.
이렇게 불운한 노년기에도 그는 그의 삶을 다룬 <브란도 앤 브란도>를 준비 중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얘기를
채 하기도 전에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말론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그가 죽어서 슬프다는 것이 내가 할말의 전부다” 대부에서 함께 작업했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말이다. 50년의
연기인생 동안 다양한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이름으로 기억할 수 있는 많은 영화들에 그가 아니면
엄두를 내지 못할 완벽한 몰입을 보여줬다. 그가 맡은 그 유명한 배역들이 그의 몰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겨지듯이 그의 화려하면서도 비극적인 삶 또한 말론 브란도 그였기에 그럴 수 있다고 느껴진다.
말론 브란도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으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삶을 눈으로 확인할
유일한 방법이었던 <브란도 앤 브란도>가 무산되었음으로 그를 볼 수 없다. 주인아줌마가 모르는 영화들은
들여놓지 않거나 조기에 폐기 처분하는 우리 동네 비디오 샵의 특성상 그나마 과거의 지난 그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그나마 유일하게 친구 녀석에게 반납하지 않은 포르노로 둔갑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어디서 찾아야할지 막막할 뿐이다. 그저 유일하게 짙은 음영으로 가득 차 느리고 어눌한 말을 늘어놓지만
섣불리 건들지 못할 것만 같은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던 대부의 돈 꼴레오네의 모습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이것이 그의 죽음과 동시에 그를 기억하기 힘든 몇 가지 이유이며, 동시에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이다.
말론 브란도 (1924 ~ 2004) 미국 배우
말론 브란도는 많은 영화인들이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20세기 최고의 배우' 후보로
흔히 꼽히는 인물입니다. 적어도 그가 명배우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할 만한 사람은
없죠. 그런 만큼 말론 브란도가 영화역사에 남긴 배우로서의 가치는 뛰어납니다.
말론 브란도는 '흥행스타'는 아니었습니다. 흥행배우의 척도를 매기는 '퀴글리지
머니메이킹 스타'에 오르락 내리던 배우도 아니었고, '대부'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큰 흥행작도 없습니다. 오히려 말아먹은 영화가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로서의 그의 가치가 상한가인 것은 그가 남긴 연기세계가
얼마나 영화역사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론 브란도는 약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만큼 결코 다작배우는 아니었죠.
작품을 신중히 골라 출연하는 배우라고 할 수 있고, 연기력도 꽤 인정받는 배우였습니다.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남자들'(Men)에서 불과 26세 나이로 주연데뷔를 한 것을 보면
그가 처음부터 무척 잘 나가는 배우였고, 출발도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프레드 진네만이라는 무게있는 감독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발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입니까? 이후 그가 보낸 4년은 굉장한 세월이었습니다.
두번째 영화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그는 '반항아'연기의 원조를 선보입니다.
흔히 '반항아'하면 '제임스 딘'을 떠올리지만 사실 말론 브란도가 먼저였습니다.
1951년, 즉 제임스 딘이 나타나기 이미 4년전 말론 브란도는 특유의 껄렁한 '현대분위기의
반항아'이미지를 심었으며 1953년에 출연한 '난폭자들(Wild One)'에서 가죽잠바와
오토바이를 탄 '폭주족'의 원조연기를 했죠. 아마 '대부'나 '지옥의 묵시록'의 늙고 비대한
말론 브란도의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은 그를 제임스 딘 같은 반항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웬 헛소리냐' 할지도 모르지만, 50년대의 20대 시절 말론 브란도와 40-50대의 그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사실 '폴 뉴만'이나 '제임스 딘' '스티브 맥퀸'같은 아웃사이더형 연기를 했던 배우들은
말론 브란도의 영향을 전혀 안 받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전까지는 게리 쿠퍼나
존 웨인, 헨리 폰다 처럼 예의바른 미국인의 연기만 있었죠. 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이어서, 52년 혁명아 자파타(Viva! Zapata!), 53년 줄리어스 시저, 그리고 54년 '워터프론트'
까지 그는 데뷔 후 무려 4년 연속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그리고 결국 4번째 노미네이트인 워터프론트에서 당당히 수상하죠. 아마 헐리웃 역사상
이렇게 빨리 급성장한 배우는 드물 것입니다.
1955년 말론 브란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화인 '아가씨와 건달들'이라는 뮤지컬에
출연합니다. 제가 꼽은 '그 답지 않은 연기'를 보인 영화입니다. 아마도 말론 브란도
자신도 그걸 느꼈던것 같습니다. 그는 즉시 '말론 브란도 표'영화로 급속히 복귀했고,
60년대가 되어서는 오히려 대중과 멀어지는 '스타'가 아닌 '배우'로서의 길을 더 많이
갔으니까요.
'사요나라' '8월 보름달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젊은 사자들'
등의 영화들은 그의 50년대 중후반의 대표작이죠. 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58년 젊은 사자들까지 그는 헐리웃의 50년대 기대주로 한 껏 명성을 날린 것이죠.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함께 공연한 배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혁명아 자파타에서는 안소니 퀸, 아가씨와 건달들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
8월 보름달의 찻집에서는 글렌 포드, 젊은 사자들에서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딘 마틴 등
모두 내노라 하는 '주연급'스타 배우들이 말론 브란도와의 공연 때는 '2선'으로
물러나야 했으니까요. 그가 얼마나 상위 레벨에 속하는 '특급주연'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1961년 말론 브란도는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애꾸눈 잭'을 직접 연출하고 출연까지 했죠.
이 작품에서 데뷔작치고는 성공적 평가는 받았지만 어떤 이유인지 그는 더 이상 감독을
하지 않고 평생 배우로만 전념하게 됩니다.
50년대 영화들이 헐리웃 스타덤에 오르고 쟁쟁한 배우들과 공연한 시기였다면
60년대는 작품을 꽤 골라서 출연하면서 한편으로 운이 없었던, 대중성과는 다소
멀어졌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꾸눈 잭 이후 야심차게 출연한 리메이크작 '바운티호의 반란'은 엄청난 제작비를
감수한 채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죠. 이어 '추악한 미국인(The Ugly American 63년)'이나
'모리투리(Morituri 65년)'등도 별 재미를 못 본 영화입니다. 특히 이탈리아의 명 여배우인
소피아 로렌과 공연한 찰리 채플린 감독의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A Countess from
Hong Kong 67년)'은 혹독한 실패작이라는 혹평을 받고 실패하고 맙니다.
같은 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공연한 '금지된 정사의 숲(Reflections in a Golden Eye)'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최고 인기의 여배우 두명과 공연한 작품이 모두 시원찬게
끝났을 만큼 60년대는 말론 브란도의 슬럼프가 이어진 셈입니다.
'알제리 전투'를 연출한 유럽의 거장 '질로 폰테코르보'의 영화 '번(Burn)'같은 대작에도
출연했지만 큰 성공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면서 그는 중년이 되었고, 살도 찌기 시작했죠.
너무나 큰 성공을 거둔 50년대와 야심있게 출연한 영화가 재미를 못 본 60년대를 보낸
말론 브란도는 어쩌면 40대 중반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고 그렇게 잊혀질 배우가 될 뻔 도
했죠. 그러나 70년대, 중년이 된 그를 기다리는 세편의 '걸작'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요?
1972년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는 주인공 돈 꼬레오네 역을
열연하여 두번째 아카데미 상을 받게 됩니다.(물론 다른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죠)
그 뿐만 아니라 대부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흥행기록을 깨고 역대 최고 흥행을 한 영화로
자리매김했죠. (물론 3년후 조스가 그 기록을 깼지만) 대부에서의 그의 연기는 굉장한 찬사와
함께 과연 말론 브란도라는 것을 증명했죠. 비록 '반항아'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뚱뚱한 중년이
되었을 망정, 그는 새로운 배우로 거듭난 것이죠. 같은 해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감독의 '파리의 마지막 탱고'에 출연한 그는 영화가 엄청난 찬사를 받았고,
적나라한 성적 묘사가 문제가 되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두편의 영화는
말론 브란도라는 이름을 다시 유명하게 만들었죠.
1979년에는 대부의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이 연출한 '지옥의 묵시록'에서 전쟁의 광기로
악마같이 변한 커츠 대령을 연기하여 대부를 훨씬 능가하는 괴물같은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엄청난 제작비에 비해서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였지만 말론 브란도가 보여준 카리스마는
대단했죠.
말론 브란도는 그 1년전인 1978년 블록버스터 영화 '슈퍼맨'에서 약 10여분 출연했으면서
엄청난 거액의 개런티를 챙겨서 역시 인물임을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 존 G 아빌드센 감독의 '포물라' 출연이후 그는 무려 9년의 공백기간을 가졌습니다.
사실상 말론 브란도는 1979년 '지옥의 묵시록'이 그의 배우이력의 마지막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이후 9년만에 복귀한 1989년 '백색의 계절(A Dry White Season)'을
비롯한 몇편의 영화는 사실상 '팬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말론 브란도가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영화들은 화제가 될 수 있었죠.
우리나라에는 1996년 출연한 'D.N.A(The Island of Dr. Moreau)'와 98년에 출연한
'프리 머니'가 그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중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작품들이 되었고,
'스코어'라는 영화에서 조연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는 2004년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인도 출신의 배우 '안나 카쉬피'와의 2년간의 결혼생활을 비롯하여 세번 결혼했고,
영화에서의 카리스마 못지 않게 특유의 기인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아들을 사고로 잃는 불행도
당했고, 나이를 먹어서는 너무나 비대하게 살이 쪄서 활동하기도 힘든 모습이었죠.
1976년도에는 카리스마로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배우인 '잭 니콜슨'과 '미조리 브레이크'라는
서부극에서 함께 공연, 카리스마 VS 카리스마의 대결을 펼쳤습니다. 영화는 대단한 걸작은
아니었지만, 그런 배우들이 함께 공연하는 자체만으로 흥미를 주었죠. 두 배우는 그 영화에서
정말 팽팽한 대결을 펼쳤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부터 '지옥의 묵시록'까지 말론 브란도가 남긴 업적은 굉장히
큰 것이죠. 원조 반항아에서부터 괴물같은 중년으로의 변신까지 그는 정말 대단한 배우였습니다.
과거 헐리웃 스타들이 '호감가는 역할'만 맡으려 했던 것에 비해서 악역이나 괴물같은 연기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였기에 더욱 빛이 났던 것이죠. '명배우'라는 수식어는 그에게 정말
어울릴 수 밖에 없죠. 저는 개인적으로 그를 '비호감'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남긴 많은
영화들을 즐겨 봅니다. 대부, 지옥의 묵시록,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아가씨와 건달들,
워터프론트, 애꾸눈 잭, 젊은 사자들, 난폭자들..... 영화팬의 머릿속에서 그는 지울 수 없는
이름으로 자리 잡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