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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해석학 정리
I. 서론: 해석의 중요성과 필요성
1. 해석의 중요성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오기까지
1) 기록의 단계
2) 보존의 단계
3) 번역의 단계
4) 해석의 단계
오늘날의 상황: “해석의 전쟁터”
2. 해석의 필요성
궁극적 목적: 하나님의 말씀 듣기
기독교 계시의 특성
사건과 기록, 역사와 해석의 상관성
해석의 다양한 단계들: 기록에서부터 사용에 이르기까지
II. 해석을 위한 텍스트 이해
1. 텍스트 외적 요소의 이해
기록의 물리적 측면 고려
지면의 제약에 따라 본문 선정에 영향
무엇을 넣어야 할지, 빼야 할지 신중하게 검토
왜 신약의 책들은 일어난 모든 일들을 세세히 다 기록하지 않나?
무한히 쓰고 또 지워서 쓸 수 있는 오늘날의 컴퓨터나 종이 사용과는 다른 상황
파피루스는 고대의 탁월한 재질
약 10m 길이의 두루마리(volume <-- volumen 말다)
예, 사도행전의 분량과 그 속에서의 반복
신약의 가장 긴 두 책 누가복음과 행전은 이 표준길이에 딱 맞게 기록
지면의 제약 의식. 그 속에서의 반복들
그렇다면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 해석에 영향
사본학의 중요성
원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본들을 통해 텍스트를 확정
사본들의 이문들이 John Mill 같은 사람을 회의에 빠트리기도 했으나
벵겔(Bengel)의 경우는 그 반대
이문들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계통을 이루는지
많은 후대의 외적 동기들 정리하며 분류하면 오히려 그 신빙성에 놀라움
2. 해석을 위한 텍스트 결정
번역의 차이: 예, 계5:5(KJV - TEV)
기초 대본의 차이에 따른 번역의 차이
행6:8의 경우
기초 대본 해석 차이에 따른 번역의 차이
고전16:22의 경우
사24:15의 경우
번역이 오히려 본문 의미를 더 어둡게 하는 경우(행28:4의 he dike)
기초 대본 확정을 위한 세심한 노력
(Metzger의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유용)
배열, 끊어 읽기 등도 해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마5장의 그리스도인의 복, 8복이냐 9복이냐?
‘복되다’(makarioi)의 배열을 볼 때는 9복이 더 적합
마8장의 교차대조구조 배열을 살려서 표현한다면 강조점이 더 선명히 부각
(병고침의 사실만이 아니라 그 방식, 그리고 그 주체의 전환)
고전11:1을 어디에 연결시킬 것인가?
헬라어성경과 번역본들의 대조 습관
우리 번역이 잘 살리지 못하는 부분. 말의 습관 때문에 단수 복수 구분
때로 이 때문에 생기는 오해. 예를 들어 고전12:31
다른 단어를 같은 말로 번역하기도 하고
(‘성령의 나타남’, 고전2:4 apodeiksis 고전12:7 phanerosis)
같은 말을 다른 단어로 번역하기도
(eksousia, 고전8:9과 9:4-6)
3. 최종본문의 통일성과 차별성
출발점으로서의 최종본문
전승의 단계, 편집의 단계, 정경의 단계, 교회의 수용(해석사) 단계
어느 단계에 권위를 둘 것인가?
혹자는 소위 Q 자료에 의존, 혹자는 교부들의 해석에 의존
일부에 의존하는 것이 그 밖의 것을 부차화시키는 피해를 낳는다.
기록을 믿을 수 없었기에 ‘역사적 예수’를 추구했던 실수와 같은 맥락
우리는 정경 속에 포함된 최종본문(final form)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 이전 단계는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나 해석의 키를 가지지는 못함.
신약의 신학적 통일성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임하고 진행되는 하나님의 나라
신약 저자들의 신학적 관점의 차이(예를 들어 기독론)
미시적 관점
거시적 관점
해석자가 선호하는 관점에 따른 ‘읽어넣기’(eisegesis) 주의
루터의 ‘이신칭의’ 중심의 해석
은혜와 행위의 일체성에 금이 가게 만드는 큰 요인
로마서, 갈라디아서와 함께 야고보서도 기꺼이 수용하는 자세
4. 목적의 점검: 해석학적 마인드의 개발
콘텍스트에 따른 해석의 편차
흔히 “본문의 의미는 하나다” 할 때, 의미의 의미를 너무 좁게 규정
텍스트의 문법적 의미(sense)를 넘어 의의(significance)까지 포함한다면
다른 맥락 속에서의 동일한 의미가 가능
E.D. Hirsch, “모든 4륜차량은 차도로 다녀야 한다”는 법규, 자기부상차 시대에는?
신약에서도 구약의 법을 그 정신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 해석법칙 위반은 아님
해석은 콘텍스트에 따라 다양한 적용성을 가지며, 성경공부나 설교는 이를 실행
성경의 해석은 기계적 해석이 아닌 종합 예술이다
해석자의 정신 속에서 수용되는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접맥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이를 콘텍스트 속에 접맥시키는 작업
기계적 해석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 해석학적 마인드를 잘 개발한 사람이 유리
같은 본문을 두고 설교해도 청중에 따라 다른 결과
설교나 성경공부 준비가 한 축이라면 청중을 품고 기도하는 것이 또 다른 축
성경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해석자 자신에 대한 점검이 늘 요구된다
해석자 자신의 피 해석: 너 자신이 텍스트와 그 주제에 합당한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난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다루는 부분은 넌센스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그러므로 성경의 일부 부분은 넌센스다.
이런 자세는 스스로의 한계를 텍스트의 한계로 떠넘기는 행위
그것이 결정적 중요성을 가진다면 다른 부분을 말하는 것은 가능한가?
그러므로 나 자신이 합당한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
텍스트의 위대한 세계 앞에서 나의 나약함과 빈약함이 읽히는 경험
그러므로 바람직한 해석자는 말씀에 의해 해석되는 해석자
이것이 가지는 두 가지 측면:
a. 자아부정의 해석학: 요11장의 예
유진 피터슨의 자전적 이야기. “너의 칼을 알아라, 그리고 너의 재료를 알아라.”
위대한 예술을 위해서도 자기부정의 원칙(John Keats, “negative capability”)
깨어져야 할 자아의 한계. 깨어짐 속에서만 그리스도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감
b. 자아개입의 해석학: 요3-6장의 예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정의되는 자아. 그의 이름이 곧 우리의 이름
그러나 누가 이름을 주는가?
III. 텍스트의 장르적 특성과 그 해석
1. 언어와 그 특성
언어에 있어서 통용성과 맥락의 중요성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말의 의미는 곧 그것이 지칭하는 사물
비유나 메타포 등은 하나의 수서적 기교에 불과
통용성 속에서 그 의미. “내가 한방 쏠게” 한국어 배우는 외국인에게는 큰 난제
이것을 그대로 “I'll shoot you.”하고 옮긴다면 질겁하고 도망갈 것
영국 교인들의 질문, Do you grind your nose?
“문이 열렸다”: 사실 주장, 요청, 비난, 빗댄 의미(남대문)
어떤 맥락에서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므로 해석에서는 이를 잘 고려
언어와 언어 외적 조건의 상관성
현대로 올수록 언어의 임의성을 강조
이 면에서 특히 Saussure, Wittgenstein의 영향, playing the chess
더 급진적으로 나가면 언어는 그 배후의 실재와 단절된 것으로 이해
사물이나 사태의 묘사만이 아니라 의미 세계의 확장
비유를 통해서, 메타포를 통해서
서로 상관없던 것들이 연결됨으로 새로운 의미 세계
일상 언어가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
바울의 경우도 시장의 언어(구속), 왕의 방문(살전4:16-17, parousia, apantesis)
복음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는 이런 방식을 통해 표현될 수 있을 뿐
신약이 보여주는 의미 확장의 모습
요한의 경우: 영지주의적 언어와의 차이
별도의 종교적 용어를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언어를 종교적 목적으로
생명의 ‘떡’, 생수(산 ‘물’), 선한 목자, 포도나무
영지주의적 상징 세계와는 엄청난 차이
바울의 경우: 일상의 언어들이 복음의 언어로
언어의 성격에 따른 해석의 차이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할 때와 비유적 해석을 해야 할 때
메타포적 표현과 그 특성
죽은 메타포와 산 메타포, 메타포적 의미의 변화
대부분의 메타포들은 “A는 B이다”의 형식을 가진다. A와 B가 서로 별개의 것이지만 둘의 특성이 연결될 때 여기에서 보다 창의적인 의미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메타포 표현들은 일상적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개그 콘서트’의 코너 가운데 하나에서도 이것이 사용되고 있다. “내 개그는 ooo야.” “왜요?” “왜냐하면 xxx하니까.” 사람들이 평소 눈여겨보지 못하였던 특성들을 연결시켜 웃음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들은 좀 더 고상한 차원의 메타포 표현들을 통해 일상의 현상들 배후에 가려져 있는 삶의 깊이를 포착하고자 애쓰고 있다. 성경에서 진리의 표현을 위해서도 메타포들은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이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구속’, ‘의롭다 함’, ‘화목제물’(롬3:24-25) 등의 표현들도 다 이 범주에 속한다. 이 각각의 배후에 놓여 있는 일상적 경험들이 바울이 제시하는 구원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메타포들은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마우스가 쥐인 것은 알지만 컴퓨터에 사용되는 물건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 “마우스가 통 먹지를 않는다”고 걱정하는 말을 하면 그 사람은 애완용 쥐가 뭘 먹지를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것이다. 이런 경우 일상적 용어들이 컴퓨터와 관련하여 새로운 메타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컴퓨터를 난생 처음 구입한 사람이 구입처 상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손님: “네, 제가 어제 컴퓨터를 샀거든요. 거기에 프린터가 딸려 왔는데, 오늘 인쇄할 것이 있어 연결을 했더니 자꾸만 ‘프린터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표시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프린터를 들어서 컴퓨터 화면에다가 보여주었거든요. 그런데도 컴퓨터가 보지를 못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이런 유사한 경우들을 피하자면 메타포들이 사용되는 상황을 잘 살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새로운 메타포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또 어떤 경우에 메타포들은 죽은 메타포가 되어서 처음 그 말이 가졌던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잘 분간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일은 앞서 영성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의 입장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사도됨을 그들이 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이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4:1)라고 표현한다. ‘맡은 자’(oikonomos)는 우리가 흔히 쓰는 청지기라는 말로서,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주인의 신임을 받아 맡은 일을 관리하는 청지기의 직임이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비밀과 관련됨을 보이는 데 있어서 적실한 메타포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일상적 의미가 비교적 분명한 이 말과는 달리 ‘일군’이라는 말을 두고는 더러 어원적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의 헬라어 hyperetes가 어원상 hypo(아래)와 eresso(노 젓다)가 합쳐진 말이기 때문에 바울이 이 말을 쓸 때는 배 아래에서 노 젓는 노예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말의 뿌리가 그런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미 하나의 ‘죽은 메타포’로서 단순히 조력자의 의미로 굳어진 채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행13:5에서 동일한 표현을 써서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 요한을 ‘수종자’로 대동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도 노 젓는 하인의 의미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 것이다.
이런 경우에서와 같이 우리가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 지나친 어원론적 접근에 많이 의존하기도 한다. 성경의 기록자가 그것을 분명히 의도하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이런 방식의 접근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제임스 바(James Barr)는 이런 면에서 좋은 지적을 하고 있다. 니콜스(W. Nicholls)라는 사람의 예를 들고 있는데, 그는 예배를 가리키는 헬라어 latreuein이 히브리어에서는 abodah와 짝을 이루며 이 말은 ebed과 같은 어원을 가진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종의 원형인 ‘여호와의 종’(Ebed Yahweh)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것처럼 온전한 순종이 예배의 본질을 이룬다는 것이다. (보라, James Barr, Semantics of Biblical Language, p. 103). 이런 해석은 그 의도는 좋을지 모르나, 언어적 측면에서 종이란 말이 종을 뜻할 뿐 예배자가 되지는 않는 점을 감안할 때, 단순히 같은 뿌리를 가진다고 해서 무리한 연결을 시도하는 것은 본문에 없는 왜곡된 의미를 부여하기 쉬운 약점을 가진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조력자)으로 나타내는 것은 결코 지나친 자기주장이 아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바울은 기꺼이 자신을 종의 위치에 두지만, 교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일하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복음의 파트너로 삼으신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바울은 자신이 받는 대접과 관련해서는 기꺼이 수모와 곤욕을 견디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 손상 받는 위험과 관련해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떳떳한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 비밀의 청지기로 세움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고귀한 신임을 신실함(충성)으로 보답하고자 하고 있다(4:2). 이 면에 있어서 그는 사람들 앞에 책임 있는 자가 아니고 주 예수께 책임 있는 자이다. 따라서 그는 오직 주님의 판단 앞에만 자신을 세우고 있다(4:3).
<그 말씀> 2003년 10월호, “메타포의 해석” 중에서
말과 일치의 중요성
말과 그 내용의 일치
‘신령한 자’ 개념이 고린도교회에서 다른 함의를 가지는 경우
매트릭스가 무엇이냐에 따라
헬라 이원주의적 매트릭스 속에서 볼 것이냐, 십자가적 영성으로 볼 것이냐
‘영성’이란 말을 쓰지만 동양적 매트릭스 속에서 이해될 때
‘천국’ 등의 종말론적 언어 역시
해석에 있어서 매트릭스를 잘 밝히는 작업은 대단히 중요
말과 그 화자의 삶의 양식과의 일치
성경은 문자-문자의 해석으로만 그치지 않음
Nicholas Lash: (문화-성경)-(성경-문화), 2중 구조에서 4중 구조로
오히려 (문화-삶-성경)-(성경-삶-문화)의 6중 구조로 나아가야
형제 고백(고전5:11) - 합당치 않은 삶을 살 때는 그 말을 치지 않음
렘7:10, 딛1:16 등 매치가 깨어지는 고백들(self-defeating speech-acts)
에스라(7장) 경우처럼 그 매치가 이루어지는 고백들
말-말의 매치만 아니라 말-삶의 매치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2. 장르와 그 특성
메시지를 담아내는 도구들
성경은 메시지의 내용이 절대적으로 중요, 그러나 그 형식 또한 무시해선 안 됨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 시, 하나님 하신 일 진술, 헌물행위
하나의 형식만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형식들 사용한 것은 큰 축복
모든 방식 통해 하나님은 다가오시고, 우리 또한 그 앞에 나아갈 수 있음
기대를 형성하는 상호작용
예배의 흐름을 알고 있는 경우와 낯선 경우(영국에서의 성만찬 - retain)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간이구나, 또 기도를 통해, 말씀선포로
각 장르를 따라 그 목적에 맞게 자세를 갖춤
만일 그러하지 못한다면 예배는 무질서를 연출하게 될 것
장르는 이와 같이 하나의 상호작용을 한다.
연애편지를 수사기록처럼 읽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의 칼이 나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살인사건 조사?
장르의 특성에 따른 해석과 의미전달의 중요성
단순한 communication을 넘어 communion의 발전
아가서 속에서 어떤 자료나 정보를 찾아내는 일에 집중한다면
그것이 나타내는 친밀성 속에 들어가는 일이 우선
역사비평적 해석학의 한계와 빈약성
모든 것을 역사적 자료 차원으로 축소 환원
이런 표현 배후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놓여져 있는가?
왜곡된 가설들 작용(시20편 등 개인탄식시들에 대한 Philip Davies의 해석)
성경신학적 ‘recital’(G.E. Wright)에 대한 강조
단순한 역사적 상황의 파악이나 교리적 재배열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감. recital, re-telling 속에서 자신을 발견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였듯이 오늘에 있어서도 이를 살리자는 것
내러티브의 재발견과 그 효과의 재현
이야기 속에 들어감으로서 그것을 나의 이야기로 삼음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 사람들, 같은 노래를 공유한 사람들
그 속에서 펼쳐지는 과거의 뿌리, 미래의 비전, 현재에 대한 삶의 자세
텍스트를 정보 획득의 수단으로만 보았던 이전의 시각을 크게 교정
물론 이것이 진리의 기능성만을 이야기 하는 차원에 그치면 문제
이야기들이 그런 기능을 하기 때문에 진리?
해리 포터의 세계 속에 빠져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종교적?
진리는 기능성 이상의 측면을 가진다.
동시에 진리는 수학 공식이나 명제 같은 방식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3. 복음서 해석
한 복음과 네 복음서들
대상 공동체의 다른 정황에 따른 강조점의 차이
복음서들이 독자들의 다양한 정황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증거들
문화적 차이
사용 어휘와 표현의 차이
논증방식의 차이
마12장과 막2:23-3장(막8:11-12)의 비교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권위에 대비한 예수님의 자기 선포
마가의 경우 점증하는 반대의 강조, 예수님의 결정적 중요성과 대비
신학적 관점의 차이
기독론의 강조점: 누가의 보다 인간적 그리스도, 요한의 신적 그리스도
종말론에 대한 다른 시각
막14:62에 보면 공회 앞에서 대제사장의 신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한다. 이것이 눅22:69에서는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축약되고 있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에 대한 마가의 종말론적 논조가 생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경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를 통해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은 누가의 관점에 있어서 예수의 부활과 이에 이은 승천의 요소는 전반적으로 강조를 받고 있는 반면, 예수의 우주적이고 가시적인 오심이라는 마가의 종말론적 구조의 한 측면은 전반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간접적 선포의 방식들
마가복음의 “하나님 아들”에 대한 명백한 선언
그러면서도 간접적 선언 역시 중요
“이가 과연 누구이길래”(4장) - 변화된 두려움(참 두려움 앞에 사라지는 두려움)
신적 시각과 신적 판정의 말씀을 하시는 분(12장)
[막12:41-44]
본문의 이야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논쟁들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에”(막11:27)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들이 가장 어려운 난제들이라고 생각하는 질문들을 예수님께 던지고 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권세의 문제를(11:27-28),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은 민감한 정치적 문제를(12:13-17),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문제를(12:18-27), 한 서기관은 계명의 문제를(12:28-34) 각각 질문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 권위 있게 대답하셨고, 사람들의 질문의 입은 봉해지고 있다. 마침내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게 된 것이다(12:34).
사람들의 질문이 마쳐진 자리에서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질문하신다. 이 역시 배경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쌔”라고 소개되고 있다(12:35). 예수님은 시110:1을 들어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알고 있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뒤바꾸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진리의 일면이긴 하지만 진리의 전체는 아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그들에게 다윗이 자신의 자손의 자손뻘인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주”라고 칭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계신다. 이런 질문을 통해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가지’ 곧 후손일 뿐만 아니라 또한 ‘다윗의 뿌리’ 곧 그의 근본임을 상기시키시는 것이다(참고, 사11:1, 계22:16).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은 그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분이시냐에 대한 간접적인 기독론적 주장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주장은 사실 비수와 같은 날카로움을 가진다. 이 말씀이 가르쳐지고 있는 성전의 배경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하다. 성전은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할 집이다. 그리고 그가 보내신 자 메시아가 영접받고 인정받아야 할 곳이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이미 그곳은 인간이 주인이 되어 있는 곳이고, 그들은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바꾸어 버렸다(11:17). 인간의 권세와 인간의 판결, 인간의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하나님의 판결, 하나님의 관심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부인당하고 있는 장소인 예루살렘 성전의 배경 속에서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보실쌔”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 전체를 통제하는 하나의 새로운 시각, 곧 예수님의 신적 시각 속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이 시각 속에 포착되는 것은 다수의 부자들이 와서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하는 것과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의 보잘것없는 헌금 하는 것의 대비이다.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던 일들을 연결시키는 이 대비의 관점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육안의 시각이 보는 것과 다른 하나의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기 위한 준비의 역할을 한다. 육안의 시각에 보이는 것은 단순한 헌금의 액수일 따름이다. 그와 같은 시각 속에서는 부자들의 큰 액수의 헌금이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가난한 과부의 행위는 철저히 이 시각을 빠져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신적 시각만이 이 여인의 헌금이 가지는 크나큰 가치를 바르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12:43). 이는 예수님의 신적 시각에 기초한 신적 판결의 말씀이다. 육안의 시각에 제한된 외면적 판단을 전적으로 뒤집어 놓는 반전의 결과를 이 말씀이 낳고 있다. 이 말씀에 따라 사람들은 그들의 이전의 눈이 보지 못하였던 현실을 새롭게 보고 있다. 이 여인의 행위가 가지는 가치를 제대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혀 주목받지 못하였던 이 여인이 주목받기 시작한다. 동전 두 닢이 가진 그 엄청난 가치가 새롭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전에 없던 놀라움이 일어나고 기존의 가치관을 깨트리는 하나의 강한 도전 앞에 직면하게 된다.
이 모든 변화를 가져온 것이 예수님의 신적 시각이며, 또한 그의 신적 판결의 말씀이다. 이것이 사람을 살리며 사람을 변화시킨다. 성전 안에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모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의 눈을 따라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육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쌓아놓은 외적 질서 속에서 진정 큰 것을 볼 줄 모르고 드러나는 큰 것에 현혹당하기 쉬운 우리의 시각을 교정 받아야 한다. 그 빈약한 시각의 한계를 깨닫지도 못한 채 인간 스스로가 교만한 판결의 말을 앞세우고 나아오는 자세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꿰뚫어보시며 모든 것을 가장 바르게 판결하시는 하나님의 판결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이런 곳에 인간의 통치가 끝장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역사의 변화가 일어난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와 같은 신적 통치를 가지고 오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의 신적 시각과 판결의 말씀을 따르는 곳에만 인간의 전도된 시각과 가치관이 바로잡히고 새롭게 되는 대 변화의 사건이 일어난다. 특히 성전은 이 일이 일어나야 할 가장 상징적인 장소이다. 그 성전의 주인노릇하려 하는 인간들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이 묵살되고 있는 이 전도된 가치관의 전당 속에서, 예수님은 앞서 간접적으로 선포하셨던 자신의 신적 권위를(12:35-37) 이제 그의 권세 있는 판결의 말씀을 통해 공개적으로 시행하고 계신다.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 가장 우선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면이다. 헌금을 어떤 자세로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관심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이 본문이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를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본문은 직접적인 기독론적 진술로서가 아니라 기독론의 간접적 전제를 바탕으로 그의 신적 권위가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말씀> 2003년 7월호 “두 렙돈 이야기 ...” 중에서
다양한 문학적 방식들
마태와 하나님 나라의 급진적 새 국면, 과장법을 통한 강조
예, 23:24(“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
팥알보다 큰 모든 곤충은 음식물을 부정케 할 수 있다고 보아 매우 조심하던 습관 배경
통상 하루살이 정도는 허용하나 바리새인들의 경우 하루살이조차 허용치 않으려 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미세한 부분까지 지키려 노력하나 정작 낙타와 같이 큰 것은 놓치고 마는 어리석음을 과장법을 통해 지적
이런 경우처럼 물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통한 과장(hyperbole)
마7:3-5(작은 티끌과 들보의 대비)
또 다른 경우는 하려고 하면 실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그런 문자적 실행을 의도치 않는 일을 통한 과장(overstatement)
마5:29-30, 6:5-6
그러나 실행이 어렵다고 해서 다 과장법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될 것
어떤 경우가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 마5:23-24과 6:14-15의 비교
판단의 기준들: 예를 들어 복음서 기자들이 그 표현을 수정하고 있는 경우
예, 마10:34 눅12:51, 눅14:26 마10:37
비유 등 과장법이 자주 등장할 수 있는 여건 고려
예, 마18:23-35(1만 달란트의 빚 - 헤롯 대왕의 연봉이 900달란트 정도였던 것과 비교)
과장법의 효과: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의 보다 선명한 제시로 결단과 변화 촉구
특히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 급진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언어로서의 가치
요한복음의 논증법, 오해와 아이러니의 세계
* Qal Wahomer 논증의 사용
안식일 논쟁(7:22-24)
하나님의 아들 논쟁(10:22-38)
* 오해와 아이러니의 사용
<18개의 오해들과 그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
예, 2:19-21(성전) - 유대인들의 오해 - 죽음과 부활
3:3-5(거듭남) - 니고데모의 오해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
4:10-15(생수) - 사마리아 여인의 오해 -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계시 혹은 영(7:38)
6:32-35(하늘에서 내린 떡) - 무리들의 오해 - 예수의 기원, 정체, 사명
6:51-53(내 살) - 유대인들의 오해 - 예수의 죽음
<아이러니의 예들>
7:3-5 그리스도가 세상에 드러나야 할 것을 말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함
9:39-41 소경보다 더 소경된 자들의 자기에 대한 스스로의 언급
11:49-52 예수님의 죽음의 위대한 의미가 그 대적자의 입으로 말해짐
오해와 아이러니들은 표현된 말들의 의미를 피상적 차원에서 이해함으로 그 참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달리, 그 말의 더 깊은 의미를 아는 자리로 독자들을 초청하는 역할을 하며,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저자의 증거의 세계에 동참케 하는 묘미를 자아낸다.
비유들과 그 해석
명제 중심 해석의 한계
아돌프 율리허의 중요성 - 알레고리적 해석의 시정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적 언어 이해 위에서
비유는 사상 전달, 가르침의 보조 수단(communication)
그 종말론적 특성을 간과(communion)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와 반전과 변혁
기존의 가치관의 도전, 반전, 새로운 상황 앞에 직면
기존 방식의 반대자로 남을 것이냐, 예수와 함께 새로운 세계 속으로 나갈 것이냐
4. 역사서 해석
역사 속에 사건적으로 일어난 대반전과 변혁
사도행전 설교들의 특징: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 대비
특히 스데반의 설교에 있어서
대역전의 하나님. 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속의 사건과 인물들을 다루시는지
사건들의 수집, 보고로서의 역사가 아님
역사기술의 특성: 특히 누가-행전 속에서
“누가가 관심 가졌던 것은 사실로서의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에 나타난 구원적 의미이다(I. H. Marshall).”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일어났던 일의 객관적 서술이나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과 행하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 앞에 사람들을 직면시키고, 믿음과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게 하며, 계속되는 하나님 나라의 행진에 동참하여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
신학적 역사 이해
복음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공간구조(갈릴리 --> 예루살렘, 예루살렘 --> 로마)
작은 한 변두리 지역을 넘어 한 나라의 수도로
한 나라의 수도를 넘어 제국의 수도로
그 속에서의 시간적 사건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행전 속에서는 십자가가 전제된 사실. 부활과 그 의미의 강조
기록의 목적과 관련된 최근의 논의들
내부적, 이데올로기적 목적인가 아니면 선교적, 변증적, 선포적 목적인가
사회과학적 해석의 일환
하나의 섹트로서의 초대교회. 그 내부적 결속을 위한 신학
Philip Esler, Community and Gospel in Luke-Acts
신학이 어떤 motivation을 가지는가에 초점
표면상 외부인(데오빌로)을 향하나 실상은 정체성 위기 속에 있는 공동체 내부용
하나님의 역사 진행과 극복되는 방해물들
신적 dei의 사용을 통한 강조
인간의 음모와 신적 dei(행23:11, cf. 19:21)
자연의 방해와 신적 dei(행27:24)
그 무엇도 가로막아 설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진행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할 것인가?
바울의 선포, 확신, 도망할 기회 속에서도 선포에 자신을 묶음, 그 결과
사실의 앎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단과 선택, 나의 역사로 삼음이 요구
바로 이런 점이 성경적 역사관의 특징
5. 서신서 해석
서신의 형식: 복음을 위한 변용
아버님 전상서, 옥체만강하옵시며...
영어 편지의 Dear는 얼마나 귀해야 붙이는가? 원수에게도 붙이는 형식
서신의 기본 형식을 사용하되, 목적에 맞게 변용
상황과 강조점에 따라 다 동일하지는 않음
도입부의 차이와 수신자 상황의 차이
데살로니가전서와 갈라디아서의 비교
비교 가운데서 명확히 나타나는 수신자 상황의 차이
건덕적 상황과 논쟁적 상황
서신들의 레토릭과 수사비평적 접근
서신들의 메시지는 상황의 차이에 따라 그 제시가 다르다.
같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더라도 갈(율법을 대치한 유일한 구원의 길)의 경우
살전, 고전(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삶의 방식)의 경우
수사적 상황의 고려가 가지는 중요성
고린도전서의 경우
복음으로 온전히 변혁되지 못한 문화적 영향에 노출된 그리스도인
그 문화의 인식 틀 위에서 복음을 수용. 겉은 그리스도인이나 속은 바뀌지 않음
신분 불일치 의식, 사회적 상승 욕구 등이 강한 도시 분위기
그 수단이 되는 수사 기술과 그에 따른 사역자들의 평가
일반 웅변가들과 바울의 다른 점들(고전2:1-5, 근거, 방식, 자세, 결과)
세상 지혜의 평가 기준에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기준에 따를 것인가?
바울의 선택 -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방식
기타 영성의 이해, 윤리적 문제의 근본 뿌리, 우상숭배 문제의 본질, 은사 문제
십자가적 정신으로가 아니라 세속적 기준을 고집하고 기득권 추구
그들의 논리를 따라 가면서 그것의 결함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방식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경우
갈라디아서 경우는 처음부터 강한 논증
이건 하나의 문화적 차원 하는 방식으로 복음의 본질 훼손하는 사람들
할례는 단순히 하나의 단편적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전면 거부 행위
이방인의 하나님 자녀 됨이 성령으로 말미암음임을 강력히 논증
로마서의 경우는 덜 상황적이라는 인식
그러나 그 상황성에 대한 고려가 중요하게 부각
특히 14, 15장의 중요성
로마교회의 역사적 정황과도 연결
1세기에 있었던 두 번의 유대인 축출
A.D.19년 Tiberius 황제 칙령에 따른 유대인 축출(네 사람의 유대인이 유대교로 개종한 유력한 로마인 Fulvia를 꾀어 성전 위해 헌금하게 하고 이를 착복. 이를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크게 욕되게 됨. 바울이 롬2:21-24에서 이를 암시)
1세기 당시는 4, 5만이 로마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로마의 민족 융화 정책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religio licita).
A.D.49년 Claudius 황제의 칙령으로 유대인 축출(행18:1-2)
이는 유대인 사회의 내부 갈등의 비화로 인함
역사가 Suetonius - “크레스투스의 선동”(at the instigation of Chrestus)
유대인들이 쫓겨난 상황 가운데서 로마교회는 이방교인들을 중심으로 유지
네로의 즉위와 더불어서 유대인들이 다시 복귀하였을 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조화 문제가 대두
유대 배경과 로마인 배경 사이의 갈등과 서로 받음의 중요성
바울의 논증은 유대인, 이방인 모두의 죄인됨, 모두의 구원을 위한 길
따라서 하나님의 부요, 하나님 나라의 부요에 이르는 길
시기를 통해 전개되는 독특한 하나님 나라의 전개의 길
데살로니가전후서의 경우
핍박의 와중에 놓인 어린 교회(살전1장 후반)
그 교회가 무엇 위에 서 있는가?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복음의 본질
그 복음을 위한 사도적 사역의 자세
종말 신앙의 중요성
설득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나?
최근의 수사비평적 접근들(deliberative, forensic, epideictic)
무엇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의 설득의 과정인가? 무엇에 호소하는가?
그러나 복음전도가 단순히 설득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의 설득,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위임, 하나님의 평가
복음적 사건, 사신 모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체적 역할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강조
고전15장의 부활과 관련. 고린도인들의 출발점과 바울의 출발점
하나님에의 호소 - 사건과 사신 모두에 있어서
고후5장에서 역시 마찬가지
하나님을 힘입음이 복음 사역자의 담대함의 이유(살전2:1-2)
복음 사역자의 지위와 사명과 권능
6. 계시록 해석
계시록의 특성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방식
계시록에 대한 루터의 평가
루터의 경우 사도들이 ‘단순명료한 말’을 사용하였고 이상들을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계시록이 사도적인 책이라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으며, 심지어 그 속에는 “그리스도가 가르쳐지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책”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기준이 너무 좁았다고 본다. 상징언어의 가치는 오늘날에 와서야 그 진가가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책들처럼 ‘교리적’ 방식으로 그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책들이 할 수 없는 강력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공동운명체 됨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
더 강하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일체감을 느끼게 만드는 방식
어린 양에 대한 표현, 그와 같은 길 가는 어린 양의 군대로서의 부름
한 운명, 한 싸움, 한 승리, 한 영광
교회의 현실과 장래를 나타내는 방식
빈번한 관점의 이동
‘성령 안에서’(en pneumati) 보는 다른 이상들(1:10, 4:2, 17:3, 21:10)
지상의 교회에서 천상의 교회로. 현재의 교회에서 미래의 교회로
역사와 그 의미를 나타내는 방식
어린 양과 그 대적의 싸움. 두 진영의 대칭적 제시
마침내 어린 양의 승리. 백마타고 오시는 분, 말씀으로 승리하시는 분
세상의 그 어떤 정권도 권력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앞에 대적하지 못함
우리로 하여금 어떤 자리에 서야 할 것인지 결단하게 만듬
계시록에 나타나는 구조의 고려
이상을 보이는 대로 기록했다고 볼 수는 없음
매우 치밀한 구조 속에 이상들을 배열
1-3장만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공동운명체 됨을 구조 속에서 제시
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된 권세와 지위, 21-22장 속에 신부의 모습으로
전체적 chiastic 구조, 세부적 chiastic 구조(사탄 세력의 등장과 퇴장)
en pneumati 문구의 사용(1:10, 4:2, 17:3, 21:10)을 통한 대비 구조
심지어 ‘어린 양’의 빈도수 (7*4)
간본문성(intertextuality)의 문제
기존의 본문에 익숙할 것으로 보고 옛 본문들을 자유롭게 사용
계시록의 경우 총 404 구절 중 성경 전체로부터 약 518회 인용/암시
상황에 맞게 변용시켜서 사용
나타내고자 하는 핵심적 메시지를 더 잘 부각
11장의 남은 자의 수, 다르게 조정함으로써 증거 사역의 효과를 부각
촛대와 감람나무로 비유되는 교회의 증거 사역의 중요성을 극적으로 제시
7. 이 부분의 결론
신약의 다양한 장르들이 가지는 특성을 잘 고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계시록을 서신들 읽듯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려 한다거나
문자적 해석이 필요한 곳에서 비유적,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는 것은 잘못
(어거스틴이 논박한 수도승들의 경우)
흔히 ‘왁스 코’(wax-nose)로 불리는 해석의 경향을 주의해야 한다. 자기 좋을 대로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고, 왼쪽으로 비틀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 비틀 수도 있는 코처럼, 성경을 제 구미에 맞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경우들은 이단들의 성경 사용에서도 폭넓게 나타나고 있고, 정통 교회들의 일반 교인들 사이에서도 일상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역사상에 나타나고 있는 한 예를 들어보자.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의 감독 아우렐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일부 수도사들의 극단적 문자적 성경해석을 논박하기 위해 ‘수도사들의 노동에 관하여’(De Opere Monachorum)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수도사들은 마6:26이하에 나오는 새들과 자신들을 문자적으로 동일시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 새들을 먹여 살리시는 것처럼, 자신들 역시 양식을 위해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비유를 비유로 해석해야 할 곳에서 문자적 해석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어거스틴은 ‘만일 너희들이 그런 식의 문자적 해석을 고집한다면 더 철저히 문자적이 되어야 한다’는 방식으로 그들을 공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새들처럼 요리도 하지 말고 뭐든 날로 먹으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곡식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들판을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그들도 수도원에 가만 앉아 있지를 말고 온 종일 들판을 돌아다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사냥꾼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날개도 필요할 것이라고 비꼬고 있다.
이 수도사들이 이번에는 나실인의 흉내를 낸답시고 머리를 깎지 않은 채 길게 기르고 있었다. 자연히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다”(고전11:14)는 바울의 말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적에 부딪치자 수도사들은 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들은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마19:12)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천국의 급진적 요구 앞에 그 남성의 상징을 제거하고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는 이 구절의 초점을 자기 목적을 위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옮겨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론상의 비약을 흔히 ‘초점의 오류’(fallacy of focus) 또는 ‘강조의 오류’(fallacy of accent)라 부른다. 예를 들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을 두고 ‘삼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안 아프다’라든지, ‘사촌이 집을 사면 배가 안 아프다’라는 식으로 추론하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어거스틴이 논박하고 있는 수도사들의 경우, 그들이 아무리 마19:12의 초점을 다른 데로 옮긴다 할지라도, 이를 통해 자신들이 남자라는 사실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어거스틴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경의 초점을 자기 편리한 대로 옮김으로써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점이다. 이와 반대로 성경 본래의 강조점을 잘 파악하고 이를 따르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함을 잘 지적하고 있다.
<목회와 신학> 2002년 9월호 “성경해석, 오해를 넘어 ...” 중에서
특히 복음의 제시가 가지는 다양성을 그 내용뿐 아니라 형식의 면에 있어서도 잘 고찰함으로 오늘날의 다양화된 세상 가운데서 보다 창의적, 역동적으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바울의 풍부하고 다양한 메타포 표현들의 사용처럼, 오늘날 사람들에게 보다 잘 다가갈 수 있는 표현이나 이미지들을 창의적으로 이용
IV. 현대적 상황과의 접맥
1. 모던과 포스트모던 상황
현대 해석학에 있어서의 중요한 전환
가다머(Hans-Georg Gadamer) 이전과 이후
가다머의 기념비적 저서 [진리와 방법]에서 and의 실제적 의미
데카르트의 방법에 의한 통제를 재검토하고 넘어가고자 하는 시도
자연과학적 주체:객체의 모델을 넘어 주체:주체의 대화적 모델, 만남의 모델
철학 속에서 부버, 하이데거, 가다머 등
신학 속에서 바르트, 브룬너, 불트만, 틸리히 등
심지어 자연과학 속에서도 상대성 이론, Quantum theory, Polanyi의 인격적 지식
가다머와 재연으로서의 진리(truth as play)
진리를 객관적으로 보기보다 체험적으로
연주, 무대, 법률의 적용, 성경의 설교 등의 중요성
죽은 텍스트보다 그것을 살려내는 해석의 창의성 강조
악보는 기계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해석에 따라 차이
자연과학적 설명을 넘어 이해, 적용 속에서 제대로 이해되었느냐
Wittgenstein, 장기를 둘 줄 안다는 것은 장기판이 뭘로 구성되었느냐의 지식 이상
그 말들을 움직여 소기의 효과를 이루어낼 줄 알 때
차츰 효과 중심의 이해. 스위치를 올리면(내리면) 불이 들어오는 것을 할 줄 앎
종교현상의 분석에도 적용. 기도를 할 줄 앎. 기도를 통해 효과를 누릴 줄 앎
그러나 기도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논외
가다머의 경우 본질과의 급진적 이탈을 원하지는 않았으나 차츰 그런 추세로
효과만 동일하다면 그 뒤에 무엇이 있느냐는 불문
Don Cupitt의 경우
하나님의 실재는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는 계속
하나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
실재 세계로부터의 이탈과 더불어 읽기(저자 이해)보다 쓰기(독자 생산)의 강조
의미 결정에 있어서의 독자의 중요성
의미의 위치: 역사적 정황 속이냐 아니면 독자의 해석 속이냐
beyond the text 보다 in front of the text
독자가 텍스트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Stanley Fish의 급진적 독자반응비평
의미 미확정의 시대: 이미 대중화, “난 코엑스 몰에서 눈 맞았다”
지칭되는 실재로부터의 이탈
배치, 권력/지식, 가상현실
의미를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들
배치에 따라 운전사, 조수, 또는 승객
지식이나 언어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권력동기와 결부
정보 수집과 권력의 행사
통일된 체계, 근본, 일자 등에 대한 거부와 해체
리좀식 사고, 절대적 차이의 세계, 동일성의 거부
존재(being) 대신 생성(becoming)
수직적 해석학에 대한 강렬한 거부
떠도는 상징과 기호들에 대한 병렬식(and ... and ... and ...) 해석학
2. 포스트모던 상황에서의 성경해석
바울의 ‘나를 본받으라’(mimetes mou) 표현에 대한 포스트모던 해석
‘권력 담화’(power discourse)로 읽기
동질성에 대한 반대와 차별성의 극대화
현실적 경험에 의해 더욱 강화
구원의 효과 추구와 십자가의 실재와 분리된 그리스도인
안락의자 신자의 양산. 리모콘 예배 시대
왜곡된 제자도
고린도교회의 병폐(고전4장) 답습
전반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실재로부터 이탈
3. 딜레마를 넘어
복음의 본질의 회복
들려질 뿐만 아니라 삶으로 보여지는 복음
이미지에 대한 포모적 추구
골로새서에서 참 이미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미지로서의 그리스도인
됨(becoming)에 대한 포모적 강조
그러나 목표없는 끝없는 변신이 아니라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됨, 그 다양한 측면
접속과 통함에 대한 포모적 관심
빌립보서가 보여주는 진정한 통함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리스도인의 순종
권력동기로 보는 언어의 명령법적 전환
사랑고백조차도 명령어로 이해. 진정 순수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빌레몬서가 보여주는 명령어 이상의 세계
복음 안에서의 자발성의 증진. 이를 위한 언어 이해의 중요성
다시 해석학과 해석학적 마인드의 중요성
이 시대의 급속한 변화
그 알맹이는 잃어버린 채 사실은 표류
끊임없는 새로운 것의 시도와 그 시도 자체에서의 만족(최정무 교수)
마침내는 허무를 안고 죽어감
우리는 같은 말을 쓰면서도 그 참 내용을 소개
무조건 거부부터 할 것 아니라 함께 하면서 그것의 공허를 보게 하는 전략
감사 잃은 세대에 감사가 뭔지, 희생이 뭔지, 정말 사랑하는 것이 뭔지 보여줌
V. 결론: 적용에 이르기까지
1. 적용의 중요성
본문의 바른 이해에 근거
항상 순서를 잘 지킬 것: 본문의 이해로부터 적용으로
학자들은 학문적 전제로 이를 어기나, 일반인들은 자기 경험 등으로
물론 ‘선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나, 이 또한 ‘선이해’에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본문의 세계와의 만남 통해 새 지평을 열어가기 위함
자신의 대입, 나의 이야기로 엮어내기
본문의 세계를 제3자적 차원에 남겨두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로 삼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확인에 그치지 않고 그와 더불어 중심에 서기
만물에 대한 책임과 사명 속에서 살아가기
그리스도의 닮은 꼴, 올바른 제자도의 확립에 이르러야만 제대로 된 해석
이를 위해 파편적 해석학을 넘어 하나의 총체적 해석학의 틀 마련할 필요
2. 총체성의 회복
바울의 ‘성령의 프로네마’(phronema tou pneumatos) 개념
그리스도인 사고와 삶과 증거의 총체성
하나의 ‘총체적, 영적, 변혁적 해석학’의 정립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