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답사기]
유관순 열사
시신을 여섯 토막내 석유통 보관한 일제 만행의 현장
순국선열 추모비 앞에서 경건하게 두 손 모아 절하며 순국선열들의
명복을 기원했다.
일제하. 해방. 6.25. 4.19. 5.16. 10.26. 12.12. 광주시민항쟁. 민주화를
위한 시위 등 역사의 굴곡을 함께 하며
살아 왔기에 순국선열을 기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추모비 앞에 서 있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다.
순국선열들의 애국혼이 넘치는 피로 이룩한 우리 대한민국이다.
하늘을 우러러 바라 봤다.
순국선열들이 측은한 눈초리로 우리를 보는 듯했다.
땅을 바라 봤다.
순국선열들의 한 맺힌 통곡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당리당략에 눈이 뒤집혀 조국의 현실을
망각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을 보라 !
핵 공격으로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북한을 보라 !
미국의 지원아래 제국주의 시절로 회귀하고 있는 일본을 보라 !
남북한 8천만 국민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간절히 기원했다.
순국선열들이시여 !
당리당략만 생각하는 대한민국 정치인들을 일깨워 주소서 !
아 ! 유관순 열사 !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
립선언을 하였다.(2.8독립선언)
3월 1일 3.1운동이 발발하였다.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례가 거행되었다. 이날은 시위가 자제되었다.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3월 10일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왔다. 유예도는 이 때 학교
선배그룹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금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3월 14~3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부락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목천 기미독립운동기념
사업회에서는 171명이라 함)이 교정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3월 31일 유관순,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4월 1일(음력 3.1) 아우내 만세시위 발발하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속장 조인원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부상당해 붙잡혔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6월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 주역들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유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8월 29일 유우석은 공주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9월 11일 유관순을 제외한 병천과 수신.성남지역 시위 주도자들의 상고가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11월 6~11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천안지역
3.1운동 피해보고와 함께 수감 교역자에게는 20원, 기타 수감자에게는 5원의
구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28일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결혼기념 특사령으로 형기가 절반인
1년 6개월로 단축되었다.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의 보통과 졸업 사진
1996년 이화여고에서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유관순 열사를 지하 감방에 특별 수감하고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日帝 유관순열사 순국뒤 시신토막, 옥중 여성열사들 성고문도 자행
서울신문 | 입력 2006.11.02 09:00
[서울신문]일제가 강점기 당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토막내 훼손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옥에 갇힌 여성 열사들을 성고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1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 8주년을 맞아 연 학술심포지엄 '3·1운동기 여성과 서대문형무소'에서 밝혀졌다.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여성 열사들의 옥중투쟁과 일제의 잔인한 고문상이 낱낱이 드러났다.'유관순 열사와 서대문형무소'를 발표한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유관순 열사를 비롯, 여성들이 받은 고문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밝혔다.7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1920년 3월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기해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 일로 심한 고문을 당해 방광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고, 그해 10월 순국하게 된다.이틀 뒤에야 소식을 들은 이화학당 교장 미스 프라이와 미스 월터가 형무소장에게 시신 인도를 요구하자, 일제는 시신 상태를 세상에 알리지 말 것 등의 조건을 붙여 마지못해 석유상자에 넣은 시신을 넘겨줬다. 김 관장은 발표문 중 '고문방에서 토막살해 설도'라는 소주제에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이 머리와 몸통, 사지 등 여섯 토막으로 잘려 있었고, 코와 귀도 잘려 있었다는 기록을 소개했다.'간수들은 유관순이 고문에 못이겨, 아니 고문으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살해 가능성을 언급하는 문헌도 인용했다.일제의 만행은 단순히 물리적인 폭행에서 그치지 않았다.
<중략-기사 내용이 너무 참담하여 여성 인권 보호차원에서-운영자>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대동단 단원이었던 이신애 열사는 서간문과 구술자료에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악명높았던 종로경찰서 미와 경사가 면상을 세게 내리치자 아래턱이 퍽 소리와 함께 왼편으로 돌아가 붙어버렸다. 아이쿠 하려 애를 써도 그때부터 전혀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신애 열사는 옥중에서 3·1운동 1주년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혹독한 전기고문을 받아 손목이 다 타버렸고, 끝내 임신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newsview?newsid=20061102090016778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여섯 토막내 보관한 석유상자
-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 -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초혼묘
이곳이 유관순열사의 초혼묘이다,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관순열사가 순국하자,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오빠 유우석을 비롯해 스승과 동문들에 의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쓰이게 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가운데 열사의 주검은 흔적도 없이 망실되었다.
이에 그 영혼이라도 편히 잠드시도록 초혼묘를 매봉산 중턱에 마련하였다.
초혼묘는 6각의 뿔형태로 각 면에는 열사의 기도문을 비롯하여 비문이 적혀 있다
.
"地下고문실 본 日 관람객들… 죄인처럼 눈도 못 마주치죠"
2014년 8월 27일 조선일보
교육부 주최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체 개선안 토론회
유관순 열사 누락 논란
이날 토론회에선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절반(8종 가운데 4종)이
3·1 독립운동을 기술하면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내용을 빠뜨린
것이 특히 논란이 됐다.
"친일파가 만◇유관순 열사 누락 논란
이날 토론회에선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절반(8종 가운데 4종)이
3·1 독립운동을 기술하면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내용을 빠뜨린 것이 특히 논란이 됐다.
들어낸 영웅…" 교과서 절반 유관순 누락 논란
홍후조 고려대 교수는 "역사를 전공한 집필자들이 유관순 열사를 모를 리가 없는데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일부러 뺐을 가능성이 크고, 이것은 결국 집필자의 편향된 역사 인식을 교과서에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라는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있기에 기술하지 않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친일 전력의 박인덕이 해방 후 유관순을 발굴해 이화 출신의 영웅으로 만든 것"이라며 "북한에선 당연히 유관순을 모르고 우리나라 교과서엔 1950년대에야 들어갔다는 것이 2009년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라고 주장했다.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면서 '유관순 열사 누락' 논란도 뜨거운 쟁점이 될 전망이다
출처:조선일보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27/2014082700368.html?csmain
입력 : 2014.08.27 05:36
자료 더보기
첫댓글 이승만 같은 놈들 때문에 일본군 장교에서 국방군 군수참모로 영전한 박정희가 유공자 3급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위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