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작은 큰집
여름 휴가를 보내러 온다는 동생도 만날 겸 해서 고향에 갔다. 내 고향은 거창 산골이다.
고향집 앞에는 담장도 울타리도 없이 허물어져가는 작은 집이 있다. 우리 큰집이다. 할아버지가 둘째이니 큰할아버지 사시던 집이다. 큰할아버지는 얼굴도 못 뵈었고, 큰할머니와 큰집 고모들, 큰집 아재에 대한 기억이 숨어 있는 집이다.
스레트를 얹은 집이 낡기도 했지만 너무나 작았다. 내 발걸음으로 재어 보니 일곱 걸음이다. 세 칸 집이 6미터도 채 안 된다. 그러면 한 칸이 2미터도 안 되는 셈이다. 2미터면 보통 사람들이 누워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다.
왼쪽은 부엌이다. 지금은 떨어져나갔지만, 두 짝의 통나무로 된 문을 열면, 아궁이와 밥솥, 부뚜막, 그리고 큰방으로 통하는 쪽문이 있다. 가운데 칸은 섬돌에 올라서 마루를 밟고 큰방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큰방에는 자그마하게 뒷문이 나 있다. 오른쪽은 작은방, 곧 사랑방이다. 큰방 마루보다 한 뼘은 더 높은데, 그 아래에는 아궁이에 가마솥이 걸려 있다.
큰할아버지가가 돌아가시고 큰집 고모들은 멀리 시집가고, 외동 아들까지 총각귀신으로 세상을 떠나버리자 큰할머니는 평생을 혼자 사셨다. 나와 동생은 하루에도 몇 번씩 큰집에 드나들었다.
“할매, 오늘은 저녁 잡숫지 말고 오시라캐요.”
“오늘 고기 잡아서 어탕 끓였어요.”
제삿날 밤, 어린 나이에 제사를 지내 볼 거라고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기다렸다. 마음은 그랬지만 몸은 어느새 마룻바닥에 쓰러져 골아 떨어졌다. 아이쿠나 싶어 잠을 깨었을 때, 제사는 끝나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챙기는 새벽녘이었다. 그때는 제사가 끝나면 일가붙이들에게 모두 제삿밥을 나누었다. 새벽에 깨어나 먹는 제삿밥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별미다.
면에서 나오는 쌀인가 보리쌀인가는 이고 오다 쓰러진 큰집할머니는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서울 딸네집으로 여기저기 전전하다 돌아가셨다.
우룽굴로 시집을 간 큰고모는 큰아들도 애를 먹이고 힘들게 산다고 했다. 새터로 시집 간 고모는 서울로 갔지만 서울살이가 만만치 않았고, 교통사고를 고모부를 잃었다. 총각이었던 큰집 아재가 어느 날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때 아버지는 부산 남포동에서 가게를 하고 있었다.
“형님, 바람 좀 쐬고 오게 돈 좀 보태 주소.”
그렇게 나간 큰집 아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일로 큰집 할머니는 두고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원망했다.
“너그가 돈을 안 줐으마 갸가 안 죽을 낀데. 너그가!”
큰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큰집은 혼자 낡아갔다. 내 기억 속의 큰집은 지금 소인국으로 변했다.
큰집은 왜 이렇게 작아졌을까?
그 좁은 마루에서 어떻게들 놀았을까?
이웃에서 고추라도 늘지 않으면 큰집은 이 더위에 무얼 하면 보낼까?
혼자 남은 큰집은 어떻게 늙어갈까?
첫댓글 가슴이 먹먹하네요.제 고향집의 마루도 생각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