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 1 - 여름 화로, 겨울 부채
월간 <사목정보>로부터 작년에 지낸 안식년에 대해 써 달라는 청탁을 받고는 적잖이 의아했다.여러 교구에서 안식년을 지낸 신부들이 한 둘이 아닐 진데 ‘왜 하필 나?’라는 생각과 함께, 내가 지낸 안식년이 좀 ‘독특해서’라는 말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사목정보>에서 내 이야기를 어떻게 알았지?’하는 궁금증마저 발동했다. 결국 간곡한 청과 더불어 지난 시간을 정리해 볼 기회라 생각하여 승낙하긴 했지만 들었던 의문은 가시지 않았고, 과연 내가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이 없다. 부디 <사목정보>의 권위에 누가 되지 않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시간과 노력에 빚을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랄뿐….
삶의 반환점에서 일단 멈춰 서다
필자는 1983년에 신학교 들어가 1991년 7월에 사제가 되었다. 처음 몇 년 간의 보좌신부 시절을 거쳐 본당 주임신부 두 번, 해외 유학, 그리고 교구청에서 소임 하는 동안 20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 사이에 마음은 여전히 새 사제 같은데 교구 사제단 서열에서는 허리 위에 있는 중견이 되었고, 아침마다 거울 속에서 머리카락이 빠지고 허옇게 센 중년의 아저씨를 만나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옛 성현의 말씀에 살짝 빗대어 말하자면 “소년은 늙기 쉬우나 완덕에 이르기는 어려운지라”(少年易老 聖難成), 특별하거나 딱히 풀어 내놓을만한 대단한 사제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남들 하는 만큼, 그리고 하루하루 하느님과 교우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온 평범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교구청 소임이 만 5년이 되어갈 즈음, 안식년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막연하게만 여기던 안식년이라는 기회가 나에게도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막상‘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생각에 승낙하고 보니, 안식년을 지내는 것이 말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나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안식년을 지낸 몇몇 선배나 동료들에게 물어봐도, ‘자~알 지내.’라는 말 밖에는 별다른 조언이 없었다. 그러니 인생도 그렇고 사제의 삶도 그렇듯 결국 자신의 길은 스스로 찾아가야 할 밖에….
안식년을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지금 나에게 안식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현재 나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성찰과 진단’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키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반성해 보았다. 그 결과 나는 지금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반환점을 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적인 나이로도, 사제 생활의 연차로도 이제 전반전을 끝내고 후반전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반환점까지는 그런대로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제는 힘이 모두 소진되어 나머지 절반을 달려 갈 동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앞만 보고 부지런히 달려온 시간이었다. 학생 때는 학생으로, 신부가 되어서는 주어진 소임지에서 멈추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앞으로만 달려갔다. 그러니 반환점을 돌고 있는 지금, 우선은 멈추어 서서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다시 한 번 천천히 바라보아야 했다.
“안식년은 외국에서 지내는 것 아닌가요?”
일단 멈춰서니 내가 보였다. 그런데 다시 보게 된 나의 모습은 참혹하리만큼 초라했다. 젊은 신학생 시절,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소화 데레사를 사랑하며, 세상을 향한 가난과 복음적 완성을 꿈꾸던 사제직의 열정이 차갑게 식어 버린 것은 고사하고, 신앙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영성생활조차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터무니없이 교만하게도, 마르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던 영성의 샘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물기 없이 말라버린 내면은 촉촉한 생명력을 잃어 황량한 찬바람만 몰아치고 있었다. 심각했다. 아니 사제로서나 신앙인으로서 이미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달려가야 한다는 핑계로 이 심각한 위기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이제 안식년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가 명확해졌다. 내면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 영적인 힘과 활력을 되찾는 것, 사제 생활의 순수한 열정과 기쁨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 안식년 동안 추구해야할 과제임이 분명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조용히 머물러야 했다. 그동안 너무 많이 떠들었으니 말을 줄여야 했고, 소위 일하느라 바빴으니 이제는 기도하느라 바빠져야 했다. 양들을 돌보는데 많은 시간을 썼으니 이제는 자신의 영신 사정을 돌보는데 집중해야 했다. 지금하지 못하면 남은 절반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임해야 했다. 한마디로 안식년 동안‘긴 피정’을 하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장소였다. 번다한 일상에서 벗어나 고요한 침묵 중에 머물 수 있는 장소, 그동안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행복한 불편을 맛볼 수 있는 곳, 그러면서도 영성적으로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찾아야 했다.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생활비의 문제까지도 고려하면서…. 그러나 그런 곳을 찾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서너 달 동안 수십 군데를 알아보았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고는 쉽사리 장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내 순진함을 탓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거의 막바지에 주님께서 내가 원하던 최적의 장소를 안배해 주셨다. 바로 배론 성지였다.
우리나라의 왠만한 신자치고, 더구나 사제라면 배론 성지를 모를 사람이 있으랴. 그러나 생각해 보면 대부분 화창한 봄날이나 가을날, 버스를 타고 가서 서너 시간 수많은 순례객 중 한명으로 머물다가 해지기 전에 돌아왔던 경험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안식년을 지내고자 하는 내 의도를 정확히 알아챈 배론 성지 주임신부 - 신학생 때부터 잘 알던 한 해 후배 -가 지내도록 허락해 준 장소는, 본 성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관상 수녀원과 피정 집에 인접하여 침대와 책상, 작은 화장실과 부엌이 붙어 있는, 한 사람 겨우 들어가 살 수 있는 대 여섯 평 규모의, 집 밖에는 성모님이 지켜주시는 조립식 통나무 오두막이었다. 두 말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집에서 안식년을 지내기로 했다.
안식년을 떠나기 며칠 전, 함께 했던 일군의 교우들이 송별식을 열어 주었다. 그 자리에서 어느 형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신부님, 안식년을 배론에서 지내신다고요. 안식년은 외국에서 지내시는 것 아닌가요?” 왜 교우들조차 사제들의 안식년은 외국에서 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은 필자는 안식년을 외국에서 지낸다는 생각은 애당초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험 상 외국에서 사는 것은 언제나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기에 안식을 하기에는 적당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어떤 형제가 건배를 제의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신부님의 편안한 안식을 위하여!”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건배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정확히 30년 전 부모님이 계신 집을 떠나 신학교로 들어가던 비장한 느낌으로, 안식년이라는 긴 피정을 위해 짐을 싸들고 배론의 오두막으로 가던 2013년 3월 1일,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렸다.
여름 화로, 겨울 부채
여름에 화로와 겨울에 부채만큼 쓸모없는 물건이 있으랴. 그러나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되는 물건이기도 하다. 계절이 바뀌면 가장 유용하게 쓰일 때가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은 아무 소용없어도 잘 갈무리해 두어야 하는 것이 여름 화로와 겨울 부채이다. 살다 보면 한순간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도대체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아무 쓸모없이 그저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 같은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모든 것이 캄캄하여 절망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화로에게 여름은, 부채에게 겨울은 좌절과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 인내와 준비의 시간이다. 참고 기다리며 자신의 역량을 키우면 가장 유용하게 쓰일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필자는 힘들고 무력감에 빠질 때 이런 믿음에서 힘을 얻었다.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주님께서 쓰실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항상 깨어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온라인상에서 필자의 이름을‘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고 쓴지 오래이다. 그래서 배론의 오두막을 하로동선이 머무는 집이라‘로선재’(爐扇齋)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현관에 어설픈 솜씨로 직접 쓴 당호를 걸었다. 다른 한 편 ‘배론 은수처’(Eremus Baeronensis)라는 라틴어 명패와 함께…. 비록 지금은 할 일 없이 앉아 있더라도 주님이 쓰실 날을 기다리며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준비하라는 자기 경구와 함께, 이 집이 주님을 가장 가까이 만나는 수실(修室)이 되어야 한다는 결단의 표시였다. 그렇게 배론 성지 로선재에서 지내는 안식년이 시작되었다.
월간 <사목정보> 2014년 3월호
첫댓글 인생의 반환점을 맞아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신 신부님, 존경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순간 순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영적인 삶에 충실할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아침시간 신부님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예수님의 성심을 느끼는 은총을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사는 것 같지만, 돌아보면 결국 주님의 이끄심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면 조급할 것도 실망할 것도,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더군요..언제나 주님 안에서 기쁜 나날이시길 기도합니다. '내사랑울보'가 '주님 사랑에 감격한 울보'이시기를 기원하며..겟세마니 동산지기 하로동선
하로동선 이란 뜻을 궁굼해 했는데 의문이 풀렸네요
겸손한 이름이네요
주님 앞에 항상 겸손한 자세로 사시는 신부님 오늘도 또 배웁니다
글을 읽으니 마음이 편안해 지네요
손주들이 와서 도둑이 한탕 털고간 집처럼 내맘도 어수선 했는데
차분해 지네요. 애들은 귀엽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고 참 사랑스런 존재들이네요..ㅋ